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인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다 전남 순천 남원골판소리를 하는 대폿집 ‘남원골’은 물 맑기로 유명한 순천 시내, 옥천과 동천 사이 방죽 길에 있었다. 여름이면 풀벌레 축제가 열린다는 곳이다. 관광음식점이나 요정 중에서 음식을 팔며 창이나 전통 공연을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이따금 들었지만, 주민들이 언제든 편하게 드나들며 술 한잔과 판소리 창에 취할 수 있는 대폿집이 순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설레던지…. 농업 분야의 유능한 공무원이면서 걸출한 소리꾼인 임용택 선생이 알려준, 몇 안되는 창(唱) 하는 대폿집이었다. 작은 간판을 따라 누추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간다. 1970년대 말부터 순천 동외동에서 ‘소입(笑入)’이란 매력적인 상호로 장사를 하다 얼마 전 이곳(장천동)으로 옮겨 오면서, 간판이 주모의 고향을 따 ‘남원골’로 바뀌었다. 전성기에는 ‘소입네’, ‘주모’로 불렸다는 쉰아홉의 이희숙 여사가 우리를 반겨 맞는다. 방 한쪽에는 아쟁과 가야금, 북과 장구가 놓여 있다. 북채는 탱자나무를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흥에 못 이겨 벽지 위에 행서로 호방하게 휘갈긴 듯한 큼직한 붓글씨가 눈길을 끈다. ‘유어예(遊於藝)’, 그러니까 ‘예술로써 즐긴다’는 뜻인데 심상치가 않다. 농아 서예가인 우보 김병규가 흥에 겨운 나머지 마치 폭발하듯 벽에다 먹물을 튀기고 온몸을 떨면서 쓴 글씨다. 그날의 열기가 후끈 느껴진다. 함께 간 임 선생이 몇몇 가까운 지우들을 불러냈다. 모두 이곳 단골들이다. 남도인들을 빨래 짜듯 짜면 국악 소리가 뚝뚝 떨어진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다. 과거 순천 일대서 술깨나 먹었다는 사람치고 소입에 안 다닌 사람이 없었단다. 그런데 10여 년 전, 소입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단골들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집주인이 가게를 비워 달라 해서 갑자기 이사갔다’는 뒷소문만 무성했다. 애가 탄 술꾼들은 소리하는 술집을 찾아 차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다른 도시까지 원정을 다니기도 했다(그렇게 찾아갔건만 소리하는 곳은 요정이나 대형 한식집이라 하룻밤 술값이 50만원은 족히 나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방죽 옆으로 옮겨온 남원골 소식을 듣고 술꾼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달려왔을 때, 소입네가 한 말은 “그게 거시기해서…”였다고 한다. 술상이 밥상이 되고, 밥상이 술상이 되고…
“노래방 때문에 안방은 조졌어.” 소입네가 싱건지(물김치) 무청을 손으로 쩍쩍 찢으면서 푸념한다. 소입네가 말하는 안방이란 아마도 남원골처럼 방에 앉아 술 마시고 노래도 부르는 곳을 말하나 보다. 살얼음이 보송보송 붙어 있는 긴 무청은 보기만 해도 속이 확 풀린다. 소입네는 5~6년 전까지만 해도 화덕 놓고 홍어에 막걸리 장사를 했단다. 여기선 술상이 밥상이 되고 밥상이 술상이 된다. 소입네 먹는 밥에 안주 얹어 먹으면 밥상이 되고, 그 상에 술을 곁들여 먹으면 술상이 된다. 또 이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안주가 다슬기탕이다. 봄, 여름이면 순천의 ‘상사’란 아주 깨끗한 호수에 들어가 다슬기를 잡아다 된장도 없이 소금과 무만 넣고 담백하게 끓인다는데, 남원골 다슬기탕은 술꾼들 사이에선 최고의 인기 안주라고 한다. 소쿠리에 풋전(부침개)이 담겨 나왔다. 고추며 소불(부추) 등을 넣어 만든다는데, 정확히 그 재료를 못 알아듣겠다. 