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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73회
진문공(晉文公)은 왕성(王城)에서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처형하고, 진목공(秦穆公)에게 재배하고 감사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부인을 대하는 예로써 회영(懷嬴)을 맞이하여 귀국하겠다고 청하였다. 진목공이 말했다.
“과인의 어린 딸이 이미 세자 어(圉)에게 절개를 잃었으니, 군후의 종묘에 욕이 되지 않을까 두렵소. 빈(嬪)이나 궁녀로 거두어도 족할 것이오.”
문공이 말했다.
“秦과 晉은 대대로 우호를 맺어 왔으니, 그 일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데 부족하지 않습니다. 장인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중이가 출국한 것을 晉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제 대혼(大婚)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혼’은 임금의 혼인을 말한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면서 문공을 다시 도성인 옹도(雍都)로 맞이하여, 수레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회영과 잉첩 넷을 데리고 돌아가게 하였다. 또 친히 딸을 황하까지 전송하였는데, 그때 정병 3천이 호송하였다. 그 정병 3천을 ‘기강지복(紀綱之僕)’이라고 하였다.
[제70회에, 진목공이 회영을 중이에게 시집보내면서 공족의 딸 넷을 잉첩으로 함께 보냈다. ‘기강지복’은 최고로 훈련되어 군율이 있는 정예 용사를 의미한다. 여기서 유래된 ‘기강(紀綱)’이라는 말이 후에 집안이나 나라를 바로잡는 근본 도리를 뜻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문공이 회영 등과 함께 황하를 건너가자, 조쇠(趙衰) 등 여러 신하들이 어가를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조쇠 등이 문공 부부를 영접하여 어가에 태우고, 백관이 호종하였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풍악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지난번에 야밤에 궁을 나와 도망칠 때에는 마치 땅 위에 올라온 거북이 머리와 꼬리를 움츠리듯 하였는데, 이번에 돌아올 때에는 봉황이 언덕 위에 출현하여 암수가 함께 잠자고 함께 나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차일시 피일시(彼一時 此一時)’였다.
[‘쌍숙쌍비(雙宿雙飛)’는 암수가 함께 잠자고 함께 난다는 뜻으로, 부부가 깊은 애정으로 함께 기거함을 이른다. ‘차일시 피일시’는 ‘그때는 그때고, 이때는 이때다.’라는 뜻으로, 각각 때에 따라 행한 일이 조금도 모순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문공이 강성(絳城)에 당도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올리고 경하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고, 회영을 부인으로 삼았다.
예전에 진헌공(晉獻公)이 백희(伯姬)를 진목공에게 출가시킬 때, 태복(太卜) 곽언(郭偃)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했었다. 그때 점괘가 ‘대대로 장인과 사위가 되며, 우리 군주를 세 번 정해준다.’라고 했었다. 백희는 진목공의 부인이 되었고, 목공의 딸 회영은 또 진문공의 부인이 되었으니, 바로 대대로 장인과 사위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제50회에, 진목공이 진헌공의 장녀 백희에게 청혼했다. 진헌공의 장녀였을 때는 ‘백희’라 했고, 목공에게 시집가서는 ‘목희’라고 불렸다. 그때 태복 곽언의 점괘가 ‘소나무와 잣나무가 이웃이 되고, 대대로 장인과 사위가 되며, 우리 군주를 세 번 정해준다. 혼인하면 이롭고, 싸우면 이롭지 않다.’고 하였다. 태사(太史) 소(蘇)의 점괘는, ‘장사가 양을 찔렀으나 피가 나지 않고, 여인이 광주리를 이었으나 담긴 것이 없네. 서쪽 이웃이 꾸짖는 말에 대꾸할 말이 없네.’라고 했었다. 그건 제60회의 한원 대전을 예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목공은 앞서 이오(夷吾)를 귀국시켜 주었고, 다음에 중이를 귀국시켜 주었었다. 이번에 또 문공이 난을 피해 출국했을 때, 목공 덕분에 여이생과 극예를 유인하여 죽임으로써 다시 晉나라를 안정시켰으니, 군주를 세 번 정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또 진목공이 예전에 꿈에 보부인(寶夫人)의 인도로 천상의 궁궐로 가서 상제를 알현했었는데, 전상에서 목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임호(任好)는 내 뜻을 받들어 진란(晉亂)을 평정하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었다. 목공은 먼저 이극(里克)의 난을 평정했고, 또 여이생과 극예의 난을 평정했으니, 점괘와 꿈이 모두 징험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제52회에, 진목공이 보부인의 꿈을 꾼 일과 보부인의 내력에 대해서 얘기했다.]
