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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선(朝鮮)의 지명(地名)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어떤 관(關)이 존재하면, 그 곳을 중심으로 방향(方向)을 구분하여 관동(關東), 관서(關西), 관북(關北), 관남(關南)이라고 하며, 어떤 영(嶺)을 중심으로는 영동(嶺東), 영서(嶺西), 영북(嶺北), 영남(嶺南)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관(關)과 영(嶺)이 서로 똑같은 곳이 아니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동(關東), 관서(關西), 관북(關北), 관남(關南), 영동(嶺東), 영서(嶺西), 영북(嶺北), 영남(嶺南)이 서로 겹치는 지역이 나오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또한 구체적인 위치 비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관(關)과 영(嶺)이 몇 군데나 존재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지금부터의 설명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오백년(五百年) 동안에 행정구역(行政區域)의 경계(境界)가 매우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럼, 검토를 위해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된 <반도사관(半島史觀)> 관련 자료를 아래에 소개한다.
<자료 1>
- 관동(關東)과 관서(關西), 영동(嶺東)과 영서(嶺西)
‘강원도’의 별칭이며, 관동/관서의 ‘관’(關)은 대관령(大關嶺)이 아닌 철령관(鐵嶺關)의 동쪽과 서쪽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한편 영동과 영서는 대관령 동쪽과 서쪽을 뜻하는 이름이므로
이들이 근래에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관동은 무방하되, 관서는 ‘평안도’를 말하므로 대관령 서쪽의 강원도 지방은 영서라는 이름으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 관서(關西)
‘평안도’의 별칭으로서 철령관의 서쪽을 뜻하는 이름이다.
강원도 지방의 관동/관서와 혼동하기 쉬우나, '관서=평안도'는 문헌상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이름이다.
- 관북(關北)
‘함경도’의 별칭으로서 철령관의 북쪽 지방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산악지대를 이루는 북쪽 지방으로서 철령위(鐵嶺衛) 문제, 여진족(女眞族) 침입 문제 등 영토분쟁으로 늘 말썽이 된 곳이다.
그러기에 철령을 중심으로 관서, 관북, 관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출처=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52679&logId=4123173]
(註1) 철령(鐵嶺)은 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현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대관령(大關嶺)은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자료 2>
- 관서지방(關西地方)
한반도의 북서부, 현재의 평남-평북-평양-자강도 일대를 포함하는 지방
‘관서’란 철령관(鐵嶺關)의 서쪽을 뜻한다.
철령관의 서쪽을 뜻하는 ‘관서’라는 말을 평안남-북도 지역의 지방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 ‘관서’라는 말보다는 서북로(西北路), 서북계(西北界), 서로(西路) 또는 서북도(西北道)라는 이칭(異稱)이 더욱 널리 사용되어 왔다.
- 관북지방(關北地方)
한반도의 북동부, 현재의 함남-함북을 포함하는 지방
‘관북’이란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을 뜻한다
- 관동지방(關東地方)
한반도의 중동부, 현재의 강원도 일원을 가리키는 지방
‘관동’이란 대관령(大關嶺)의 동쪽이란 뜻이다.
영동(嶺東)이란 태백산맥(太白山脈)의 동쪽이란 뜻으로, 관동-영동이 가리키는 지역의 범위는 강원도 일원을 가리키는 지방명으로 쓰였다.
고려(高麗) 성종 때,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관내도(關內道)라고 하였으며, 강원도 지역은 관내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출처=http://ms0076.tistory.com/192]
위 <자료 1>을 검토해 보면,
철령(鐵嶺)에 있는 관(關) 즉 “철령관”(鐵嶺關)을 기준으로 관동(關東), 관서(關西), 관북(關北)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관동(關東)과 관서(關西)를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그래서 평안도(平安道)인 관서(關西)와 겹치게 된다.
또한 관동(關東)과 영동(嶺東), 관서(關西)와 영서(嶺西)라는 지명(地名)은 서로 똑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말로 그럴 수 있는가?
<자료 2>의 경우에는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은 “철령관”(鐵嶺關)을 기준으로, 관동(關東)은 “대관령”(大關嶺)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방향의 기준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관령(大關嶺)이라는 지명에 “관”(關)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가? 또한 관동(關東)과 영동(嶺東)을 똑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위 두 자료의 공통점은,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를 기준으로 생각하여도 관남(關南)이 있을 것 같은데, 그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자료 3>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 문경현편에 초점(草岾)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은 "현에서 서쪽으로 19리 떨어진 충주 통로에 있는데 험로가 7리에 이른다"고, 조령(鳥嶺) 즉 새재를 적었습니다.
