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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있으면
고봉스님
내가 태어난 곳은 충주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벽지인데 어릴 때
스님구경이라고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웃에 사는 친구의 누님이 해인사로 출가를 했어요.
그 친구를 통해서 불교얘기랑 해인사얘기를 많이 듣게 됐지요.
해인사에는 도닦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했어요.
도인들은 한결같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딱 소리만 나면 먹을 것이 들어오고 또 딱 소리만 나면
먹을 것이 나간다고 해서 어린 마음에
신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또 부처님일대기랑
6조 혜능스님 얘기도 들려줬어요.
그게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평소에도 막연하게나마 도 같은걸
한 번 닦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친구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지요.
자나깨나 해인사가 무릉도원처럼 다가왔습니다.
해인사는 어린 소년의 꿈이요, 이상향이 돼 버렸어요.
부모님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출가한다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3년만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니까
네가 도를 깨치면 이세상에 도 못깨칠 사람 없겠다며
허락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는수 없이 말도 않고
집을 나와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18세되던 해였습니다.
대구를 거쳐 고령에 도착한 다음 해인사까지 걸어갔습니다.
마을사람들에게 도닦으러 해인사에 간다고 하니
주지스님을 찾으라고 해요.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스님’ ‘스님’하는데
불교용어를 잘 몰랐던 나의 귀에는
꼭 ‘神님’ ‘神님’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정화전이었던 당시 해인사에는
현당 등에 대처승들이 머물렀고,
가야총림으로 불리던 관음전과 퇴설당
그리고 선열당 등에는 비구승들이 살았습니다.
나는 가야총림에서 행자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해인사에는 방장 효봉스님을
비록 청담스님 구산스님 등 큰스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퇴설당 너머로 언뜻 언뜻 보이는 큰스님들의
좌선하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풍도골의 풍모 그대로 였습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발심이 될 때는
돌마루나 툇마루 혹은 우물가에 앉아서
큰스님들의 흉내를 내곤 했었지요.
당장이라도 도를 깨치고야 말겠다는
그 초발심이 지금까지의 수행생활의
밑받침이 되어 주었습니다.
요즈음 수행 납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도
초발심때의 마음을 항상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공부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에 그냥 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공부에 진척이 없으면 포기를 하거나
타성에 젖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천산 암벽이라도 깰 것 같은
초발심때의 마음을 지속해야 합니다.
행자생활중에 염불을 익히라고 하는데 하기가 싫었습니다.
오로지 선방에 가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스님노릇 제대로 하려면 염불도 알아야
된다고 해서 마지못해 염불도 배우고 강원에도 들어갔습니다.
강사스님께서 천수경을 가르쳐주며
외워오라고 하는데 금방 암기가 됐습니다.
반야심경을 하루만에 다 외워버리니
스님이 어디서 중노릇하다가 왔느냐고 묻더군요.
해인사에 오기전 고향에서 사서까지 익혔던 터라
문리는 어느정도 터져 있었습니다.
일제 암흑기를 막 벗어나 6·25전쟁을 치러야 했던
당시의 한국사회는 암담하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눈빛은 푸르고 성성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다른 잡생각이 생길 여지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옷한벌에 일단사 일표음의 두타행이 저절로 되던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마음은 넉넉했습니다.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고 했어요.
춥고 배고파야 발심이 된다는 얘깁니다.
문명이 발달하여 편리해질수록 도닦기 힘들어집니다.
다 해준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절실해야 공부가 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야 화두가 타파되지요.
기본자세가 잘못되면 기름때묻은 공부,
남보기에 점잖은 공부밖에 안됩니다.
6·25전쟁당시 은사이신 영월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떠나 양산 통도사, 언양 석남사,
청도 운문사 등지를 전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이었어요.
전쟁의 와중이었는데도 공부가 참 잘 됐어요.
거기서는 화두로 밥을 먹고
화두로 길을 걷고
화두로 잠을 자는 생활이 지속됐어요.
그냥 대충 후다닥 해치우는게 없었습니다.
매사에 화두가 살아있는 생활이 계속됐지요.
그러던 어느날 가슴에 맺힌 것이 확 트이는데
모든 미운 감정들이 싹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계속 공부를 밀어붙였어야 되는데 전쟁이 끝나고
해인사로 돌아가 절살림을 맡는 바람에
공부를 제대로 끝까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백련암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옛날 조선시대
한적스님께서 벽곡(벽穀·곡식대신 솔잎·밤 따위를
날것으로 조금씩 먹고 삶)하시며 수행하시던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토굴을 짓고 2~3년간 살았습니다.
진주 응석사 토굴에서도 몇개월 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1종식에 장좌불와를 하며 용맹정진을 했더랬습니다.
그때 느낀 것이 공부에는
자신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을 그대로 두고는
발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발심하려면 먼저 나라는 것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있음으로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나라는 근본무명 내지 착각을 벗어나 불성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는 곧 생명체입니다.
화두를 드는 순간,
잡념망상이 다 떨어지는 순간은 살아있는 상태요,
화두를 놓치는 순간은 곧 무명속입니다.
현실에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킴은
곧 역경계에 걸리는 것이니 이는 무명입니다.
화두를 드는 순간은 이런 경계가 다 떨어져 버리니
화두는 곧 생명이요 광명이며 지혜고 문수입니다.
<금강경>의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납니다.