萬物榮枯皆有定 만물의 영고(榮枯)는 모두 정해져 있는데
浮生碌碌空奔忙 덧없는 인생에 부질없이 바쁘기만 하구나.
笑彼愚人不安命 저 어리석은 자들이 천명에 안주하지 못함이 우습구나.
強覓冬雷和夏霜 억지로 겨울에 우레를 찾고 여름에 서리를 찾으려 하는가?
[‘영고(榮枯)’는 ‘초록의 무성함과 말라죽음’인데, 사물의 번영과 쇠락을 비유하는 말이다. 보통 ‘영고성쇠(榮枯盛衰)’라고 한다.]
문공은 여이생과 극예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 그 도당들까지 모조리 죽이려 하였다. 조쇠가 간했다.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은 너무 각박하게 하다가 인심을 잃었습니다. 주군께서는 마땅히 관용을 베푸셔야 합니다.”
문공은 조쇠의 말에 따라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그러나 여이생과 극예의 도당들은 대사령을 듣고도 마음이 불안하여,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나돌았다. 문공은 이를 근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하급관리였던 두수(頭須)가 궁문에 와서 문공을 알현하고자 하였다. 그때 문공은 머리를 풀고 막 목욕을 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노하여 소리쳤다.
“그놈은 나의 재물을 훔쳐 도망친 놈이다. 그래서 과인은 노자가 없어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걸식을 하였건만, 그놈이 대체 뭣 때문에 왔단 말이냐!”
[제61회에, 발제(勃鞮)가 혜공의 명으로 중이를 암살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중이가 적나라를 떠날 때 두수는 재물을 갖고 도망쳤었다.]
문지기가 문공의 명을 받아 거절하자, 두수가 말했다.
“주군께서는 지금 목욕을 하고 계신 모양이오.”
문지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보통 목욕을 할 때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히기 때문에 마음까지도 뒤집혀지는 법이오. 마음이 뒤집혀 있으니, 나오는 말도 전도(顚倒)되기 마련이오. 그래서 날 만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오. 주군께서는 발제를 용납하셨기 때문에 여이생과 극예의 난을 면할 수 있었소. 그런데 어찌 지금 두수만 용납하지 않으시겠소? 두수가 지금 찾아온 것은, 晉나라를 안정시킬 계책이 있기 때문이오. 그래도 주군께서 거절하신다면, 두수는 여기서 도망칠 것이오.”
문지기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문공은 말했다.
“과인의 실수로다!”
문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두수를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두수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뒤 말했다.
“주군께서는 여이생과 극예의 도당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문공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단히 많다고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대사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그들을 안심시킬 방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들을 안심시킬 계책이 있느냐?”
“신은 주군의 재물을 훔쳐 주군을 굶주리게 한 자로서, 신이 죄가 있음은 온 나라가 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주군께서 외출하실 때 신을 어자로 삼으신다면, 온 나라 사람들은 그들이 들은 바를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주군께서는 지나간 잘못을 생각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연히 의심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좋다.”
[‘불념구악(不念舊惡)’은 지나간 남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난날의 원한에 집착하지 않는 넓은 마음을 가리킨다. 논어에서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지난 악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원망하는 자가 드물었다.[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라고 하였다.]
문공은 두수를 어자로 삼아 성안을 순시했다. 이를 본 여이생과 극예의 도당들은 서로 소곤거렸다.
“두수는 주군의 재물을 훔친 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를 예전의 직위에 다시 임용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로부터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문공은 두수를 다시 예전의 창고지기에 복직시켰다. 이러한 문공의 넓은 도량이 晉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문공은 공자 시절에 이미 두 아내를 얻었었다. 첫 번째 아내는 서영(徐嬴)인데 일찍 죽었다. 두 번째 아내 핍길(偪姞)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환(驩)이고 딸은 백희(伯姬)라 불렸다.