조령은 대략 조선시대 초기에 개척되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이자 고갯길의 대명사로 군림하였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뒤 도읍을 한강(漢江) 유역으로 하자, 조정은 관방(關防)에 대한 사항을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관동과 관서를 잇는 대관령(大關嶺)과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새재가 그 중심이었습니다.
이는 한강 유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분수령 즉 백두대간과 기타 정맥들의 고개를 방어하는 것이 상식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개를 중심으로 관동, 관서, 관북, 영남과 같은 명칭이 생겨났습니다.
다만, 새재 아래를 관남이라 부르지 않고 영남이라 한 것은 새재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고 나라의 제1 고개였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하겠습니다.
[출처=http://www.cyworld.com/historiai/2749686]
(註2) 문경새재(聞慶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고개이다. 옛 문헌을 인용하여 초점(草岾), 즉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주장도 있다. 일명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위 <자료 3>에 의하면,
철령관(鐵嶺關)이 아니라, “대관령”(大關嶺)을 기준으로 관동(關東)과 관서(關西)를 설명하고 있고, “문경(聞慶)새재” 즉 조령(鳥嶺) 아래를 영남(嶺南)이라고 한다.
문제는, 한강(漢江) 유역을 둘러싼 분수령(分水嶺)을 기준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구분하고 있으며, 관남(關南)을 영남(嶺南)과 똑같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정말로 그럴 수 있는가?
아래 <자료 4>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종 11년 기사에는 관남(關南)과 영남(嶺南)이라는 지명이 각각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런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관남(關南)과 영남(嶺南)은 똑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료 4>
고종 11권, 11년(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2월 5일(무인) 1번째기사
이유원이 청나라 돈을 없애지 말고 쇠로 녹여서 사용할 것을 청하다
(前略)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결두전(結頭錢)을 상납(上納)에 대하여 퇴짜를 놓은 것을 도로 받도록 하교한 바가 있었는데, 영남(嶺南)에서는 과연 어떠한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영남에서는 원래 청나라 돈을 쓰지 않았으므로 경차인(京差人)이은 처음부터 본 도에서 상평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청나라 돈을 가져다가 경사(京司)에 상납한 것은 구별하여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 고을에서 받아서 보관해 둔 것에 대하여 말하면 역시 상평전으로 그냥 보관해 두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북도(北道)는 어떠한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관남(關南)은 관북(關北)과 다릅니다. 거기서 과연 모두 다 상평전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아래에 인용된 <자료 5>의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 기사에 따르면,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는 조선팔도(朝鮮八道) 중 강원도(江原道)에 속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향의 기준이 되는 영(嶺)은 적어도 강원도(江原道)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영(嶺)은 대관령(大關嶺)인가? 철령(鐵嶺)인가? 조령(鳥嶺)인가?
일단, 한반도(韓半島)를 기준으로 생각한다.
아무래도, 철령(鐵嶺)과 조령(鳥嶺)은 부적절하다.