약보살(若菩薩)이 심주어법(心住於法)하고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如人)이
입암(入闇)에 즉무소견(則無所見)이니라.
약보살(若菩薩)이 심부주법(心不住法)하고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如人)이 유목(有目)하고
일광(日光)이 명조(明照)하야 견(見) 종종색(種種色)이니라.
(만약에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속에 들어가 아무 것도 못보는 것과 같고,
만약에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의 눈이 있고 햇빛이 밝게 비쳐
가지 가지의 색을 봄과 같으니라)
화두를 들고 놓는 것도 이와같아 화두를 들면
모든 것에 걸리지 않으니 광명이요 태양이지만
화두를 놓치면 곧 무명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이어지려면 나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집착이 모두 떨어져야 합니다.
태풍이 불고 파도가 치는데 배를 띄워봐야
배는 파산하고 맙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다 떨어져야 합니다.
마음속의 바람이 가라 앉아야 화두를 들면
순식간에 쏙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도리는 제가 공부를 해봐서 잘 압니다.
공부가 잘 안될 때는 반드시 세간사 어떤 일에 걸려 있어요.
그런게 남아 있으니까 공부가 안돼요.
그게 다 떨어진 순간이 바로 발심입니다.
은사이신 영월스님은 일평생 참선만 하신 분입니다.
'참선공부만 하라’는게 스님의 평소 지론이셨습니다.
다른 것은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죽어서 뭐 될래?
공부하라’는게 스님의 가르침이셨습니다.
책을 보고 경학을 공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참선수행 일변도의 외곬은
스님의 열반송에도 잘 나타나 있어
지금도 노상 외우고 있습니다.
八十人間事 猶如夢中夢
古路依舊然 山上白雲歸
한평생 사람일이 꿈속의 꿈이로다
변함없는 옛길따라 흰구름 돌아가네
내가 25세되던 무렵 희랑대에 경하노스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일어나다 현기증으로 쓰러지셨는데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거동을 못하시게 됐습니다.
노스님이 제 은사이신 영월스님한테
시봉을 부탁했는데 제가 그 소임을 맡게 됐어요.
노장님이 시봉을 받으시다 미안해서 안되겠다며
저더러 법상좌가 돼 달라고 해요.
그래야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 것 같다며
계속 부탁하시는 바람에 응낙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소변 받는 일을 약 3년간 했습니다.
참으로 모든 일은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인연따라 일어나지 않는게 없고
내 마음이 지어내지 아니한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해탈을 하면 인(因)에도 걸리지 않고
과(果)에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경계에 도달하기까지는 일체의 현상이
다 내 마음작용이 씨가 되어 일어나며
인연과보에 응하여 발생합니다.
경하스님과의 인연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별한 가르침이 있었다기 보다
시봉드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인내와 하심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법문이란 공식석상에서만 전해지는게 아닙니다.
일상생활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체가 다 나의 스승이요,
일체처가 다 법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하스님은 독성님(나반존자)과 인연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경하스님의 은사이신 우련스님이 상좌가 없어서
독성님에게 1주일간 기도를 했더랍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1주일 되던 날 초라한 행색의
한 젊은이가 올라오는데 스님이 되고자왔다고 해요.
시원찮아 보였는데 기도회향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산을 허락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경하스님입니다.
경하스님은 당시로는 불치의 병으로 여겨지던
등창(종기)이 있어서 절에 들어 왔는데
어떻게나 신심이 깊던지 아주 신명나게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고 그랬답니다.
어쨌든 경하스님이 들어오고 나서 절에 불공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논도 사고 밭도 사고 부자가 됐어요.
하루는 경하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웬 노인이 한뼘도 더 되는
커다란 침을 갖고 와서 한손으로 스님의 머리를 꽉 잡고는
“이놈, 꼼짝마라”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러고는 침을 콱 찌르는데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잠을 깼답니다.
이날 이후로 등창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독성님과의 인연으로 해인사에 오신 경하스님은
경학에도 능하고 전계도 받는 등 대법사가 되셨습니다.
해인사주지도 2번이나 하셨지요.
하루는 통영에서 49재가 들어왔는데 재주(齋主)가
여타 중진스님들을 제껴놓고 경하스님더러
49일간 법문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백련암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나서는 포효를 하는 바람에 대중들이
재를 잘못 지냈는 줄 알고 겁을 집어먹고 크게 당황했어요.
경하스님이 대중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화엄경>을 설하니까 산신(호랑이)이 신심이 나서
이러는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은 호랑이가 스님앞에 오더니 넙죽 엎드렸습니다.
스님이 호랑이더러 저쪽으로 가라고 지시하니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49일내내 계속 와서 법문을 듣더니
재가 끝나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답니다.
경하스님을 시봉하는 동안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호랑이도 감명시킬수 있는 신심을 가진 불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지극한 불심앞에서는 미물이나 천지자연도
저절로 감응하게 마련입니다.
근본 마음자리에서는 시방세계 어느 한구석
통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착을 티끌도 남김없이 완전히 놓아 버리면
곧 우주심과 하나가 됩니다.
그때는 달리 삼매를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모든 집착을 놓는 일은 아상을 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라는 생각, 내것이라는 소유심이 팔만사천 번뇌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망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어요.
그렇게 보면 뛰어넘어야 할 장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뿌리를 잘 다스리면 망상은 없어집니다.
거부함이 없이 망상의 실체를 반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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