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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리산 둘레길도 두 번 정도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둘레길 제12구간의 서당마을 ~ 대축 구간 중 서당마을 ~ 삼화실 구간은 이미 진행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구간은 제12구간 중 나머지 구간의 13.4km, 제13구간 대축 ~ 원부춘 8.5km,, 제14구간 원부춘 ~ 가탄 13.3km, 제15구간 가탄 ~ 송정 10.6km, 제16구간 송정 ~ 오미 10.4km 그리고 서비스 구간(岐線)인 목아재 ~ 당재 구간이 8km입니다.
그러면 65km 정도가 되니 이를 두 구간으로 나눠 진행하면 충분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그러면 ① 서당마을 ~ 가탄까지 한 구간으로 묶어 35.1km 그리고 ②가탄 ~ 오미의 21km에 서비스 구간 8km를 더하여 29km를 마지막 구간으로 하여 이렇게 두 구간으로 묶어 진행하겠다는 것이죠.
감개무량해 집니다.
드디어 대망의 지리산 둘레길을 8회로 마치게 되겠군요.
그렇게 마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전체로 포장하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오게 될 기대가 됩니다.
그럼 어서 지리의 품으로 달려갑니다.
다시 하동입니다.
2018. 4. 21. 남부터미널에서 22:00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탑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구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 두 시간 정도 잤나요?
영화여객 특유의 정류장 도착 시그널 뮤직이 울립니다.
그러고는 하동에 내리니 01:40.
이 아저씨는 다른 분들보다 더 빨리 달리셨군요.
이제 제법 낯익은 피씨방 사장님과 인사도 나누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보니 04:40.
나와서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을 먹고 택시(8,000원)로 서당마을로 이동합니다.
지도 #1
05:32
지도 #1의 '가'의 곳에 도착합니다.
눈에 익은 곳이죠?
서당마을 무인 먹거리센터.
그리고 이곳으로 오는 길에 택시 기사님께 물어보았숩니다.
아무래도 지리나 지명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 보다 확실하게 잘 아실 것 같아서죠.
"지도상 이곳은 서동으로 되어 있던데요?"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택시 기사님은 반색을 하시며 "맞다. 이곳이 서동이지 왜 서당이냐!"고 한 말씀 하시는군요.
그러니까요.
어쨌든 이 노인정도 '서당마을 노인정'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동네 어른들께 여쭤봐야 할 계제階梯 같습니다.
05:33
오늘 비가 예정되어 있는데 제발이지 제가 오늘 구간을 마칠 때 까지만이라도 좀 참아주실 것을 산신령님께 부탁 올리고 오늘 구간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지금 이곳은 하동군 적량면 우계리 서동(당)마을입니다.
진행 방향 좌측으로 우계저수지 뚝이 보이고 그 뒤로 횡천지맥 능선이 보이는군요.
좌측 분지봉627.8m 정상부는 완전히 구름에 가렸고.....
신촌재 부근만 구름이 내려 앉지 못한 모양새입니다.
홍매화인지 뭔지 아주 소담스럽게 피었습니다.
7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우계저수지 뚝방 방향으로 좌틀합니다.
그냥 이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신촌마을로 연결되므로 각자 알아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계저수지.
그 뒤로 아까 본 분지봉과 신촌재가 더 가까워졌습니다.
구름이 조금 벗겨진 것 같습니다.
뚝방에서 지나온 서당마을을 봅니다.
우측으로 지난 번 상우마을에서 진행하다 본 길가의 당산나무도 보이고.....
논들도 아주 자그마하게 보이는군요.
태양광 발전소도 이제는 좀 흉물스럽게 보입니다.
뚝을 빠져나와 우틀하여 시멘트 포장임도를 따릅니다.
근데 요새 산고양이가 무척 많아진 느낌입니다.
요 쉬키들은 그래도 명색이 인간이 지나가는데 비킬 생각도 안 하는군요.
집이 몇 채 있는 괴목마을을 지납니다.