[제69회에, 송양공(宋襄公)이 말하기를 ‘중이(重耳)는 예전에 이미 송나라 여인과 혼인한 적이 있다.’고 했었다. 핍길이 바로 송나라 여인이다. 제50회에, 진헌공의 장녀도 백희라고 했듯이, ‘伯’은 형제 서열이 첫째라는 것을 뜻하고 ‘姬’는 晉나라 공실의 성이다.]
핍길 역시 포성(蒲城)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문공이 포성을 떠나 망명할 때 자녀가 모두 어려서 포성에 버려두고 떠났는데, 두수가 그들을 거두어 포성에 사는 수씨(遂氏)에게 맡겨 기르게 하고 매년 양식과 비단을 공급하여 부족함이 없게 해주었다.
[중이가 포성을 탈출하여 적나라로 망명한 일은 제54회에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두수가 문공에게 죄만 지은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한가한 틈을 타서, 두수가 두 자녀에 대해 문공에게 얘기하였다. 문공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과인은 그 아이들이 병사들에게 죽음을 당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아있단 말인가?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두수가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어미는 자식으로 인해 귀해지고, 자식은 어미로 인해 귀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주군께서는 열국을 주유하시면서, 가는 곳마다 여인을 얻어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공자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주군의 뜻이 어떠신지 몰라 감히 일찍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과인은 못된 아비란 이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문공은 즉시 두수로 하여금 포성으로 가서 수씨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회영을 그들의 어머니로 삼고, 환을 세자로 책립하였으며, 백희를 조쇠에게 시집보냈다. 그녀는 조희(趙姬)라 불리게 되었다.
[제61회에, 적나라에서 구여(咎如)를 정벌하여 얻은 두 미녀 가운데 계외(季隗)를 중이에게 시집보내고 숙외(叔隗)를 조쇠에게 시집보냈다. 중이의 신하 가운데 첫째가 조쇠임을 알 수 있다.]
적후(翟侯)는 문공이 군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경하하면서 계외도 晉나라로 보냈다. 문공이 계외에게 나이를 묻자, 계외가 대답했다.
“이별한 지 8년이 되었으니, 지금 32세입니다.”
문공이 농담으로 말했다.
“다행히 25년이 되지 않았구려.”
[제61회에, 중이가 적나라를 떠나면서 계외에게 ‘내가 25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타인에게 개가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하자, 계외는 ‘지금 첩의 나이가 스물다섯인데, 다시 25년이 지나면 첩은 늙어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개가하겠습니까? 첩은 당신은 기다릴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제효공(齊孝公) 역시 사신과 함께 제강(齊姜)을 晉나라로 보냈다. 문공이 그녀의 옥성지미(玉成之美)에 감사하자, 제강이 말했다.
[‘옥성지미’는 옥을 이룬 아름다움, 즉 고난을 겪고 일을 성취한 훌륭함을 이르는 말이다.]
“첩이 부부의 즐거움을 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떠나시게 했던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함이었습니다.”
[제68회에, 제강은 떠나지 않으려는 중이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하고, 조쇠 등으로 하여금 강제로 수레에 싣고 떠나게 하였다.]
문공은 제강과 계외의 어진 덕을 회영에게 얘기하였다. 회영은 칭찬해 마지않으며, 부인의 지위를 두 여인에게 양보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궁중의 지위를 다시 정했는데, 제강을 부인으로 삼고, 계외를 그 다음, 회영을 또 그 다음으로 순서를 정하였다.
조희는 계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 조쇠에게 숙외 모자를 맞이해 오라고 권하였다. 조쇠가 사양하며 말했다.
“주공의 은덕으로 당신과 혼인했는데, 어찌 감히 다시 적녀(翟女)를 생각할 수 있겠소!”
조희가 말했다.
“그런 세속의 야박한 말씀을 첩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첩이 비록 귀한 몸이라 하더라도, 숙외는 먼저 배우자가 된 사람이고 아들까지 있습니다. 어찌 새 사람만 사랑하여 옛사람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조쇠는 말로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희는 궁으로 들어가 문공에게 아뢰었다.
