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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노즉신흠(習勞則神欽)
수고로운 일일지라도 응당히 습관처럼 하면 귀신도 존경한다는 뜻이다.
習 : 익힐 습(羽/5)
勞 : 수고로울 노(力/10)
則 : 곧 즉(刂/7)
神 : 귀신 신(示/5)
欽 : 흠모할 흠(欠/8)
19세기 중엽 청(淸)나라 왕조를 뒤집을 정도의 위협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있었는데, 억압(抑壓)과 착취(搾取)를 당하던 농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항운동으로 14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난을 진압(鎭壓)한 공로로, 청나라에서 왕족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후작(侯爵)까지 받은 증국번(曾國藩)이란 대신이 있다. 이 분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상향(湘鄕) 고을의 궁벽(窮僻)한 산골마을 출신이었고, 그 조상들은 600여년 동안 이름난 인물 한 사람 없는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이었다.
이 분의 조부는 젊은 시절에는 읍내에 드나들면서 술 마시고 노름도 하는 등 허랑(虛浪)한 생활을 하며 지냈는데, 서른 살쯤 되었을 때 읍내서 돌아오다가 자기를 비웃는 이웃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그때부터 정신을 차려 분발하여 농사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다. 매일 일찍 일어나 채소밭에 거름을 주고 가축과 물고기 등을 기르고 하여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재산을 모은 뒤, 그 아들을 과거에 합격시키려고 열심히 뒷받침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손자인 증국번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하였다. 증국번은 조정에서 10여년 정도 벼슬하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지냈다.
그때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는데, 다급해진 황제는 상주의 몸이 되어 있는 증국번에게 지방의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였다. 여러 차례의 고난 끝에 결국 그의 지휘하에 태평천국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 분은 매우 검소하여 관직이 높아져도 늘 가난한 시골사람처럼 청렴하게 살았다. 훌륭한 사람을 대접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당시 조정 관원들은 다 첩(妾)을 두었으나, 이 분은 끝내 첩을 두지 않았다. 관직에서 종사하거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다고 전쟁터에서 지냈으면서도, 늘 학문을 계속하여 일생 동안 지은 책이 400권에 이를 정도다.
이 분은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 중국에서는 자녀 교육 잘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의 집안은 흥했다가 다시 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분의 아들과 손자들 가운데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최초의 영국공사(英國公使)를 지낸 증기택(曾紀澤)이 그 아들이다. 지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인격 능력을 두루 갖추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이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수고로운 일에 습관이 되면 귀신도 존경한다(習勞則神欽).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수고로운 일을 싫어한다.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할 것없이, 모두 편안한 것을 탐내고 수고로운 일은 꺼려한다. 사람들이 날마다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이 하루 동안 한 일과 쓴 힘과 일치한다면 옆에 사람도 옳게 여기고 귀신도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부귀한 집안의 사람들이 일년 내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진수성찬을 먹고 비단 옷을 입고 편안히 지낸다면, 이는 아주 불공평한 일이다. 농부들은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하여 겨우 몇 섬의 곡식을 생산하고, 아낙네들은 몇 자의 베를 짜낼 뿐이다. 이런 일은 귀신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서도 부귀영화를 오래 누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좋은 말이 수없이 많지만, 내가 경험해보니 근(勤: 부지런함)과 검(儉: 검소함)보다 더 좋은 말이 없더라."
그의 후손들은 이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지켜왔기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가문이 번성한 것이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게으르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다.
이 분이 아들이나 아우들에게 보낸 교훈적인 편지인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는 청나라 후기에 삼대 베스트셀러로 계속 출판되었고, 지금도 중국과 대만에서 다투어 출판하고 있다.
청나라의 마지막 등불, 명재상 증국번(曾國藩)
후회없이 용서하고, 원망없이 화해하고, 굴욕없이 인내하라.
19세기 말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재산은 하나둘씩 유출되었다. 이런 존망의 위기에 ‘증국번’의 존재는 청나라를, 아니 중국의 백성을 지키는 외로운 등불이었다. 그는 청렴, 성실, 인내, 관용의 처세학으로 청왕조가 아닌 백성을 섬긴 시대의 마지막 재상이며, 유학자였다.
중국의 전통 공연 '변검'이 있다. 서천성에서 유래한 변검은 순식간에 얼굴에 쓴 가면을 바꾸는 것으로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중국의 대표적인 기예이다. 흔히 처세술에 능한 자들을 '변검에 능한 자'라고 평가한다.
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위대한 ‘처세학의 달인’으로 네 명을 손꼽는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 전국시대 재상이며 거부인 '여불위', 19세기 막대한 부를 만들어낸 중국 재벌의 시조 '호설암', 그리고 청나라 말엽의 정치가이며 장군이었고, 유학자인 '증국번'이다.
이 중 증국번은 단순히 처세술의 달인으로 치부하기에는 개인적 인품의 완성도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관리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상군이라는 민병대를 조직해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을 진압한 군사 전략가였다. 시문과 경전에도 능한 유학자이며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마지막까지 붙잡은 시대의 충신이기도 했다.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과시한 인물이다.
더구나 증국번은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이 “근대 중국의 인물 중에서 나는 오로지 증국번에게만 탄복할 뿐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모택동과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한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조차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 증국번은 가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존경을 표했다.