우계저수지를 뚝방길을 따라 걸으며 고도를 올리면 괴목마을이다. 오르는 길에 갓논이라 불리는 작은 논들이 보인다. 지리 북쪽의 논을 ‘다랑이논’이라 부른다면 지리 남쪽의 이곳은 ‘갓논’이라 부른다. 갓처럼 조그맣다는 말일게다. 예전에 이 마을에 키가 큰 기목나무(귀목나무의 현지 발음)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하여 기목마을로 불리다가 한자 표기를 하면서 비슷한 이름을 갖다 쓴다는 것이 어정쩡하게 ‘괴목槐木’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단다. 풍수로 따져보면 마을 뒷산의 능선이 ‘말이 뛰어 내려오는 형상’인데 그 산이 실꾸리에 실을 감아놓은 듯한 실봉이다. 맞은편에는 한자 ‘玉’자 같이 생긴 옥산이 있다. 예전에는 이 옥산에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이 있었다고 한다.
우측으로 신촌마을을 보고 진행하다,
우계천을 건너 괴목마을을 빠져나와,
06:14
좌틀하여 7번 도로를 다시 만납니다.
그러니까 아까 우계저수지 뚝으로 좌틀하지 않고 그냥 직진을 해도 이곳 신촌마을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하러 일부러 우회를 하였을까요?
두 가지 이유겠죠.
하나는 좀 더 자연친화적인 길을 걷게끔 하려는 의도가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고,
차도와 인접한 도로를 따르다 혹시나 발생할 수도 있을 안전사고를 방지하려는 배려가 그 두 번째 이유일 겁니다.
신촌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우계천을 옆에 끼고 논두렁을 따라 걸으면 신촌마을이다. 상당한 고지에 있는 이 신촌마을은 이름이 얘기해 주듯 새로 정착한 마을임을 암시해주는 듯하나 오히려 괴목마을보다 더 오래된 마을이라고 한다. 구재봉의 너른 품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대문처럼 확 열려 있고 분지봉과 삼화실 방향의 물래재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임도를 따라 오른다.
06:25
삼거리 팻말 있는 곳에서 우틀하고,
숲길로 접어듭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멘트 포장 도로입니다.
06:50
그러고는 지도 #1의 '나''의 곳에 도착합니다.
사실 이 고개가 아까 서당마을에서 보던 고개일 것입니다.
실제 횡천지맥상의 신촌재인 분지봉과 구재봉을 잇는 고개는 여기서 산자락을 두 개 더 돌아가야 하니 저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그렇게 표기하였던 것입니다.
06:56
정확하게 6분을 더 걸어야 만나는 고개.
지도 #1의 '다'의 곳으로 이곳이 바로 신촌재입니다.
그러니 다른 산줄기와는 달리 횡천지맥 만큼은 둘레길과 두 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곳과 지난 구간에 만났던 하동읍의 하동 중앙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곳이 그것들이죠.
환형環形인 지리산 둘레길이 점과 점의 이음인 선線인 맥과 만나는 곳이 두 군데 이상이라는 것은 사실 사리에 어긋납니다.
하지만 이는 지리산 둘레길이 갖는 특성 즉 기선 岐線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교통의 접근성과 상징성 등을 고려하여 서당마을 ~ 하동읍 구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말씀드렸었죠?
이 신촌재에서 좌틀하면 분지봉을 지나 옥산재를 거쳐 중앙중학교 옆고개 ~ 하동우시장을 지나 횡천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진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우틀하면 구재봉 ~ 칠성봉 ~ 거사봉 ~ 삼신봉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낙남정맥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 더 진행해 볼까요?
삼신봉을 따라 올라가면 지리산의 영신봉으로 가게 되고 그곳이 백두대간입니다.
그 대간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 끝은?
그렇죠.
백두산입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산은 백두산을 정점으로 모두 한 줄기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신촌재에는 이정표가 두 개다. 둘레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만 있는 게 아니라 구재봉과 분지봉을 오르는 산꾼들을 위한 이정표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신촌재는 적량면과 하동읍의 면계가 되는 곳으로 산행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분지봉627.8m, 우측으로 올라가면 구재봉773.7m으로 올라가게 된다.
