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해 여름
오랜 가뭄에 감나무 잎새도 시들었고
중풍 든 사사끼 씨 집 울타리 밑에서
퀭한 그 노인의 눈초리를 피해
나는 돼지감자를 몰래 캐고 있었다.
해방이 됐다는
읍내 갔다 온 마을 사람 소식에
온 동네는 벌컥 뒤집혀
서로 아무나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소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서 있던
신사(神社)를 도끼로 때려 부수던 날
소 잡고 막걸리 빚어
꽹과리에 장구 치며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꼬마들도
어른들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말걸리를 마셨고
취해서 뛰어다니며 장난질해도
누구도 야단치지 않았다.
중풍 든 사사끼 씨가 구루마에 실려
이삿짐 싣고 읍내로 가던 날
동네 부인네들은 치마꼬리로 눈물을 훔치며
불쌍하다고 조용히 속삭였다.
2
그 해 여름
임진각 가는 홍제동 길에
장마비는 세차게 쏟아지고
아스팔트 위에 대학생들이 겹겹이 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목이 쉬게 부르고 있었다.
최루탄은 뽀얗게 터지고
사람들은 우산도 팽개친 채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울면서 빗속으로 뛰어갔다.
전쟁이 터지던 그 날
목이 쉬게 군가를 부르며
트럭에 실려 총 한 자루 없이
미아리 고개로 가던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최루탄 연기를 피해 울면서 울면서
나는 골목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교회 첨탑 십자가에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윤동주(尹東柱)의 얼굴을.
- 광화문에 내리는 눈은, 한나래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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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그 해 여름 (김원호)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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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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