물론 1920년대 이후 중국번은 비판을 받았다. 근현대에 들어 민중봉기로 평가받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봉건보수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만주족 황실인 청나라에 충성한 한족의 배신자 즉 '한간(漢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증국번을 완전한 인간, 즉 '완인(完人)'이라 부르며 지금도 가장 존경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유연하고 현실적인 정책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적재적소의 인재 등용과 후계 양성, 실용적인 제도개혁 등은 물론이고 강인하면서도 관용을 베푼 재상으로서의 완벽성이 현재의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리시절 정치의 유연성과 실무 감각을 배우다
증국번은 1811년 청나라 고광제 치세, 후난성 샹샹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증린서는 무려 17번의 시험 끝에 43세에 관직에 나갔다. 당시 청나라는 총 7번의 시험에 합격해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어 수십 년을 공부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증린서의 급제는 늦은 편이다.
증국번은 어려서부터 매일 공부만 하고, 끝없이 도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근면과 끈기의 자세를 배웠다. 공부만 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역시 강인한 성품이었다. 훗날 증국번은 자신이 어머니의 강인함을 닮았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머리는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그는 천재적이거나 명석한 인물이 아니었다.
증국번은 14세 때 처음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좌절이 거듭되었고 27세에 최종 합격했다. 아버지보다는 빨랐지만 훗날 증국번이 키운 후계자인 이홍장이 17세에 합격했고, 증국번보다 한 살 어린 좌종당이 14세에 현시에서 1등으로 급제한 것에 비하면 늦은 편이다.
증국번이 공부에 매진할 때의 일화이다. 증국번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대들보에 몸을 숨기고 식구들이 전부 잠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증국번만은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외었다. 그런데 몇 번씩 읽고, 외어도 증국번이 마치지 못하고 새벽녘이 다가오자 도둑은 그만 화가 났다. 대들보에서 내려온 도둑은 증국번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책 내용을 자기가 외우고는 버럭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증국번은 타고난 인물, 영웅이 아닌 각고의 노력과 끈기의 소유자인 셈이다.
과거에 합격한 증국번은 한림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한림원은 황제 직속 기구로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만의 집합소였다. 10여 년을 북경에서 근무한 증국번은 특별할 것이 없는 관리였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통과하면 공부를 중단하는 보통의 관리들과는 달랐다. 송나라 유학자들의 경전을 깊이 있게 공부해 유학자로서의 능력을 키웠다. 증국번은 병부시랑, 예부시랑으로 승진했다.
유학에 심취한 증국번은 틀에 박힌 관료생활을 탈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옛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간언을 했던 충신, 열사들의 전기를 공부하며 자신도 그들의 행동을 본받기로 한다. 1850년부터 약 2년 동안 증국번은 황실과 조정에 대해 직설적이고 대담한 간언을 수시로 황제에게 올렸다.
당시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청나라는 경제위기에 처했다. 엄청난 배상금을 영국에 물어주어야 했고 그로 인해 은이 유출되고 농민과 자영업자들은 세금폭탄에 휘청거렸다. 증국번은 상소에서 이 같은 실정을 낱낱이 황제에게 고했다. 한족으로 이루어진 녹영군,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팔기군은 무기, 월급, 사기를 상실한 군대가 되었으며 고리대금과 관리들의 부정으로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곧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함풍제는 대노했다. 사실을 왜곡하고 침소봉대한다고 증국번을 나쁘게 보았다. 하지만 주위 관리들의 청원으로 함풍제는 증국번에 대한 노여움을 풀었다. 증국번도 이때 교훈을 얻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정치란 현실적 정무감각과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단지 도덕적 기준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민병대 '상군'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다
현실은 냉혹했다. 증국번의 예견대로 민란이 일어났다. 1851년 청나라군이 기독교계 신흥종교를 공격한 것이다. 교주 홍수전은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며 태평천국을 개국하고 난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의 리더 이수성은 치밀한 전략으로 남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이라 바꿨다. 태평천국군은 ‘청나라, 즉 만주족을 몰아내고 모든 백성이 함께 땅을 일구고, 같이 음식을 나눠먹고 더구나 남자와 여자가 모두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라는 구호로 양쯔강 유역을 점령하고 북경까지 그 세를 확장했다.
청나라는 정예 녹영군과 팔기군을 파견했지만 군대는 이미 전의도, 전략도, 투지도 상실한 부대였다. 관군의 패배가 계속되자 함풍제는 수도 천도를 고민할 정도였다. 이때 중국번이 나섰다. 1853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샹샹 마을에서 민병대 격인 '상군(湘軍)'을 조직했다. 잘 훈련된 상군은 해군이 주력이었다.
