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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말씀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해 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완전한 사람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완벽한 사람일까 생각케 됩니다.
완벽한 사람이란 우리가 흔히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인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짐작하시듯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한 사람은 그런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허술한 사람이고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왼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오른뺨을 대주고 오리가 아니라 십리까지 가주는 바보가 되라고 하셨는데, 완전한 사람은 이처럼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전은 ‘하늘의 아버지처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판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너무도 똑같이 닮으면 판박이라고 하지요.
이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오늘 주님 말씀에 비춰 얘기하면 사랑의 모상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을 닮는다면 사랑을 닮아야 한다는 얘기이고, 사랑을 닮아야 하느님을 진정으로 닮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주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그 유명한 원수 사랑이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완전한 사랑을 이룬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느님 사랑에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어떻게 그 사랑에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론 가능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순서로 치면 의지가 처음이고, 노력이 다음이며, 은총이 그 다음입니다.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 원수까지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우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할 마음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거나 원수사랑은 가능치도 않다고 미리 포기하면 원수사랑은 첫걸음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의지적인 노력입니다.
물론 하느님 은총에 대한 믿음과 의탁과 함께.
그 이전에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청하는 겸손과 함께.
그 다음은 실망치 않고 기도와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며, 어쩌면 생애적인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원수사랑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안다면 쉽게 실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믿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러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
(노자 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 사랑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 사랑이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 자녀도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낳기 전에 천주교를 믿는 것을 반대하는 시누이를 그렇게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낳아보니 제가 고모의 얼굴을 꼭 빼닮았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자식은 엄마가 미워하는 사람을 꼭 빼닮는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태어나게 해 주신다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EBS 다큐 프라임 ‘엄마가 달라졌어요’에 한 엄마가 딸은 그렇게 사랑하는데 아들만 지나치게 미워하는 사례가 나왔습니다.
아들만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잘 안되어 고통스러워합니다.
아들을 보면 그냥 밉습니다.
편애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는 이유는 그런 사람과 같은 사람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자식이라고 미워하지 않으면 나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혹시 남자 형제 중에 미운 형제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심리 상담을 통해 어머니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다음에 태어난 남동생만을 사랑한 엄마도 미웠고 남동생도 미웠습니다.
엄마의 모습을 닮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닮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남동생처럼 여겨지고 딸은 불쌍한 자기 모습처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엄마에게 부모를 용서하는 심리치료를 했습니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어머니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런 이유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내 삶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악영향 중 하나가 ‘편애’입니다.
편애하고 있다면 반드시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 편애하는 이유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사랑엔 편애가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편애하면 그런 성향이 있는 이를 또 미워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편애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 의해 사랑받지 못한 나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옵니다.
여기서 나 자신은 뱀입니다.
자아의 보복을 대신해 주고 편애하며 자아를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에 맏이를 지독히 싫어하는 한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제보한 것입니다.
왜 첫째만 그렇게 싫어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앞뒤 안 가리는 자신을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를 닮았다고 싫어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첫째를 싫어하는 것 때문에 아내와의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올바른 남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잔소리를 쏟아붓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너무 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맏이에게 쏟아냅니다.
둘째는 아빠 다음이 자신이라 생각하고 형을 무시합니다.
형의 머리를 때립니다.
아버지는 또 첫째만 혼을 냅니다.
이렇게 서열이 엉망이 됩니다.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보면 어떠냐는 질문에 맏이가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자기 때문에 부모가 싸운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그동안 자신이 서운하게 했던 것에 미안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가 착실한 형만 사랑하고 자신은 무시했던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벌어 썼지만, 아버지는 형에게만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둘째에게만 용돈을 주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맏이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며 안아줍니다.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는 잔소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가족은 그렇게 하나가 됩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미워지고 또 편애를 하는 것 같다면 빨리 살펴보십시오.
