진시황 이야기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더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부정적인 것부터 보자.
중국을 통일한 후에 궁중 연회에서 순우월이라는 사람이 봉건제도의 복원을 들고 나왔다.
역사, 농경, 의술 등 실용적인 책 이외의 책은 지식인들의 논쟁거리만 만든다면서, 유학 서적을 수거하여 불살라 버렸다. 진은 상앙 이래로 법치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는데, 의견이 니뉘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서 사건이다.
진시황은 이 세상에서 모든 걸 이루었다. 오래 살고 싶었다.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렸다.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머리에 먹물 든 자를 잡아서 땅에 묻어버렸다. 갱유 사건이디, 이 둘을 합해서 갱서분유라고 했다.
진을 이어서 나를 일으킨 한나라가 자신의 전통서을 주장하여 진을 나쁘게 말하는 과정에 과장하여 표현한 말이라눈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앙이 만든 오가통제법도 유가의 입장에서는 압법 중의 악법이었다.
시황제의 북방 외교, 군사 정책은 북방의 흉노를 막는 일이었다.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만리장성 쌓기는 폭정 중의 폭정으로 진이 망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 증의 하나이다.
황제의 권위를 괴시하려 아방궁을 짓게 한 것도 국고를 고갈시키는 원인이 되었ㄷ.
불로불사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서복이라는 방사가 전설상의 봉래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렸다. 그리고 서복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탄 배가 제주도에 정착하고 돌아가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시황제는 불로불사 약인 줄 알고 단약을 먹고 자신의 생명까지 단축했다. 단약은 수은을 고아서 만들었다. 결국 시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줄였다.
진시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미신의 집착을 꼽는다.(불로장생)
자신의 무덤에도 재물과 인력을 낭비하였따.(병마총까지) 태자 지명을 불분명하게 하여 사후에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다. 태자 지명 문제는 똑똑한 맏아들 부소를 멀리한 것도 꼽는다.
그러나 시황제는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영웅이다.
다음은 그의 공로도 알아봅시다.
첫댓글 잘읽고 잘배우고갑니다
권력과 부의 엄청난것들 부질없는줄
진시황은 왜 몰랐을까요?
피조물인 인간에게 불사불멸이란 존재하지않지요.
선생님 공부 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