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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라벤더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는”(시 16:8)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언적으로 주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대하기도 한다. 그 말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우리에게 본을 남겨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주를 항상 앞에 모신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의미는 우리가 그의 청지기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일한 것을 전부 그에게 고하여야 한다는 것과 이 사실이 끊임없이 우리의 좌우명이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우리가 항상 그의 이름과 영광을 목표로 하여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지 않고 나타난 그의 뜻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우리가 어떤 신앙적인 일을 할 때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기를 힘쓴다고 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외면적인 행위나 헛된 말에 넘어가실 분이 아니시다. 그를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요 4:24)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신 말씀에 다윗은 이렇게 응답하였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물이 가득차 있어서 처음 펌프질을 할 때부터 물이 쏟아져 나오는 우물은 아주 드물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적인 말을 할 때에 최선의 주의를 기울인 뒤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고양시키고 끌어올릴 수 있는 무엇이 없이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유롭게 쏟아부을 수 있는 영적인 마음의 상태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다. 은혜의 샘물이 때때로 고갈되어 펌프질을 하는 것만으로는 기도하고자 하는 상태로 마음을 끌어올릴 수 없어서 마음에서 사모함이 솟아나기 전 영혼을 설복하는 무엇이 영혼 안으로 부어져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W. Gurnall, 1660)
이 말은 시편 기자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찬양한 후에 다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2)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하는 독자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되 입술로만 하지 않기 바란다. 다윗은 겉으로는 깨어 있다고 하면서 속 사람은 잠자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한 것이다. 당신도 그와 같은지? 다윗은 마음의 둔함이나 졸음으로 자기의 영적 기능이 방해받지 않도록 힘쓴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찬양하였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자”자기 속에 있는 것들은 지각과 양심과 성향과 의지 모든 것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꾸짖으신 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하신 그 두려운 죄를 범하지 말하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2절의 반복에 주목하게 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높으신 보좌로 나아갈 때에 전력을 다하여 영적인 나태와 형식성과 위선을 던져 버리기를 힘쓰며 우리 자신을 반복적으로 분발시켜야 할 필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사64:7)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가 이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진정 우리가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가?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야곱과 같은 하나님과의 성공적인 씨름군이 될래야 될 수 없을 것이다.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드리는 청원에 응답이 그토록 적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의인의 뜨거운 기도”(약 5:16)이어야 한다.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로 하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욥 11:13),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그를 신뢰하며(잠 3:6),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마 22:37), 마음을 다하여 그를 찬양하여야 한다(시9:1).
오늘날 거의 모든 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불경건을 보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안으로 무분별하게 뛰어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러 그렇게 가장하기도 하는) 마음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대로 지껄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휠씬 더 악한 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전 15:33)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그토록 심히 욕되게 하는 것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대상이 누군가를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완전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드리고 있는 반쪽 마음과 잘못된 인식과 무분별과 무관심의 예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힘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깊이 생각하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의 약속을 굳게 잡음으로 우리의 전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저 은혜로운 성품 안으로 우리의 성향이 불타올라 우리의 마음이 인도받아 들어가도록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나 예배 중에서 나아가려고 할 때 뿐만 아니라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눈을 돌릴 때에도 우리의 마음을 조심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들과 도움과 은혜의 수단들은 우리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다만 공허한 껍데기일 뿐이며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렘 9:13)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인간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영을 가지고 읽는다면 인간의 글을 정독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우리의 영혼이 유익으로 얻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에 주신 말씀이며 그 말씀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정당하게 기대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읽는 말씀의 내용에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맡기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신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 6:20-21) 또 말씀하신다.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2-3) 잠시동안 성경을 읽고나서 한 시간 후에는 읽은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서는 말씀대로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가벼이 여기는 사실을 크게 부끄러워 하여야 할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내가 주의 율례를 끝까지 길이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12)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의미는 거룩함 가운데서 마음이 진보하는 것과 타락하는 것을 부지런히 살펴 유의한다고 하는 것이다. 신체와 건강 사이의 관계는 영혼과 성결 사이의 관계와 같다.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시77:6) 건강한 영적 삶이 유지되기 위하여서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매일 매일 한 시간을 따로 내어 마음으로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이라고 하는 방법을 통하여 마음의 기능을 함양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어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거의 묻는 일이 없이 몸만 생각하고 돌보는데 열심이었던 우리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히스기야의 예를 생각하여 보자. 그는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스스로 겸비”하였던(대하 32:26) 사람이었다. 베드로의 마음은 자신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그의 실패는 “교만한 영”이 먼저 그에게서 존재한 까닭이었다.
