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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74회
진문공(晉文公)은 해장(解張)이 쓴 글을 보고 크게 놀라며 말했다.
“이는 개자추(介子推)가 과인을 원망하는 글이로다. 예전에 과인이 위나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었는데, 자추가 허벅지살을 베어 과인에게 바쳤다. 이제 과인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오직 자추만 빠뜨렸으니, 과인의 실수를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문공은 즉시 개자추를 찾아오게 하였으나, 이미 개자추는 떠나고 없었다. 문공은 이웃사람들을 붙잡아오게 하여, 개자추의 거처를 알려주는 자에게는 관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해장이 나아와 말했다.
“그 글은 자추가 쓴 것이 아니라, 소인이 대신 쓴 것입니다. 자추는 상을 구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노모를 업고 면산(綿山)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은거하고 있습니다. 소인은 그의 공로가 묻혀 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런 글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문공이 말했다.
“만약 그대가 그 글을 내걸지 않았더라면, 과인은 자추의 공을 잊을 뻔했도다.”
문공은 해장을 하대부로 임명하고, 그를 앞세워 친히 면산으로 가서 개자추를 찾았다. 하지만 첩첩산중(疊疊山中)에 수목은 울창한데, 시냇물은 잔잔히 흐르고 구름이 조각조각 떠돌며 산새 소리만 들릴 뿐, 개자추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다만 이 산중에 있을 뿐 구름이 깊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격이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무본(無本)이라는 스님이 지은 ‘방도자불우(訪道者不遇)’라는 시가 있다. ‘도인을 찾아갔는데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松下問童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고 하네.
只在此山中 다만 이 산중에 있을 뿐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네.]
좌우에서 농부들을 몇 명 데려오자, 문공은 농부들에게 친히 물었다. 농부들이 대답했다.
“며칠 전에 한 장부가 노모를 업고 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산 아래에서 물을 마시고는 다시 노인을 업고 산을 올라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문공은 온 산을 뒤져 개자추를 찾게 했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끝내 찾지 못하였다. 문공은 다소 화가 난 빛으로 해장에게 말했다.
“자추가 과인을 원망하는 것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내 듣건대, 자추는 효성이 지극하다 하니, 숲에 불을 지르면 반드시 노모를 업고 나오리라.”
위주(魏犨)가 말했다.
“주군을 따라 망명했을 때 공로를 세운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찌 유독 자추만 염려하십니까? 자추는 은신하여 주군으로 하여금 이곳까지 와서 시간을 허비하게 하니, 그가 불을 피하여 나오기만 하면 신이 그를 꾸짖어 망신을 주겠습니다.”
문공은 군사들로 하여금 산의 사방에 불을 놓게 하였다. 불은 맹렬하게 타올라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꺼졌는데, 개자추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자추는 노모를 껴안은 채 버드나무 아래에서 타죽어 있었다.
문공은 그의 유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면산 아래 장례를 지내고 사당을 지어 그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산 주위의 밭을 사전(祠田)으로 하사하여, 농부들로 하여금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전(祠田)’은 사당에 속한 땅이다.]
문공은 영을 내렸다.
“면산을 개산(介山)으로 고쳐 부르게 하여, 과인의 잘못을 기억하게 하라!”
후세에 그곳에 현(縣)을 설치하고 이름을 개휴(介休)라 하였으니, 이는 곧 개자추가 그곳에 휴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불을 지른 날이 3월 5일로서, 절기로는 청명(清明)이었다. 晉나라 사람들은 개자추를 사모하여 그가 불에 타죽은 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한 달 동안 찬 음식만 먹었는데, 후에 점점 기간이 줄어들어 사흘이 되었다.
지금 태원(太原)·상당(上黨)·서하(西河)·안문(雁門) 등에서는 해마다 동지 후 105일이 되면 미리 마른 식량을 준비하여 냉수와 함께 먹으면서, 금화(禁火) 혹은 금연(禁煙)이라 한다. 그 풍속이 점점 굳어져 오늘날 청명 하루 전날이 바로 한식(寒食)이 되었다. 그리고 한식 때 집집마다 대문 앞에 버드나무를 꽂아 개자추의 영혼을 부르고, 혹은 들에서 제사를 지내며 지전(紙錢)을 태우는데 모두 개자추를 위함이다.
