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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사로잡은 백종원의 세 얼굴!^^
-외식 경영전문가, 동네형, 요리강사로 팔색조 매력-
TV조선 트로트 시리즈의 성공으로 지상파, 케이블 너나 할 것 없이 트로트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TV를 틀었다 하면 트로트가 흘러나오고, 채널을 돌렸다 하면 트로트 스타가 시청자를 맞이한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 아이돌밖에 모르던 아이들이 ‘찐이야’, ‘보라빛 엽서’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의 반세기 만에 찾아온 트로트 열풍 아닌가. 제법 반가운 일이다.
식을 줄 모르는 트로트 열풍 속에 또 하나의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론칭했다.
지난 7월10일 첫 방송된 MBN ‘보이스트롯’이 그 주인공이다.
방송 전부터 ‘200억 프로젝트’, ‘초대형 서바이벌’ 등 규모감을 과시했던 ‘보이스트롯’은
방송 2주 만에 시청률 10%를 돌파하며
동시간대 방송되는 지상파, 케이블, 종편 등 전체 채널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이는 MBN 사상 최고 시청률이기도 하다.
MBN이 시청률 마의 벽 10%대를 돌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이스트롯’이 기존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과 차별화를 두는 대목은 ‘스타들의 오디션’이다.
방송 사상 최초로 80여 명의 연예인이 총출동했다.
그렇다 보니 1라운드가 펼쳐지는 1회와 2회에서는 출연진의 실력차가 들쑥날쑥했던 것이 사실.
80명 출연자 전원이 프로급 실력은 아니었단 얘기다.
방송 직후 일부 출연진에 대해 “실망했다”,
“명절 특집 무대냐”라는 반응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이스트롯’에는 이따금 시청자들의 마음을 확, 움켜쥐는 순간들이 있다.
방심했다가 나도 모르게 함께 울어버린 순간. 1회의 안희정과 김현민, 2회의 정동남이 그러했다.
전 축구선수 안정환의 사촌 누나이자 재즈 싱어인 안희정은
대중에겐 그리 익숙한 가수가 아니다.
잔뜩 긴장한 채 무대에 오른 이 낯선 중년의 가수는 나훈아의 ‘공’을 열창했다.
트로트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음을,
한의 정서가 담긴 장르임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무대를 꽉 채웠다.
녹록지 않았던 지난날이 떠오른 안희정은 2절의 절반을 오열하며 불렀다.
대기실에서 이를 지켜보던 출연자들은 물론, 심사위원들마저 함께 울었다.
그가 밝힌 첫사랑과 이혼의 아픔,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연을 몰랐더라도, 오롯이 무대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안겼다.
무명가수 김현민은 첫 방송 직후 가장 뜨거운 집중을 받은 이다.
‘보이스트롯’ 방송 전만 해도 포털사이트 인물 검색도 안 됐던 그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가창력과 구성진 목소리로 올크라운을 획득했다.
심사위원 진성은 자신의 노래 ‘동전인생’을 부른 김현민에 대해
“나보다 잘 불렀다”라는 최고의 극찬을 쏟아냈다.
2회에서는 정동남이 반전 카드였다.
대중에게는 콧바람 차력사, 이마 한가운데 크게 박힌 점으로 유명한 정동남은
행사장은 물론, 어느 무대에도 올라본 적 없다고 털어놨다.
“이렇게 떨린 적은 없다. 입이 바짝 마른다”던 그였지만
간드러진 꺾기 신공으로 ‘용두산 에레지’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정동남은 올크라운을 받은 후 객석을 향해 큰절한 뒤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남모를 서러움을 쏟아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알던 정동남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지워지고
트로트 앞에서 신인처럼 긴장하는, 모처럼 받는 박수에 한없이 설레하는 ‘인간 정동남’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처럼 ‘보이스트롯’에는 대중에게 잊힌,
혹은 대중의 편견에 갇힌,
혹은 대중에겐 익숙하지 않은 도전자들이 무려 80명이나 출연한다.
앞서 언급했듯 80명의 실력이 모두 만점 수준은 아닐 순 있겠지만,
그 진심만큼은 묵직하다는 것을 1회와 2회를 통해 증명했다.