다시 범죄하고 타락하는 모든 일은 마음 속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성향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하나님 아니면 세상 둘 중 어느 것으로 향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이 늘고 기쁨을 점점 맛보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기도에 대해서는 어떤가 살펴 보라.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붓는 일에 있어서 점점 더 자유한가, 아니면 점점 더 속박되고 있는가? 기도하는 일에 점점 더 자유함을 얻는가, 아니면 성가신 의무가 되는가? 하나님의 훈계와 약속을 섭취함으로써 당신이 받은 영적 은혜들을 잘 점검하여 보고 믿음이 생동력 있게 역할을 다 하는가 확인하라. 당신의 소망은 살아 있어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는가? 당신의 사랑은 더운가 차가운가? 인내와 겸손과 절제가 더 나아졌는가 아니면 더 못하여 졌는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순전하고 거룩한 것들을 마음에 잘 공급한다는 의미이다. 어린아이가 더러운 물건을 손에서 버리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오렌지나 사과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단의 유혹에서 영혼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혼으로 하여금 더 사랑스럽고 만족을 주는 대상에 쏠리게 하는 것이다. 선한 것으로 충만하여 그 일에만 전념하는 마음은 악에서 가장 잘 보호되고 있는 마음이다.
빌립보서 4:6-8의 순서를 잘 주목하기 바란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던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영혼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장 좋은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정결한 공기가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호흡에 필요하며 건전하고 사랑할 만하고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일들만 생각할 때 이 호흡은 잘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 자주 교제하라. 그의 사랑스러우심 위에 거하며 그가 임재하시는 밝은 태양빛 안에 머물며 주께서 주시기로 늘 예비하신 은사와 은혜로 당신의 영혼을 새롭게 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당신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이같은 것들(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리스도의 영광)로 충만하여 있으며 사로잡혀 있으며 소유되어 있다고 하면, 또한 이런 일들이 마땅히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의 행복이 있다고 하면 도색된 쾌락과 사탕발린 독과 독묻은 미끼를 가진 죄가 어떻게 우리 영혼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 때에 우리는 죄가 가져다 주는 것을 모두 미워하며 ‘더러운 것들아 물러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John Owen)
이 세상 사람들이 가난한 자가 산업이 없이 부자되기를 기대하며 허약한 자가 음식과 운동이 없이 건강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진지한 열심과 근면한 노력이 없이 믿음에 부요하여지고 하나님께 담대하려고 한다. 우리가 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요 15:5)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지 않고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아무런 상을 베풀지 아니하시며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고 약속하시었다.
한 농부가 자기 밭에서 소출을 내려고하다가 아무런 도움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밭의 비옥도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고 깨달으며 기도의 효력을 굳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의 곡간은 텅텅 비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게으름뱅이가 되도록 부르시지는 않았으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부르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일하고 애쓰고 수고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중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일에 관계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일은 무시하고 지엽적인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이 말씀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하신 큰 임무이다. 그러나 지키라고 하신 마음을 우리가 얼마나 소홀히 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사 중에서 마음을 지키는 일은 거의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관심거리들, 즉 자신에 대한 평판이나 자신들의 몸이나 세상에서의 자기 위치등에 대한 관심에만 빠져 있는 한, 마음은 자기 멋대로 내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심장(heart)이 우리 신체 중에서 피를 각 부분에 순환시켜 건강과 질병을 전하여 주므로 신체 한 가운데 있어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의 마음이 불경건과 교만과 완악과 악의와 더러운 정욕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면 우리 생명의 모든 순환이 악한 것들로 더럽혀질 것이다. 이 악한 요소들이 들어와 마음을 일시라도 다스리게 되면 우리의 성품과 행동은 비례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잘 보호될 필요가 있으며 항상 마음을 공격하는, 조심하여야 할 수많은 공격자들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 영혼의 샘을 잘 보호하여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에 독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됨됨이는 그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고 한다면 그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만약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상태에 있다면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시계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중요한 스프링 때문에 모든 톱니바퀴와 부속품들이 잘 움직일 수 있듯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어떠한”(잠 23:7)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행동도 바를 것이다.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인간의 현재와 미래 상태도 결정된다.
