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살던 시절에는 특히나 우리 집처럼 형제간은 많고 아버지가 안 계신 집에서는
다른 집의 몇 배나 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고향에서의 시절은 항상 따뜻했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넓은 종중 땅과
농사를 지으시며 소를 키우며 우리들의 미래를 준비하시던 아버지가 계시던 시절에
성장한 우리 언니 오빠들은 사실 배고픈 설움을 겪지 않았고 나부터 내 아래 두 남동생들이
겪었던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나마 위안을 삼아본다.
내가 다니던 공장은 스레트 지붕에 대충 약 150평 남짓 되는 단층 건물로
지붕이 꽤 높았던 그런 창고 같은 단층 건물이었는데 막상 안에 들어 가보면
중간에 나무로 마루를 놓아서 2층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올라 다니는 계단도 나무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 할 적마다 삐그덕 대던 소리가 요란하던 그런 구조였다.
아래층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셋팅실과 아줌마들이 있는 세탁실과 아줌마들이
있는 3차 검사실 등이 있었고 윗 층엔 주로 미싱과 우리가 맡았던 1차 검사와
바느질 마지막 최종 포장실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윗 층이 더러움이 덜 타니까 거기서 포장을 했던 것 같고 비닐팩에 넣어진 제품들은
큰 박스에 넣어 다시 아래층으로 큰 종이 박스에 담아져서 창고에 쌓이던 그런 구조였는데
우리가 근무하는 2층이란 것이 건물 바로 아래 천장 밑이었고
남자들 키로는 전혀 고개를 못 드는 그런 구조여서 여름이면 그야말로 찜통에 앉아 작업을 하는 그런 꼴이었다.
그 어느 해 여름에는 사장님이 공장에 와 보더니 직원들을 시켜 얼음을 큰 다라로 한 다라 사오라고 시켜
우리를 잠시 쉬게 하고 얼음덩어리를 싫컷 먹여 준 기억이 난다.
그 사장님 그 시절에 사장하면서 야간 대학에 다녔고 우리들 월급은 단 하루도 늦춘 적이
없기에 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상황이야 어찌됐던 간에 그 시절 공장들이 다 그랬고
박정희 대통령도 수출업체에 세금을 줄여주며 기업을 도와주던 때에
우리 어린 근로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데는 관심도 없었고
작은 월급이나마 제 때 나오니 감사할 따름이었는데
나에게는 그 작은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는 큰 위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은 남녀평등이니 뭐니해서 남녀 월급의 차이가 없지만 그 시절에는 여자들 월급이 남자들에 비해 월등히 적어서
생활을 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고 우리들 시다들 월급 갖고는
우리 가족들 한달 양식장만도 힘든 그런 상황이었는데 멀리 대구에서
제법 돈을 잘 벌어 가금씩 엄마와 동생들에게 몫돈을 보내와
지원하던 작은 오빠의 군 입대가 어둠처럼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린동생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막내가 곧 중학교를 가야하는 상황에서 군대를 가야하는
작은 오빠도 막막하기는 매 한가지였지만 나라에서 부르니 안 갈 수도 없고
오빠의 군 입대는 우리 남은 네 가족에게는 삶과 죽음의 고비와도 같이 무섭고도 두려운
큰 산이었다.
엄마와 내가 아무리 벌어도 돈 만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한 달 수입이 3만원 정도 되던
큰 수입원이 돈 벌이를 못하게 되니 그 두려움은 차마 말로 다할 게 아니었다
가끔 소포로 책도 보내주고 월간지도 보내주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고
예쁜옷도 사주던 오빠가 3년 동안이나 군대에 가 있어야 하다니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각 끝에 난 오빠가 군대에 가던 그해 열일곱 나이에 용감하게 공장을 나왔다.
반장언니는 똘똘하고 일 잘 하는 나를 보내기 싫어 죽기 살기로 붙잡았지만 다 뿌리치고
근처 다른 공장으로 취직을 하러 갔다.
면접실에 나온 반장은 나에게 물었다.
월급은 얼마를 받고 싶냐고?