기교만큼이나 부르는 이의 감정이 중요한 트로트이기에
진심이 아니었다면 금방 들통났을 터다.
일단 출발은 산뜻하다.
금요일 오후 10시부터 무려 3시간에 걸쳐 방송되는 것을 고려했을 때,
단순히 트로트의 열풍에 힘입어 거둔 성적표는 아닐 것이다.
다채로운 출연자, 그만큼이나 다채로운 사연들,
사연들보다 더 감동적인 무대 덕분이었을 테다.
남은 과제는 보다 정돈된 실력이다.
사실상 예선전과 같았던 1라운드 이후엔
출연진들의 실력 격차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해본다.
과연 ‘보이스트롯’에는 또 어떤 반전의 무대가 펼쳐질지,
트로트 열풍의 정점에 설 주인공은 누가 될지 관심이 쏠린다.
-김수현(칼럼니스트)-
^^잊을 만하면 나오는 '왜색 논란' 왜 못 막나?^^
또 ‘왜색 논란’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나영석 PD가 연출하는 케이블채널 tvN ‘여름방학’이 그 대상이다.
호감도가 높은 두 배우인 정유미, 최우식까지 배치했지만
왜색 논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왜색’은 한국 방송가에서 첫 손에 꼽히는 금지어다.
촬영 및 편집 과정에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최근 SBS 드라마 ‘더킹-영원의 군주’와
tvN ‘놀라운 토요일-도레미 마켓’을 포함해 세 차례나 불거졌다.
이쯤되니 궁금해진다. 왜색 논란은 안 피하는 것일까? 못 피하는 것일까?
#뭐가 문제였나?
‘여름방학’의 경우 배경으로 쓰인 집이 일본의 적산가옥과 유사하고,
전반적인 흐름이 일본 소니의 게임 ‘나의 여름방학’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제작진은 "다락과 3개의 마당이 있어
출연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이 느끼실 수 있는 불편함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고,
"해당 게임은 알지 못하며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더 킹:영원의 군주’은 포스터 속에 등장한
대한민국 궁궐의 이미지가 일본의 사찰과 몹시 유사했고,
극 중 대한민국의 평행세계인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 또한 일본 왕가의 문양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제작사 측은 포스터 속 2층 목조건물은
일본 사찰의 일부 특징을 사용했다고 실수를 인정한 후 사과의 뜻을 밝혔고,
황실 문양에 대해서는 "국회나 행정부가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오얏꽃이 오얏꽃을 감싸는 ‘이중 오얏꽃’ 형태로 디자인됐으며
일본 왕가 문장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왜색 논란은 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발목을 잡았다.
지난 6월에는 ‘놀라운 토요일-도레미마켓’은
게스트로 참여한 아역 배우 김강훈이 입고 나온 의상에 쓰여진
‘大一大万大吉(대일대만대길)’이라는 문구가 도마에 올랐다.
이는 일본 전국시대 이시다 미츠나리의 가문(家紋)이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제작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점 사과의 말씀 드린다"며
"해당 의상은 제작진이 평소 거래하는 의상 대여 업체에서 구한 것이며
출연자 김강훈은 물론 제작진, 대여 업체도 알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왜 문제인가?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깝고, 최대 한류 콘텐츠 소비국이기도 하다.
숱한 한류스타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며 일본에 콘텐츠가 수출되길 원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으로서 일본을 정서적으로 완전히 끌어안기 어렵다.
일본이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여전히 극우 세력은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 징용이 아니라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동해를 일본해라 주장한다.
이런 정치적, 역사적 대립은 일본 문화와 민족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일본에 대해서는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한류 시장 측면에서 봤을 때는 공생 관계지만,
생산자 입장에서는 콘텐츠 속에 왜색을 드러내는 것이
치명적이기 때문에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최근 왜색 논란에 휩싸인 콘텐츠들의 경우 불거진 시점이 좋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국내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이뤄지고 있고,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아베 정부가 마스크 사용을 적극 수용하지 않아
확진자가 속출하게 만드는 등 이미지가 극도로 좋지 않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경험하는 속에서
일제 강점기를 경험하지 않은 신세대들에게도 반일 감정이 커졌다.