여하튼 보통 때 먹는 부침개와는 무언가 다른데, 자꾸만 손이 가고 배가 불러도 계속 먹게 되는 희한한 안주다. 싱건지며 풋전은 따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술을 시키면 곁들여 나오는 ‘서비스’ 안주라니, 그저 흐뭇할 따름이다. “소캐로(솜으로) 가슴을 찍고 죽을 일이다.” 슬슬 사라지려는 우리 소리의 말로가 기가 막히다는 뜻인가 보다. 소입네는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 춘향 여성 농악대’에서 국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명창 오갑순, 강정숙, 안숙선씨 등이 동문이다. ‘슬픔이 파도를 많이 탈’ 정도로 힘들게 소리 공부 하던 시절이었다. “예술은 안아 주어야 한다. 겉멋이 아니라 속멋이 있어야 한다. 속궁합 안 맞으면 어떻게 살 거요” 하면서 소입네가 내 잔에 술을 가득 붓는다. 술이 몇 순 돌아간 뒤 모두가 청하자 소입네가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른다. <내 사랑 내 사랑 내 알뜰 내 간간이지야 /오호, 둥둥 네가 내 사랑이지야…> 이 도령이 춘향을 만나 정을 나누는 유명한 ‘사랑가’다. 저 여리디 여린 체구에서 어찌 저런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걸까? 고수는 술 손님 중 천성남 선생이 맡았다. 절묘한 북장단이 예사롭지 않다. 북에는 한자로 글귀가 적혀 있다. 名鼓何有別處兮(명고가 어찌 별다른 곳에 있단 말인가)/苦生眞聲就是也(고생에서 우러난 이 소리야말로 진정한 명고의 소리리라) 마침 한학자인 남경 김현선 선생이 유건을 쓴 채 들어오셔서 그 뜻을 풀이해 주었다. 글의 끝에는 1987년 2월 도올 김용옥이라 쓰여 있다. 아마도 선생이 그의 제자 몇몇과 이곳에 왔다가 오래된 통북을 보고 몇 자 기념 휘호를 한 것 같다. 주모의 ‘사랑가’는 정중한 우조에 느릿한 진양조장단에 맞추어 우아하고도 힘있게 들렸다. 아마도 동편의 고장에서 창을 익히고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주모 소입네는 1960년대엔 일본으로 농악공연을 다니기도 했단다. 농악대에선 ‘땡땡’ 하고 높은 음을 내며 소리가 차진 수꽹과리를 치는 ‘상쇠’를 했으며, 창은 ‘춘향가’를 많이 했다고 한다. 사람이 좋아서 정이 좋아서 아직도 이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소입네의 살아온 것을 글로 엮으면 몇 권짜리 소설이 됨 직했다. 나도 이제 ‘사한량’이다 답가로 한 손님이 가락을 잇는다. 황철환 선생이다. 할 일 하며 가끔 틈을 내 논다는 선생은 판소리를 하기 전의 예고편 격으로 단가 중에 ‘천생아재’와 판소리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을 불렀다. 지리산이 움직이는 것 같다. 창이 끝나자 소입네가 “간만에 존 소리 들었소”라며 경탄한다. 이곳에서는 김씨, 이씨, 혹은 미스터 김, 미스터 리 대신 서로를 ‘김한량’, ‘이한량’으로 부른다. 여기서는 한량이 ‘멋을 알고 풍류를 안다’는 존칭쯤 된다. 마지막으로 임한량이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어서 노래한 단가 ‘사철가’를 부른다. “잘한다!” “얼씨구!” 대폿집 소리꾼은 더욱 신이 나서 열창하고, 좌중은 추임새로 화답한다. 한바탕 소리 잔치가 끝났다. 새벽이 왔다. 밤새 먹은 술값을 치르니 8만원이 나왔다. 가게 문을 나서자 바람이 상쾌하다. 나도 이제 ‘사한량’이다. (남원골은 ‘아리랑 주막’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월간조선/화가 사석원의 대폿집 기행 |
다음검색
출처: 랑피더양(狼皮的羊)의,,좁은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랑피더양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