이들은 서서히 태평천국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해전에서도 패하고 특히 항저우 연안 도시 치먼에서 증국번과 상군은 태평천국군에게 포위되자 위기에 처한 증국번은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증국번은 강한 인내심과 적절한 인재 등용, 유연한 전술, 소통의 지휘력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물론 증국번은 노련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상군을 조직하고 양성하는 과정에서 너무 강한 훈련으로 부하들이 반발해 한때 반란이 일어날 뻔도 했다. 또한 수군을 양성하는 기간에는 황제가 빠른 출진을 명했지만 증국번은 듣지 않았다. 그에게는 황제의 조급한 명령보다 훈련 받은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옆에는 여우 같은 간신들이 들끓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증국번이 강남을 지배하는 권력 놀음에 빠진 것 같습니다”라는 모략을 일삼았다. 하지만 증국번은 황제의 명령을 무려 3번이나 거절한 끝에 준비된 상군으로 전장에 나가 승리했다. 그는 느리지만 치밀한 준비와 계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완벽주의자였다.
태평천국군의 명장 석달개가 상군에 체포됐다. 그는 증국번에 대해 “처음에 증국번을 능력 없는 장수로 알았다. 하지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치밀한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비록 적장이지만 탁월한 지휘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855년 제2차 아편전쟁까지 겹치면서 중국은 온통 전란에 휘말렸다. 1864년 상군이 남경을 함락해 홍수전과 이수성을 포로를 잡았다. 그리고 이수성의 팔과 다리를 자르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태평천국군 30만 명의 투항을 유도했지만 태평천국군은 끝까지 저항해 모두 몰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약 6년간의 태평천국의 난은 약 2000만 명이 희생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865년,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 비밀 결사 조직인 염당이 장낙행의 주도로 ‘염군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주로 탈주병, 농민들이 주축으로 태평천국군과 합세해 저항했지만 이 역시도 증국번의 상군에게 토벌 당했다.
역사는 말한다. 청왕조는 1616년에 개국해 1912년, 296년 만인 황제 푸이 시절 망했다. 증국번이 태평천국, 염군의 난을 모두 진압한 1868년에서 불과 50년 후의 일이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은 이른바 ‘멸망흥한(滅滿興漢)’ 즉,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이 중원을 되찾자는 것과 기득권 봉건세력에 맞서는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이를 앞장서서 진압한 증국번에게 ‘봉건적인 보수주의자, 백성보다는 청나라 황실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 한족 출신으로 만주족에게 충성한 배신자’라는 다양한 낙인이 찍힌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증국번은 그 시대, 자신의 위치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는 관리, 군인, 재상이기도 했지만 충과 효 그리고 의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유학자였다. 그에게 백성과 국가는 모두 지켜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조정은 증국번을 치하했다. 그에게 태자 태보의 벼슬과 함께 의용후로 후작의 직위를 내렸다. 그리고 증국번은 대학사로도 임명되어 실질적인 권력과 명예에서도 청나라 으뜸이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은 근본적으로 증국번을 믿지 않았다. 그가 만주족이 아닌 한족 출신이라는 것도 불신의 원인이었지만 증국번의 세력과 명성이 전 중원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경계했다.
증국번의 상군이 태평군의 수도인 남경을 점령하자 청나라 조정은 녹영군과 팔기군을 상군의 주둔지에 배치해 상군을 경계했다. 또한 황제의 특사인 흠차대신을 증국번에게 보내 그의 공적을 치하했지만 비밀리에 그를 감시했다. 또한 증국번의 동생이면서 상군의 장군인 증국전의 병사들이 남경을 약탈하고 반란 수괴인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의 도주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감사까지 진행했다.
그러자 상군 내부가 들끓기 시작했다. '우리 상군의 돈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돌아오는 것이 겨우 반란을 의심하는 것이냐?'는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군 지도부를 중심으로 '이왕 의심받을 것이라면 우리가 일을 저지르자'는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황제가 되라는 권유를 물리친 유학자
증국번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해 ‘한족 왕조’를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이 본격화 되었다. 증국번의 오른팔이면서도 증국번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던 좌종당이 움직였다. 좌종당은 심복 호림옥을 시켜 증국번에게 비밀 서신을 보냈다. “증국번이 마음을 움직여 큰 뜻을 품는다면 나도 진심으로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증국번은 편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답신을 썼다. “나는 그대가 말하는 큰 뜻을 품고 있지 않다. 나에게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호림옥이 나섰다. “대신, 대신의 뜻대로 우리가 천하를 전부 얻지 않더라도 장강을 사이에 두고 천하를 양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께서 결심만 하시면 우리는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증국번의 대답은 ‘불가’였다.
