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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14,18-20>
그 무렵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1,23-26>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1ㄴ-17>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의 신비를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이 신비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는 신비임과 동시에 그분의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신비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는 헤로데의 질문과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고백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 신원을 밝혀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신원과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제자인 우리가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루카 9,13)
이에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고 있는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오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리잡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촉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루카 9,16)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을 보고자 합니다.
아라비아의 신비가 사디가 전한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숲 속을 걷던 한 수행자가 네 다리가 전부 없는 여우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여우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호랑이 한 마리가 포획물을 입에 물고 와 자기 배를 채우고 나더니, 나머지를 여우를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도 신은 같은 방식으로 여우가 굶주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았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신의 사랑만 믿으면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겠지?”
그는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죽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 그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그릇된 길로 들어선 자여, 진실을 향해 눈을 떠라! 내가 너를 이 자리로 이끈 것은 하릴없는 여우 흉내나 내라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본받으라는 것이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호랑이에게 포획물을 얻을 힘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이미 그러할 힘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는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리 없는 여우를 보내주셨고, 굶주린 소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고, 또 빵을 떼어 주시며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인간관계를,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어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원입니다.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신원입니다.
이 사랑은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시면서 하신 말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라는 말씀에서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표현은 마태오(26,28), 마르코(14,24), 루카복음(22,20)의 ‘성찬례 제정’ 장면에서 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표현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에 빵을 들고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이라고, 또 잔을 들고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라고 축성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재생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체 성혈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어줌', '떼어 나누어줌', 이는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눈물겨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역시 자신을 '떼어줌'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을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루카 9,13)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시고,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최후 만찬상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만찬상에 대해 요한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경우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또는 죽음의 그 순간에도 사랑했다는 뜻인데 주님도 그러셨다는 뜻일까요?
제 생각에 그런 뜻도 있지만, 아마, 아니 틀림없이 그 이상일 것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하신 것은 물론 그 후에도 사랑하셨고, 그래서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가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셨고, 더 나아가서 세상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영원히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당연히 주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을 포함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주셨음을 포함하고 다 주시고 나서 더 주실 것이 없으니 당신 자신마저 주신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로운 인간이 죽으면서까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의 몸까지 그러니까 전신 기증까지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당신 생명을 바친 것과 당신 몸을 주신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인간이 당신 몸을 먹도록 주신 것인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 유효하려면 주님 말씀대로 그것을 기념하며 주님의 몸과 피를 마셔야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주시는 것이 주님 몫이라면 받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무리 영약이라 하더라도 먹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효하고, 먹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 몸과 피를 먹으라고 주실 때 우리는 받아 먹어야 하고, 그것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알고 기념하며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모르고 성체를 받아 먹는 사람에게는 성체가 쥐나 개에게 성체가 아니듯 성체가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축일의 부속가를 노래할 때마다 웃음이 나곤 하는데 바로 다음 구절 때문입니다.
"천사의 빵 길손 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마라."
천사의 빵이고 자녀들의 참된 음식을 개에게 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진짜 쥐나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일 뿐 아니라 개 같은 사람에게도 주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개 같은 사람입니다.
정말 주님의 이 사랑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개입니다.
이 사랑을 완전히 망각하고 기억하지 않는 사람도 개입니다.
기념하지 않는 사람도 결혼 기념일을 기념하지 않는 사람처럼 개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보증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으로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성찬례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양식인 성체로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지시길 희망합니다.
제가 감곡 매괴성모순례지성당에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미사를 마치면서 성체현시를 하고 신자들과 더불어 성시간을 거행하여 오후 5시에 성체강복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어느 목요일에 저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사랑입니다.
죄를 저질러도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날 있었던 한 자매의 목격담을 들었습니다.