아래 <자료 5>에 따르면, 영동(嶺東)은 (바다와 인접하고 있기에) 평상시 소금(鹽)을 저장하고 있고, 영서(嶺西)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자료 5>
세종 17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8월 25일(기유) 2번째기사
강원도 경차관 황보인이 영서·영동의 상황 등에 대해서 계하다
강원도 경차관 황보인(皇甫仁)이 계하기를,
“금년에 올곡식이나 늦곡식이 모두 부실하게 되었으니, 영서(嶺西)의 각 관청에 금년의 공물(貢物)을 모두 감면시킬 것이며, 도내가 조잔(凋殘)한데다가 역리(驛吏)들이 전혀 구제하여 주기만 바라며 생계를 유지하니, 말먹이나 죽 쑤어 줄 것을 내놓으라는 공문은 모두 금지하여야 합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비록 풀을 먹더라도 반드시 염장(鹽醬)을 먹어야만 부종(浮腫)에 걸리지 않는 것인데, 소금이란 영서(嶺西)에서는 없는 것이니, 청컨대 영동(嶺東)의 관염(官鹽)을 갖다가 영서(嶺西)에 적당하게 배급할 것이며, 피융 잔질(疲癃殘疾)이나 환과 고독(鰥寡孤獨)은 풍년들 때에도 남에게 얻어먹고 사는데, 금년에는 호구(糊口)할 데가 없어서 살아갈 수 없으니, 8월 그믐날까지 구제하여 주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자료 6>
정조 6권, 2년(1778 무술 / 청 건륭(乾隆) 43년) 12월 23일(기묘) 2번째기사
승지 유의양을 소견하고 강릉의 사정을 듣다
(前略)
영동(嶺東)은 곡식은 적은데, 백성이 많고 영서(嶺西)는 곡식은 많은데 백성이 적으며, 대령(大嶺)이 가운데 끼어 있어서 거리가 멀고도 험한 까닭에 흉년을 당하게 되면 곡식을 옮겨 진대(賑貸)하는 데 진실로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중간에 있는 산성에 곡식을 저장해 놓았다가, 풍년과 흉년을 살펴보아 동·서가 서로 구제하게 한다면 평상시에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긴요한 방도가 될 것이니, 지금 이 산성을 설치하는 의논은 일거 양득의 계획이 될 수 있습니다.
(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그리고 아래에 인용된 <자료 7, 8, 9, 10>에 따르면,
관동(關東)과 영동(嶺東)은 똑같은 범위의 지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자료 7>
광해 126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4월 2일(신묘) 4번째기사
영건 도감에서 관동 지역의 벌목으로 인한 일로 아뢰다
(前略)
관동(關東)의 재목이 물에 떠내려간 뒤에 다시 벌목하고 있는지 그 여부를 모르겠기에, 상의 분부를 인하여 행이(行移)해서 조사하도록 한지 지금 벌써 오래 되었는 데도 여태 치보(馳報)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강원 감사를 각별히 추고하고, 어느어느 고을의 공물(貢物) 가운데 어느어느 종류를 견감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어느 고을의 전세(田稅)를 얼마나 감해 줄 것인지에 대한 일 및 떠내려간 재목 대신 다시 벌목하게 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속히 치계(馳啓)토록 하소서. 그리고 재목이 생산되는 각 고을 백성들의 힘이 고갈되어 운반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영동(嶺東)의 연군(烟軍)을 징발해 힘을 보태게 해야 할 것이니, 이 뜻도 아울러 본도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後略)
<자료 8>
광해 13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0월 9일(갑자) 14번째기사
호조가 군량과 조운의 방법 등을 아뢰자 윤허한다는 전교를 내리다
함경도의 수졸(戍卒)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영동(嶺東)과 영남(嶺南)에 있는 응당 운반해야 할 군량을 기일에 맞추어 독촉해 보내라고 누누이 이문하여 공문을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번에는 또 양도의 도사로 하여금 담당하여 독촉하는 한편 운반 상황을 보고하게 하라는 뜻으로 청하여 하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마디의 치계도 없으니 지극히 온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감사를 무겁게 추고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제서야 비로소 느릿느릿 함경도와 양도의 장계를 조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전에 정했던 기한내에 영남의 조운이 평해(平海)에 들어가지 못하고, 관동(關東)의 배가 원산(元山)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 양도(강원도와 경상도)의 도사를 군율로 다스리겠다는 뜻을 다시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자료 9>
숙종 45권, 33년(1707 정해 / 청 강희(康熙) 46년) 3월 12일(을축) 1번째기사
관동의 병사를 춘천에 두어 영동·영서의 병마를 관장하도록 묘당에 명하다
교리 오명준(吳命峻)이 상소하여, 관동(關東)의 병사(兵使)를 춘천(春川)에 두어 영동(嶺東)·영서(嶺西)의 병마(兵馬)를 겸하여 관장하게 하고, 양양(襄陽)·통천(通川)·회양(淮陽)을 문관(文官)·무관(武官)을 교차(交差)하는 자리로 만들며, 연변(沿邊)의 각 고을에 봉수(烽燧)를 두어 요망(瞭望)·척후(斥候)하는 곳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일을 묘당(廟堂)에 내렸다.