하지만 상군 지도부의 야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증국번의 심복 팽옥린도 권했지만 증국번은 “어찌 팽옥린이 나의 충성심을 실험할 수 있는가?”라고 분노하며 팽옥린의 편지를 씹어 삼켜버렸다. 상군 지도부는 왕개운을 증국번에게 보냈다. 그는 패도를 주장하는 이른바 책사였다. 왕개운은 증국번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설파했다. 아무 반응 없이 찻잔 물로 탁자에 글씨를 쓰던 증국번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왕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증국번이 찻물로 쓴 글씨를 읽었다. ‘허망할 망(妄)’자였다. 왕개운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상군 지도부는 마지막 방법을 썼다. 증국번의 친동생인 증국전을 비롯해 좌종당, 팽옥린, 포초 등 증국번의 수족 같은 참모들 30여 명이 모여 증국번과 마지막 담판을 시도한 것이다. 증국번은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시 한 구절을 보냈다. 그 시는 소동파와 왕안석의 시에서 구절을 따 상군 지도부에 전달되었다. 내용은 ‘내 뜻은 권력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증국번의 변치 않은 마음을 확인하자 상군 지도부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증국번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청왕조가 그의 배반을 두려워해 태평천국군과의 치열한 전투 중에 일부러 지원을 끊고 의심을 했던 일들에 실망과 좌절을 느낀 적도 있었다. 또한 당시 증국번의 위세는 황제를 능가해 전란이 수습되면 증국번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사실처럼 전 중국에 퍼져있었다. 하지만 증국번은 백성과 국가에 대한 충신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상군을 조직한 이유가 청나라 왕조의 사직을 지탱하려는 것도 이유였지만 오랜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겠다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는 직예총독과 대학사 그리고 북양통상대신을 역임했다. 증국번은 자신의 권한과 경륜을 모두 중국의 굴기에 쏟아 부었다. 중국번은 20세 전후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한 유학단을 구성했다. 매년 약 30여 명의 인재들이 15년간 국비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군수공장을 중심으로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등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힘을 썼다. 그는 보수적인 유학자였지만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편향된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실용주의자였다.
증국번은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즉 중국을 몸체로 하되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이용한다는 것으로 마치 등소평의 ‘흑묘백묘론’과도 일맥상통하는 정책이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서양 문물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확산되었다. 그야말로 두 번의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을 겪으면서 존망의 위기에 처한 청나라로서는 증국번의 정치사회 개혁이 마지막 등불이었던 것이다.
증국번은 자신의 정책이 지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사상과 이념을 같이 하고 전란을 함께 겪으며 동지가 된 후계자 그룹 양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증국번은 가문, 부, 학벌보다 능력이 있는 자를 발탁했다. 그렇게 이홍장, 좌종당 등을 후계자로 양성했고 그 외에도 호림익, 류장우, 이한장, 증국전, 곽숭도, 심보정 등이 증국번의 교육과 지휘 하에 인재로 성장했다. 상군 출신으로 순무와 총독에 오른 이가 무려 13명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 청나라는 증국번의 후예들에 의해 지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국번은 그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고 그들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를 지켜본 것이다. 증국번은 1870년 이홍장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은퇴했다. 그리고 1년 뒤 1861년 62세에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 황제 동치제는 증국번을 태부로 추증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1등 후작으로 임명해 증국번의 충성심,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다.
▷ 처세학 1
모든 것의 시작은 나를 다스리는 것,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
증국번은 천재적 혹은 영웅적 풍모와 위엄의 인물은 아니었다. 14세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해 13년 후인 27세에 관직에 올랐던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근면과 성실로 채웠다. 즉 증국번은 “남이 열 번하면 나는 천 번, 만 번을 한다”고 할 정도의 노력파였다.
또한 증국번은 고집이 세고 한 번 뜻을 품으면 번복하지 않았고 너무나도 신중해 사람들은 그를 ‘굴강(倔强)’이라고 불렀다. 증국번은 유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성현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적용했다. 그는 스스로를 감시했다. 매일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 반성하고 자책했다.
하루는 증국번이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때 손님이 찾아와 그와 환담을 나누고 친구의 집으로 갔다. 친구의 아들 혼례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와 읽던 책을 마저 공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오늘이 또 다른 친구의 생일임이 생각났다. 증국번은 그의 집으로 가 생일을 축하하고 밤늦게까지 어울렸다. 집에 와 책상에 앉아 오늘 일을 기록했다. 그리고 반성했다. “오늘, 굳이 생일집에는 안 가도 되는 거였다. 공부를 하지 않고 시간과 힘을 낭비했다. 나는 아직도 마음이 굳건하지 못하다”라고.
증국번이 경전의 자구에 연연하는 꽉 막힌 인물만은 아니었다. 그는 솔선수범, 청렴, 성실 그리고 진솔한 자세로 모든 사람을 대했다. 지위가 높다고, 돈이 많다고 상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따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증국번의 한결같은 자세와 마음이 있었기에 그가 지휘한 상군이 당시 최고의 정예부대가 되었던 것이다.
증국번의 일생은 한마디로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의 실행이었다. 그는 자신과 집안 그리고 국가 경영에 있어 항상 경계심을 잃지 않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 지었고 소신이 서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불의, 관행, 편리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로서, 군사전략가로서의 명성보다는 ‘하나의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역점을 두었다. 즉 명재상이었지만 그는 공맹의 도리, 인내와 관용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유학자라는 자긍심이 더 컸던 것이다.
▷처세학 2
후대와 역사에 전하는 인간경영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
증국번은 수신제가를 기본으로 도덕심, 학문의 깊이, 관리로서의 전문성을 중시했다. 입신양명만을 목적으로 한 공부와 관리들의 무사안일을 질타했다. 증국번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글로서 전달했다. 동생들, 자식들은 물론 측근 참모들에게까지 많은 편지를 보냈다. 또한 부하들의 사소한 궁금증이 담긴 편지에도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증국번은 일생 동안 약 5000여 통의 편지를 썼고 그 중에서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약 1500여 통이다. 훗날 주로 아들에게 준 서간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었는데, 이 책을 장개석과 모택동, 그리고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책에는 증국번의 삶이 모두 녹아 있다. 이 책은 그가 유학을 공부하고, 뜻을 세워 세상을 경영한 ‘인간경영’의 총서라 할 수 있다.