분명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기도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바로 그 이유가 앞으로 나의 발목을 계속 잡으리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요즘 참 난감한 문제 앞에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수용하기 힘든 상황 앞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일단 그를 위해 매일 기도하자.'
'매일 아침 그의 영혼과 그의 구원을 위한 지향을 두고 미사를 봉헌하자.'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자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그의 안쓰러운 뒷모습이 측은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즉각적으로 상황이 호전되거나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층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님 시선의 폭은 좁디 좁은 우리의 안목과는 정말이지 천지차이입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인내롭고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이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마태오 복음 5장 45~46절)
사랑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참 요구가 많으신 분입니다.
때로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솔직히 원수가 내게 끼친 해악을 큰 마음 먹고 참는 일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가 내게 안긴 상처를 털어버리는 일 역시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정신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인간 세상 안에 악(惡)이 종식될 수는 없지만, 악은 누군가의 진정한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됩니다.
원수 사랑이 가능해진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원수를 사랑하여라">
만일에 하느님이 ‘정의’만 있고 ‘자비’는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이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는 하느님은 무서운 폭군 같은 심판자일 뿐입니다.
반대로 만일에 하느님이 ‘자비’만 있고 ‘정의’는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악’을 물리치지 못하거나, 물리치지 않는 ‘무능한 신’이고, 우리는 그런 분을 하느님으로 믿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정의’만 있고 ‘자비’는(사랑은) 없는 세상이라면?
무자비하게 옳고 그름만을 따지고 처벌하는 세상이라면?
자비와 사랑이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기계들(로봇들)만 있는 세상입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자비’만 있고 ‘정의’는 없는 세상으로 바뀐다면?
그러면 그 순간 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무법천지로 바뀌면 ‘자비’도 ‘사랑’도 모두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자비는 정의를 통해서 제대로 실현되고, 정의는 자비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계명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여라.”가 이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루카 6,27ㄷ-28)
이 말씀은 무조건 잘해 주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비를 통해서 정의를 완성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의 목적은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선의 실현’은 ‘선한 방법’으로만(사랑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악한 방법으로는, 또는 앙갚음으로는 하느님의 선을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움에 선행으로, 저주에 축복으로, 학대(박해)에 기도로 대응하는 것,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이 계명은 ‘감정’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 ‘의지’에 관한 계명입니다.
‘선한 의지’로 ‘선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자비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1) ‘원수’가 나하고 사이가 나쁜 ‘평범한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계명에 포함됩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가,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랑 실천과 화해는 상대방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원수’가 나의 신앙을 박해하는 ‘박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이 말씀에서 ‘용서’는 ‘회개’와 ‘구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저들이 지은 죄를 그냥 덮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저들이 회개해서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직접 보여 주신 일입니다.
3) ‘원수’가 정말로 나쁜 ‘악인’일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밭을 빼앗으려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서 그를 죽였고, 결국 그 포도밭을 차지했습니다.
왕의 권력으로 살인과 강도짓을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봇의 가족에게 가서 무턱대고 왕과 왕비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고, 정의의 실현에 반대가 되는 일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아합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아합 왕실 가문의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즉결 처분을 하지 않으시고 멸망을 ‘예고’하신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고, 사랑을 주신 것인데, 그런데 아합은 자기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멸망을 조금 늦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사죄도, 손해배상도 하지 않았고, 포도밭을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아합 왕실의 가문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멸망했고, 이제벨은 처형당해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장-10장).
그 일은 억울하게 죽은 나봇을 대신해서 하느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신 일입니다.
너무 큰 ‘권력의 악’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면, 즉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무의미한 상황이라면, 하느님의 심판에 그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래야 너희가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아버지의 자녀라면, 자녀답게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가 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자녀답게 사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으면(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에 참여하고 싶으면) 너희도 이웃에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의 궁극 목표 - 완전한 사람, 성인(聖人)이 되는 것>
사소한 일 같지만 저에겐 새삼스런 깨달음입니다.