<자료 10>
숙종 46권, 34년(1708 무자 / 청 강희(康熙) 47년) 10월 3일(을사) 1번째기사
영의정 최석정이 강원도에 양전(量田)하는 일로 아뢰다
(前略)
관동(關東)은 26읍(邑)이 되나 영동(嶺東)의 9군(郡)과 영하(營下)의 수읍(數邑)은 오히려 그 절반도 되지 못하므로, 절반을 먼저 거행하면 앞으로의 형세(形勢)를 알 수가 있으니, 시험하지 않은 곳을 뒤따라 시행할 때에도 솜씨도 또한 익숙하여질 것이다.
(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아래에 인용된 <자료 11, 12>를 살펴 보면,
오히려 관동(關東)은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뜻의 지명(地名)임을 알 수 있다. 즉 영동(嶺東)은 관동(關東)의 일부분이 된다.
원주(原州)와 횡성(橫城)은 영서(嶺西)에 속하고, 삼척(三陟)과 강릉(江陵)은 영동(嶺東)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서(嶺西)와 영동(嶺東)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관령(大關嶺)이 된다.
한편, 처음에 인용된 <자료 2>에서, 서울과 경기도(京畿道) 지역을 관내도(關內道)라고 하였으며, 강원도(江原道) 지역은 관내도(關內道)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관동’(關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명은, 넓은 뜻의 관동(關東)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방향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철령관(鐵嶺關)이 아니고 관내도(關內道)가 그 중심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철령관(鐵嶺關)의 동쪽” 지역에 해당되는 “좁은 뜻의 관동(關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과연 납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관서(關西)나 관북(關北)도 관내도(關內道)를 중심으로 구분한 것인가?
한반도(韓半島)를 기준으로 살펴 보면, 관서(關西)는 황해(黃海) 즉 바다에 해당된다. 관서(關西)는 결코 평안도(平安道)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강원도(江原道) 일부,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모두 관북(關北)이 되어 버린다.
기준(基準)이 여러 곳이면 정말 혼란스럽다. <조선왕조실록>의 원본(原本) 작성자(作成者)들도 그러한 뜻으로 기록하였을까?
참고로, <조선왕조실록> 정조 7년(1783년)의 기사인 “비변사에서 올린 제도 어사 사목”에 의하면, 비변사에서 제도(諸道)의 어사(御史)가 가지고 갈 사목(事目)을 올린 내용이 나온다.
그 기사에는 조선팔도(朝鮮八道)의 별칭(別稱) 즉 경기(京畿=京畿道), 호서(湖西=忠淸道), 호남(湖南=全羅道), 영남(嶺南=慶尙道), 해서(海西=黃海道), 관서(關西=平安道), 관북(關北=咸鏡道), 관동(關東=江原道)이 나온다.
여기서 관서(關西), 관북(關北), 관동(關東)의 기준은 어디일까? 똑같은 곳일까?
관내도(關內道)일까? 아니면, 대관령(大關嶺)이나 철령관(鐵嶺關)일까?
특이한 점은, 관남(關南)과 영북(嶺北)이라는 지명은 “관북 어사 사목”(關北御史事目)의 내용에서만 등장한다. 즉 관남(關南)과 영북(嶺北) 지역이 관북(關北) 지역과 서로 연결된다는 뜻이 아닐까?
영북(嶺北)은 조선팔도(朝鮮八道)의 별칭(別稱)이 아니다.
그럼, 영북(嶺北)은 어디일까?
영동(嶺東)이라는 지명은 “관동 어사 사목”(關東御史事目)의 내용에만 나온다.
반면, 영서(嶺西)라는 지명은 바로 위에 언급된 <조선왕조실록> 정조 7년 기사의 어디에도 안 나온다. 그 시기에는 어사(御史)가 관여할 일이 없었는가?
아래에 인용된 <자료 11, 12>에서는, 관동(關東) 지역이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영남(嶺南)이라는 지명은 “호서 어사 사목”(湖西御史事目), “호남 어사 사목”(湖南御史事目), “영남 어사 사목”(嶺南御史事目)에만 등장한다.
“관”(關)과 “영”(嶺)이라는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를 이용한 명칭은, 단순히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나타내는 다른 지명(地名)보다는 시대에 따라 그 변화가 적다.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이 급격하게 이동(移動) 내지 축소(縮小)되었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명칭과 위치가 크게 바뀔 수 없기에 장점이 있다.