제단의 성광에 성체를 모실 때 사제 옆에 서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가족 세자매가 함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막내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너무 죄송스러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매우 아쉬워하며 성시간 마무리 직전에야 제단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미처 사진에 담지 못한 안타까움을 두 언니에게 얘기하며 마지막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광에 모셔진 성체에서 ‘자비의 예수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사진을 보내 주셨는데 저도 ‘말씀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우연이든, 자연현상이든, 착시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고 회개의 삶으로 인도한다면 더없이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목요일 성시간에 많은 이들이 그 신비스런 현상을 볼 수 있었고 저도 목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함보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는 그 감동은 사라지고 ‘사진에 어떻게 담을까’ 하는 분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강론시간을 통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체의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신 그분을 보고도 내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목격담을 말하지 마십시오.
회개한 내 삶을 통해서 말하십시오!”
표징이나 어떤 신비스런 모습을 찾지 말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의 열정을 회복하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누구에게나 사적인 체험이 있을 수는 있지만,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귀한 체험을 해도 겸손이 없다면, 삶의 변화가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9개월의 감옥살이 동안 “가장 큰 고통은 미사를 드릴 수 없고,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이었다.” 고 회상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료들에게 “ ‘내가 더이상 미사를 거행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거든,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시오.”하고 미사의 중요성을 말하였습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예를 들면 나무를 접목할 때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영세한 지 오래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부속가에도 보면 "선인 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17),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18), 천상의 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21)" 하며 합당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영혼을 풍요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고 하루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시어....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풍요로움과 함께 바로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영양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영양을 취해야 합니까?
요한복음을 보면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6,57)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를 영함으로써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도 빵의 기적을 통하여 성체성사를 예표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빵을 배불리 먹게 해 주셨듯이 우리도 세상 사람들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배불리 먹게 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 없을 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고,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웃사랑의 기회가 오면 핑계를 대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민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주님의 도움으로 내 안에 영적 풍요로움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체를 모신 사람이고 성체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고히 할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는 분의 말씀의 의미가 살아있게 됩니다.
부속가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지전능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죽을 인생
저 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 하고
주님 밥상 함께 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24)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양식은 공동체를 만들고 음식은 외로움을 만든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이 살과 피는 탈출기의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세처럼 광야에서 헤매는 백성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십니다.
이 빵을 먹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체성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밝혀집니다.
먹는 것은 이것과 직결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02회에 9년째 구토하는 금쪽이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금쪽이는 14세 외동아들입니다.
머리가 좋은 아이였지만 구토증세를 달고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복통이 나며 이내 구역질을 합니다.
응급실에 가서 링겔을 맞아도 계속 구토가 나옵니다.
이 증상이 9년째 지속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금쪽이는 건강문제로 등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쪽이는 초등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중학교 복학은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건강과 학업이 동시에 걱정됩니다.
금쪽이는 제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사는 게 지옥 같다고 합니다.
금쪽이의 증상은 6살 때부터 장염을 앓은 후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을 전전하며 괜찮아지는가 싶었는데 11살쯤 다시 증상이 심해져 시골 학교로 전학을 하였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고 8번이나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쪽이는 대인관계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을 할 때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상대가 말하는 단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가 구토를 하는 이유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빠가 글씨 연습을 하자며 앉히자 숨이 거칠어지고 트림이 나왔고 구토 전조 증상까지 보였습니다.
금쪽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강요에 학교가 싫어졌습니다.
남들과 비교되는 게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공부 멈춤 선언’을 하라고 부모에게 말합니다.
일단 아이가 살아야 하니 그렇습니다.
부모가 주는 ‘밥’ 안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부모는 밥을 주며 자기 뜻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이 버거울 때는 부모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뜻이 부담스러워 뜻을 거부하니 몸이 음식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몸과 직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어떤 뜻이 들어 있을까요?
공부를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루카 9,12)
황량한 곳은 말 그대로 하면 사막처럼 텅 빈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텅 빈 곳을 당신 성체와 성혈로 가득 찬 곳으로 변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하셨을까요?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루카 9,14-17)
사막도 배불리 먹을 것이 있고 그 음식을 함께 먹을 공동체가 있다면 더는 황량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바뀝니다.