인간의 마음이 거듭나고 성화하면 이 세상에서는 믿음과 성결의 생활을 할 것이요, 다가올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우물을 청소하기보다는 마음을 청결케 하며, 당신의 양떼를 먹이기 보다는 마음을 먹이며 집을 지키기 보다는 마음을 지키며 당신의 돈을 지키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을 지키라.”(Petter Moffat, 1570)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여기서 마음은 우리의 내적 존재, 즉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음은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을 통제하고 그 일에 성격을 부여한다. 마음, 즉 영혼을 지키는 일-수비대나 파수대로서 - 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임무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이를 행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헛된 것에서부터 생각을, 오류에서 이해력을, 완악함 에서부터 의지를, 죄책에서 양심을, 무절제와 악한 일에서부터 우리의 성향을, 악한 것이나 무익한 것에서부터 마음을 지켜야만 한다. 우리 존재 전체를 사단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여하신 임무이다.
청교도였던 죤 페이블(John Favel)의 말은 지극히 정당하다. “모든 상황에 있어서 마음을 지키고 바르게 유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크고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마음을 바르게 지킨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바르게 놓여져 있다고 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바르게 놓여지는 것은 중생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새로운 영적 성향이 주어졌을 때이다. 참된 회심은 마음이 사단의 다스림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죄로부터 거룩함으로 돌아가며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거듭나 인간이 은혜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성결의 상태에서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고자 끊임없이 돌아보고 애쓰는 것이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일들이 여기에 달려 있다. 지켜진 마음과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앞으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에 미치지 못하여 잃어버린 인생이 될 것이며 미래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잃어버린 인생이 될 것이다”(John Owen, Cause of Apostasy에서)
1.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적되는 모든 것에서 마음을 가리워 지키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 보좌에 않기를 요구하시며 당신만을 최고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어떤 것을 향해 무절제하게 끌리고 있음을 인식하였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마귀와 싸워야 한다. “모든 것에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은 그가 마음을 부지런히 지켰으며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할 경외의 자리가 자기 영혼 속에 잘못 들어와 있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는 뜻이다. 아주 작은 물체라도 우리 눈앞에 가까이 있기만 하면 태양 빛을 가리게 되듯이 아주 사소한 세상의 일이라도 우리의 마음이 그리로 좇아가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단절되어 버린다.
중생이 있기 이전에 우리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었다(렘 17:9). 이는 악의 원리, 즉 육체가 마음을 전적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가 회심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영을 다스리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을 쉬지 말고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며 마음이 속기 잘하는 성질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며 마음이 유혹에 타협하기 쉬운 사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음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 중에 해로운 것이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방비하여야 할 것이며 특별히 헛된 생각과 상상을 경계하되 어떤 이익을 얻게 될 때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해로운 사상들이 생각 안으로 들어올 길을 얻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그 사상들을 즐기게 된다면 “영적인 생각을”(롬 8:6) 하는 상태를 원하는 우리의 소망은 헛되게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전혀 힘써서 자기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의 성향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주목하는 것을 말하며, 세상의 일들이 그의 마음을 점점 더 확고하고 완전하게 사로잡고 있는지 아니면 점점 매력을 잃고 있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계하신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이 훈계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늘 시험하며 속이는 멸망할 세상에는 점점 더 죽은 마음이 되어 가는지, 하늘의 것들에서는 귀하고 가장 큰 기쁨을 찾아내고 있는지를 살피라고 하는 것이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신 4:9)
2.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말씀의 순전하고도 거룩한 교훈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마음에 새겨지기 전까지 우리는 만족하여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슬프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의 교훈을 희롱하고 있으며 자기 환상 속에서 이를 멋대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이 교훈들을 붙들어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날카로운 설교의 말씀을 듣거나 신앙적인 글들일 읽었을 때 받은 엄숙한 인상들이 어떻게 그다지도 사라져 버리는가? 당신 안에서 일어났던 그같은 거룩한 감정이나 열망들이 왜 지속되지 않는가? 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그 인상이나 감정이나 열망들로 온전히 감동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은 “받고 들은것”(계 3:3)을 “굳게 잡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로 당신의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다시 빠져 들어가 말씀이 질식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강력한 메시지를 듣거나 읽고 마음이 깊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당신의 편에서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구나”(호 6:4)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장소에 못을 박으시듯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심으로 마귀가 그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열심과 끈기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눅 2:19)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지 않는 일은 쉬 잊어버린다. 말씀을 읽을 때 묵상하는 것은 음식을 먹을 때 잘 씹는 것과 같다. 무엇이 요구되는가? 바로 이것이다. 배운 바를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빛을 따라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배운 바를 즉시 빼앗길 것이다.(눅 8:18).