어제 6월13일 어머니 17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어머니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그동안 가뭄으로 묘지위에 잔디가 죽어가고 있었고 유난히 푸른 잡초가 있어 뽑아보니 10cm 이상의 긴 뿌리였습니다.
영혼도 그냥 방치하면 깊이 뿌리내린 잡초같은 죄들로 가득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어 세탁에도 잘 빠지지 않는 얼룩이 특별한 세탁으로 말끔히 빠진 깨끗한 옷을 보면서도 회개가 없는 영혼은 완전히 죄에 쩔은 얼룩으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얼룩진 옷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입었던 것은 내심 마음이 깨끗하다 자부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겉을 보지만, 하느님은 겉이 아닌 속 마음을 보십니다.
언젠가 수도형제의 평범한 두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 완벽한 처사에 우려를 표명하자,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다려 봅시다.”라는 답변에 내심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심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아니 자신이 심판을 자초한 것이지요.
열 사람이 완벽하게 지켜도 한 사람의 도둑을 막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이렇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73장에 나오는 말마디가 자주 생각나곤 합니다.
하늘의 그물이 크고 성긴 듯 하지만 결코 빠트리는 법이 없다는 뜻으로,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죄를 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란 말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말마디도 같은 믿음의 표현들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 그가 하느님 그물망에 걸려 있음을, 그 누구도 하느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음을 봅니다.
바로 어제 제1독서에서 우리는 무죄한 나봇의 감쪽같은 죽음을 봤습니다.
이제벨과 아합의 완전 공모(共謀)로 인한 쥐도 새도 모르는 완전 범죄였지만 하늘의 그물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오늘 계속되는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등장하여 아합을 만나 미구에 있을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전합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개들이 나봇을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엘리야의 호된 질책에 급기야 아합은 뉘우쳤고, 잠시 죄에 대한 응보가 유보됩니다만 후대에 있을 것이 예고됩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참 섬찟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심판은 엄중합니다.
하느님은 결코 무골호인(無骨好人)같은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이런 정의의 관점을 놓쳐서는 절대 안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하느님의 정의를 가르친다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칩니다.
이래서 통절한 회개와 더불어 자비하신 하느님께 향하게 됩니다.
정의를 유린하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정말 착하게 살아야 함을, 끊임없이 하느님 자비를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착하게 잘 산 부모들의 은덕은 후손에도 영향을 미치니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5,48)
오늘 복음은 여섯 대당 명제 중 마지막 여섯 번째 “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참고로 앞의 다섯 대당명제는 “1.성내지 말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입니다.
바로 “6.원수사랑”과 더불어 여섯 대당명제 전체의 결론이 되는 말씀이 윗 마태오복음 5장 48절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사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우리의 진짜 의로움이요 우리 모두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비슷해지다가 죽음 앞에서는 똑같아집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공부 적게 한 사람도, 재산 많은 사람도 재산 없는 사람도, 예쁜 사람도 예쁘지 않은 사람도 다 똑같아집니다.
“저 박사예요.”, “저 대학 영문과 나왔어요.” 평범해 보이는 어느 자매의 말도 생각납니다.
삶에 묻혀 보이지 않으니 환기시키려는 의도같았습니다.
제가 볼 때는 모두가 같았습니다.
페인트 칠한 것이 벗겨졌을 때 보이는 것과 흡사한 이치입니다.
차이는 얼마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주님을 닮은 참된 고결한 삶을 살았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하느님을 닮아 훌륭한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서 인품의 향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의 체험적 고백처럼 들립니다.
바로 예수님 한 분 만이 이렇게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삶, 자비로운 삶,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 일은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인 예수님을 닮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여정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점차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빛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저절로가 아닌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한 여정이요 이런 노력과 함께 가는 은총입니다.
수도생활에서 참으로 강조되는 것이 노력입니다.
여기서 완전함이란 온전함이요,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영어 발음은 거의 구분이 안됩니다.