[‘지전(紙錢)’은 종이를 돈 모양으로 재단한 것으로, 저승에서 망자가 사용할 화폐이다.]
호증(胡曾) 선생이 시를 읊었다.
羈絏從游十九年 고삐 잡고 주군 따라 주유하기 19년
天涯奔走備顛連 세상 끝까지 달려 고난이 오죽하였으랴.
食君刳股心何赤 허벅지살 베어 주군을 먹였으니 그 마음 충성되고
辭祿焚軀志甚堅 봉록을 사양하고 그 몸 불태웠으니 그 지조 굳세었구나.
綿上煙高標氣節 면산의 높은 연기는 기개와 절의를 나타내고
介山祠壯表忠賢 개산의 사당은 충성과 어짊을 표하도다.
只今禁火悲寒食 오늘날 불을 피우지 않고 한식을 슬퍼함은
勝卻年年掛紙錢 해마다 지전을 태우는 것보다 낫도다.
진문공은 신하들에 대한 포상을 마치고, 대대적으로 국정을 쇄신하였다. 어질고 능력 있는 자들을 등용하고,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였으며, 상거래가 잘 통하게 하고 외국에서 온 빈객들을 예우하였다. 과부를 시집보내고 어려운 자를 구제하여,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주양왕(周襄王)은 태재(太宰) 주공(周公) 공(孔)과 내사(內使) 숙흥(叔興)을 晉나라로 보내, 문공에게 후백(侯伯)의 작위를 내렸다. 문공은 사신들을 예로써 대접하였다.
[‘내사(內使)’는 내관으로서 임금의 명에 따라 사신의 구실을 하는 사람이다. 제17회에, 주이왕(周釐王)이 1軍을 거느린다는 조건으로 진무공(晉武公)을 晉侯에 봉했었다. 이제 정식으로 제후에 봉했다고 할 수 있다.]
숙흥은 주왕실로 돌아가 양왕에게 아뢰었다.
“晉侯는 필시 제후들의 패자가 될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왕은 이로부터 제나라와는 소원해지고 晉나라와 가까워졌다.
이때, 정문공(鄭文公)은 초나라에 신복(臣服)하면서, 중국과 왕래하지 않고 있었다. 정문공은 초나라의 강함을 믿고 약소국을 업신여겼는데, 활백(滑伯)이 위나라만 섬기고 정나라를 섬기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활백이 두려워 강화를 청하자, 鄭軍은 물러났다.
[제68회에, 홍수(泓水) 전쟁에서 초성왕(楚成王)이 송양공(宋襄公)에게 승전하자, 정문공은 초성왕에게 복종하였다. 초성왕은 정문공의 두 딸을 겁탈하고 후궁으로 삼았다. 제69회에, 중이(重耳)가 정나라에 갔을 때 정문공은 성문을 닫고 중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鄭軍이 후퇴하자, 활나라는 다시 예전처럼 위나라를 섬기고 정나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정문공은 크게 노하여, 공자 사예(士洩)를 대장으로, 도유미(堵俞彌)를 부장으로 삼아 다시 대군을 일으켜 활나라를 정벌하였다.
위문공(衛文公)은 그때 주왕실(周王室)과 화목했기 때문에, 정나라의 활나라 침공을 주왕실에 호소하였다.
[제62회에, 중이가 위나라에 갔을 때 상경(上卿) 영속(寧速)은 중이를 맞아들이자고 했지만 위문공은 거절했었다.]
주양왕은 대부 유손백(游孫伯)과 백복(伯服)을 정나라에 보내 활나라와 강화하라고 권하려고 하였다.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소식을 들은 정문공은 노하여 말했다.
“정나라와 위나라는 마찬가지인데, 왕은 어찌하여 위나라에만 후하고 정나라에는 박하단 말인가?”
정문공은 명을 내려, 유손백과 백복을 국경에서 사로잡아, 활나라를 격파하고 개선할 때 풀어주라고 하였다. 유손백과 백복이 鄭軍에 사로잡히자, 시종들이 도망쳐 돌아가 주양왕에게 아뢰었다.
주양왕이 정문공을 꾸짖어 말했다.
“정나라 첩(捷)이 짐을 업신여기는 것이 너무 심하구나. 짐이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
[‘첩(捷)’은 정문공의 이름이다.]
양왕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누가 짐을 위하여 정나라에 죄를 묻겠소?”