증국번의 책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만나야 할 사람, 교류하지 말아야 할 사람, 정치에 필요한 덕목 등으로 나눠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학자 허권수 경상대 교수에 의해 번역본으로 출판되었는데, 구구절절 금과옥조로 가득하다. 일부만 살펴보자. '긴 시간 이득을 보는 짓은 하지 마라, 작은 험만으로 장점이 많은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게으름은 사람을 속되게 하고 교만은 사람을 망친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면 사람이 모이고, 스스로에게 엄격하면 사람이 따르며, 대범하면 사람을 얻고 부지런하면 사람을 거느릴 수 있다, 후회 없이 용서하고, 원망 없이 화해하고, 굴욕 없이 인내해야 한다, 사람을 믿지 않는 자는 소인배이다, 백성들이 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작은 승리는 지혜로 얻고 큰 승리는 덕으로 얻는 것이다' 등등이다.
또 있다. 증국번은 교류해도 좋은 자와 교류를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했다. '자신을 이기는 자, 덕이 많은 자, 여유가 있는 자, 손해를 볼 줄 아는 자, 직언을 할 수 있는 자, 배려심이 있는 자 등은 교류해도 좋은 사람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 이득만 보려는 자, 측은지심이 없는 자, 사람을 속이는 자, 덕성이 부족한 자' 등은 교류해선 안될 인간형으로 분류한 것이 그것이다.
나무 위 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부는 것이다
나무 밑동에 달린 입은 바람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의 맨 위에 달린 잎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 위를 보고 날씨를 판단하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 직장생활에서도 나무의 윗부분을 보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서로 엉켜있는 부분은 외부의 변화에 더디기 마련이다. 그곳에 몸을 담고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도 안팎에서 일어나는 개혁과 회사의 전략을 체감하기에는 '이미 늦다.' 처세학의 기본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가이다. 목표가 세워져야 각론의 방법론도, 기술과 계책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목표는 간단하고 확실해야 하지만 ‘3년 뒤에 과장이 되겠다’ 등의 단편적인 목표는 일단 뒤로 미뤄야 한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다. 큰 실수가 없다면 시간의 흐름이 50%쯤은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세학에서 목표는 ‘나는 어떤 사람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떤 평가를 받겠다’이다. 한마디로 조직에서 ‘필요한 직원’이 되는 것이다. 업무 능력, 대인관계, 특별한 스킬, 인맥 등 회사에서 직원을 평가하는 다양한 기준에서 지위와 직책에 맞는 합격점을 받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A를 받는 것은 ‘아름다운 희망’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낮밤 따로 없이 회사와 결혼하고, 일과 연애한 것처럼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방법만으로는 당신의 특별함을 돋보이게 할 수 없다. 왜? 내일 사표 쓰고 나갈 사람이나, 타고난 다이아수저, 금수저를 제외하고는 모든 직장인이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처세학이다. 같은 일을 하고도 더 돋보이는 것, 같은 보고를 하는데도 더 설득력 있는 것, 같이 모여 해결책을 찾아도 더 효율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진짜 처세학인 것이다. 처세학을 오해하면 안 된다. 실력은 없는데 말만 뻔지르하게 하거나, 간신나라 충신처럼 상사의 의견에 예스를 연발하거나, 상사의 몸종처럼 구는 것은 처세학이 아닌 그저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진짜 처세학은 남들이 열 번 하면 나는 백번을 할 수 있는 ‘다름’이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마라톤 풀코스를 뛸 수 있는 강인함이다. 그래서 그 결과물을 상사나 동료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위를 봐야 한다. 즉 목표를 정확히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 일수 도장 찍는 직장생활은 나무 밑동에 엉켜있는 평범한 나뭇잎 일뿐이다. 비록 비바람을 온 몸으로 받고 버틸 수 없는 거센 태풍에 떨어질 수도 위험이 있더라도 나무 위의 잎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직장의 리더나 상사의 시선은 항상 위에 붙은 나뭇잎을 보기 때문이다.