구재봉에 대해서 한 마디만 더 할까요?
신산경표의 신백두대간에 대해서는 지난 번에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북한에서는 백두대간을 어떻게 보는가를 보죠.
우리보다 일찍 일제를 극복했다고 하는 북한에서는 이 지질학적 개념의 산맥이나 백두대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북한은 1996년 ‘국가과학원 지리연구소’에서 학자들을 내세워 우리나라 산줄기를 전면적으로 조사, 백두대산줄기를 기본 축으로 하여 산줄기 체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즉 우리의 백두대간에 해당하는 ‘백두대산줄기’는 ‘백두산의 장군봉2,750m에서 시작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구재봉에 이르는 총길이 1,470Km인 산줄기’라고 하면서 이를 모두 8개의 산줄기로 나누었다. 그들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조종(뿌리로 되는 거룩한 존재)의 산'으로 숭상하여 왔으며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 하나의 산줄기로 보고 백두대간이라고 일러왔다"며 일제가 우리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백두대간이라는 말 자체를 없애 버리고 산줄기 체계를 왜곡했다고 지적하고 북한 학자들이 이를 연구, 바로 잡았다고 했다. 이에 의하면 ‘지리산줄기는 장수와 함양의 경계에 있는 백운산1278.9m으로부터 경상남도 하동군 구재봉773.7m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 구재봉이 북한에서 얘기하는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 줄기의 종착역인 셈이다.
그런데 이 구재봉을 악양면과 적량면에서는 서로 다른 뜻으로 부른다. 적량면은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집정자였던 최우崔瑀( ? ~ 1249)의 처남으로 팔만대장경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여 국난극복에 힘썼던 하동 출신 정안鄭晏( ? ~ 1251)의 출생지이고 그의 동생 정희령 장군의 ‘백마와 화살’에 관한 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정안이 축조한 퇴뫼식 석성이 정안산성으로 횡천면, 양보면과 고전면이 만나는 삼면봉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 산을 정안산447.6m 혹은 정안봉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구재봉과 정안산 사이의 땅이 정안의 장원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어마어마한 권세를 읽을 수 있겠다.
한편 그 당시 이 산의 이름은 구자산龜玆山이었다고 ‘조선지지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산의 산등에는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자산龜子山이었던 것이 지금은 구재봉龜在峰이라 불린다고 하니 이 龜在峰은 적량면 사람들이 거북 바위 모양의 바위를 보고 부르는 이름인 셈이다. 한편 악양에서 볼 때 이 봉우리는 비둘기 형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비둘기 鳩’를 써서 ‘鳩在峰’이라 부른다. 그러니 구재봉 정상에 오르면 악양면에서 세운 정상석과 적량면에서 세운 정상석이 서로 다른 한자어로 표기되어 새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악양면의 손을 들어주어 鳩在峰으로 표기하였다.
내려가죠.
신촌재를 넘으면 적량면에서 다시 하동읍으로 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동읍 흥용리의 먹점마을로 든다는 얘기죠.
내려오는 중간 중간에 편백나무 숲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둘레꾼이 밟는 길은 모두 시멘트 길입니다.
좀 삭막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먹점마을의 생김새가 좀 특이합니다.
사실 이 먹점마을의 생김새를 보기 위해서는 섬진강 건너 다압쪽으로 가야 합니다.
이 마을이 양옆으로 커다란 산줄기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지봉에서 내놓는 능선과 구재봉에서 가지를 친 680.6봉 능선 안에 싸여 있는 모양새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강 건너 호남정맥에서 보면 마을이 산자락에 점점이 박혀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지정학적인 이유가 둘레꾼으로 하여금 아무래도 분지봉 산줄기와 구재봉 가지줄기를 넘으려면 어느 정도의 난이도 정도는 각오하라는 의미도 될 겁니다.
신촌재는 그럭저럭 넘었으니 일단은 고도를 낮춥니다.