이를 위해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양식을 먹는 자녀들은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향으로 양식을 내어줍니다.
한 부모의 양식을 나누어 먹는 것 때문에 형제들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이 잘못되었을 경우는 위 금쪽이처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사회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 가족의 지웅이는 동생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동생을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그러기를 바라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의 음식을 거부한다면 동생과의 사이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양식 안에는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음식은 사회성과 직결됩니다.
어쩌면 그 사회성이 양식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24회에도 식음을 전폐한 아이가 나옵니다.
음식을 먹으려고는 하지만 삼킬 수가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목에 꽉 찬 것 같다고 하며 음식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 금쪽이도 수액으로 연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언제부터 그랬나 살펴보니 엄마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엄마가 직장을 나간다고 다 아이들이 식음을 전폐할까요?
엄마가 일을 나가는 것이 아이에게 그만큼 커다란 충격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자 금쪽이는 사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로부터 양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면 결국엔 동생과의 관계도 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고, 또 동생과도 원만해지려면 아이는 음식이 아닌 양식을 더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토하며 양식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식은 부모의 사랑이고 부모의 사랑은 곧 형제간의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성체를 영하며 성당에서 형제들과의 친교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부모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형제간의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절로 한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 형제간의 친교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미사할 때 형제간의 친교로 이어지지 않는 성체는 진정한 양식이 아니고 음식일 뿐입니다.
음식을 먹기 때문에 친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미사만 하고 집에 돌아가고 친교 공동체, 봉사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성체성사를 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무리가 형성되지 않는 성체성사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냉담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냉담은 성체를 영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성체를 영하면서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이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하느님 자녀들끼리 서로 친교를 맺는 형제 공동체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양식은 곧 친교 공동체를 지향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강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1년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와 선교,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연결시키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의 한 부분입니다.”
살레시오회 전 총장 파스칼 차베스 신부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기쁨, 창의성, 열정으로 거행하십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성체성사가 시작되기 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한 청원 기도를 하려고 기다립니다.
바로 이때가 천상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좋고 유리한 시간임을 천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성체성사를 기쁨과 연결시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체성사를 봉헌하십시오.
성체성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에 있어서 파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그대가 매일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의 양식>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남이 먹는 모습을 구경만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가난한 사람은 비참한 심정이 되고, 마음에 ‘한’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외면하고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것은 ‘큰 죄’입니다.)
어떤 병에 걸려서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를 죄에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일은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이사 25,6)
그 나라는 가난도 질병도 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배불리 먹는 나라,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묵시록을 보면, 특별히 ‘생명나무의 열매’가 언급되어 있습니다(묵시 22,2).
‘생명나무’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인간들의 접근을 차단하셨던 나무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세 3,22-24)
예수님은 우리를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오신 분이고,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류가 먹지 못했던 생명나무 열매를 우리에게 먹이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생명나무 열매가 사람들의 양식이 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생명나무 열매만 먹으면서 산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무슨 나무 열매 같은 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결합과 일치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먹는’ 성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생명나무라고, 또는 생명나무 열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체 한 번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영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성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게 되고,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됩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코린 11,23-26)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전해 주는 말인데,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희생과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에 참여하는 일이고, 희생과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 다음에 바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1코린 11,27-28)
영성체를 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믿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말을 한 것은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에 코린토 신자들 가운데에서 부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1코린 11,20-22)
당시에는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서 성찬의 전례를 거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대단히 엄하게 꾸짖는 말입니다.
사랑 없는 이기심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성체성사가 아니라 ‘성체 모독죄’ 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1코린 10,16-17)
성체성사의 성체는 실제로 예수님의 몸이고, 성혈은 실제로 예수님의 피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과 실제로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과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웃과도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 성찬례의 삶>
하느님이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셋입니다.
성서, 예수님, 그리고 미사입니다.
이 셋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경을, 예수님을, 미사를 사랑합니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은 참 좋은 달입니다.
