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는 이곳을 더듬었다
오래 되었다
그 동안
모호하고 따뜻한 것을 모았고
분명하고 딱딱한 것은 내다버렸다
감정은 이성과 같이 아주 합리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너무 일찍 죽은 아버지가 실수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점점 어두워졌지만
사실 그것은 색으로 구분할 수 없는 세계였다
식물을 이해하고 공기를 이해하고
순간을 이해하고 알약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나는 매일 싸웠지만
싸움의 대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내 종말은 기쁨 때문에
지저분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상영관에서 두 편의 영화뿐 아니라 무례하게 담배를 피면서 영화를 보는 사내도 보고, 대기실에서 양복을 입은 채 짜장면을 시켜먹고 있는 무직자도 보고, 기형도 시인의 영화관 죽음도 생각하다 보면 나는 좀 늦은 출근을 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듯한 생활을 동시 상영관에서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생활은 무력감과 반항심이 동시에 등을 밀어주어서 가능했던 생활이었지만 세상을 읽는 내 나름의 방식이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세상을 모호하게 이해하고 세상을 좀더 작은 미립자로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거대하면서 또한 분명했다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것은 무조건 손해보는 장사이긴 하지만 옛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랄 때도 있는 것이다
여기보다 어딘가에
여기는 있을 것이다
여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생각없이
나쁜 꿈을 꾼 다음에 나는 잘못이 되었다 모르는 목소리가 통곡하는 것도 들은 듯하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음식을 잔뜩 먹은 듯도 했다 아무튼 나는 잘못이 되어 여기로 왔다 나는 나와 비슷한 잘못을 찾아 여행을 했고 어떤 저수지를 맴돌기도 했다 나는 지쳐서 잠을 자기도 했지만 나와 잠시 분리된 잘못은 내가 자는 동안에도 기도를 하거나 손톱을 깎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외치는 것들을 찾아 잘못은 살포시 스며들었다 여기는 잘못의 땅이 아니었지만 잘못은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사람들에게 연애인마냥 손을 흔들어주는 잘못을 내가 낚아채서는 코로 눈으로 입으로 구겨넣었다 그런 몸으로 여기를 몇 바퀴 돌았지만 아무도 내가 잘못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