그런 의미 있는 줄기를 떠나 잠시 하동읍의 먹점마을로 들어선다. 이 먹점마을의 지형을 보려면 섬진강 건너 광양시 다압면의 물형物形을 봐야 한다. 즉 위 다압면의 물형이 필봉筆峰인 고로 이에 문방사우에 대칭되는 물형을 갖기 위하여 이 마을을 먹점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선조들은 지명 하나하나에 이렇게 공을 들여 지었다. 지명이라는 것은 그 지역을 대표하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명은 그 지역 주민들의 의지, 염원, 주관 등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보통 생김새보다는 종교, 풍속, 생활상 등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고 그 이름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먹점재를 넘어 대축마을로 들어선다.
지도 #2
07:15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다,
07:16
우측으로 빠져 마을 외곽을 탑니다.
좀 높은 위치에서 먹점마을을 내려다 봅니다.
이 마을은 섬진강 건너 광양 매화마을 같이 매실농사가 많군요.
곳곳에 매실농장 간판이 자주 눈에 띕니다.
봄이면 그것도 매화가 한창인 3월 초였으면 저 호남정맥의 매봉 자락은 흰눈으로 덮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뿌연 안개구름이 모든 것을 다 가렸습니다.
맑은 날이었으면 섬진강도 그리고 매봉도 보였을 것인데....
남쪽으로의 조망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그림이다. 전라북도 임실군과 완주군 그리고 진안군이 갈리는 삼군봉인 565.3봉(일명 조약봉)에서 시작한 호남정맥의 큰 줄기가 백운산1228m에서 마지막 기지개를 켠 다음 쫓비산 ~ 망덕산을 지나면서 남해와 섬진강이 만나는 망덕포구로 그 맥이 잠기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른 봄이라면 그 쫓비산 아래에 있는 다압면 도사리 매화마을의 10만 그루 넘는 매화나무에 눈이 온 듯한 진풍경을 보면서 앞에는 섬진강, 그 뒤로는 쫓비산의 어우러짐에 눈이 호강을 하게 된다.
07:36
지도 #2의 '라'의 곳인 삼거리입니다.
우측은 구재봉 활공장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구재봉 활공장이라고 해서 활공장이 구재봉 꼭대기에 있다는 것은 아니고 이 임도를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될 듯 싶습니다.
둘레길은 직진합니다.
이런 팻말도 너무 자주 보이고.....
07:51
섬진강이 보이는군요.
섬진강의 이전 이름은 두치강豆恥江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들어와 이 강의 나루터에 도착하자 나루터 일대에 수많은 두꺼비가 몰려들어와 울부짖었다. 이 때문에 왜군들이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에 두치강이라 부르던 강 이름을 이때부터 섬진강으로 바꾸었다.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전설이다. 다른 하나는 위 전설과 유사한데 시기만 다르다. 즉 임진왜란이 고려 우왕 11년(1385년)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젊은 처자가 등장한다.
옛날 두치강 하류의 나루터에 마음씨 착한 처녀가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두꺼비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와 두꺼비에게 밥을 주며 함께 살게 되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자 두꺼비가 처녀를 업어 살리고 두꺼비는 죽었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옥편을 보면 蟾에는 ‘두꺼비’란 뜻 말고 ‘달月’이라는 뜻이 하나 더 있음을 찾을 수 있다. 하늘에 있는 달을 섬궁蟾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예로부터 달에는 두꺼비가 살았다고 하는 설화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섬토蟾兎라는 말도 달을 이르는 말인데 이 역시 달나라에 금두꺼비와 옥토끼가 살고 있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섬진이라는 이름은 달月 + 나루津의 조합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니 '높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우리말 '달'을 月이나 鷄를 쓰는 대신 蟾을 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경우 예전 이름 두치강의 두치도 한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우리말 '머리재' 즉 '높은 고개'에서왔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즉 豆恥는 頭峙였다는 것이다. 지리산의 웅장함에서 이렇게 일반적인 이름이 조금 색다르게 변화한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니 섬진강을 머리재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시도 때도 없이 약탈을 일삼는 왜구에 대한 지겨움에 두꺼비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07:56
미점리 개치마을 삼거리에서 우틀합니다.
