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508788411
흥국사(興國寺)는 태조 왕건이 924년 개경 광화문 동남쪽에 창건한 고려시대의 대찰로서, 12세기 초 흥국사를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 "법당이 웅장하고 뜰 가운데에는 황금을 칠한 10장(약 30m) 높이의 당간이 있었다"고 기록하여 그 번창함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멸망 이후 흥국사는 폐사되었지만 그 옛 터에 남아 있던 3층 석탑은 오늘날 북한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개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탑은 바로 다름 아닌 강감찬이 세운 것이다.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관직에서 물러난 강감찬이 1021년 재가제자로서 흥국사에 시주한 이 탑에는 강감찬의 친필로 전하는 3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은 고려의 평화와 민생의 안정을 바라는 노장의 마지막 소원을 담고 있다.
菩薩戒弟子 平章事姜邯瓚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제자(弟子)인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瓚)이 나라가 영원히 태평하고 만백성이 항상 평안하기를 빌기 위해 공경히 이 탑을 만들어서 영원히 공양(供養)에 충당하니, 때는 천희(天禧) 5년(1021) 5월이다.
무신집권기에 최충헌 형제가 골육상쟁을 벌인 싸움터였고, 원 간섭기에는 김방경의 국문장으로 활용되었으며, 고려 말 이성계 일파가 창왕의 폐위를 모의한 장소이기도 했던 흥국사는 고려왕조 오백년 역사의 부침 속에 결국 사라지고 말았지만, 국태민안을 염원한 강감찬의 호국 정신은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석탑에 아로새겨져 남아 있다.
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ddy215/222654872012
댓펌
맨첫줄보면 강감찬의 이름이 邯瓚으로 서명해놨는데, 정작 고려사 등 후대 역사서에는 邯贊으로 구슬옥변을 빼고 썻음. 그래서 실제 자신이 쓰던 이름과 후대인들이 쓰는 이름이 다른 케이스임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중략)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정조실록>
감감찬은 고려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했겠지만
정작 본문 내용처럼 창왕의 폐위를 모의했던 장소가 흥국사였던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요
사실 흥국사 9공신 중 조선 건국 전에 옥사한 지용기와
어떻게든 고려 왕조를 보전해 보려고 했던 정몽주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조선에서 활약했으니
자신이 고려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한 흥국사 이름이 붙은 공신들이 저런 행보를 걸은 걸 보고
강감찬께서는 참으로 운명이 얄궂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첫댓글 글쿠나 잘읽었어
와 직접 보고싶다 북한애들 유물관리 잘 되고있나 ㅠㅠ
고구려 유적 제밣보고싶어...
와씨 친필이라니 존나 신기해....나 죽기 전에 제발 한 번만 고구려 고려 유적지 북한 가서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