▶️ 習(익힐 습)은 ❶회의문자로 习(습)은 (간자)이다. 어린 새가 날개(羽)를 퍼드덕거려 스스로(自, 白)날기를 연습한다 하여 익히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習자는 '익히다'나 '배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習자는 羽(깃 우)자와 白(흰 백)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習자의 갑골문을 보면 白자가 아닌 日(해 일)자에 羽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새의 날개깃이 태양 위에 있으니 習자는 매우 높이 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새가 하늘을 나는 법을 익히기까지는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習자는 수없이 배우고 익혔다는 의미에서 '익히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習(습)은 ①익히다 ②익숙하다 ③배우다 ④연습하다 ⑤복습하다 ⑥겹치다 ⑦능하다 ⑧버릇 ⑨습관(習慣) ⑩풍습(風習) ⑪항상(恒常) ⑫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배울 학(學), 익힐 련(練), 익힐 이(肄), 외울 강(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르칠 교(敎), 가르칠 훈(訓), 가르칠 회(誨)이다. 용례로는 여러 번 되풀이함으로써 저절로 익고 굳어진 행동을 습관(習慣), 배워 터득함을 습득(習得), 버릇이 되어 버린 성질을 습성(習性), 습관된 풍속을 습속(習俗), 글씨 쓰기를 익힘을 습자(習字), 글을 익혀 읽음을 습독(習讀),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힘을 습련(習練), 걸음을 익힘을 습보(習步), 익은 습관이나 개인의 버릇을 관습(慣習), 사물을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습(學習), 제 스스로 배워서 익힘을 자습(自習), 학문이나 기예 따위를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힘을 연습(練習), 풍속과 습관을 풍습(風習), 한 번 배운 것을 다시 익히러 공부함을 복습(復習), 폐해가 되는 습관으로 나쁜 버릇을 폐습(弊習), 나쁜 버릇을 악습(惡習), 배운 기술 등을 실지로 해 보고 익힘을 실습(實習),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힘을 연습(演習), 늘 하는 버릇을 상습(常習), 몸에 밴 버릇이나 버릇이 되도록 행동함을 행습(行習),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습관과 풍속은 끝내 그 사람의 성질을 바꾸어 놓는다는 말을 습속이성(習俗移性), 습관이 오래 되면 마침내 천성이 된다는 말을 습여성성(習與性成), 널리 보고 들어서 사물에 익숙함을 이르는 말을 습숙견문(習熟見聞),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뜻으로 배운 것을 항상 복습하고 연습하면 그 참 뜻을 알게 된다는 말을 학이시습(學而時習) 등에 쓰인다.
▶️ 勞(일할 로/노)는 ❶형성문자로 労(로)의 본자(本字), 劳(로)는 통자(通字), 劳(로)는 간자(簡字)이다. 勞(로)는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으로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𤇾(형, 로)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勞자는 ‘일하다’나 ‘힘들이다’, ‘지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勞자는 火(불 화)자와 冖(덮을 멱)자,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또는 熒(등불 형)자와 力자가 결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熒자가 ‘등불’이나 ‘밝다’라는 뜻이 있으니 勞자는 밤에도 불을 밝힌 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勞자에서 말하는 ‘일하다’라는 것은 매우 열심히 일하거나 과도하게 일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勞자에는 ‘지치다’나 ‘고달프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勞(로/노)는 ①일하다 ②힘들이다 ③애쓰다 ④지치다 ⑤고달프다 ⑥고단하다(몸이 지쳐서 느른하다) ⑦괴로워하다 ⑧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⑨수고롭다 ⑩위로(慰勞)하다 ⑪치사하다 ⑫수고 ⑬노고 ⑭공로(功勞) ⑮공적(功績)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수고로울 로/노(僗), 일할 길(拮),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부릴 사(使)이다. 용례로는 노무자와 고용주를 노사(勞使), 마음과 몸을 써서 일을 함을 노동(勞動), 노동에 관한 사무를 노무(勞務), 힘을 들이어 일함을 노력(勞力), 애쓰고 노력한 수고로움을 노고(勞苦), 매우 수고로운 노동을 노역(勞役), 노른하고 고달픔을 노곤(勞困), 정신적으로 애씀을 노심(勞心),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한 노무에 종사하는 일을 근로(勤勞), 고달픔을 풀도록 따뜻하게 대하여 줌이나 괴로움이나 슬픔을 잊게함을 위로(慰勞), 정신이나 육체의 지나친 활동으로 작업 능력이 감퇴한 상태를 피로(疲勞),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에 힘쓴 노력이나 수고를 공로(功勞), 지나치게 일을 하여 고달픔이나 지나치게 피로함을 과로(過勞), 보람없이 애씀이나 헛되이 수고함을 도로(徒勞), 마음을 태우고 애씀을 초로(焦勞), 아이를 낳는 괴로움을 산로(産勞),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너무 깊게 함을 노심초사(勞心焦思), 애를 썼으나 공이 없음을 노이무공(勞而無功), 일을 하면 좋은 생각을 지니고 안일한 생활을 하면 방탕해진다는 노사일음(勞思逸淫), 효자는 부모를 위해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결코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노이불원(勞而不怨) 등에 쓰인다.
