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외 2편)
이 날 양귀비꽃, 제비나비를 해산한다 꽃 안에서 날개가 피어난다 꽃과 나비는 날갯짓을 함께 연습한다 어슴푸레한 저녁 속 빛나는 검은 날개 나비는 정중하게 탯줄을 거두고 몸을 띄운다 꽃은 홀로 남아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본다 들판과 들판과 들판으로부터 달아난다 하늘이 엉기는 하늘로부터 달아난다 아무리 달려도 아편 냄새 멀어지지 않는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3-4월호
박쥐
박쥐는 자신의 슬픔으로 누군가를 위로한다 그 누구도 누군가가 될 수 있다 박쥐는 동굴 밖으로 나가면 새가 된다 그 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이다 박쥐는 어떠한 새도 될 수 있다 그 새는 당신도 가장 좋아하는 새이다 그 새는 참새일 수 있다 후투티일 수도 있다 고양이가 낚아챈 새일 수 있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의 새여도 좋다 그 종은 내일 탄생할지도 모른다 박쥐는 거꾸로 매달려서 운다 박쥐가 울 때의 표정엔 진심이 담겨 있다 박쥐는 깊은 눈빛을 지녔다 날개 속에 몸을 숨기고 어둠 속에 표정을 숨긴다 박쥐는 동굴 밖으로 날아간다 누군가에게 날아간다 그 누구도 자신만의 새를 가질 수 있다 모든 새는 그만의 깃털과 색이 잇다 모든 새의 눈은 까맣다 —시집 『입술을 스치는 천사들』 2023.11
젖은 가지들
사과를 반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반을 타인에게 건네는 것을 나머지 반을 나에게 건네는 것을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구멍가게에서 껌을 훔쳤을 때 이층집 누나의 벗은 몸을 봤을 때 그 두근거림 때문에 나쁜 짓에 홀려서 골목을 꺾을 때마다 따귀를 맞으면서도 살고 싶었다 낮이면 부모들이 없는 동네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명문고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신학대를 가고 성직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차를 끌고 배가 불러오는 여자의 곁으로 돌아가는 저녁이 이런 일들은,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터질 수밖에 그런 이들은 어디선가 살고 있고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그들과 사과를 반으로 나누어 먹고 싶다 눈이 내린 사과나무밭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나무들 눈이 내리고 녹고, 검게 젖은 나뭇가지들 가능했을 것이다 수많은 가지 중 다른 하나를 잡는 것이 잠에서 깨어나 여러 날 중의 하루를 맞이한다 나는 식탁 위의 사과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안녕? 아침은 늘 좋은 아침이다
—시집 『입술을 스치는 천사들』 2023.11 ------------------- 이날 / 2015년 계간 《포지션》 등단. 시집 『입술을 스치는 천사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