나는 내 월급의 세배가 넘는 일류 기술자 월급을 달라고 했다.
마음이 떨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처음 본 그 반장님이 단번에 승낙을 하며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하라고 했다.
어찌나 좋은지 나도 이제 시다 자리에서 기술자 자리로 올라 앉는 순간이었다.
작은 내 몸으로 한 순간에 내 엄마와 가족들을 책임 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오빠가 군대를 가도 동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것은 엄마와 내가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힘이야 들겠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도 야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공장을 다녔지만 나를 믿고 군대에 간 오빠도
내 동생들도 엄마도 아무 근심 없이 또한 우리들 생에서 다시는 배고픈 설움 없는 그런 시절에 접어 든 것이다.
그 이후 30개월 후에 오빠는 제대를 하고 그해 1976년에 그 많던 뚝 방 주민들도 철거를 당해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모두들 어디에 사는 지 기억에만 가물가물할 뿐
아마도 나처럼 옛날 생각하면서 잘 들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세월에게 이처럼 경제가 발전한 나의 국가에게 감사한다.
끝.
*뚝방이 철거 되던 그해 그 유명한YH사건이 터졌고
가발공장 여성 근로자가 죽고 잡혀가고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전태일 사건도 그 무렵이 아닐까 생각 되며
난 우연히 여기 시골 마을에서 전원 주택
아담하게 짓고 사는 뚝방출신 아주머니를 만났다.
이 분은 내가 사는 장안동 지구가 아니고
한양대학교 부근 송정동에서 살았다고 하였고,
국민새박사 윤무부교수님께서는 우리 보다
윗쪽 의정부 쪽으로 이문동 거기 뚝방에서
신접 살림을 차리셨다고 한다.
교수님은 지금도 자꾸만 옛날 이야기 해 달라고 보채시는데
아마도 이걸 복사해서 드리면 될 것 같다.
장사를 하다가 우연히 만난 윤무부 교수님께서는
나 뿐만이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친절한 분이어서 얘길 꺼내 봅니다*
첫댓글 해방이후의 혼란한 시기를 보내면서 6.25의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르고 그야말로 살아가기힘든
60년대의 전후의 한국민들은 살아가기 힘든. 그러한 가난으로 부터 싸우고 가족들간에 서로 다소 힘이 되면서
형제간들이 서로 노력을 하여 오늘날의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가정과 국가의 힘이 되고 오늘날의 교육의 발전도 가져오는
우리는 주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의 시리즈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발전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우리세대는 가난과 배고품의 세대로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기위해 희생을 많이 하였기에 더욱더 우리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구나 저희 세대에서는 교육열이 남달라서
자식들을 열심히 가르쳤기에 지금의 이 경제성장이
이루워 지지 않았나 싶고 자식들이 잘 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하답니다.
가난과 척박한 환경속 에서도
몸이 부셔져라 일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당연히 여기고
끈끈한 가족애가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일 망정 순수하고 살가운 사람사는 맛은 있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살아왔기에. 지금은 그래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살만한 지금은 오히려 사람사는 맛이 살벌합니다
정말입니다 다들 힘들다 힘들다들 그러고 잘 못된일은 다들 나라탓만
하고 있으니 한심 합니다.
제 자식들도 그모양이니 가르친게 잘못인가 싶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절 잘 견디었군요.
먹고산다는 거...
가족의 생계가 작은 어깨에 큰 부담이 되었으나...
.......
이제는 웃으며 옛날이야기하니
인생은 그래도 살 만하지요?
저는 시집 올때 돈 10원도 안갖고 왔어요.
마지막 봉투까지 엄마 드리고 왔는데
친정엄마 그렇게 일찍 가시고 나니
제가 저한테 감사하더라구요^^
아 참 지금은 저도 살만 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집안 환경두요^^
미례가 확실치않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살아온 님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요즘엔 조금만 힘들어도 일을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과는 대조적인 삶을 살아왔던 우리들...
