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가족이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리면 얼마 동안은 극도의 슬픔에 젖어서 애도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점점 옅어지고, 애도의 시간도 지나가 버린다. 이때부터는 새로운 자기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태도이다. 김 아가다도 그런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애도의 시간이 좀 길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의 넋도 이제 보내 주리라. 비록 불의 인연으로 한 줌의 재가 되었을지라도 소멸이 아닌 소박한 한 송이 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수필 ‘꽃’의 마무리를 이렇게 한 것이 그가 애도의 시간을 끝내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남편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고, 기억 속에 묻어두고, 회상으로만 불러낸다. 김 아가다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의 삶을 새롭게 꾸렸고, 이처럼 건강한 삶으로 수필세계를 꾸려 간 것이다.
수필 ‘희나리’는 자신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말한다. ‘희나리’를 자기 수필집의 제목으로 삼았으니까 그 만큼 의미 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자.
“난로 속에서 말없이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본다. 태울 수도 없고 탈 수도 없어 온몸으로 연기만 끌어안고 있던 희나리가 아니던가. 태우고 또 태워 재가 된 장작은 비로소 안식을 되찾으리라. 혹 아는가. 타는 동안이라도 저 스스로 몸을 열어 누군가에게 작은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지. 그 어떤 못난 것도 쓰임새가 있어서 세상에 던져졌을 터이니.
-‘희나리의 부분-
그는 누군가를 위한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약속한다. 누군가는 작가의 자녀들이다.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자녀들을 뒷바라지 하는 삶을 자신의 새로운 인생행로로 결정한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으로 불러내 나의 마음을 달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행위라고 하였다. 김아가다가 회상으로 불러오는 인물은 남편이 많다. ’허락된 시간‘은 남편이 떠나갈 때의 아픈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 딸 이야기도 나온다. 남편을 떠나보낸 그 자리에 자녀들을 불러와서 자신은 그들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이고, 내용도 그러하였다.
불쏘시개는 어차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희생을 상징한다. 내가 작가를 수필 공부방에서 만난 것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슬픔에서 벗어나려 수필쓰기를 시작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의 그의 글은 그의 아팠던 인생 이력을 생각하면 대체로 밝았다는 생각이다.
수필집 ‘희나리’에 실린 여러 글도, 특히 뒤로 갈수록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가 많다. 김아가다의 글을 읽으면, 투덜투덜하면서도 삶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왜냐면, ‘명의’, ‘삼대공덕’, ‘텃밭에서’ 등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평범한 삶의 모습이고, 더러는 농담도 나누고, 텃밭처럼 자연의 작은 움직임에서 우리 모습을 찾아보기도 하는 일상의 이야기로 읽어진다.
수필집 ’희나리‘의 2부에 실린 글들은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면서도, 무언가 의미를 읽어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수필 쓰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사유라고 할까. ’살아가는 이유‘는 자식을 그리는 모성이 실린 글이다. 모성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장애인을 통해서,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전통예술의 공연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반추해보지만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관념의 세계이다. ‘버들강아지’의 글은,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들이지만 독자 앞에 펼쳐서 보여 주었다. 깊은 의미를 담으려 하기 보다는 내가 경험하였던 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고 본다. 사실 나는 수필쓰기에서 너무 관념적이고, 사유 중심의 이야기보다는 경험하였던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주장한다. 이런 표현은 소설의 표현 방식과 유사하며, 독자가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는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수필쓰기에도 소설의 기법을 가져오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수필에서도 현상을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하자는 주장을 해왔다.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서, 작가가 선택한 현실의 삶이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한 가운데에 있다. 현실의 삶 한 가운데에 아들과 딸이다. 100세가 되어서 돌아가신 어머님도 작가를 지켜주었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삶도 그가 걸어가는 길에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대니 보이‘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아들 이야기이고, 불법 체류자가 되면서까지 요리사로 성공하는 아들 이야기이다. 한국 사람이 아닌 싱가폴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을 기를 쓰고 막아 보았지만 어쩔 수 없더라는 이야기도 한다. 그의 글에 유난히도 어머니와 아들 사이를 다룬 내용이 많다. 불쏘시개의 역할도 하면서, 한편으로 아들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인간심리가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남편과의 이별도 애도의 단계로 끝을 내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시어머님이 입원한 요양 병원을 드나들면서 인간사의 달고, 쓴 맛을 경험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것들은 꼭히 그만의 수필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는 자신의 아픔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그만의 수필세계가 되었다. 아들의 결혼식에 문화가 다른 양가 부모가 만났던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김아가다 수필의 한 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함으로, 내용이 밝고 재미를 준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 싶었다.
오리와 닭
김 아가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생김새는 비슷한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서로 입만 쳐다보고 표정만 살피는 꼴이 오리와 닭이다.
미국에 사는 아들이 싱가포르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인구 600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섬나라이다. 그곳에는 거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 며느리네 조상들은 중국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중국인이라고 하면 몹시 싫어한다고 하였다. 엄연히 싱가포르 공화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공용어로는 중국어, 영어, 말레이어, 타밀어를 쓰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을 인정하는 신부측의 배려로 결혼식은 우리식으로 치렀다. 성당에서 예식을 마친 다음 연회장에서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씌우고 폐백을 받았다. 대추를 던져주며 덕담하는 문화를 사돈댁에서 이해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귀국하기 전날 중국 레스토랑에 초대했다.
---뒷부분은 생략했습니다.---
-희나리.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16. p94-95-
그의 수필집에서 이 글을 가져온 이유는, 이 글이 김아가다의 가족 모습을 잘 나타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의 지향점을 자녀를 위한 불쏘시개라고 하였지만, 그의 가족들이 미국과 한국으로 흩어져 있다. 한국에서의 그의 삶은 혼자였고, 성당에 다니면서, 종교가 그의 의지처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지난날의 한국적 가족관계에 깊이 묶여있다. 미국에서 삶의 터를 잡은 아들네와 관계를, 그리고 아들 세대와 다름을 폐백이라는 우리의 전통으로 통합하였다. 이 수필은 노년의 작가 모습을 잘 요약하였다고 읽었다.
첫댓글 김아가다님의 삶과 글의 중심에는 남편이 굳건히 존재함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여전히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삶은 모순투성이다가 때로는 경이롭기도 한 모습으로 인간을 담금질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