“숙외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저는 어질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부군께서 이 일을 처리해 주십시오.”
문공은 적나라에 사신을 보내 숙외 모자를 영접해 오게 하였다. 조희는 부인의 지위를 적녀에게 양보하고자 하였으나, 조쇠는 승낙하지 않았다. 조희가 말했다.
“그분은 저보다 나이도 많고 저보다 먼저 시집왔습니다. 나이로나 시집온 선후로나 그 순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 돈(盾)은 이미 장성했고 또 재주가 있으므로 마땅히 적자로 세우셔야 합니다. 첩은 건넌방에 거처하는 것이 이치상 당연합니다. 만약 당신이 제 말을 따라주지 않으시면, 첩은 궁중으로 물러나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조쇠는 어쩔 수 없이 조희의 말을 문공에게 아뢰었다. 문공이 말했다.
“내 딸이 그처럼 양보할 줄 아니, 비록 주태임(周太姙)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보다 더 낫지 못할 것이오!”
[‘주태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妊)을 말하는데, 문왕을 태중에서부터 가르쳤다 하여 태교(胎敎)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문공은 숙외 모자를 입조하게 하여, 숙외를 부인으로 삼고 조돈(趙盾)을 적자로 세우게 하였다. 숙외 역시 극구 사양하였으나, 문공이 조희의 뜻을 설명하자, 절하며 명을 받고 사은하고 돌아갔다.
그때 조돈의 나이는 17세였는데, 풍채도 좋고 기상이 당당하였으며, 거동에 법도가 있고 시서(詩書)에 통달하였으며, 활쏘기와 말 타기에도 정통하였다. 조쇠는 조돈을 아주 사랑하였다. 후에 조희는 동(同)·괄(括)·영(嬰) 세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조돈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제3회에, 조숙대(趙叔帶)가 가족을 데리고 晉나라로 가서 조씨 가문의 조상이 되었는데, 조쇠와 조돈 같은 사람이 바로 그 후예라고 하였다. 훗날 조씨·한씨·위씨가 晉나라를 삼분하여 제후가 된다.]
사관이 조희의 어진 덕을 글로써 칭찬하였다.
陰性好閉 여자는 성격이 폐쇄적이어서
不嫉則妒 미워하지 않으면 시기하게 된다.
惑夫逞驕 남편을 미혹시키고 교만해지며
篡嫡敢怒 적자의 자리를 빼앗고자 분노한다.
褒進申絀 포사(褒姒)는 신후(申后)를 쫒아내고
服懽臼怖 백복(伯服)을 낳아 기뻐했으나 의구(宜臼)를 두려워했다.
理顯勢窮 이치가 드러나 형세가 궁해지자
誤人自誤 남을 그르치더니 자신도 그르쳤도다.
貴而自賤 귀하면서도 스스로 천한 길을 택하고,
高而自卑 지위가 높으면서도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았다.
同括下盾 동(同)과 괄(括)을 돈(盾)의 아래에 두고
隗壓於姬 숙외를 자신보다 위에 두었도다.
謙謙令德 겸양하고 또 겸양하는 아름다운 덕은
君子所師 군자들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니
文公之女 문공의 딸이요
成季之妻 성계(조쇠)의 아내로다.
한편, 진문공은 나라를 되찾은 일에 대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시행했다. 신하들을 모두 소집하여, 3등급으로 나누었다. 함께 망명했던 신하들이 일등공신이 되고, 국내에서 맞이한 신하들은 이등공신, 투항한 신하들은 3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등급 안에서도 그 공로에 따라 경중을 구별하여 포상에 상하가 있었다.
함께 망명했던 일등공신 가운데서도 조쇠(趙衰)와 호언(狐偃)이 으뜸이 되고, 호모(狐毛)·서신(胥臣)·위주(魏犨)·호사고(狐射姑)·선진(先軫)·전힐(顛頡) 등이 그 다음이었다.
[제54회와 제68회에, 중이를 따랐던 아홉 명의 호걸 이름이 나오는데, 개자추만 빠졌다.]
국내에서 맞이한 이등공신 가운데서는 난지(欒枝)와 극진(郤溱)이 으뜸이 되고, 사회(士會)·주지교(舟之僑)·손백규(孫伯糾)·기만(祁滿) 등이 그 다음이 되었다.