어느 달보다도 대축일이 많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사랑이 활짝 드러난, 절정의 날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모든 축일이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드러내지만 오늘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 중 하나인 성체성사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날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얼마 전 타계한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이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감동을 선사하는 시입니다.
예전 한국의 세계적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성체성사의 핵심을 정말 잘 드러냈다고 극찬했던 시입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그래서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 성찬례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살기 위하여’,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하여 이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혈 대축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바로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생명의 빵,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하느님을 모셔야 비로소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며, 우리를 날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세상에 이 성체성사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많이많이 사랑하면 얼굴에 손대지 않아도 됩니다.
저절로 예뻐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교회는 복음화하고 복음화됩니다.
전례는 또한 복음화 활동을 경축하는 것이며, 자신을 내어 주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됩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는 물론 오늘 아침 성무일도 전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감동으로 와닿는 많은 내용들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께서 빵과 포도주를 올리셨도다.”
엊저녁 부른 저녁기도 중 첫 후렴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의 사제 멜키체덱은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의 예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후렴들 모두가 은혜롭습니다.
“구원의 잔을 받들고서 찬미의 제사를 올리리이다.”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잔을 받들고서 찬미와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하늘의 빵을 그들에게 주셨도다.
사람들이 천사들의 빵을 먹게 되었도다.
그 맛이 더할 나위 없었나이다.”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이어 아침 성무일도 시 초대송 후렴도, 즈카르야 후렴도 은혜로웠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느님 자랑하는 마음에 많이 인용했습니다.
예전 있었던 추억이 새롭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가 와서 두 시간 동안 자랑을 늘어놓고 갔고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
간 다음 요약하니 자식 자랑, 돈 자랑 둘이었습니다.
내 자랑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 떠오른 것이 바로 하느님 자랑, 예수님 자랑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 자랑하는 재미로, 하느님 찬미하는 재미로, 예수님 사랑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또한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너는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너’가 가리키는 바 예수님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는,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들입니다.
또 제2독서 후 부른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성체송가’는 얼마나 풍요로웠는지요!
성체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 무려 24절까지 계속됩니다.
마지막 23,24절을 또 하느님 자랑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23.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정말 깊고 아름다운 전례에 잘 참여하면 강론 시 미진했던 것을 완전히 보완해 줌을 깨닫습니다.
성찬례는 단지 전례로 끝나면 반쪽입니다.
우리 하루 전 삶으로 확산되어 성찬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있는 성체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정말 성체를 공경하는 이들은 살아있는 성체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성체신심의 완성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반포한 회칙 그대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몇 가지 성찬례의 고마움을 나눕니다.
너무나 끝없이 깊어 나누는 내용은 그 일부일뿐입니다.
마치 바다 같은 넓이와 깊이에서 퍼올리는 몇 컵의 생명수같은 내용입니다.
첫째. 회개와 배움의 성찬례입니다.
이 거룩한 성찬례 시간은 회개와 배움의 시간입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주님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런 자세는 하루 전 삶으로 파급됩니다.
성찬례를 통한 끊임없는 회개와 배움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삶, 공부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둘째, 기억과 감사의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는 과거 구원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화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오늘 성찬례를 통해 현실화고 오늘은 영원이 됩니다.
그리하여 기억과 감사로 바치는 성찬례의 은총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두려움을 없애니 그대로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미 2천년 전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 말씀안에 성찬례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얼마나 뿌리 깊은 전통의 가톨릭 교회인지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미사은총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천년 전과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현존하셔서 당신 사제를 통해 친히 성찬례를 집전하십니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영원한 현재의 구원을 살게 하는 성찬례 은총입니다.
셋째, 섬김과 나눔의 성찬례입니다.
성찬례의 영성은 섬김과 나눔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께서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을 상징합니다.
황량한 광야인생 중에 지친 이들이 흡사 생명의 샘터이자 오아시스인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형국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섬기는 모습으로 계시됩니다.
온전히 우리를 섬기러 오신 참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주신 후 본격적으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대로 미사로 하면 전반부 말씀전례같습니다.