결국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왜색이 짙은 설정을 걷어내지 못한 것은 치명적 ‘사고’라 볼 수 있다.
#왜 반복되나?
최근 왜색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왜색 논란의 경우 이로 인한 대중적 반발을 고려했을 때
프로그램의 존폐를 고민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오류이기 때문이다.
‘노이즈 마케팅’ 정도로 이용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우선 ‘무지’(無知)에서 오는 실수일 가능성이 크다.
건축양식이나 의상의 경우 전문적인 소견이 없다면
표현 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조차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놀라운 토요일’ 제작진이 "현장에서도 의구심을 가지지 못한 채
녹화가 진행됐고 방송까지 이뤄졌다.
해당 제보 글을 뒤늦게 확인했고 필요한 조치 후 댓글 남긴다"며
솔직하게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시인한 것이 대표적 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공공의 전파를 이용하는 제작진이
"몰랐다"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해명이 될 수 없다.
결국 그들의 ‘안일함’이 이 같은 사태를 키웠다고 볼 수 있다.
한 지상파 방송사 관계자는 "각 방송사들은 극우 사이트인
‘일간 베스트’(일베) 이미지를 사용해 문제가 된 후
공식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만 쓰도록 조치하고 있다"며
"이처럼 여러차례 반복되는 논란의 경우 이를 거를 수 있도록
사전 검토하고 조치하는 전문 집단을 배치하는 것이 필요한데
각 방송사들의 이러한 노력이 부족했다"고 꼬집었다.
최근 이런 논란이 더욱 늘어나는 또 다른 이유는,
대중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늘었기 때문이다.
방송을 지켜보는 이들 중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각종 SNS나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공론화되는 등 언로가 확대된 셈이다.
이 관계자는 이어 "방송을 지켜보는 대다수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콘텐츠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중 안에는 각계각층의 전문가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통해 잘못된 표현이 걸러지고 다양한 SNS를 통해
이런 지식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막을 방법은 있나?
"왜색 논란을 원천적으로 막을 방법이 있나?"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콘텐츠가 쉼없이 쏟아지지만 모든 것을 검증하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후약방문이라도, 잘못된 표현이 발견될 때마다 이를 바로 잡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민족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을 맞은 지 어느덧 75년이 됐다.
일제 강점기를 경험하거나 기억하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고,
부지불식간 왜색이 짙은 콘텐츠를 만들 가능성 또한 높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공공의 기능을 갖는 방송이
스스로 왜색 논란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고,
자칫 논란이 불거졌을 경우 이를 본보기 삼아
모두가 왜색 논란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각 방송사들이 내부 심의 과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사고 발생 후 잘 수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예방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윤준호(칼럼니스트)-
^^20세기를 대표하는 미녀에게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 TMI-
20세기를 풍미한 세기의 연인, 영원한 대중 문화의 아이콘,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 활동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친 소셜테이너...
이 모든 것은 단 한 사람. 이제는 불멸의 이름이 된 오드리 헵번을 가리킵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연기력, 그리고 인성까지 흠잡을 곳 없었던 그녀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배우 오드리 헵번은
‘미의 화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미녀 타이틀을 놓고 늘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는 했습니다.
그녀가 입는 옷, 착용한 쥬얼리,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으며
‘헵번 스타일’로 불리며 시대의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죠.
당시 할리우드에는 마릴린 먼로, 소피아 로렌, 리타 헤이워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육감적인 매력을 지닌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호리호리 마른 체형의 오드리 헵번이 인기를 끌면서 일대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54년 <사브리나> 출연 당시 지방시는 헵번에게 드레스를 협찬해 주었는데
지금이야 빈번한 일이지만 이때의 사례가
특정 브랜드가 배우에게 의상 협찬을 해준 첫 케이스였으며,
지방시는 그녀로 인한 광고 효과로 톡톡히 보면서
그 이후로도 협찬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우정을 평생 유지했다고 하네요.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주인공 ‘홀리’ 역을 맡아
이른 아침에 검은 선글라스와 옷을 입고 티파니 보석상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그녀의 모습을 한번쯤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헵번 특유의 세련된 패션 감각과 청순하면서도 귀여운 면모가 새삼 화제가 되었는데,
극 중 그녀가 입었던 지방시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00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됩니다.