[제71회에, 난지의 아들 난돈(欒盾)이 秦나라로 와서 중이에게 난지·극진·주지교가 국내에서 내응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중이가 황하를 건너가자, 난지와 극진이 앞장서고 사회·주지교·양설직·순림보·선멸기·정선도 등이 뒤를 따라 황하까지 나와 영접했다. 손백규와 기만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명된 적이 없다.]
투항한 삼등공신 가운데서는 극보양(郤步揚)과 한간(韓簡)이 으뜸이 되고, 양요미(梁繇靡)·가복도(家僕徒)·극걸(郤乞)·선멸(先蔑)·도격(屠擊) 등이 그 다음이 되었다.
[제71회에, 중이가 晉나라로 돌아가자 극보양·양요미·한간·가복도 등은 강성 교외로 나와 중이를 영접하였다. 선멸이 황하까지 영접하러 온 선멸기와 동일인물이라면, 착오가 있는 것이다. 그때 극걸과 도격은 거명되지 않았다. 제57회에, 극걸은 극예의 사촌동생이라고 하였다. 도격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명된 적이 없었는데 도안이의 아들이다. 도안이는 제55회에 탁자와 순식을 살해했던 용사인데, 제60회에 건시 대전에서 秦의 백을과 싸우다가 붙잡혀 참수 당했다.]
식읍이 없는 자에게는 식읍을 하사하고, 식읍이 있는 자에게는 봉지를 더해 주었다. 문공은 따로 백벽 다섯 쌍을 호언에게 하사하며 말했다.
“지난번에 황하에 던졌던 백벽을 이걸로 갚겠습니다.”
[제71회에, 중이가 황하를 건널 때 그간 사용했던 낡은 물품들을 버리자, 호언이 진목공에게서 받은 백벽을 중이에게 바치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중이가 백벽을 황하에 던지면서, 함께 망명했던 신하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문공은 또 호돌(狐突)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생각하고, 진양(晉陽) 마안산(馬鞍山)에 사당을 세웠다. 후인들은 산 이름을 호돌산이라고 하였다.
[제70회에, 호돌은 호모와 호언 두 아들을 불러들이라는 진회공의 명을 거역하여 참형을 당했다.]
문공은 성문에 방을 내걸어, 공로가 있으면서도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나서라고 하였다. 호숙(壺叔)이 나아와 말했다.
“신은 포성(蒲城)에서부터 주군을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느라 발바닥이 모두 갈라졌습니다. 주군께서 거처하실 때는 잠자리와 음식을 시중들었고, 다니실 때는 수레를 몰아 잠시도 곁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군께서 함께 망명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시면서, 신에게는 상을 내리지 않으시니, 신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문공이 말했다.
“이 앞으로 오너라. 과인이 너를 위해 분명히 일러 주겠노라. 과인을 인의(仁義)로써 인도하여 과인의 폐부(肺腑)를 밝혀 준 사람은 최고상을 받았고, 계책을 써서 과인이 제후들로부터 모욕을 받지 않도록 해준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으며,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선봉에 서서 몸으로 과인을 호위해 준 사람은 또 그 다음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는 덕을 포상하였고, 두 번째로는 재능을 포상하였으며, 세 번째로는 공을 포상한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따라다닌 것은 노고로서 필부의 힘이므로, 또 그 다음이다. 3등급의 상을 내린 후에 너에게도 상을 내릴 것이다.”
호숙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문공은 많은 황금과 비단을 내어 어자나 하인들에게까지 모두 상을 내렸다. 상을 받은 자들은 감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오직 위주와 전힐 두 사람만은 자신의 재능과 용력을 믿고, 조쇠나 호언 같은 문신들이 말을 잘하는 것으로 자기들보다 더 높은 상을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원망하는 말을 자주 했다. 문공은 그들의 공로를 생각하여 나무라지 않았다.