지도를 보니 이제부터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설 채비를 하여야 하는군요.
삼거리입니다.
사진은 지금 걸어 내려온 방향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내려오는 방향에서 보자면 급우틀하여 좌측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좌틀하게 됩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만연히 직진했다가는 대형 알바입니다.
좌틀하면 돌계단을 따라 잠시 부드러운 길을 걷게 되지만 이내 공사판 같은 현장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야 둘레길 본연의 산길이 되는 것이죠.
08:11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다시 시멘트 길이 나올 때 둘레길은 우틀을 하여야 하는데 바로 앞에 조망터가 보입니다.
올라가 보면,
아!
드디어 악양입니다.
평사리의 너른 들판이 보이는군요.
드디어 악양이다! 악양은 중국에서 온 이름이다. 중국 호북성의 한 현으로 악양루, 동정호, 군산 등의 명소가 있는 곳이다. 호북성은 동정호의 북쪽에 있는 성省, 호남성은 그 남쪽에 있는 성省이라고 이름지을 만큼 동정호는 그 아름답고 장엄함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소정방이 중국의 악양과 같다고 하여 ‘악양’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양지’에 의하면 “고소성과 한산사 그리고 동정호 · 소상 · 평사 · 군산 등의 지명이 있는데 악양이 신라 ‘소다사현’일 때 이런 명칭이 있었다. 소상팔경이라 한 것은 대략 중국의 악주와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그러니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모화사상에 젖은 말발이 어느 정도 서는 선인이 당나라를 다녀온 후, 이 동네가 중국의 악양과 같은 모습을 닮았다 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는 말일 게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악양현嶽陽縣은 경덕왕16년(757년)에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되어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 바, 지금은 岳陽으로 표기되므로 한자어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진주땅이었던 악양은 숙종때 하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니 악양에 들어서면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평사리를 떠올려도 좋고 두보를 떠올려도 좋고 뇌계 유호인(1445~1494)을 떠올려도 좋다. 동으로는 낙남정맥에서 가지를 친 횡천지맥이, 서쪽은 지리남부능선에 둘러싸여 있는 악양은 그 자체가 얘깃거리다.
08:22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별로 아름답지 않은 우측의 조그만 봉우리가 하나의 산이라고 하는군요.
이름하여 아미산峨眉山3092m.
중국 사천성四川省 아미현縣의 남서쪽에 있으며 중국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산입니다.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하나인데 특히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영장靈場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죠.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이 뒷동산이 호사가들에 의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순전히 악양때문일 것입니다.
높이 12m, 둘레 3m 크기의 이 문암송文岩松은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소나무의 씨앗이 바위틈에 떨어져 그것을 비집고 올라와 이런 규모로 컸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하게도 보였을 것 같습니다.
주민들은 계契를 조직하여 보호할 정도로 문암송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고 하니.....
그래서 나라에서는 2008년 천연기념물 제491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앞에는 문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멀리서도 이 정자를 찾을 수 있다면 그 뒤에 보이는 짙푸른 색깔 물체가 바로 이 문암송으로 보면 됩니다.
한편 지금의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가 예전에는 이 부근에 있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폐사 직전의 것을 지금의 악양교 옆으로 옮겼으나 이 역시 제대로 관리가 안 돼 지금은 동정호 안에다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고 하죠.
그 문암정에서 우측으로 멀리 거사봉 쪽을 봅니다.
악양면 있는 곳도 안개 구름에 덮여 있습니다.
대축마을 회관을 지나,
08:38
대축 버스 정류장 앞에서 제12구간을 마무리합니다.
캔맥주 한 통 마시려 했는데 개쉬키가 하도 짖어대서 그냥 마을을 빠져 나옵니다.
이 마을의 역사는 변한시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마을이라고 하는군요.
원래는 진주땅이었고.....
다행히 신촌재에서 안개비 조금 적시고 아직은 말짱합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