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도 광주사태 유공자들과 피해자들이 있다. 북한에서는 광주사태 때 남한에 침투하여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교란작전을
하다가 전사한 이들을 공화국영웅이라 부르며 그 가족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 그러나 엉뚱한 광주사태 피해자들도 있다.
1982년 7월 중순경 80명의 건설부대 장병들이 한 공화국영웅에게 시비를 걸며 싸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공화국영웅의 이름은
장중한이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 남한 지하조직들과 손잡고 봉기를 일으키는 공작을 했던 인물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낫을 휘두르는
폭력시위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남민전 세력이었다. 남민전이 가톨릭농민회와 해남농민회 등 전남의 농민단체들에도 점조직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 남민전 계열의 운동권이 5월 19일 광주로 모여들어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가, 18일 광주사태가 터지자 예정대로
실행하였다. 이렇듯 광주사태 때는 낫을 든 자들은 장중한과 한 편이었다. 그런데, 2년 후 건설부대와의 예기치 않은 싸움판에서 한
북한군이 등 뒤에서 휘두르는 낫에 척추가 잘려 그는 죽었다.
장중한은 자신이 5·18 광주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그 싸움을 피하고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도
광주사태 피해자였다. 그는 5·18 광주의 영웅이자 광주사태 피해자였다. 그리고, 그와 싸우다 죽은 군인들도 5·18
광주의 영웅을 죽인 책임으로 총살형 당한 군인들도 그 사건의 연대 책임으로 불명예 제대를 한 여단장과 그의 부하들도 모두 광주사태의 엉뚱한
피해자들이었다.
북한 자강도 희천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비석이 있는데, 그 문구는 이러하다고 한 탈북군인은 증언한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pp. 128-129). 윤한봉처럼 이 사람도 자서전을 남겼다.
출판을 목적으로 쓴 윤한봉의 자서전과 달리 이 자서전은 공화국 영웅 장중한이 그의 노모에게 어느 누구한테도 절대로 보여주지 말고 잘
건사해 두라고 당부한 자서전이었다. 광주사태 공작에 대한 기밀도 기록되어 있다는데서 윤한봉의
출판용 자서전과 다르다. 그러기에 출판용 자서전에는 기록되지 않는 기밀도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겉표지는 많이 낡았고 자필로 깨알같이 쓴 이 두툼한 책에 놀라운 광주사태의 비밀,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으로부터 친필 서한을 받았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그 자서전을 본 탈북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 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pp. 131-132).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의 친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한 것은 단지 자서전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에게 그대로
보고되었다. 장중한이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죽자 중앙당 간부들이 직접 그의 고향까지 찾아와 5일장을 성대하게
치루어주었다는 사실로도 확증된다. 문익환 목사가 광주사태 직전 김일성의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1989년에도 김일성의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로 확증이 된다. 김남주와 더불어 남민전 전사로서 문익환 목사 동지였던 박석률이 그 사실을 증언한다. 윤한봉과는 중학교
동창 관계이기도 한 박석률이 1989년 초 문익환 목사를 찾았을 때 문익환 목사는 박석률에게 북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보여줬다. “통일원에서 이 편지를 전해
받았어요. 날더러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으로 오라는 초청장이야. 어떻게들 생각해?”
만약 문익환 목사가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다면 과연 김일성이 평양에서 만나자는 초청장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사전접촉과 사전교감이 있었다. 따라서 위 자서전 내용은 사실인 것이다. 사전접촉으로 김일성은 문익환 목사가 절대신임할 수
있는 부하임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재구 등 남민전 간부들이 출옥하자마자 김일성이 문익환 목사를 평양으로 불러들였으며, 문익환
목사는 출옥후 다시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남민전 동지들에게 그 초청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직후
안재구 등이 김일성의 지령으로 구국전위를 결성하였다.
윤한봉도 안재구 등 그의 남민전 동지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조직적으로 보살펴 주었던 인물이다. 김일성이
문익환 목사를 평양으로 부르고, 안재구에게 구국전위 결성 지령을 내렸을 무렵 그 초청장에는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는데,
그들도 북한에 밀입국 시킨 인물이 바로 윤한봉이었다. 광주사태 직전 대남공작원들이 문익환 목사를 접선하고 있었다는 대남공작원 자서전
기록이 있듯이, 광주사태 당시 대남공작원들이 접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서경원이다. 문 목사는 장중한의 자서전에
기록된 공작 대상들 중 한명이었을 뿐이고, 여러 명이 공작 대상이었다. 그 대상 중에는 윤한봉도 안재구도 서경원도 포함되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안재구는 1970년대에 그가 남민전 중앙위원이었을 때부터 김일성의 지령을 직접 받고 있었다.
