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이가 일터로 출근하면 산책을 한다.
부릅뜬 눈으로 앞만 보고 바쁘게 살 때의 휴일 같지는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평일에도 공간이 생겼다. 추석 지나니 해 뜨기 전 기온이 제법 쌀쌀한데 운동화 신은 발끝이 조금도 시리지 않다. 여름내 무성하던 잎 날개를 떨어뜨리고 퇴각해 가면서도 뒷등을 간질이는 가을의 남은 숨결을 느낀다.
십 년쯤 전에 이 소읍으로 이사하면서부터 산책코스는 정해져 있다. 집에서 나와 큰길 건널목을 가로지른다. 그리고는 둑에 멈춰 서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잠시 바라본다. 발 아래로 개천이 흐르고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사나흘 퍼붓는 비에 붉은 범람이 걱정이더니 수면이 제 높이로 돌아가 있다.
황소걸음으로 개천을 건넌다. 보강천 징검돌다리다. 우기가 아니면 언제나 건널 수 있는 돌다리를 깡충거리며 건너뛰는 발걸음이 아이처럼 가볍다.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는 노릇이 녹록치는 않지만 결 얕은 일탈에 배어드는 삶의 여유도 나쁘지만은 않다.
오늘은 보강천 미루나무 숲 흔들의자에 걸터앉아 지난여름과 가을을 북녘에서 살아낸 기러기들이 돌아올 행로를 읽는다.
‘우두머리 따라 수면을 박차고 올라 화살표 대열을 이루며 날아갔던 저들은 어디로 갔다가 해마다 돌아오는 걸까. 북녘이라는 막연한 나침반은 저들의 고향을 제대로 알려줄까. 아니면 보강천은 저들 떠돌이 생의 여정 중 한 곳일까?’
분명한 건 겨울 한 철을 보낸 보강천이 저들의 고향은 아니라는 거다. 생존을 위해 저들은 물갈퀴 세운 북풍을 헤딩하며 한껏 날갯짓해 먼 길을 다시 떠났다.
저들이 알을 낳고 부화하는 모습은 그저 상상이다. 저들의 유전자엔 유랑이 각인되어 있을지 모른다. 디아스포라. 떠돌이 운명이다. 저들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산다. 얼마나 행복한 생인가. 내일을 고민하며 애면글면할 필요도 없다. 저들의 행로가 그려진 지도엔 온통 빈구석뿐이다. 그러니 날개가 저어가는 허공이 그저 막막하기만 할 리도 없다. 저들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럴 리 없다가 진답이다. 인생에서 막연함보다 더 두려운 노릇은 없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허공을 바지런히 날갯짓한다. 닻 없는 거룻배를 노 젓는 삶은 막막하기만 하다. 산다고는 하지만 기실은 버티는 거다.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세파의 절박함으로부터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한다.
‘살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결핍을 메우려 안간힘 쓴 세월이 아니었던가.’
이러지 말자. 단 한 번뿐인 생에서 모든 욕망의 종착지는 결국 그늘이었다. 기를 쓰고 벗어나서 양지에 나앉고자 했으나 그럴수록 그늘은 더 짙고 깊었다. 버리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가지지 말아야 했다. 밖을 채우는 게 아니라 안을 비우는 게 옳았다. 돌아보니 삶이 그랬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얼음 언 보강천 숨구멍을 살아남으려 들락거리던 기러기들이 떠나니 어느덧 다시 봄이다. 생강나무는 올해도 다시 생강나무다. 노란 꽃송이들이 말한다. 고민하지 말고 살자. 내일을 알 수 없는 아득함이라는 건 얼마나 큰 생의 축복인가.
겨울은 한없이 깊고, 야트막한 봄은 슬프고 서럽다.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 봄꽃들이 하릴없이 지고 나면 머지않아 여름이 올 테고, 가을은 너무 이르게 잎 지고 저문다. 북쪽 어디에선가 부화해 건강한 날개를 매단 새내기 기러기들이 엄마 아빠의 겨울 거처로 함께 날아온다.
“여기가 어디지?”
초년병들은 눈 깜박이며 묻겠지만 아무도 대꾸해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혼잣말이 귓전에 들린다.
‘나도 그랬단다. 이게 세상이고, 너의 생이야. 운명이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거지만.’
그들이 생에 몇 개의 겨울이 놓여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난겨울의 그들에게 일일이 이름표를 달아주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는 노릇이다. 만화방창 봄나들이가 어제였는데, 어느덧 다시 겨울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세월은 갈수록 눈치 없이 빠르다.
회귀점이 있는 생은 철따라 여행 떠날 허공이라도 있지. 부럽구나. 너희들, 세상 빈구석을 올해도 용케 찾아들겠구나. 그나저나 보강천 피라미들의 지난한 겨울나기는 또 어쩌니? 날개 없는 피라미들에겐 물속이 곧 전부다. 배부를 필요 없다. 고프지만 말아라.
가을이 되면 보강천 천변에도 빈구석이 많아진다. 잎 떨군 미루나무들은 장배기에 먼 구름을 이고 있다. 바라보아야 할 건 자신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지 않던가. 가을은 내가 내게로 돌아오는 계절이라고. 문명과 자연의 조화는 빈자리에 있다. 그걸 확인하려고 아침이면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글뜰書案 나영순
참여문학 시 등단(2006), 문예한국 수필 등단(2006), 시집 『맹물은 뜨겁다』(2021), 『쥐코밥상』(2012), 산문집 『시간의 잠』(2015), (충북문예진흥기금 수혜 2012, 2015, 2021). 증평군 기록집 『생은 가방 하나로 충분해』(2022), 『서른 내, 서른 뫼』(2023). 구술채록 <자서전> 『내 인생 갈대호드기』 정영권 장인편(2023). 제1회 충북시인축제 시 부문 장려상(2023). 2023년 직지 콘텐츠 공모전 시 부문 장려상(2023). 문화관광부장관독서문화상표창(2006), 한국예술인총연합회우수예술인상(청원2010,증평 2019),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운동 최우수 강사상(2017, 2020), 한우리독서논술학원 청주시지부장, 원장, 글바구니 도서관 관장, 한국문인협회증평지부회장, 새마을중앙회새마을문고 증평군지부회장, 청주시1인1책펴내기운동지도강사 및 각급도서관 강사, 세계직지문화협회회원, 증평문인협회회원, 증평군향토사연구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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