▶️ 則(법칙 칙, 곧 즉)은 ❶회의문자로 则(칙/즉)은 간자(簡字), 조개 패(貝; 재산)와 칼 도(刀; 날붙이, 파서 새기는 일)의 합자(合字)이다. 물건을 공평하게 분할함의 뜻이 있다. 공평의 뜻에서 전(轉)하여 법칙(法則)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則자는 '법칙'이나 '준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則자는 貝(조개 패)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則자의 금문으로 보면 貝자가 아닌 鼎(솥 정)자가 그려져 있었다. 鼎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솥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鼎자는 신성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則자는 이렇게 신성함을 뜻하는 鼎자에 刀자를 결합한 것으로 칼로 솥에 문자를 새겨 넣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금문(金文)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이 솥에 새겨져 있던 글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솥에는 어떤 글들을 적어 놓았을까? 대부분은 신과의 소통을 위한 글귀들을 적어 놓았다. 신이 전하는 말이니 그것이 곧 '법칙'인 셈이다. 그래서 則(칙, 즉)은 ①법칙(法則) ②준칙(準則) ③이치(理致) ④대부(大夫)의 봉지(封地) ⑤본보기로 삼다 ⑥본받다, 모범으로 삼다 ⑦성(姓)의 하나, 그리고 ⓐ곧(즉) ⓑ만일(萬一) ~이라면(즉) ⓒ~하면, ~할 때에는(즉)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근본 법칙을 원칙(原則),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을 규칙(規則),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을 법칙(法則), 법규를 어긴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규칙을 벌칙(罰則), 법칙이나 규칙 따위를 어김을 반칙(反則), 표준으로 삼아서 따라야 할 규칙을 준칙(準則), 어떤 원칙이나 법칙에서 벗어나 달라진 법칙을 변칙(變則), 변경하거나 어길 수 없는 굳은 규칙을 철칙(鐵則), 법칙이나 법령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헌칙(憲則), 행동이나 절차에 관하여 지켜야 할 사항을 정한 규칙을 수칙(守則), 기껏 해야를 과즉(過則), 그런즉 그러면을 연즉(然則), 그렇지 아니하면을 일컫는 말을 불연즉(不然則), 궁하면 통함을 일컫는 말을 궁즉통(窮則通), 서류를 모아 맬 때 깎아 버릴 것은 깎아 버림을 일컫는 말을 삭즉삭(削則削), 가득 차면 넘치다는 뜻으로 모든 일이 오래도록 번성하기는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만즉일(滿則溢),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圖謀)하면 능히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남보다 앞서 하면 유리함을 이르는 말을 선즉제인(先則制人),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을 이르는 말을 필사즉생(必死則生),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을 이르는 말을 필생즉사(必生則死), 오래 살면 욕됨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고생이나 망신이 많음을 이르는 말 이르는 말을 수즉다욕(壽則多辱), 달이 꽉 차서 보름달이 되고 나면 줄어들어 밤하늘에 안보이게 된다는 뜻으로 한번 흥하면 한번은 함을 비유하는 말을 월영즉식(月盈則食), 말인즉 옳다는 뜻으로 말 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언즉시야(言則是也), 잘못을 하면 즉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함을 이르는 말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남을 꾸짖는 데에는 밝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덮어두고 남만 나무람을 일컫는 말을 책인즉명(責人則明), 너무 성하면 얼마 가지 못해 패한다는 말을 극성즉패(極盛則敗), 예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사이가 멀어짐을 일컫는 말을 예승즉이(禮勝則離),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면 시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겸청즉명(兼聽則明), 예의가 너무 까다로우면 오히려 혼란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예번즉란(禮煩則亂), 너무 세거나 빳빳하면 꺾어지기가 쉬움을 일컫는 말을 태강즉절(太剛則折), 세상에 도덕이 행해지면 즉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나아가서 활동함을 일컫는 말을 유도즉현(有道則見), 논밭 따위의 등급을 바꿈을 일컫는 말을 나역등칙(那易等則), 만물이 한 번 성하면 한 번 쇠함을 일컫는 말을 물성칙쇠(物盛則衰), 죽어서 남편과 아내가 같은 무덤에 묻힘을 일컫는 말을 사즉동혈(死則同穴), 달이 차면 반드시 이지러진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지 성하면 반드시 쇠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월만즉휴(月滿則虧), 꽉 차서 극에 달하게 되면 반드시 기울어 짐을 일컫는 말을 영즉필휴(零則必虧), 물건이 오래 묵으면 조화를 부린다는 말을 물구즉신(物久則神), 물이 깊고 넓으면 고기들이 모여 논다는 뜻으로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사람들이 따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수광즉어유(水廣則魚遊), 충성함에는 곧 목숨을 다하니 임금을 섬기는 데 몸을 사양해서는 안됨을 일컫는 말을 충칙진명(忠則盡命), 예의를 잃으면 정신이 흐리고 사리에 어두운 상태가 됨을 이르는 말을 예실즉혼(禮失則昏), 물의 근원이 맑으면 하류의 물도 맑다는 뜻으로 임금이 바르면 백성도 또한 바르다는 말을 원청즉유청(源淸則流淸), 무엇을 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구즉득지(求則得之), 자기가 남보다 먼저 실천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 공중이 지켜야 할 법칙이나 준례를 만듦을 이르는 말을 이신작칙(以身作則), 새가 쫓기다가 도망할 곳을 잃으면 도리어 상대방을 부리로 쫀다는 뜻으로 약한 자도 궁지에 빠지면 강적에게 대든다는 말을 조궁즉탁(鳥窮則啄), 짐승이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을 문다는 뜻으로 사람도 썩 곤궁해지면 나쁜 짓을 하게 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수궁즉설(獸窮則齧) 등에 쓰인다.