윤한봉이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양을 밀입북시켰다는 사실은 그가 북한 당국과 내통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밝힌다. 언제부터
내통하였는가? 그가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내통하고 있었기에 미국에 가서도 교포들과 행사단을 북한에 보낼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한국
국민들까지 밀입국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서경원은 윤한봉의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소속이었는데, 문익환이 방북하였을 때 간첩 서경원도 문규헌과 함께 밀입국하도록 윤한봉이 도왔다. 그리고 윤한봉이 보낸 서경원에게
김일성이 공작금을 주었다. 김일성이 아무에게나 거금을 주었겠는가? 그해 1989년 서경원이 김일성에게 받아 김대중에게 전한
하사금이 1만 달러였다. 서경원은 남민전 점조직이었던 전남 가농 회장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그는
가톨릭농민회 전국연합회 회장이었다. 그는 또한 함평 농민사건 관련 운동권이었으며 5.18단체들이
광주사태 주동인물로 손꼽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윤한봉과 문익환과 안재구와 더불어 서경원도 김일성이 이미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윤한봉이 보낸 또 하나의 인물 문규현 신부가 지금껏 초지일관 반미운동으로, 주한미군철수운동으로 북한정권에 충성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면 1980년 봄에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이 친서를 보낼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는가? 그랬다. 문익환
목사가 국민연합 중앙위상임위원장이었는데, 모든 실권은 그에게 있었다. 김대중과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이 공동의장이었기는 했으나,
실권은 문익환 목사에게 있었다. 1988년 11월 17일의 광주청문회에서 우리는 김대중의 재밌는 논리를 발견한다. "문익환
목사가 다 알아서 하였다. 자기는 실권이 없었으므로 모르고, 모든 일은 문익환 목사가 결정하여 진행한 일이었다"는 투로 그는 책임을
회피하고, 책임 전가를 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허수아비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김대중이 어째서 자기를 허수아비로 비하하였는지는
재밌는 논리이다. 미국에서 광주사태 강연을 할 때는 자신이 중요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청문회 때는 모든 것을 문익환 목사에게 떠넘기는
것이 김대중의 모순된 논리였다. 그러나 문익환과 그의 동지들이 1990년대 초에 구국전위와 법민련을 결성하였을만큼 1980년대 초에도
문익환이 운동권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1980년 4월 10일 김대중이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고 국민연합에 복귀하자마자 문익환 목사는 윤한봉의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조직원이자 김대중의 홍위병이었던 조성우를 국민연합 중앙위원으로 거느렸던바, 1989년의 문 목사의 방북 후 다시 이들이 법민련을 결성하였다.
1980년 5월 8일 폭력시위 결의를 한 이들도 바로 문익환과 조성우였다. 그날 조성우는 문익환 목사의 지시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폭력시위를 결의하였으며, 12일의 국민연합 회동에서는 단지 김대중의 재가만으로 그 결의가 채택되었다. 따라서,
1980년 5월의 과격시위는 윤한봉과 문익환의 두 지렛대에 의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익환 목사가 실권을 쥐고 움직이던
국민연합이 전남민주청년협의회와 손잡고 전민봉기 거사준비에 착수할 무렵에 문 목사가 김일성의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총련은 신세대 운동권 단체이지만, 그 뿌리는 남민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일성이 안재구에게 구국전위를 결성하여 한총련을
장악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그 지시대로 안재구가 한총련을 장악하여 주체사상을 학습시켜 반국가 친북단체로 만들어놓았을 무렵 김영삼 대통령 정부가
안재구를 체포하였다. 만약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 김염삼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안재구는 민주화운동가였다. 광주사태의
가장 큰 주동세력 중 하나가 남민전이었으며, 안재구는 남민전 세력이 지도자로 떠받들던 인물이요, 모든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안재구를 동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김영삼 정부가 안재구의 간첩활동 증거물로서
`구국전위' 창립선언문, 강령 등과 북한이 보낸 조직결성 축하격려문, 대북보고문, 난수해독용 사전 등을 확보하고, 그를 체포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다. 분명한 것은 김영삼 정부도 안재구가 간첩이었음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안재구를 남민전 사건 때 문익환
목사가 가족 생홟비까지 대주며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대남공작원이 문 목사에게 김일성 친서를 전해준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지금껏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문익환의 동지 안재구의 충성심이 일편단심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문익환이 김일성 수령에게 생의
마감까지 충성하겠다고 맹세하였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문익환과 그의 주군 김일성이 같은 해 1994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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