이처럼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녀와 관련된 전시회, 특별전, 패션쇼 등을
자주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대중 문화에 남긴 족적은 상당하다 할 수 있겠네요.
정작 헵번 본인은 외모 컴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종종 지인들에게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이 각졌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전해지며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상술했듯이 자신은 너무 말라서 당시 인기 있었던 글래머러스한 매력과는
거리가 멀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뭔가 조금 억울한 느낌이 밀려오네요...
오드리 헵번은 미국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를 대표하는 가장 권위있는 4개의 시상식인
에미(Emmy, TV), 그래미(Grammy, 음악/청각 매체), 아카데미(Academy-Oscar, 영화),
토니(Tony, 무대공연)를 모두 거머쥔, 소위 EGOT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15인 중 한 명입니다.
우선 본업인 영화 배우로서의 성취로 가장 유명한데요.
AFI(미국영화협회)가 꼽은 가장 위대한 배우 3위에 선정되기도 할만큼
오드리 헵번은 외모 뿐만 아니라 연기력 역시 익히 인정 받았습니다.
1953년, 오드리 헵번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연출한
그녀의 대표작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발탁됩니다.
본래 앤 공주 역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진 시몬스’가 고려되었지만
오디션을 통해 와일러 감독이 당시 완전 무명에 가까웠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됐죠.
촬영이 끝나고 영화 개봉 당시, 이미 유명 스타였던 그레고리 펙에 비해
신인인 오드리 헵번의 이름값을 고려해 배급사인 파라마운트는 펙의 이름을 크게 써넣었는데요.
이를 본 펙은 "헵번은 분명 이 작품으로 오스카를 수상할텐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 합을 맞춰봤던 그레고리 펙의 예상대로,
그녀는 <로마의 휴일>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전설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4년에 많은 이들이 예상을 깨고
영화가 아닌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 주연인 물의 요정으로 출연해
당해 토니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그녀의 커리어가 본래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연극배우로서의 재능과 가능성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조금 독특하게도 아이들을 위한
동화 오디오북 녹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는데 성공했으며,
마지막 에미상은 그녀가 결장암으로 타계한 이듬해인
1994년에 ‘오드리 헵번의 황홀한 이야기’를 통해 수상하면서 사후 'EGOT'를 달성하게 됩니다.
1929년생인 오드리 헵번은 10대 시절 영국에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수업을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자 나치 독일 치하의 네덜란드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나치 독일의 탄압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원하는 등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제대로 휘말린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귀족 가문이었던 외가는 전쟁 중에 몰락해 영애였던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와 가정부로 일하며
헵번의 발레 레슨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하네요.
나치 독일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살아남기 위해
산에서 튤립 구근을 캐먹고 반쯤 썩어가는 음식들도 닥치는 대로 먹으며
가까스로 견뎠던 경험이 있으며, 영양실조로 인한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습니다.
때문에 한국의 개고기 식용 문화를 강도 높게 비난했던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향해
"전쟁을 겪게 되면 개고기가 아니라 더한 것도 살아남기 위해 먹게 되는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해 봤는데도 그런 말을 하냐” 라고 일침을 가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뼈저린 고생을 한 탓에
그녀는 일생 동안 전쟁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정중히 고사해 왔다고 하네요.
4. 은퇴 후 노년에는 더 아름다웠던 미녀 스타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며 인권 운동과 자선 활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빈민 구제와 아이들을 돕는 것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헵번 스스로도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만큼
어려운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돕는 것을 중요하다 생각했겠죠.
특히나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장암 투병 중이던 92년에는
소말리아를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공개되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젊었을 때 만인을 사로잡았던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세월의 흐름 앞에 천천히 사그러 들었지만,
내면의 아름다움 역시 늘 지켜온 그녀였기에
변함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듯 하네요.
헵번 타계 후에도 아들 션이 '오드리 헵번 어린이 재단'을 설립하여
전 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하니
그녀의 뜻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