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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에 유독 폴리페서들이 판을 치고 있을까? 우리 학계에서 국가권력은 너무도 자연스런
유착의 대상이다. 아니 유착이 아니면 차기 교수임용에서도 살아남기 힘든 학계의 풍토다.
'교수님'이란 이제 속물적 권력지향과 물욕으로 뭉쳐진 단어가 되어 버린지 오래이니 대부분의
교수들은 권력을 감시하기 보다는 정계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열망할 뿐이고 아닌 사람들은
권력의 감시속에 도태되어 간다. 한국의 역대 내각들을 보면 교수출신 장관이 3분의 1을 넘고
있으니 지구상 한국만큼 교수들의 정부 요직 임용율이 높은 나라도 없다.
1972년 유신 선포후 서울법대 최종길교수가 교수회의에서 학생들의 유신반대의 데모에 따른
안기부의 구속과 고문에 대해 우리 교수들이 청와대로 가서 한번 대화로 학생들을 구해보자는
발언을 했는데 바로 다음 날 안기부에 구속되었고 엄청난 고문끝에 고층 베란다에서 밑으로
떨어져 '자살 당한'예는 그 도태되는 예에 속한다.
교수임용에서 탈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부지도 힘든 시기였으니. 안기부가 발표하기를
최종길교수는 본시 간첩이었는데 그것이 들통나는 게 두려워 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1961년 5.16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부산대학에 사표를 내셨다. 대대로 항일투쟁의 집안이던 윤인구
총장은 해공 신익희(申翼熙)선생의 특별소개로 부산대로 내려간 아버지를 대단히 아끼셨고 (海公
선생은 아버지에게 그냥 교수직을 권한 게 아니라 딸린 가족들도 있는데 민족운동을 굶어가며 할
수는 없으니 밥벌이나 하며 계속하라고 그러니까 부업으로 소개한 셈이었다)점점 학생들에게 추앙
을 받으며 교내외로 인기 집중받는 교수가 되자 총장은 아버지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과 교수들 중에 아니 부산대 전 교수들 중에 아버지를 가장 아끼셨던 것 같다.
해공선생의 전화한통 소개로 다음날 부산으로 가신 아버지는 바로 그 날 세과목이나 배정받아 한
과목 당 적어도 주 2시간이니 週 6시간이나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항상 바쁘신 아버지는 한번도
차분하게 앉아 그 교재연구 하시는 걸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냥 입만 열면 모든 강의는 항상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듯 술술 나오시는 것 같았다.
국제신보(여당쪽인 부산일보에 비해 상당히 야당성향인)에 매주 올리는 아버지의 정치부문 사설은
지식인들과 학생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니 총장으로선 대학명성으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으리라.
아버지는 학생들에게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진정한 민족해방을 설파하여 학생들 사이에 그 열정은
발화점을 지난 들불처럼 뜨겁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대학강의보다는 (본업인)민족의
통일을 위해 다시 감연히 일어서 행동해야 할 때라며 목소리를 높히니 아버지의 그 고집을 누가
꺾으리오. 아버지의 그 뜻은 평생 일본 경찰들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필시 CIA 도 어느 누구든 꺾을
수 없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우리 동네 입구쪽에 살고 계시는 부산대 교수 한분을 길에서 마주치쳤는데
그분은 아버지께 "교수님, 교수님은 정치인이 아니라 교육자이신데 어째서 정치계에서도 그리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까? 그냥 조용히 학교 강의에만 전념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 하자
"교수님은 전공과목이 무엇이십니까?" 하니 "조선造船학과 입니다" "만일 교수님께서 강의를
하는 중에 바로 옆에서 배가 파손되어 침몰하고 있다면 강의는 나중으로 밀어두고 배부터
구하러 달려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그건.." 말문이 막히는 그 분은 아버지의 적수가
못되었다.
조선학과는 당시 부산의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필시 요즘도 그럴 것이다. 어쨋든 그 학과
출신들은 후에 조선소의 큰 줏대가 되어 세계적 선박 건설에 큰 기둥들이 되었을 것이니 그렇
다면 그 교수님은 국가의 번영을 위해 아버지보다 적게 기여했다고 할 순 없겠다.