<자료 11>
영조 82권, 30년(1754 갑술 / 청 건륭(乾隆) 19년) 12월 17일(신유) 2번째기사
관동의 상정을 주대할 만한 자를 뽑아 올리라고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관동(關東)의 상정(詳定)이 편리한지를 내가 묻고자 하니, 영동(嶺東)·영서(嶺西)의 시종(侍從)을 지낸 수령 가운데에서 그 일을 익히 알아서 주대(奏對)할 만한 자를 각각 한 사람씩 올려보내라는 뜻으로 본도의 도신에게 하유(下諭)하라.”하였다.
<자료 12>
정조 37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9일(신미) 1번째기사
춘당대에서 관동의 공령 유생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생원 신재화 등에게 급제를 내리다
(前略)
관동(關東) 선비들을 시취(試取)하는 일을 1백 66년 뒤에 실시한 것이 어찌 관동 사람들만 위로하여 기쁘게 할 뿐이겠는가. 그러나 도과(道科)와는 조금 다르므로 부와 책으로 각각 한 사람씩 뽑아 급제를 내렸다. 그리고 영동(嶺東)인지 영서(嶺西)인지를 시권의 머리에 쓰도록 명하였는데, 시권의 점수를 매기면서 보니 영서는 모두 등수가 높았으나 영동은 유독 빠져 있었다. 그래서 영동에서 맨 먼저 올린 부와 책의 두 시권을 특별히 아울러 뽑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면 옛날 과거를 보일 때 네 사람을 뽑던 고사(故事)를 우러러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에서 1등을 한 원주 생원(原州生員) 신재화(申在和), 책에서 1등을 한 횡성 생원(橫城生員) 정원선(鄭元善), 부에서 1등을 한 삼척 유학(三陟幼學) 홍인조(洪寅祚), 책에서 1등을 한 강릉 유학(江陵幼學) 심보영(沈普永)에게는 모두 급제를 내리고, 다음 등급의 세 사람에게는 각기 분수[分]를 주고, 그 나머지 유생들에게는 내려갈 때에 해당 관청에서 양식과 노자를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
(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아무튼, 영동(嶺東)은 대관령(大關嶺)의 동쪽 지역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철령관(鐵嶺關)의 동쪽이 좁은 뜻의 관동(關東)에 해당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좁은 뜻의 관동(關東)이 보이질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6년 기사에 따르면,
북로(北路)의 철령(鐵嶺), 동로(東路)의 대관령(大關嶺), 서로(西路)의 정방산 구현(正方山 駒峴), 호서(湖西)의 차령(車嶺)은, 여러 도(道)의 관방(關防)을 지켜 적로(賊路)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관령(大關嶺)과 철령관(鐵嶺關)은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 당시의 대관령(大關嶺)과 철령관(鐵嶺關)이 지금의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는지? 아니면, 구체적으로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어디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별론(別論)으로 한다. (향후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자(飜譯者)들은 관동(關東)과 영동(嶺東) 둘 다 똑같이 “강원도”(江原道)라고 주석(註釋)을 붙이고 있다.
그럼, 영북(嶺北)은 어디인가 살펴 본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여 보면, 영북(嶺北)이라는 지명이 분명히 나온다.
일반적으로 영남(嶺南)은 경상도(慶尙道)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문경(聞慶)새재 즉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인가?
아니면, 대관령(大關嶺)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아니면, 철령(鐵嶺)의 북쪽이 영북(嶺北)인가?
일반적으로 한반도(韓半島) 경기도(京畿道) 아래의 여러 고개 중에서 대표적인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구분한다.
[출처=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52679&logId=4123173]
현재 한반도(韓半島)의 지형(地形)과 지명(地名)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영북(嶺北)은,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하면 충청북도(忠淸北道)에 해당된다.
반면, 대관령(大關嶺)을 기준으로 하면 강원도(江原道)의 중부(中部) 지역이 된다.
따라서 대관령(大關嶺)보다는, 문경(聞慶)새재 즉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영북(嶺北)과 영남(嶺南)을 구분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물론, <대륙사관(大陸史觀)>으로 검토하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결국, 영북(嶺北)과 영남(嶺南)은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영서(嶺西)와 영동(嶺東)은 대관령(大關嶺)을 기준으로 구분하게 된다. 혼란스럽지 않은가?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지형(地形)과 지명(地名)으로 그 위치를 비정하면 어떨까?