일을하지 않으면서 편히살려고만하는 시대적 변화를 보면서 경제발전이 사람의 마음마저도
병들게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하게 됩니다. 물론 그때는 먹고살기위한 삶의 투쟁이었고
지금은 삶의질을 높이고자는 인간의욕심이겠지만 이글을 읽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변화된 삶이
많은것을 느끼고 시사함이 크다는것을 보고갑니다. 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이글을 읽는
많은분들께 지나온 우리들의 과거를 떠올리게하고 추억하게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항상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 많습니다.
자동차, 집 다 가지고도 불만이 많으니 답답 합니다.
저는 현재 제 삶에 만족하며 감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내시고 잘 살아오셨네요~
님의 글을 쭈욱 읽으면서 우리의 6-70년대 삶을 되돌아 보게되며
그 때는 대부분 국민들이 어렵게 살았는데 짧은 시간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을
많이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글로 지난일을 술술 잘 풀어 내시는 글솜씨에 박수 보냅니다~~
여러번 박수 쳐 주심에 매우 감사합니다.
우리나라도 감사하고 우리국민들 지도자들
다 감사하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름다운 글로 시처럼 답글 주시는 엣지님 아래 사진은 어디인가요?
멋집니다. 해외에 계시는군요. 궁금합니다 ㅎ
마지막편까지 읽고난 소감은 그저 먹먹한게
마녀님이 큰산처럼 느껴집니다
많이많이 행복하세요~
하얀길님와 카페님들 덕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부끄럼도 모르고 올려 봤습니다.
늘 응원 감사하구요.
햐얀님의 재미난 글도 기다릴게요 글을
너무나 재밌게 잘 쓰시네요^^
님의 귀한 글 읽노라니 북녘의 동포들 생각이 납니다(평양시민들 말고요~). 저들에게도 참 자유의 날이 속히 오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힘!!
ㅎㅎ 평양시민들은 ? 맞아요 얘네들은 빼야 해요.
기 나머지 이북동포들 너무나 불쌍하지요.
김정은 돼지 밑에서 얼마나 힘들까요.
글을 이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읽을때마다 많이 놀랍니다.
일전에 잠깐 비췄지만 전 30대에 돌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집에서 10년동안이나 백수로 뒹굴댔는데
그때 사촌동생이 방통대에 넣어줬습니다.
누나가 잘하는 건 공부밖에 없다고...
그래서 늦은 나이에 다시 국문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소설공부도 했구요
학교다닐때부터 글 잘쓴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냥 책이 좋고 끄적이는 게 좋아한거지
뭐가 되려고 한 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구요...
그런데...칠칠마녀님이 글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많이 열심히 써보세요
여러 사람에게 희망의 메세지가 될거예요^^
그러시군요. 안타까워라..
국문학을 전공하셨으니 부럽습니다.
사실 저는 학벌이 너무 없어서
자신이 없어요.
예진아씨 이곳 지리를 잘 아시니
지나는 길에 한번 만나요.
제 큰딸도 국문학 전공했고 국문학 대학원까지 다녔는데 내 글을 좀
봐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해요
못됐죠? ㅎ
고통 없이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만 678십년대 우리 민족이 치룬 고통의 총량이 오늘날 국민소득 3만불을 바라보는 풍요의 댓가입니다.
연재가 끝이라니 아쉽습니다.
좋은글 자주 부탁드립니다.
사실 그시절에 우리보다 더더더 잘 살던 국가들도 많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보다 훨씬 못하지요.
코딱지만한 나라에서 참 장합니다.
저도 장하구요 ㅎ
그 시절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 번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 공부시킨 맏이나 언니누나가 많았는데
칠칠마녀님도 그러셨군요.존경스럽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희생하는 형제는 없지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요즘은 그렇게까지 어렵게 사는 가정은 없으니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 시절이 다시오면 또다시 부모형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 같아요.
열심히 살아오신 칠칠마녀님께
절로 고개 숙여집니다
어려운 살림에 학교 보내주신 부모님께서
고생 많으신것만 기억합니다
학교등록금 낼때면 쩔쩔매시던 부모님....
어머님과 동생들을 위해 애쓰신 칠칠마녀님
존경스럽습니다
맞습니다. 등록금 낼때면 소도 팔고 땅도 팔고 그랬지요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