그 후의 차기 문홍주(文鴻株)총장은 극구 사표를 반려하였으나 어찌됐든 아버지의 굳은 의지는
꺾을 수가 없자 사표는 보관만하고 있을 테니 언제든 마음이 돌아서면 돌아오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 길로 아버지는 서울로 향하셨고 얼마 안가 그것은 곧 구속 재판 감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후 총장들도 바뀌고 만일 아버지가 훗날 부산대로 돌아가셨다해도 그 총장들은 아버지를
문전박대했을 것이다. 군사정권이후 특히 국립대 총장들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이들이라야 하는
경향이 강했으니. 2006년대까지도 국립서울대 총장에 이완용의 증손자이자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가 임명된 것도 예사가 아니다.
아버지의 사표는 진즉에 수료되어 있었고 수년 후 감옥에서 나오신 후에도 아버지는 부산대엔
근처에도 가지 않으셨다. 그래도 제자들의 힘으로 현재 부산대 민주언덕엔 아버지의 기림비碑가
서있으니 아버지의 영혼이나마 기뻐하실 것이다. 물론 진정으로 기뻐하실 때는 통일될 때이겠지만.
아버지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군사정권에게 평소 주장하는 민자통(민족자주통일)을 결성하여 적극
적인 통일운동에 들어가셨는데 북진통일도 아니고 민족 자주 통일이라니..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
만의 분리 정권에서 영원한 유신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정희로선 눈에 가시들이었으니 마음에 안드
는 자들은 모두 빨갱이란 편리한 죄목으로 그 전가의 보도를 죽을 때까지 휘둘러 대었다. (그래봤자
그는 61세라는 한창 나이에 가버렸다)
만일 아버지가 평생 감옥살이로 고생을 많이 하여 몸도 안좋으니 이제 그만 교수나 총장으로서
후학들이나 가르치며 편하게 물러나 계시겠다해도 아무도 비난하진 않았을 터인데 아버지는 끝까지
한 목숨을 군사정권에게 내놓는 각오로 일어나셨다.
실지로 혁명재판에서 아버지는 사형구형을 받으신 후 일어나서 방청석으로 돌아서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것은 패배자나 희생자의 얼굴이 아니라 승리자의 그것
이었다. 혹시 아버지는 종교적인 순교를 원하셨을까. 그때 아버지는 불과 만 59세의 젊은 나이셨는데.
아마 선고까지 그렇게 받아 사형대앞에 섰다해도 아버지는 그렇게 미소 지으셨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평생 최선을 다한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으셨을 테니.
박정희는 아버지같은 사람은 백번이라도 사형시키고 싶었겠지만 국외의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조차
박정희를 성토하자 할 수 없이 사형은 면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바윗덩어리같은
스트레스로 남아 그 후 1967년 동백림사건을 터뜨리면서 '이래도 내가 틀렸느냐'식으로 사건을
부풀려 세계에 시위를 하였다.
그 때 주범이라던 재독 윤이상 음악가는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유명한 작곡가 몇명 안에 드는
분이셨는데 한국으로 강제 이송되어 사형을 구형받자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 음악가들이 들고 일어나
할 수 없이 사형이 아닌 10년을 선고했는데 형을 산지 2년만에 찬방에서 고생을 하며 온갖 병을
얻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풀어주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분이 안풀렸던지 다시 1970년부터 80년까지 10년 간 또다시 150여명에 달하는
재일조선인들의 북한 간첩사건을 터뜨려 국가 폭력을 가하였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며 상고를 하여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아니면 말고식의 한국 위정자들의 폭력은
그 후 한참이나 계속된다. 박정희는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며 살고있는 불쌍한 우리의 동포들을 따뜻
하게 품어 줄 생각보단 그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권력을 다질 생각만 하였으니.
권력지향적 해바라기 폴리페서가 아니라 아버지는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교단에서든
어디에서든 혼신을 다 바치셨으니 진정한 의미의 폴리틱 프로페서 아니 폴리틱 라이프 셨음이다.
79회 8.15를 맞이해서 몇자 써보았는데 8.15를 해방일이라 해야하는지 또는 무엇이라 불러야하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날 16일에 시청앞 광장 일장기가 내려진 게양대엔 태극기가 아닌 미 성조기가
올라간 나라.. 그 깃발 아래에서 이승만과 하지 중장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나란히 서있었다. 하긴
그 날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올라갔다한들 그것은 그저 형식일 뿐 내용에선 우리는 아직도 성조기
아래 있는 셈 아닌가.
