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마태 26,14-27,66)
끝까지 사랑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한결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받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이 자기의 겉옷을,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2,9).하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 했습니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사막 지역에서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7,22.23).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태27,29).를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감탄고토’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환영받던 예수님을 통해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으며 중풍병자가 일어섰고 빵을 배불리 먹는 기적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서니까 마음이 완전히 돌변하였습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 배신자! 누구? 은전 서른 양에 예수님을 팔에 팔아먹은 유다, 십자가 죽음 앞에 도망간 제자들...베드로, 우리는?)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 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급박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드러나는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궂은일,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 빼기에 익숙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안정되고 제자리를 찾으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 하며 속 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던 모습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 사람이 참된 사람인지 거짓된 사람인지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풍수지리를 본다고 하다가 마음의 혼동을 가져와 신경쇠약으로 아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뭣합니까? 애써 노력하지 않는데! 묘지를 잘 쓰면, 조상이 복을 줍니까?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인간의 변덕은 죽 끓듯 합니다. 성당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가정에나 밖에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하며 흉보고 욕하며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보입니다.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유치원은 왜 보내고, 학교는 왜 보냅니까? 더군다나 학원은 왜 보내요? 돈 들여가면서.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부모의 의무는 일상이나 신앙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 이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27,46)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을 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 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 우리도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쓰더라도 뱉지 않고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은혜를 간청합니다. 어떠한 처지, 환경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