한반도(韓半島)든 중국대륙(中國大陸)이든 관(關)과 영(嶺)은 여러 곳에 존재하므로, 관동(關東), 관서(關西), 관북(關北), 관남(關南), 영동(嶺東), 영서(嶺西), 영북(嶺北), 영남(嶺南)이라는 지명(地名)은 곳곳에 남아 있게 된다.
역사기록을 살펴 볼 때, 세심하게 검토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한편, “관남”(關南)에 관하여 <네이버 지식iN>에서 검색하여 보니까,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왔다.
<자료 13>
“관동지방은 강원도를, 관서지방은 평안남도-평안북도-평양-자강도를, 관북지방은 함경남도-함경북도를 가리키는데, 왜 관남지방이 없는지 궁금합니다”라는 질문에 대하여,
“(한반도) 분단 이전에는 (한반도) 북부 지방이 관북 지방, 관서 지방, 관남 지방, 관동 지방으로 나뉘어져 불려왔는데요.
그 당시 관북 지방의 범위는 함경북도, 관남 지방의 범위는 함경남도, 관서 지방의 범위는 평안남-북도(평안도), 관동 지방의 범위는 강원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관남 지방은 사라지면서,
관남 지방이 관북 지방에 속해 있고, 또한 관동 지방 중 북한에 속한 강원도 일부 지역이 관북 지방에 속해있는 것으로 되어 있답니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위 <자료 13>에 따르면,
(한반도) 분단 이전에는 함경남도(咸鏡南道)를 관남(關南)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관남”(關南)에 관한 자료를 더 찾아 보면 아래와 같다.
<자료 14>
선조수정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16번째기사
함경남·북도가 적에게 함락되다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王子)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中略)
청정이 안변부(安邊府)로 돌아와 웅거하니 관남(關南)의 주진(州鎭)도 반민들이 웅거하게 되어 모두 청정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평소 민심을 얻었으므로 양민을 많이 모아 군사로 삼아 스스로 방위하면서 군계(郡界)에 웅거하니 산골짜기에 살던 토민들이 귀의하는 자가 많았다.
(後略)
<자료 15>
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7월 25일(경술) 2번째기사
최석정·이세백이 함경도 문·무과 급제자의 정원에 관하여 상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함경도의 무과(武科) 시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갑진년(1664년, 현종 5년)의 예에 따라 3백 명을 뽑고, 문과(文科)는 본래 3명을 뽑았으나, 근년(近年)에 서관(西關; 황해도·평안도)에서 4명을 뽑는 예에 따르도록 하소서.”하니,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명을 받들고 서관에서 시험을 보일 때에 청남(淸南), 청북(淸北)에서 각각 2명씩을 뽑았는데, 응시자로 하여금 권두(券頭; 시험지 첫머리)에 남(南) 또는 북(北)자를 쓰도록 하여 표시를 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곧 관북(關北)의 구법(舊法)을 쓴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남(關南)·관북(關北)에서 각각 2명씩을 뽑으라.”하였다.