▶️ 神(귀신 신)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보일 시(示=礻; 보이다, 신)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申(신)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申(신)과 만물을 주재하는 신(示)의 뜻을 합(合)하여 정신을 뜻한다. 申(신)은 번갯불의 모양이고, 示(시)변은 신이나 제사에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神(신)은 천체(天體)의 여러 가지 변화를 부리는 신, 아주 옛날 사람은 천체의 변화를 큰 신비한 힘을 가진 신의 행위라 생각하고 그것을 번갯불로 대표시켜 神(신)자로 삼았다. ❷회의문자로 神자는 '귀신'이나 '신령', '정신'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神자는 示(보일 시)자와 申(펼 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申자는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옛사람들은 번개는 신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申자는 '하늘의 신'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申자가 '펴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여기에 示자를 더한 神자가 '신'이나 '신령'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神(신)은 (1)인간의 종교심(宗敎心)의 대상이 되는, 초인간적 위력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는 존재. 명명(冥冥)한 중에 존재하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능력을 가지고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신령(神靈). 곧 종교 상 귀의(歸依)하고 또 두려움을 받는 대상 (2)하느님 (3)귀신(鬼神) (4)신명(神明) (5)삼신(三神) (6)영묘 불가사의(靈妙不可思議)하여 인지(人智)로써는 헤아릴 수 없는 것 (7)거룩하여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것. 신성(神聖) 등의 뜻으로 ①귀신(鬼神) ②신령(神靈) ③정신(精神), 혼(魂) ④마음 ⑤덕이 높은 사람 ⑥해박한 사람 ⑦초상(肖像) ⑧표정(表情) ⑨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 ⑩신품(神品) ⑪신운(神韻: 고상하고 신비스러운 운치) ⑫영묘(靈妙)하다, 신기하다 ⑬화하다 ⑭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⑮소중히 여기다 ⑯영험이 있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신령 령/영(靈), 귀신 귀(鬼), 넋 혼(魂), 넋 백(魄)이다. 용례로는 선도를 닦아서 도에 통한 사람을 신선(神仙), 신과 사람 또는 신과 같은 만능의 사람을 신인(神人), 죽은 사람 위(位)를 베푸는 나무 패를 신주(神主), 신의 종복이란 뜻으로 기독교 신도가 스스로 낮추는 말을 신복(神僕), 신령의 자리로서 설치된 것이나 장소를 신위(神位), 영성의 생명 또는 신의 명령을 신명(神命), 신묘하고 기이함을 신기(神奇), 신령을 모신 집을 신당(神堂), 신기하고 영묘함을 신묘(神妙), 신의 공덕을 신덕(神德), 귀신이 몸에 접함을 신접(神接), 마음이나 생각을 정신(精神), 사람의 죽은 넋으로 어떤 일을 유난히 잘하는 사람을 귀신(鬼神), 본 정신을 잃음을 실신(失神), 땅을 맡은 신령을 지신(地神), 신을 받들어 공경함을 경신(敬神), 비밀에 속하는 일을 누설함을 일컫는 말을 신기누설(神機漏泄), 신이 행하는 뛰어난 계략을 일컫는 말을 신기묘산(神機妙算), 큰 일을 당해도 냉정하여 안색이 평소와 다름없이 변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신색자약(神色自若), 예술작품 따위에서 신비한 기운이 어렴풋이 피어 오름을 일컫는 말을 신운표묘(神韻縹渺), 신과 사람이 함께 노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분노할 만큼 증오스럽거나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을 신인공노(神人共怒), 비밀에 속하는 일을 누설함을 이르는 말을 신기누설(神機漏泄), 큰 일을 당해도 냉정하여 안색이 평소와 다름없이 변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신색자약(神色自若), 헤아릴 수 없는 변화의 재주를 가진 힘을 일컫는 말을 신통지력(神通之力), 귀신처럼 자유자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는 뜻으로 날쌔게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모양을 이르는 말을 신출귀몰(神出鬼沒) 등에 쓰인다.
▶️ 欽(공경할 흠, 신음할 음)은 형성문자로 '흠'의 본음(本音)은 '금'이다.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광물, 금속, 날붙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金(금→흠)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欽(흠, 음)은 (1) '공경할 흠'의 경우는 ①공경하다(恭敬--) ②존경하다(尊敬--) ③흠모하다 ④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⑤구부리다 ⑥산(山)이 높다 ⑦경칭(敬稱) ⑧근심스러워 하는 모양 등의 뜻이 있고, (2) '신음할 음'의 경우는 ⓐ신음하다(呻吟--)(≒吟)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恭(공손할 공), 敬(공경 경), 祗(공경할 지), 虔(공경할 건) 등이고, 통자로는 吟(읊을 음, 입다물 금)이다. 용례로는 기쁜 마음으로 사모함을 흠모(欽慕), 공경하고 부러워함을 흠선(欽羨), 아름다움을 감탄함을 흠탄(欽歎), 공경하여 우러러보고 사모함을 흠앙(欽仰), 기뻐하며 존경함을 흠경(欽敬), 정성들여 구함을 흠구(欽求), 기쁘고 상쾌함을 흠쾌(欽快), 존경하여 높임을 흠상(欽尙), 황제가 손수 제도나 법률 따위를 제정하던 일 또는 그런 제정을 흠정(欽定),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좇음을 흠준(欽遵),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흠명(欽命), 공경하여 우러러 사모함을 앙흠(仰欽), 죄수를 신중히 심의하라는 뜻의 은전을 이르는 말을 흠휼지전(欽恤之典), 얼굴색을 바꾸며 흠앙하여 복종함을 이르는 말을 동용흠복(動容欽服)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