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8.29.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1,17-19 마르6,17-29
하느님 중심의 삶
“참행복”
“주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시편71,3)
사제생활 35년 동안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강조될 “삶의 중심, 하느님”입니다.
어제 수도공동체 소풍은 참 풍요롭고 충만하고 유익한 날이었습니다.
저에게 원내 매일 소풍을 제외한 외부 소풍은 이날이 유일합니다.
이번 주는 미사주례가 아니기에 자유롭게 일기쓰듯, 기록을 남기듯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강론 주제와 일치합니다.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이런 사람만이 경쟁에 임할 자격이 있다.”<다산>
르네상스형 인간인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르네상스형 인간이란 삶과 예술과 학문의 모든 분야에 정통한 사람”, 백과사전적 인간을 말합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의 챗gpt 세상에서 이런 인간의 출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스스로 바로 잡은 후에 활을 쏘고, 적중하지 않더라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본다.”<맹자>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하는 회개와 겸손의 미사전 참회의 기도는 정말 귀하고 고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도문의 깊이입니다.
하늘 보며 기도하며 살라고 직립인간이요, 세상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밤 12:30분경 어김없이 잠깨어 수도원 자비의 집 본원 숙소 현관문을 열자 마자
눈들어 헤아리는 하늘의 별들입니다.
이어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입니다.
아주 오래 전 “땅의 행복”이란 시가 고맙게 떠올랐습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이래서 하늘에는 별들이요 땅에는 꽃들이라 믿습니다.
또 아주 오래전 41세 늦은 나이에 사제서품되어 신림본당(지금은 서원동본당으로 바뀜)에서 첫미사,
“사람이 되는 길” 강론시 마지막 인용했던 <김준태>의 시가 반갑게 떠올라 나눕니다.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비가 내리면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하늘과 땅 바닥을 보지 않으면
사람 몸뚱이는 총알이 돼 버립니다
사람 몸뚱이는 짐승이 돼 버립니다
두 눈에 하늘을 넣지 않고
가슴에 풀꽃 향기를 넣지 않으면
사람 목숨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기 마련입니다
아, 이제 우리는 제발!
하늘을 보면서
사람을 보면서 사람이 됩시다”<1989.7.16. 신림본당에서 첫미사날>
어제는 계속되는 폭염이라지만 처서와 말복이 지나 성큼 가을 문턱에 들어선 느낌의
높고 푸른 하늘에 흰구를 두둥실 뜬 그림같은 장면같았습니다.
마침 어느 자매가 이런 풍경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줬고 제가 보낸 시와 함께 시화를 만들어 보내줘
많은 친지들에게 소풍 선물로 나눴습니다.
역시 오래전 시입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되네”<2006.8.>
푸른 하늘 품에 안겨 있는 흰구름처럼, 푸른 하늘 보면 누구나 푸른 하느님 품안에 두둥실 흰구름 되어
자유로이 노닐고 싶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강화도 공동체 소풍 참 알뜰하게 보낸 하루였습니다.
세속의 푸른 하늘안에 흰구름 자유인 되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며 떠돌며 지낸 하루였습니다.
1.온수리 성공회 성당, 2.전등사, 3.동검도 채플, 4.강화도 케이블카, 5.조양방직(미술관 카폐).
6.샤브 올데이(저녁식사)
알게 모르게 많이 먹다보니 새벽 체중계에 올라서니 어제보다 1.4kg 늘었고 곧 감량할 계획입니다.
1906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한옥 건물이니 100년이 훨씬 넘었고 이젠 활력을 잃어
유적으로 전환되는 느낌이었지만 감회가 깊었습니다.
여기서도 100년을 훨씬 노송이 성당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전등사였는데 곳곳의 건물에서 부처님 앞에서 불경을 드리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살아 있는 절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웠던 것은 700년에서 250년 수령의 무수한 나무들이 전등사의 역사를 알리는 듯 했습니다.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중이 절이 싫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오지 않아 중이 절을 떠난다 합니다.
작금의 인구감소의 심각한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전통좋고 자연좋고 건물좋아도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사찰, 수도원, 학교, 교회, 병원, 음식점,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주와 환대의 영성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검도 채플의 주인공은 조광호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지금은 저명한 화가에 속합니다만 제 수도원 입회후 지원자 시절 담당 책임신부였습니다.