대부 퇴숙(頹叔)과 도자(桃子)가 나서서 말했다.
“정나라는 선왕께서 패전한 후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습니다. 지금 또 초나라를 끼고 강해져서, 왕의 신하를 학대하고 있습니다. 만약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승전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적(翟)나라의 군대를 빌려야만 위세를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8회에, 주환왕(周桓王)이 蔡·衛·陳 3국과 함께 정나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정장공(鄭莊公)에게 패전하였다. 그때 환왕은 정나라 장수 축담(祝聃)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았었다.]
대부 부신(富辰)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소불간친(疏不間親)’이라고 했습니다.。정나라가 비록 무도하나, 鄭伯 우(友)의 후손으로 천자의 형제입니다. 정무공(鄭武公)은 주왕실이 동천(東遷)할 때 공로가 있었으며, 정여공(鄭厲公)은 왕자 퇴(頹)의 반란을 평정하였습니다. 그 은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적나라는 융적(戎狄)으로서 승냥이나 이리 같은 무리이므로 우리와 동류가 아닙니다. 다른 부류를 이용하여 동성(同姓)을 멸시하는 것은, 작은 원한을 갚기 위해 큰 은덕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 해로움만 있지 이로움은 없습니다.”
[‘소불간친(疏不間親)’은 관계가 소원한 사람이 관계가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뜻이다. 제3회에, 鄭伯 友는 주여왕(周厲王)의 막내아들로서, 주선왕(周宣王)이 정나라에 봉하였으며, 주유왕(周幽王) 때에 사도(司徒) 벼슬을 하고 있었다. 제5회에, 유왕 때 서융이 침략했을 때 鄭伯 友는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제6회에, 鄭伯 友의 아들 정무공(굴돌)은 서융을 격퇴하기 위해 구원병을 이끌고 왔으며, 태자 의구(평왕)를 신나라에서 모셔 오고, 또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동천할 때 수행했었다. 제38회에, 왕자 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정여공과 서괵공(西虢公)이 왕성을 공격하여 왕자 퇴를 참수하고 주혜왕(周惠王)을 복위시켰다.]
퇴숙과 도자가 말했다.
“예전에 무왕(武王)께서 은나라를 정벌할 때, 구이(九夷)가 모두 와서 전쟁을 도왔습니다. 어찌 반드시 동성이어야만 하겠습니까? 동산(東山)을 정벌한 것은 실로 관채(管蔡) 때문이었는데, 정나라의 횡역(橫逆)은 관채와 같습니다. 적나라는 주왕실을 섬기면서 예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순종하는 자를 이용하여 거역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중국인들은 동쪽의 이민족들을 ‘동이(東夷)’라 불렀는데, 동이는 크게 아홉 부족이 있었기 때문에 ‘구이(九夷)’이라고도 했다는 설이 있고, 또 ‘九’는 반드시 ‘아홉’이 아니라 ‘많다’는 뜻으로도 사용하므로 여러 동이족을 ‘구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논어에 ‘공자가 九夷에 살고자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관채’는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으로 주공(周公)의 형제인데,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등극하여 주공이 섭정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공에게 죽음을 당했다.]
양왕이 말했다.
“두 경의 말이 옳소.”
양왕은 퇴숙과 도자를 적나라로 보내, 정나라를 정벌하는 일을 알리게 하였다.
翟侯는 기꺼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갑자기 정나라로 쳐들어가 역성(櫟城)을 깨뜨리고 병력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翟侯는 두 대부와 함께 사신을 주왕실로 보내 승첩을 고하였다.
주양왕이 말했다.
“적나라는 짐에게 공을 세웠다. 중궁(中宮)이 지금 세상을 떠났으니, 짐은 적나라와 혼인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퇴숙과 도자가 말했다.
“신들이 적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전숙외(前叔隗), 후숙외(後叔隗), 주옥(珠玉)처럼 빛나네.’라고 하였습니다. 적나라에 두 여인이 있는데, 둘 다 이름이 숙외이며 둘 다 미색이 뛰어납니다. 전숙외는 구여국(咎如國)의 딸인데, 이미 晉侯에게 출가하였습니다. 후숙외는 翟侯의 딸인데, 출가하지 않았으므로 왕께서 구혼하실 수 있습니다.”