[제54회에, 중이가 포성에서 도망쳐 적나라로 갔을 때, 위주는 적나라의 원조를 받고 포성 사람을 동원해 晉나라로 쳐들어가자고 주장했었다. 제55회에, 이극이 탁자를 죽이고 중이를 영접하려 할 때, 위주는 귀국하자고 주장했었다. 제62회에, 위나라에서 중이를 거절하자, 위주는 위후를 꾸짖을 것을 주장하고, 또 마을을 약탈하자고 주장했었다. 오록 땅에서 농부들이 중이에게 흙덩어리를 주자, 위주는 화를 내며 농부들을 꾸짖고 그릇을 집어던져 깨뜨려 버렸다. 개자추가 허벅지살을 베어 중에게 바쳤을 때, 조쇠가 호찬을 갖고 뒤따라오고 있었는데, 위주는 조쇠가 호찬을 먹어 버렸을 거라고 말했다가 호모에게 망신을 당했었다. 제70회에, 중이가 초나라에 있을 때 위주는 맥(貘)이라는 짐승을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이처럼 위주는 용력이 대단하여 문공이 아낄 뿐, 문공의 뜻과는 항상 어긋나는 사람이었다. 과연 위주는 훗날 어떤 일을 저지를까?]
한편, 개자추(介子推)도 원래 문공을 따라 망명했었는데, 지조가 비할 바 없이 굳센 사람이었다. 황하를 건널 때 호언이 공을 자처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비루하고 천박하다고 생각하여 그와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그래서 귀국한 다음 조정에서 한번 하례를 한 이후 병을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가, 청빈한 삶을 살면서 몸소 짚신을 짜서 노모를 봉양하고 있었다.
문공이 신하들을 소집하여 논공행상할 때 개자추가 보이지 않았지만, 깜빡 잊고 묻지 않았었다. 개자추의 이웃에 사는 해장(解張)이란 사람이, 개자추가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한 것을 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던 차에 상을 받지 못한 자는 스스로 나서라는 방을 보고서 개자추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개자추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개자추의 노모가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19년 동안이나 주군을 따라다녔고, 허벅지살을 베어서 주군을 구한 적도 있어, 그 노고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느냐? 가서 쌀이라도 좀 받아오면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니, 짚신을 짜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
개자추가 대답했다.
“헌공(獻公)의 아들 아홉 가운데 오직 주군만이 가장 어집니다.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이 부덕(不德)하여 하늘이 그들로부터 나라를 빼앗아 주군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 신하들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서로 자신의 공로만을 내세우니, 저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평생 짚신을 삼을지언정 하늘의 공을 탐하여 제 공으로 내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록 네가 봉록을 구하지는 않더라도, 한번 입조하여 허벅지살을 베어 준 공로라도 잊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이미 주군께 구할 것이 없는데, 만나서 뭐 하겠습니까?”
“너는 정말로 청렴한 선비로구나. 내 어찌 청렴한 선비의 어미가 되지 못하겠느냐? 우리 모자는 이 혼탁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중에 은거하여 살자꾸나.”
개자추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소자는 평소에 면산(綿山)을 좋아했는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습니다. 지금 그곳으로 가십시다.”
개자추는 노모를 업고 면산으로 들어가, 깊은 골짜기에 초가집을 짓고 초의목식(草衣木食)하며 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이웃에서는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간 지 몰랐는데, 다만 해장만 알고 있었다. 해장은 글을 써서 밤중에 성문에 걸어 놓았다.
[‘초의목식’은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껍질로 연명한다는 뜻이다.]
문공이 조회를 열자, 근신이 해장의 글을 수거해 문공에게 바쳤다.
有龍矯矯 뜻이 높은 용이 있었는데
悲失其所 슬프게도 거처할 곳을 잃었도다.
數蛇從之 몇 마리 뱀이 그를 따라
周流天下 천하를 떠돌아다녔네.
龍飢乏食 용이 배가 고파 먹을 게 없었는데
一蛇割股 한 마리 뱀이 허벅지살을 베었도다.
龍返於淵 용은 연못으로 되돌아와
安其壤土 자기 땅에 안주하였다.
數蛇入穴 몇 마리 뱀도 굴을 찾아
皆有寧宇 모두 거처할 집을 얻었건만
一蛇無穴 오직 한 마리 뱀은 굴을 찾지 못해
號於中野 벌판에서 호곡(號哭)하는구나!
첫댓글 개자추에 대하여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