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의 삶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2024.9.22.연중 제25주일 지혜2,12.17-20 야고3,16-4,3 마르9,30-37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오늘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 생명을 떠받쳐주시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신망애(信望愛) 삶을, 진선미(眞善美) 삶을 두터이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가, 은총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너무 잊고 지낸 생명의 주님입니다.
어제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갈망하며 피정자들과 파견미사후 퇴장성가 부르기전 일어나 함께 부른 만세칠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자 강론에 이어 실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눈길을 두고 양손을 활짝 펴들고 만세칠창을 바쳤습니다. 피정자들도 이런 체험은 처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우리 가정 만세!”
함께 부르는 만세칠창 기도 얼마나 좋은지요! 두발로 서서 눈들어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입니다. 순교자성월 9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철은 정말 기도의 계절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받쳐 주는 주님께 기도할 때 활력넘치는 충만한 삶이요, 위에서부터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입증되는 지혜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는 수제자 베드로가 격렬하게 반응했고,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 예고 때는 철부지 제자들은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승이자 주님께 공감하는 분위기가 전무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신, 생명과 진리의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길은 걸을 때 마다 상기해야 할 사실은 길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도인(道人)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현자 무위당 장일순과 목사 이현주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목사인 자기에게 왜 도인이라 써주었는지 묻자 장일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허, 자네는 길 가는 사람이 아니신가? 길 도(道)에 사람 인(人), 그러면 그게 길 가는 사람이지, 사람이 길을 간다는 건 길을 닦는 거라.”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길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길 가는 사람’ 도인(道人)이자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들임을 깨닫습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말마디가 도(道)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요한복음 중국한자 성경은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삶의 지혜도 길 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싶어 나눕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위해, 소식(小食)에 고기를 먹기, 뭘하든 계속하기, 햇빛 쬐기, 눕지 말고 움직이기, 일부러 외출하기, SNS를 즐기기, 지인과 대화하기, 느슨한 운동을 습관화하기”
이보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기, 적절한 걷기 운동”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에 필시 이런 삶의 지혜도 적절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기에 차마 부끄러워 대답을 못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속내를 환히 아시고 위에서 오는 지혜의 절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이런 지혜를 체현(體現)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 영적 진리의, 겸손의 최고봉이자 천상 지혜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이런 첫째의 삶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런 첫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공동체의 첫째 원리입니다. 모두가 “커지기 경쟁”이 아니라 모든 이의 “꼴찌 되기, 작아지기의 경쟁, 모든 이의 종이 되기 경쟁”이라면 상상만해도 너무 흐뭇한 '복음적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지체없이 택한 오늘 강론 제목, “첫째의 삶-모든 이의 꼴지, 모든 이의 종”입니다. 영어 말마디 역시 은혜롭게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부터 또 하나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Last of all, Servant of all(모두의 꼴찌, 모두의 종)”
얼마나 멋집니까! 이러면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우리의 파스카 영성은 어원도 같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 어린이를 껴안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참 감동적입니다. 제가 간혹 면담성사시 감동하여 형제자매를 안아들일 때도 이런 심정입니다. 예수님 제자 공동체는 물론 교회 공동체의 두 번째 원리로 이 또한 ‘위에서의 지혜’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건강하고 건전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환대가 예수님 환대요 하느님 환대라는 놀라운 신비를 보여줍니다. 어린이가 누구입니까?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물론 모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약자, 병자, 죄인, 난민, 노인, 변두리 소외된 사람..끝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환대함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일이요, 이런 이들을 받아들여 모든 이의 꼴지로, 모든 이의 종으로 사는 자가 참 영성가이자 신비가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가한 박해와 시련중에도 이런 위에서의 지혜와 하나된 이들의 내공은 놀랍고 주님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녕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과정을 통해 입증된 영적승리자, 하늘 지혜의 화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영적전쟁의 상황은 흡사 온유와 겸손, 인내력, 분별력의 시험장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한 “지혜의 도(道)”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내적 일치가 우리 모두 모든 이의 꼴지로, 모든 이의 종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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