[제61회에, 적나라에서 구여국을 정벌하여 얻은 두 미녀 가운데 계외(季隗)를 중이(重耳)에게 시집보내고 숙외를 조쇠(趙衰)에게 시집보냈다. 제72회에, 계외는 晉나라로 와서 진문공(晉文公)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착오가 있다.]
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퇴숙과 도자를 적나라로 보내 구혼하게 하였다. 翟侯는 숙외를주왕실로 보냈다. 양왕이 숙외를 왕후로 세우려 하자, 부신이 또 간했다.
“왕께서 적나라의 공을 인정하여 위로하시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존귀하신 천자께서 비천한 오랑캐 여인을 왕후로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적나라는 그들의 공과 혼인을 믿고 필시 기회를 엿보아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양왕은 부신의 말을 듣지 않고, 숙외를 왕후로 세웠다.
숙외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녀는 용모는 아름다웠지만 부덕(婦德)은 없는 여인이었다. 본국에 있었을 때에는 오로지 말 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翟侯가 사냥을 나갈 때마다 수행하였으며, 날마다 장사들과 들판을 달리는 것에 전혀 구속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周王과 혼인하여 깊은 궁궐 속에 거처하게 되자, 마치 새가 조롱에 갇히고 짐승이 우리에 갇힌 것과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어느 날 숙외가 양왕에게 청하였다.
“첩은 어릴 때부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익혔는데, 부군께서는 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답답한 궁중에만 있다 보니, 사지가 나른해지고 온몸이 마비되는 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왕께서는 사냥 대회를 열어, 첩이 구경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양왕은 새 왕후를 총애하였으므로 그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왕은 태사(太史)에게 명하여 길일을 택하게 하고, 군사들을 동원하여 북망산(北邙山)으로 사냥을 나갔다. 산 중턱에 장막을 치고, 양왕은 외후(隗后)와 함께 앉아 사냥을 구경하였다. 양왕은 외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영을 내렸다.
“정오가 될 때까지 짐승 30마리를 잡은 자에게는 돈거(軘車) 30승, 20마리를 잡는 자에게는 충거(䡴車) 20승, 10마리를 잡는 자에게는 소거(轈車) 10승을 상으로 내리겠다. 10마리 이상을 잡지 못하는 자는 상이 없다.”
[‘돈거(軘車)’는 전투에서 수비하는 데 쓰는 병거, ‘충거(䡴車)’는 적진을 공격할 때 쓰는 병거, ‘소거(轈車)’는 망 볼 때 쓰는 병거이다.]
그러자 왕자와 왕손 및 대소 장사들이 여우를 잡고 토끼를 쫓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상을 받으려고 경쟁을 벌였다. 한참 동안 사냥을 벌였는데, 태사가 아뢰었다.
“정오가 되었습니다.”
양왕이 영을 내려 사냥을 그치게 하자, 장수들이 각기 잡은 짐승들을 바쳤다. 어떤 자는 10마리, 어떤 자는 20마리를 바쳤는데, 오직 귀인(貴人) 한 사람만 30마리가 넘는 짐승을 바쳤다.
그 귀인은 용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늠름하였다. 그는 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대(帶)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태숙(太叔)이라 불렀으며 작위는 감공(甘公)이었다. 그는 예전에 적자(嫡子)의 자리를 탈취하려다가 실패하자, 융족의 군대를 불러들여 주왕실을 공격하게 했었다. 융족이 패전하고 돌아가자,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후에 혜후(惠后)가 재삼 양왕의 면전에서 변호하고 용서를 구했으며, 또 대부 부신이 형제간의 우호를 권하여, 양왕은 부득이 그를 불러들여 복위시켰었다.
[제47회에, 주혜왕(周惠王)의 장자는 정(鄭)인데 선왕비(先王妃) 강씨(姜氏) 소생이고, 차자는 대(帶)인데 차비(次妃) 진규((陳媯; 혜후)의 소생이었다. 주혜왕은 대를 총애하여 태숙이라 부르며 태자 정을 폐하고 대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제환공(齊桓公)은 수지(首止)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태자 정을 초빙하여 지지를 선언하였다. 제48회에, 주혜왕이 붕어하고 태자 정(양왕)이 제환공을 비롯한 제후들의 도움으로 즉위하였다. 제58회에, 왕자 대는 융족과 연합하여 왕성을 공격했다가, 진목공(秦穆公)과 진혜공(晉惠公)이 구원하러 와서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했었다.]