이론적 완전함이 아니라 실천적 완전함이자 온전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완전함이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는, 자기 형제들에게만이 아닌 모두에게 인사하는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사랑을 넘어 모두를 사랑하라는 보편적 사랑, 아가페 사랑을 할 때의 완전함입니다.
참으로 호오(好惡), 우열(優劣)과 무관한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 존중과 배려입니다.
사실 사람은 그 누구든 깊이 들여다 보면 그만의 사정을 지닌 자기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참으로 너나할 것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측은하고 가엾고 불쌍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주님은 무조건 아가페 사랑을 명하십니다.
참으로 어쩔수 없는 운명처럼 타고난 것도 많습니다.
타고난 얼굴이 변변치 못하다 생각되어 그 위험한 성형 수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참 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타고난 것들이 참 무궁무진 끝이 없어 잘못 타고났다 절망하면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용감하게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널려 있습니다.
몇날이 아닌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사랑을, 기쁨을, 희망을, 생명을, 빛을, 감사를,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요 한마디로 주님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인이, 훌륭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언제든 좋습니다.
이래서 분투의 노력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궁극의 목적이자 보람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면담성사 시 드리는 당부는 단 하나 “성인(聖人)이 되십시오.”라는 말마디입니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든 말든 보아주든 말든 제 삶의 꽃자리에서 이런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기쁨도 참행복도 이런 아가페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무지로 인한 죄악의 유혹은 어림없을 것이고 죄악도 도저히 우리 영혼에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학교에서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일 뿐이요, 죽는 그날까지 배워야하는 사랑의 평생학인일 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북돋아 주시어 이런 아가페 사랑 실천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나눔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서점에 갔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서 읽으면 저는 책 속에 있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듯이 제가 읽은 책은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서점에서 2개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오강남 교수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와 팀 마샬의 지리의 힘입니다.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책의 내용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또 다른 보물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시력을 잃어버린 학생이 미국에서 혜안을 찾았던 이야기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 승무원은 휠체어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항으로 학생을 마중 나온 하숙집 주인은 승무원에게 큰 소리로 야단쳤습니다.
"학생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다리는 멀쩡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학생의 손을 잡고 안내하면 될 일이지 왜 휠체어를 태우느냐?"
학생은 하숙집 주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다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것은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은 부모님처럼 학생을 도와주었습니다.
학생의 실력을 보고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학생을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포기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미국에 와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되었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생은 투자 분석가가 되었고 'JPM(제이피모건)’이라는 유명한 회사에 입사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경제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들은 시각장애인이 투자회사의 분석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가능성을 보았고 조금만 도와주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청년은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출근했다고 합니다.
모든 서류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입력하였고 음성파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서류를 들은 후에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청년의 분석은 정확하였고, 많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고서를 점자책으로 만들어주었던 어머니의 헌신과 나를 정상인과 똑같이 대해주었던 하숙집 주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물은 겨자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죄를 지었을지라도,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면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제 또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형, 누나들과 놀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친구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새로 이사 왔는데, 그 집에는 제 또래의 아이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제 또래의 친구였고, 이제 낮에도 함께 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났습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날, 저는 제가 제일 아끼는 딱지를 주었습니다.
친구에게 좋은 것을 먼저 줘야 친해질 수 있다는 형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호의를 먼저 베풀었음에도 저와 함께 놀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준 딱지만 보면서 이리저리 만져볼 뿐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딱지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놀자고 준 것인데, 놀지 않으니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딱지를 뺏긴 친구는 “내 딱지, 내놔!!”라고 말하면서 울었고, 저는 “내 딱지야!!”라면서 울고….
아주 난장판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합니다.
하지만 선물만을 바라보고 선물을 준 사람을 외면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미워질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주님의 사랑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구약의 말씀을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이 구절은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이웃 사랑을 이야기할 뿐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구약성경 전체를 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대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사랑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보지 않으면서, 적대시하고 미워하는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먼저 집중할 수 있을 때, 그분이 주시는 모든 은총에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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