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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신명기>와 관련하여
성서기자가 생각한 '이상적인 왕'의 개념을 소개해 보려고 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신명기>는 위와 같이 모세의 말이라며
왕정 제도에 관한 몇 가지를 전하는데
이에 대한 '종교적인 관점'의 해석을 먼저 소개하면
첫째 왕이 될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며 타국인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했는데
왕은 신의 대리자였기에 신앙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지
둘째 왕이 금해야 할 일로 병마와 아내, 은금을 많이 두지 말 것을 명하는데
병마를 기르려면 말을 수입하기 위해 이집트와 접촉을 하게 되는데 그에 대한 경계와 함께
아내를 많이 두면 국가의 일보다 개인적인 향락에 빠질 수 있는 부분 또한 경계되고 있으며
은금을 쌓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경계도 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은 '신앙인'으로서 율법서의 등사본을 만들어서 야훼에 대한 경외를 배우고 율법을 지켜 행해야 했어...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모세가 직접 신명기를 기록했다는 믿음은
성서비평학에 의해 반박되는데
비평적 관점에서 신명기는 요시야의 재위기에 쓰여진 것으로 강력하게 합의되어 있어
그러므로 신명기를 역사학과 관련한 참고 자료로 쓴다면
왕정 이전에 이미 '이상적인 왕'의 개념을 히브리인들이 정립하고 있었다기 보다는
요시야 시대 정권의 주류 세력이 '왕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나'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해
물론 그 시대... 그들의 왕이 파라오로부터 자주적이기를 희망하는 관점은
역사적인 시각에서도 찾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 왕이 병마(군사력)와 재정(은금)을 많이 두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절대왕권을 가진 군주의 등장을 경계하는 종교 세력의 이해관계가 철저히 반영된 부분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러한 '신명기적 시각'은 세속적인 시각에서 강력한 군사지도자였으며 왕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던 아합과 같은 지도자를 최악의 지도자로 단죄하게 하는데...
아합과 같은 현실주의적 지도자의 입장에서 볼때는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군사력의 강화와 재정의 확보, 중앙집권화와 같은 국력의 신장을 위한 정책은 반대하는
종교 세력의 입장이 참으로 답답하지 않았으려나 싶어
물론 요시야의 시대의 개혁과 관련하여 '사회적 정의(고아나 과부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라는 측면이 이전 시대에 비해 분명히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부분은 인정해야 하는데...
요시야 시대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요시야의 아들(여호야김)이 화려한 궁궐을 지은 것에 대한 요시야의 지지자였던 예레미야(다만 예레미야의 일부 견해는 신명기적 사관과 일치하지 않음)의 분노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일 것이야...
뭐 "현실주의' 혹은 '부국강병'과 '사회적 정의' 혹은 '형평'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는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기도 하니까...
마지막으로 왕이 특별히 종교적 율법서를 읽도록 한 것은
확실히 그 이전 시대의 관점이 아닌 요시야 시대 주류 세력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원전 8세기까지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야훼의 말씀을 적어놓는 전통은 없었어(위의 예레미야가 신명기 사관들과 이견을 보이는 부분과 관련하여 예레미야는 서기관들이 '지혜'보다는 '정보'를 주는 것을 우려함)
그것은 명백히 '특정한 종교 세력과 서기관들의 이해'가 반영된 부분이며
조선의 사대부들이 왕을 유교 경전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심어놓은 것과 비슷한 부분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 개인적으로 왕에게 현실적인 관점 이전에 '수양'을 중시하도록 하는 부분이나 왕권을 제약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왕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충성심이 보장된 부분 등 요시야 시대 주류 세력은 조선의 사림과도 많이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 글을 마칩니다.
댓펌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현대의 이스라엘도 그렇고 종교적 색체가 강하다고 느껴서 당연히 왕도 종교적 교육따위를 받았을 줄 알았는데 저 시기에 생긴 거라니.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 교육은 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경전을 통해 '책의 종교'가 된 것은 확실히 요시야 때의 영향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종교세력이 왕권을 신명기를 통해 견제한거 같은데 이걸 왕이 역으로 율법서를 수정해서 종교세력을 견제하거나 왕권을 강화를 노린 경우도 있나요?
사실 현재 전해지는 유대교(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 유파 중 '예루살렘 성전 중심론자'들의 신앙이 살아남은 것이라...
당연히 왕권에 우호적인 계열들도 있었지만... 결국 남는 것은 기록이라... <아모스> 같은 경우를 보면 왕권과 유착한 종교집단에 대한 강한 비난이 담겨있지요 ㅎㅎ
유대교는 왕권과 종교에서 종교가 승리로 끝난 종교이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확히는 다윗 왕가가 어용화한 유대교 중 종교 세력 그중에서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이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그래서 고고학적 연구에 따른 현대 시점과 성경 시점의 성군, 암군은 완전 반대임.
야훼를 잘 섬길수록 주변국에 배타적일 수 밖에 없거든. 그럼 교류도 안되고 뭐 망하는 거지.
외교적 고립주의를 하려면 자강이라도 해야 하는데... 또 군사력 증강은 반대하니 현실적인 지도자 입장에서는 참 ㄹㅇ 답 없다고 느껴질만하죠...
단 여호사밧이나 웃시야처럼 성서에서도 선한 왕으로 묘사되는데 고고학적으로도 나름의 성과를 인정받는 왕들도 있기는 합니다 ㅎㅎ
질문있는데) 성경은 우리나라로 치면 환단고기 같은거야? 이스라엘은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여?
역사기록임.
비현실적이다고? 그 시절 기록들이 다 그래
람세스 2세가 새긴 카데시 전투 벽화도 보면 이집트군이 뚜드려맞아서 위험한 상황에서 람세스 2세가 갑자기 신이되서 히타이트군 다 쓸어버림.
고대사의 역사기록들은 다 그럼
다윗 왕조 후 북이스라엘왕국 남유다왕국 왕들을 비교하는데 성경과 현대 사학계의 평가가 다른왕들이 많죠.
지나치게 우상숭배했다고 욕먹던 아합이나 므낫세 등이 재평가되거나 성경에선 고평가되지만 나라를 위기로 몰았다고 사학계가 평가하는 히스기야처럼 말이죠.
요시야처럼 사학계나 성경에서 모두 긍정평가를 받는 왕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