오늘 사냥에서 대(帶)는 실력을 발휘하여 수훈(首勳)을 세웠던 것이다. 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잡은 짐승의 수만큼 돈거를 하사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잡은 짐승의 수에 따라 상을 내렸다.
외후는 왕의 곁에 앉아 있다가 감공 대(帶)를 보니, 용모와 재능이 비범하고 활솜씨도 출중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 양왕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고, 금지옥엽(金枝玉葉)이란 것을 알게 되자 마음속으로 십분 사랑하게 되었다.
[‘금지옥엽(金枝玉葉)’은 금으로 만든 가지와 옥으로 만든 잎이란 뜻으로, 왕이나 고관의 자손 또는 집안의 귀한 자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외후는 양왕에게 말했다.
“날이 아직 밝으니, 첩도 사냥을 해서 근육을 단련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양왕이 사냥을 나온 본래 의도가 외후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었으니, 어찌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겠는가? 양왕은 즉시 명을 내려, 장사들로 하여금 사냥 몰이 준비를 하게 하였다
외후는 비단옷을 벗고 이상한 모양의 황금 쇠사슬로 만든 가벼운 갑옷을 입었다. 허리에는 오색실을 꼬아 만든 허리띠를 매고, 검은색 명주로 이마를 둘러 봉황 비녀를 가렸다. 그리고 허리에는 전통을 차고 손에는 붉은 활을 들었다.
花般綽約玉般肌 꽃 같은 아리따운 용모에 옥 같은 피부
幻出戎裝態更奇 환상적인 무장(武裝) 자태는 더욱 기이하다.
仕女班中誇武藝 여인들 반열에서는 무예를 자랑하고
將軍隊裏擅嬌姿 장군들 대열에서는 함부로 교태를 뽐내네.
외후가 그처럼 무장을 하고 나서자 평소의 모습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내, 양왕은 기뻐서 미소를 머금었다. 좌우에서 융로(戎輅)를 대기시키자, 외후가 말했다.
[‘융로(戎輅)’는 전투 때 사용하는 큰 병거이다.]
“병거를 타는 것은 말을 타는 것보다 빠르지 못합니다. 첩을 수행하는 시비(侍婢)들도 모두 적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말을 타는 데 익숙합니다. 왕 앞에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양왕은 명을 내려, 좋은 말을 여러 마리 골라 준비시키게 하였다. 몇 명의 시비들이 말을 타고 수행하기로 하였다. 외후가 막 말에 오르려고 할 때, 양왕이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양왕은 동성의 경들에게 물었다.
“누가 말을 잘 타시오? 왕후가 사냥하는 동안 보호해 주시오.”
감공 대가 아뢰었다.
“신이 모시겠습니다.”
그건 바로 외후가 마음속으로 몰래 바라던 바였다.
시비들이 외후를 둘러싸고 일대를 이루어 먼저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감공 대가 명마를 타고 그 뒤를 따라가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외후는 태숙의 면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자 하였고, 태숙 역시 외후의 면전에서 자신의 수단을 뽐내려 하였다.
활을 쏘기 전에 먼저 말 타기 시합이 벌어졌다. 외후가 몇 차례 채찍질을 하자, 말은 마치 허공으로 뛰어오르듯 하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태숙 역시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렸다. 한참을 달려 산허리를 돌아가자, 두 말은 머리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외후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감공을 칭찬하였다.
“오래 전부터 왕자님의 큰 재주를 흠모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태숙은 말 위에서 몸을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신은 겨우 말 타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왕후의 만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외후가 말했다.
“태숙께서는 내일 아침 태후궁(太后宮)으로 문안드리러 오십시오, 첩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시녀들이 모두 당도하였다. 외후가 눈짓으로 추파(秋波)을 던지자, 감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각자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때마침 산비탈 아래 한 떼의 노루와 사슴들이 나타났다. 태숙이 왼쪽의 노루를 쏘고 오른쪽의 사슴을 쏘았는데, 모두 명중하였다. 외후도 활을 쏘아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모두 갈채하였다.
외후가 다시 말을 달려 산허리에 당도하자, 양왕이 장막을 나와 맞이하며 말했다.
“왕후는 수고가 많았소!”