그리고 얼마 안가 그들의 계획대로 두동강으로 잘려져버린 나라에서 진정한 광복과 해방과 독립은
언제야 올 것인가.
그동안 나의 아버지얘기를 많이 하면서도 성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이제 밝히기로 한다. 호는 산수로 山水 이종률(李鐘律 1902~1989)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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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통일을 기원하며,어제 구청 광복절 기념 행사에 참석해,분단을 만든 자들인 세상을 만들어 가는 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 되겠지.......생각하면서 왓읍니다.....오늘 다시 힌번 통일을 생각햐며,산비탈 잘 들러보고 가네요........
2006년대까지도 국립서울대 총장에 이완용의 증손자이자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가 임명된 것도 예사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언론들은 보도를 했었나요?
정치인들 중 누구 한 명시라도 문제제기를
했는지...
오늘에야 새삼 알았습니다.
예전에 어디서 들어 봤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당시는 노무현대통령 때였는데도 이완용쪽 세력은 승승장구 내려오고있어
감히 손을 못대고 있었던 듯 합니다. 물론 언론에선 잠시 이장무가 그 매국노의
증손자라며 면피용으로 떠들었지만 계란 바위치기일 뿐이었고 얼마안가서 잠잠
'해 지더군요
.
이장무는 대 국립서울대 총장 임기 4년을 꽉 채우고 내려왔고 이장무의 친동생
이건무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짱짱하게 날리고 있었지요.
그것을 문제제기한 정치인은 안보였고 뜻있는 국민들만 아직까지 냉가슴만
앓고 있습니다.
산수 이종률 선생~
산과물이면 인간에세 가장 필요한 자연물이겠지요
얼마나 고귀하시면 그런 호를 갖으셨을까요
하시는 일마다 그에 못지 않으시니 귀감이 됩니다
언니의 아버님께서 그ㅡ 토록 크시고 대담하시니
언니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것 같습니다
이종률선생님에 그따님이십니다
두 부녀의 가르침과 사랑이 가슴 시리게 아파옵니다.....
내가 초등학교1년 때 아버지는 이시영선생을 뵈오러 갈 때 나를 데려
가셨는데 아버지는 그 분을 할아버지라 깎듯이 대하고 그분은 아버지 이름
을 부르며 너는.. 이라하여 나중에 여쭤봤더니 먼 친척이시라더군.
알고 보니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이회영 이시영형제분들의 사촌형님이라
우리가 더 큰집이었고.
그러나 우리는 그 작은 집에 비해 훨씬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이시영할아버지
집안도 독립운동으로 씻은 듯 가난해 지셨지.
나는 그 후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몰라. 내가 이완용같은 매국노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해. 그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지극하신 축복 아닌가..
뜻이 높고 지조가 매우 강한 분이셨네요
그런 애국, 애족, 애민의 신념을 간직하시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고자
온갖 박해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심신을 다바쳐 한생을 다바쳐 투쟁하신 아버님은
진정한 애국자이시고 통일활동가십니다
참으로 고귀한 한생이고 빛나는 한생입니다
우리 모든 후대들의 귀감이고 조국통일사에 한 페이지가 될 소중한 사적입니다
조선에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헌신하신 분들에게
수여하는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여 있고
유명무명의 많은 분들이 이미 수상하였습니다
통일조국은
산수 이종률선생께도 그 이름, 그 투쟁사적을 잊지않고 찾아내여 수상의 영광을 안겨드릴것이라 생각됩니다
진정한 조국은
그 어머니 조국을 위해 일신의 안락과 부귀영화도
바라지 않고
청춘도 생명도 다바쳐 투쟁한 자기의 아들딸들을
영원히 잊지않고 찾아내여 후대들이 잊지않고 따라배울 영원한 별로 내세워주는것이지요
다시한번 부탁드리지만
아버님의 일대기와 투쟁사료, 사적들을 꼭 책으로
엮어내시길 바랍니다
자식이면서 믿음직한 동지였고 조력자였던
산비탈님이 아버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고,
조국에 드리는 선물이고, 또 효도라고 생각됩니다
항상 건필하세요
동의합니다
댓글 또한 너무 훌륭합니다
실은 이 글은 아버지 제자분들에게 보낸
글중 하나를 복사해서 이곳에 올린 것입니다.