<자료 16>
고종 21권, 21년(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8월 7일(무인) 2번째기사
관북의 과거 입격자수를 늘리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북도 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조병직(趙秉稷)의 장계(狀啓)를 보니, ‘관북(關北)은 사람이 많고 문학이 흥성한 것이 다른 도(道)에 비해 뒤지지 않는데, 식년(式年) 감시(監試)의 정원을 관남(關南)에서는 50인을 뽑고 관북에서는 20인을 뽑고 있습니다. 이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 금년 가을 시취부터 관남의 예대로 50인을 뽑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관남과 관북의 시취 정원수가 서로 다른 데는 애초 정식을 만들 때 참작하여 한 것이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지고 문예가 흥성해져서 옛날과는 다르니, 특별히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자료 17>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4월 25일(계사) 1번째기사
관남의 증광시와 식년시의 소과 초시의 정원수를 늘리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기회(鄭基會)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도내의 선비들이 올린 글을 낱낱이 보니, 「본도(本道)에서 과거를 보여 뽑는 액수(額數)가 관북(關北)은 20, 관남(關南)은 50이라고 원전(原典)에 실려 있는데, 지난해 가을 과거 때에 관북은 30으로 특별히 늘려 주었습니다.」하였습니다. 관남은 과거 보는 선비가 관북보다 10배나 더 되는데도 불구하고 관남과 관북의 액수를 같게 하였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관북에 변통하여 준 전례에 따라 원액(原額) 50에 30원을 가설(加設)하여 도합 80으로 하며 동당(東堂) 7원은 3원을 가설하여 도합 10원으로 할 것에 대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작년에 도(道)를 나눈 이후에 비로소 관북에 증액(增額)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나, 지금 이 도신(道臣)이 진달한 것은 참작하고 따져본 데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또한 응당 변통하여 주는 정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관남의 증광시(增廣試)과 식년시(式年試)의 소과(小科) 초시(初試)는 원액 50 이외에 특별히 20을 가설하고 동당 초시는 원액 7인 외에 특별히 3원을 더 늘려 주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 그대로 시행할 것에 대하여 해도(該道)와 해조(該曹)에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자료 18>
고종 27권, 27년(1890 경인 / 청 광서(光緖) 16년) 7월 23일(신묘) 2번째기사
감사와 각 수령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폐단을 바로잡도록 명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내린 전교(傳敎)를 보니 함경도(咸鏡道)의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가는 일에 대해 돌봐줄 방도를 깊이 염려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명령까지 내렸으며, 관북(關北)의 10주(州)와, 6진(鎭), 관남(關南)의 삼수(三水), 갑산(甲山)의 두 읍(邑)에서 가장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수령을 묘당(廟堂)에서 보고하고 교체하되, 문관(文官)이건 무관(武官)이건 자급(資級)에 구애됨이 없이 택차(擇差)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註3) 함경도(咸鏡道)는 함경북도(咸鏡北道)와 함경남도(咸鏡南道) 지역의 조선시대 이름이다. 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하였으나, 1416년(태종 16년)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 1467년(세조 13년)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1470년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고 관찰사 본영을 영흥부로 옮김에 따라, 영흥부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이름을 따서 ‘영안도’(永安道)가 되었다.
1509년(중종 4년)에 다시 함흥부와 경성(鏡城)도호부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가 되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위에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들을 검토해 보면,
함경도(咸鏡道)의 남쪽과 북쪽 즉 함경남도(咸鏡南道)와 함경북도(咸鏡北道)를 각각 관남(關南)과 관북(關北)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를 기준으로 또한 북한(北韓)이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바꾸기 전의 지명(地名)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철령관(鐵嶺關)을 기준으로 함경남도(咸鏡南道)와 함경북도(咸鏡北道)를 나누었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차라리 남설령(南雪嶺)이 있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두산동아’의 <새국어사전 (제4판)>에서는 관남(關南)을 마천령(摩天嶺)의 남쪽 지방, 곧 함경남도(咸鏡南道) 일대라고 한다. 또한 관북(關北)은 마천령(摩天嶺) 북쪽의 지방이고 함경북도(咸鏡北道)라고 한다.
한반도(韓半島)의 지형(地形)에 끼워 맞춘 느낌이 든다.
(註4) 마천령(摩天嶺)은 이판령(伊板嶺)이라고도 하고, 해발고도(海拔高度) 709m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남쪽에 있다. 함경남도 단천시 용덕리(룡덕리, 龍德里)와 함경북도 김책시 장현동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관서(關西) 지방인 평안도(平安道)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령관(鐵嶺關)을 기준으로 하면, 설명이 안 된다.
낭림산맥(狼林山脈)을 기준으로 서쪽 지역이 평안도(平安道)에 해당된다.
그리고 낭림산맥(狼林山脈)의 동쪽은 함경도(咸鏡道)이다.
낭림산맥(狼林山脈)에는 아득령(牙得嶺), 설한령(雪寒嶺), 검산령(劍山嶺) 등의 고개가 존재한다.
‘두산동아’의 <새국어사전 (제4판)>에서는 관서(關西)를 마천령(摩天嶺)의 서쪽 지방, 곧 평안도(平安道)라고 한다. 그런데 관동(關東)은 대관령(大關嶺)의 동쪽 지방, 곧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그 기준이 달라진다.
한편, 영동(嶺東)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의 동쪽 지방이라 하고 관동(關東)과 똑같은 것이라 한다. 영서(嶺西)는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서쪽 지방이라 한다.