말씀을 경청하면서 이미 시작된 영육의 치유가 성체를 모심으로 완결될 것입니다.
복음 후반부 나눔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마치 인류의 영원한 꿈인 대동사회(大同社會), 하늘 나라의 실현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세상을 지향 성찬례입니다.
아, 이런 파스카 잔치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바로 하느님이 꿈꾼 세상이요 예수님을 통해 현실화된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과제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 하늘의 빵인 성체도 함께 나눠야 합니다.
정말 큰 죄는 혼자서 먹고, 갖고, 누리는 독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어려울 것도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나부터 섬김과 나눔의 삶에 충실하면 바로 그것이 성찬례의 삶이요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되니 바로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은총입니다.
넷째, 일치와 평화의 성찬례입니다.
성찬례의 빛나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공동체의 일치와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일치와 평화라면, 사람이 하는 일은 분열과 불화와 갈등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데 작금도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내적분열로 망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작고 약해도 내적으로 일치와 평화의 상태에 있으면 누구도 다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짜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고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내적일치와 평화를 증진시키는 성찬례의 은총입니다.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이 아니라, 주님 바위 위에 일치의 공동체라는 집을 짓게 하는 성찬례의 은총입니다.
성찬례 미사가 아닌 도대체 세상 그 무엇이 이렇게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일치시킬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서로간 형제들로 만들 수 있겠는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2017년 이날 대축일 미사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감동적인 강론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성체성사는 추상적인 기억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해 살아 있는 기억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DNA’안에 새겨져 있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 평화의 성사입니다.
이 일치의 빵(성체)이 다른 이를 지배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독점하려는 탐욕으로부터, 불화를 조장하고 비난을 퍼뜨리려는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해 주시길, 또한 우리가 경쟁의식을 버리고,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기쁨을 주시길 빕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활짝 계시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이 거룩한 성찬례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찬례의 삶을 살게 하며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끝으로 2007년 써놓고 애송했던 '온 세상 제대로 삼아' 자작시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山 가슴
활짝 열고
온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둥글고 커다란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 성체 모시고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릴 때 의미도 잘 모르지만 따라 부르던 성가가 있습니다.
“하늘에 별수가 얼마인지 아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매일 축성되는 성체의 수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31년 동안 제가 미사를 통하여 축성한 성체의 수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성체가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인호 선생은 투병 중에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저 지금 성체가 몹시 고픕니다. 성체를 주십시오."
본당 신부님은 기꺼이 봉성체를 해 드렸다고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성체는 사제가 미사 중에 제병을 축성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성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혈은 사제가 미사 중에 물이 섞인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성혈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릴 때, 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생각납니다.
펌프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고 펌프질을 하면 수백 수천 배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큰 체험이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니,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 이태석 신부님은 모두 한 바가지의 마중물 정신을 사신 분들입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마중물’이 되시어 수많은 신자의 가슴에 용기와 생기를 주고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은총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바다의 물이 마른 적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모두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 코넬 대학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인간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즉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가는지를 본 것입니다.
결론은 길어봐야 30개월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져야만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어느 영화에서 “나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어?”라고 묻는 부인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연애 4년에 결혼 3년이야. 아직도 심장이 뛰면 그건 심장병 같은데?”
사랑은 처음에 분명히 떨리고 설렙니다.
그 단계를 거치면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지만, 늘 숨 쉬고 있어서 익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마냥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과의 사랑 관계가 익숙해집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합니다.
예전의 기쁨을 또 설렘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만약 설렘이 없어졌다면 지금 익숙해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 주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일회적 사건으로 당신 사랑을 끝내지 않고, 성체와 성혈을 주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미사 때마다 이루어지는 그 사랑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을 모실 때 느꼈던 설렘과 기쁨도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공기와 같이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한 우리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영적 양식은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은 계속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셨던 사랑을 나의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사랑을 넘어서 주는 사랑이 되어야,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잘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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