외후가 잡은 사슴을 양왕 앞에 바치자, 태숙 역시 노루 한 마리와 사슴 한 마리를 바쳤다. 양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장수들과 군사들도 또 한 번 말을 달려 사냥을 한 다음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요리사들이 잡은 짐승들을 요리하여 바치자, 양왕은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고는 해산하였다.
다음 날, 감공 대는 입조하여 전날 하사한 상에 대해 양왕에게 감사를 드린 후, 혜후의 궁중으로 가서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때 외후는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외후는 미리 뇌물을 써서 수행하는 시비들을 매수해 두었다.
두 사람은 눈짓을 교환하여 뜻이 통하자, 돌아가겠다고 일어서서 몰래 옆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여자를 탐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여, 서로 간절한 정을 주고받았다. 작별할 때가 되자 차마 떨어지지 못하였다. 숙외가 태숙에게 당부하였다.
“언제라도 궁으로 와서 만납시다.”
태숙이 말했다.
“왕이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외후가 말했다.
“첩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혜후의 궁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태숙은 태후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게다가 사안이 중대하여 감히 발설하지 못하였다. 혜후도 역시 눈치를 챘지만, 궁인들에게 분부하였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 마라!”
외후의 시비들은 이미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눈과 귀가 되었다. 태숙은 날마다 궁으로 와서 밤부터 아침부터 몰래 궁중에 머물렀다. 오직 양왕 한 사람만 모르고 있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太叔無兄何有嫂 태숙은 본래 형이 없었으니 어찌 형수가 있겠는가?
襄王愛弟不防妻 양왕은 아우를 사랑했지만 아내를 간수하지 못했도다.
一朝射獵成私約 하루아침에 사냥터에서 밀약이 이루어졌으니
始悔中宮女是夷 오랑캐 여인을 중궁으로 맞이한 일이 후회되는구나!
또 사관이 시를 지어, 양왕이 태숙을 불러들여 화를 자초한 일을 꾸짖었다.
明知篡逆性難悛 반역 했던 본성이 바뀌기 어려움이 분명한데
便不行誅也絕親 바로 죽이지도 않고 형제의 정도 끊지 않았다.
引虎入門誰不噬 범을 문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누군들 물지 않겠는가?
襄王真是夢中人 양왕은 진정 꿈속을 헤맨 자였도다.
무릇 좋은 일을 하려는 마음은 나날이 줄어들고, 나쁜 일을 하려는 마음은 나날이 커지게 마련이다. 감공 대와 외후의 사통은 길을 갈수록 익숙해지고 일이 거듭될수록 습관이 되어, 점점 남의 이목도 피하지 않게 되고 이해(利害)도 돌아보지 않게 되어, 자연히 노출되었다.
외후는 나이도 젊고 욕정이 넘쳤는데, 양왕은 비록 외후를 총애하기는 했으나 나이가 50대여서 정력이 달려 수시로 별실에서 휴식하였다. 태숙은 궁문을 지키는 자들에게 뇌물도 쓰고 권세도 부려 궁문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내시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태숙은 태후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周王이 붕어하면 태숙이 왕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주는 재물이나 받아먹으면 그만이지, 그가 궁중에서 하는 일에 간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태숙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멋대로 궁중을 출입하게 되었다.
한편, 소동(小東)이라는 궁녀가 있었는데, 제법 미모도 있고 음률에도 밝았다. 어느 날 저녁, 태숙이 주연(酒宴)을 즐기면서 소동에게 옥퉁소를 불게 하고 자신은 거기에 맞춰 노래를 하였다. 그날은 마음 놓고 술을 실컷 마시다 보니 크게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방탕해져, 소동을 끌어안고 즐기려 하였다.
소동은 외후가 두려워 옷을 벗어 던지고 몸을 빼내 달아났다. 태숙은 크게 노하여 검을 뽑아들고 뒤쫓아 소동을 찾아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소동은 양왕이 쉬고 있는 별실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고 울면서 태숙이 저지른 일을 모두 일러바쳤다.
“태숙이 지금 궁중에 있습니다.”
양왕은 크게 노하여 침상 머리맡에 있던 보검을 들고 중궁으로 달려가 태숙을 죽이려고 하였다.
첫댓글 서쪽 월지에 가까운 적나라는 유목기질이 심하여
구중궁궐의 적응이 잘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