외면적인 행동이 말씀에 의해 조절되어야 할 뿐 아니라 마음도 역시 말씀과 일치하여야 한다. 살인의 행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까닭 없는 분노도 버려야 한다. 간음의 행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적인 정욕도 또한 억제해야 한다(마 5:28). 하나님은 외면적인 행위를 모두 주목하고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심령을 감찰”(잠 16:2)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행동의 배경을 면밀히 살필 것과 그 동기를 시험할 것과 어떠한 영으로 행동하고 있는 가를 생각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시 51:6) 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신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3.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죄에 취약한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의미이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종교적인 죄(sin)와 윤리적인 죄(crime)를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자기가 사는 사회의 법 안에서 행동하고 동료 인간들에게서 존경의 평판을 받고 있는 한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전혀 이와 다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서 있으며 자기 인생의 모든 회계 보고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을 가지고 신경을 쓴다. 처음 성령이 그에게 죄를 깨닫도록 하셨을 때 자기의 전 인생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었으며 자기만을 기쁘게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의 마음을 관통하여 깨어나게 하였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뇌는 신체의 어떤 부분을 잃은 것보다 더욱 큰 고통이 된다. 그는 자신이 영적인 문둥이임을 깨닫고 그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슬피 애통하는 것이다. 그는 부르짖는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9-10)
이 같은 죄에 대한 죄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한 부분이다. 가증한 자기 고집과 자기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고통에 마음이 둔감하지 않도록 신자는 매일 노력하여야 한다. 신자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게 하며 악행을 가벼이 여기게 하며 변명하게끔 하도록 애쓰는 사단의 모든 노력에 대해 끊임없이 대항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눈이 자기 위에 머물러 있음을 항상 인식하여 시험받을 때마다 요셉이 한 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이 말을 자신에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
신자는 영광의 주께서 자기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은 자기의 범죄 때문인 것을 날마다 상기하며 십자가의 관점에서 자기 죄를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므로써 구세주가 구속하신 모든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성결과 순종에 배치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더욱 마음을 부지런히 지키는 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다. 오늘날 안일한 신앙을 가르치는 종교들은 그 추종자들을(차라리 희생자들인) 결코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대답 하신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 3-4)
신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 청결한 마음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요, 죄에 대항해 싸우는 마음이다. 청결한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요,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곳을(엡 3:17) 더럽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이다.
4. 마음을 지키는 것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도록 부지런히 살피는 마음이다.
독자 중에는 자주 “오, 내 마음이 이다지 사악한가”고 부르짖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하여 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바란다. 진정 당신의 마음이 그러하고 또 실제로 그것을 느낀다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눈멀고 무관심하고 입으로만 신자임을 고백하는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당신을 구분하여 내셨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의 마음이 계속하여 사악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당신의 정원에 잡초와 쓰레기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비통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상태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현재 당신 안에 여전히 거하는 죄로 물든 본성인 치료와 변화가 불가능한 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당신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서 헛된 상상을 깨끗이 치울 책임은 당신에게 있으며 불법으로 향하는 생각을 당신의 영혼에서 제거하고 양심에서 죄책을 제거할 책임도 당신에게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없다. 그것들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나타나며 그것들을 막을 힘이 내게는 없다.” 당신을 그렇게 믿게 한 것은 마귀이다. 당신의 정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잡초는 원래 청하지 않아도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마당벌레나 해충들은 식물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력한 것을 슬퍼만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다. 대항해 싸워야 한다. 제거할 수단들을 취하여야 한다.
도적은 청함을 받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과 창문을 단속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사단의 유혹하는 자장가에 마음을 두지 말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두 마음, 한 마음은 하나님께로 또 한 마음은 자기에게로 향한 것을 말한다. 한 마음은 거룩함으로 또 한 마음은 죄의 낙으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마음을 “정결케”할 것인가? 속에 들어간 더러운 것들을 다 토해 내어야 한다. 부끄러운 낯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것들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것들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그것들을 증오하면서 돌이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매일 새롭게 하는 회개를 함으로써 “정결케”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7:11은 그러한 회개에 관하여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날마다 믿음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보혈로 깨끗이 씻으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 13:1)에 밤마나 목욕함으로써 정결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따라 감으로써 정결케 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이제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인인 독자들에게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마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하는 모든 의무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그리고 분명하게 은혜와 도움을 성령께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마음의 순전함으로 말하여야 한다.
“주여 당신은 부지런히 제 마음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온전히 그 명령을 이룰 수 없음을 느낍니다. 제 연약하고 초라한 능력으로는 그런 일을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겸손히 구합니다. 주께서 제게 명하신 대로 행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저에게 은혜로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여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내 속에 역사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