저보다 2년 연상이지만 제가 늦깎기로 입회한 까닭입니다.
채플의 운영도 자유로웠습니다.
물욕이 전혀 없는 신부님이 평생 벌었던 모두를 교회에 봉헌하는 마음으로 지은 채플입니다.
넓은 갯벌 넘어 마니산이 보이는 풍광좋고 전망 좋은 동검도 채플에서 공동낮기도를 바쳤고
카페에서 빵과 커피도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화의 소재는 챗gpt 였고 경악할 내용이었습니다.
인류가 망한다면 인공지능의 챗gpt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분별이 없으면 비인간의 괴물로 변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싶지만 인공지능에는 땀과 눈물의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가, 사랑이, 생명이,
만남이, 친교가, 감정이, 영성이 없고 인간은 날로 불통의 외롭고 외로운 홀로의 인간이 될 수뿐이 없으니
새롭게 도래할 자업자득의 지옥입니다.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남은 것은 하느님 희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날로 새롭게 함이 챗gpt에 대한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영적인 것의 선택과 영적훈련 및 습관화가 절실하다 싶었습니다.
강화 케일블카를 통해 산정상에 올라가 강화도 인근을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59년생 이전 노인들은 내려올 때 차를 탈 수 없다기에 저를 포함 세분의 연노한 형제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왔습니다.
세월의 나이에 순응하는 것도 자기를 비운 겸손임을 배웁니다.
이어 조양방직 미술 카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옛 추억과 역사가 가득 담긴 낡은 건물과 고물들 즐비한 카페가 새삼 뿌리의 고향을 찾는 인간 실존을,
원시와 최첨단,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과 조화의 공존을 추구하는 역설적,
모순적 인간 실존을 보여준다 싶었습니다.
여기서도 빵과 음료수를 먹었습니다.
곳곳에 카페였습니다.
수도원 방문하는 형제와 함께 1년 2회 정도 점심식사후는 꼭 배부른 상태에도 시간을 낭비하며
왜 굳이 카페에 가서 비싼 빵과 음료수를 먹는지 몰랐는데, 요즘의 관행이라는 것을
어제야 조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알았습니다.
도대체 세상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카페에 음식점이었습니다.
먹는 재미로 살다 싶을 정도로 정말 맛집에 먹는 것을 너무 밝히는 사람들이요,
날로 빈약해지고 척박해지는 문화, 예술, 인문, 출판 풍토가 정말 우려스러웠습니다.
이 먹는 돈으로 책을 사 본다면, 불우한 문화 예술가들을 돕는 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많이 생각했습니다.
너무 물질적인 식욕, 성욕, 물욕 추구의 삶에 날로 빈약해지는 영성과 날로 쇠퇴하는 정신문화 풍토는
인류사회를 낙관할 수 없게 합니다.
죄도 많은 세상에 정신 질환은 일상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정말 쓸만한 사람들이 날로 사라져가는, 서사를 지닌 거목들은 없고 얄팍한 잡목들 우거진
야산같은 세상이 전개된다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지옥도를 보는 듯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람은, 제대로의 참사람은 순교자 세례자 요한뿐이요, 나머지는 사람의 탈을 쓴 괴물들입니다.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는 물론이고 예수님께 호감을 지닌 듯한 헤로데이지만 하느님 중심이 없기에
경박하고 우유부단하며 부족한 분별의 지혜로 의인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광야인생여정, 하느님 중심의 성인도 있겠고 중심을 잃어 세상 것들에 중독되었을 때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겠습니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축생(畜生;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의 비유)
같은 인생도 얼마나 많은지요.
인면마심(人面魔心)이라는 말도 나올 듯 합니다.
저절로 불교의 윤회설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삶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 중심의 일당백의 주님의 전사, 참사람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나다 해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저만은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저처럼 76세 나이에 하루종일 소풍후 8:40분에 취침하여 12:30분에 일어나
01시부터 04시까지 제가 저절로 알아 강론을 쓸 수 있겠는지요?
이건 제 자랑이 아니라 하느님 자랑입니다.
소풍을 통해 한 젊은 형제와는 열린 친교를 통해 한 젊은 형제와는 많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내적 오해를 해소하여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강론 끝나는 대로 다시 감사의 만세칠창을 바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