사실상, 마천령(摩天嶺)의 서쪽은 함경남도(咸鏡南道)를 거의 포함하기 때문에 모순이 있다. 또한 대관령(大關嶺)의 동쪽은 강원도(江原道) 전체가 아니고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납득할 수 없다.
특히, 영동(嶺東)에 대응되는 지역을 관서(關西)라고 한다. 터무니 없는 설명이다.
또한 관서(關西)에 대응되는 지역을 관동(關東)이라 하는데, 그 기준이 다른데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으니까 말이 안 된다.
‘두산동아’의 <새국어사전 (제4판)>에 나온 위 설명들은 한마디로 엉터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현재 한반도(韓半島)의 지명(地名)을 기준으로 관동(關東), 관서(關西), 관북(關北), 관남(關南)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의 기준(基準)이 되는 대표적인 “관”(關)과 “영”(嶺)이 <조선왕조실록> 당시에는 실제로 어디에 몇 군데 있었는가에 문제가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에 따라 그 기준이 한반도(韓半島)의 철령관(鐵嶺關), 대관령(大關嶺), 조령(鳥嶺)인가? 아니면, <대륙사관(大陸史觀)>에 따라야 하는가?
<식민사학(植民史學)>과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의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왜곡(歪曲)/날조(捏造)되었다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로 이런 모순점을 그대로 남겨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래의 지명(地名)을 한반도(韓半島)의 지형(地形)에 맞게 적절히 배치(配置)하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왜곡/날조 당시의 당사자나 주체 세력이 아니라서 단언(斷言)하기도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의 어느 부분이 왜곡/날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곳곳에서 한반도(韓半島)의 모습과 중국대륙(中國大陸) 또는 아세아대륙(亞細亞大陸)의 모습이 뒤섞여 나타나므로 혼란스러울 뿐이다.
<진실게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朝鮮)의 관동(關東)에 관하여 또 다른 연구자의 견해를 아래에 일부 인용한다.
여기서는 “관”(關)을, 지금의 “북경”(北京; 베이징) 또는 “산해관”(山海關)으로 보고 있다. 얼마나 타당한지 회원 여러분도 함께 검토하여 보길 바란다.
<자료 19>
북관지역은 어디인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가지고 간 동기는 다음과 같다.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일제 관동군(關東軍)이 러일전쟁을 하다 함경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것이다. 이 비석을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발견 장소가 현 한반도 내에 있는 함경도 길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러일전쟁 당시에 만주국 전쟁터는 송화강 일대였으며 관동군이 활동한 지역의 중심이다. 일본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는 부르는 것은 만주 일대를 관동지방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원도 태백산맥 대관령을 중심으로 대관령의 동쪽을 관동지역이라 하고, 대관령 서쪽을 관서지역이라 하는데 그것은 조작된 것이다. 관동군이라고 한다면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활동하는 일본군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고 한 것은 이 일대가 관동지방이기 때문이다.
외국 고지도를 보더라도 북경의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중심으로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 위 그림에서 관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으며 그 옆에 요동이라는 영문 표기도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시대 천리장성이 축조된 그림이 점선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이 지역이 1900년 전후 조선과 청이 국경을 정한 지역이다. 또 다른 지도를 보면 목책이 있었던 지역이다.
관(關)이라는 것은 중요국경이나 요충지역을 말한다. 국경이나 관경을 의미하는 말이나, 관공서 관찰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국가, 요충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관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을 말한다. 흔히 경기장 내에 구경꾼 자리를 관중석이라고 한다. 즉 경기장 중심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筆者 註: ‘관중석’은 한자로 ‘觀衆席’인데, 그 설명이 좀 이상하다.> 즉 관은 중심을 말한다. 그래서 관중 지역은 수도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서안이나 북경이 고대 역사에서 수도로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그 일대를 관중(關中) 지역으로 불리웠다. <筆者 註: 글쓴이가 ‘觀衆’과 ‘關中’을 혼동하는 것 같다.> 다른 말로 수도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의 지역을 경기도라고 불리웠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관서와 관동, 관북과 관남으로 부른 것이다.
관동군(關東軍)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군 주둔권을 승인받고,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요녕성이 관동 지방이며, 북경을 관으로 보고 지역을 구분한 것이다.
[출처=http://blog.daum.net/hanquk/682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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