봉수님 요즘 제게 엄청난 압박을 주고
계신다는 걸 아십니까 ㅎ
안그래도 이 치매환자가 기억을 짜내느라
힘이 든 판인데..
근데 조국통일상이란 조국이 통일도 되기
전에 미리 주는 겁니까
상 받은 이들은 통일도 되기 전에 거의 다
세상을 떠나셨겠습니다 ㅠㅠ
'진정한 조국은 그 어머니 조국을 위해 일신의
안락과 부귀영화도 바라지 않고 청춘도 생명도
다바쳐 투쟁한 자기의 아들딸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찾아내여...'
허지만 우리의 역대 독재정권들은 그런 아들
딸들을 많이도 처단하여왔지요.....
제 글이 부담이 되셨다니 죄송합니다
저의 글은
아버님께서 살고 투쟁하신 그 모든 삶이
조국에 바친 애국이고 헌신이고 그것이 후대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고 본보기가 되고 가르침이 되는
귀중한 사료가 될것이기에 꼭 남겨져야 한다는 뜻에서
부탁드린것입니다
그리고
조국통일상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돌아가신 분들께도, 살아계신 분들께도 그 공적을 평가하고
기리기 위하여 드리는것입니다
유족들이 계시면 유족들께서 대신 받기도 합니다
진정한 조국이라면
자기의 훌륭한 아들딸들을 적극 찾아내여
인민들, 후대들이 영원히 기억하는, 인민들의 마음속에 빛나는 별로 내세워주는것이지요
돌아가신 분들은 모두 애국렬사릉에 반신상으로,
생전의 본 모습대로 모셔져 있습니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것들이 치매예방과
치료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하여
저도 지금 어렵사리 기술자격증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무모한 도전이 될것인지 어찌될것인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볼려고 합니다
읽어도 이해도 안되는것도 많고
기술용어들이 외래어 투성이라 힘들고
어제 읽은것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튼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이희영선생님이라 하시면
만주 화전현에 있었던 "화성의숙"을 세울 때에
많은 자산을 쾌처하신 분이 아니신가요
독립운동자들이 정치군사간부양성을 목적으로
그 학교를 세울 때에 협력합심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서 세운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회영은 서울의 6형제들이 엄청난 부동산을 급매로 팔아 모두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과 지휘관을 양성하신 위대한 분이시고 한성의숙은(그도 무관학교지만 일제의
눈을 피하기위한 이름) 이회영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김일성이 어렸을 때
잠깐 그 학교에 다녔다는 것으로 기억하구요.
이회영 형제들은 모두 옥사하시고 5째인 이시영씨만 돌아와 이승만은 그 분에게 체면상
부통령이란 타이틀을 내렸지만 부산 한 양식집에서 가진 애국인들 모임에 몽둥이를 든
서북청년단들의 행패에 충격을 받아 들어 누우신 후 다음 해 세상을 떠나십니다.
사실 상 이승만이 그 분을 죽인 것이지요. 김구를 죽인 것처럼.
내가 그 할아버지를 단 한번 뵈온 날이 바로 그 날로 지금도 그 처참하시던 표정과 모습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내가 평생 본 아버지의 얼굴에서 그날이 가장 괴롭고 슬펴하시던 모습
이셨고.
나는 나의 고통스러운 지난 날들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워 아버지의 글을 쓰는 걸 사양
했지만 제자분들은 강력하게 그것은 나의 의무라는 듯 계속 압박을 가해 할 수 없이 조금
씩 쓰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압박아니면 저는 시작도 안했을 겁니다.
봉수님
의 압박이란 거기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녜, 답글 감사합니다
아버님과 아버님제자, 동지들의 못다한 뜻을 기리고
그 고귀한 뜻을 후대들에게 전해야할,
누구도 대신할수없는, 산체험자, 증거인인
산비탈님의 책무입니다
건강을 챙기시면서 집필하시길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서울 오실 짬을 내시면 모습을 한번 뵙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