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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한에 대해서는 지난 구간 때 자세히 봤으므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지도 #1
11:28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우틀합니다.
지금부터 지루하게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이 길의 끝에는 그 유명한 형제봉 활공장이 있습니다.
행글라이더 꾼들 뿐만 아니라 비박꾼들로부터도 호평을 받는 곳입니다.
하긴 편하게 차를 이용하여 지리남부능선의 한 자락 그것도 1090m 정도되는 고지까지 올라가 야영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질 것 같습니다.
해밀 산악회의 비박팀장 '노고단'님은 이런 곳과 취향이 맞으실 지....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나누는 술 한 잔이란....
거기에 조용히 흐르는 통기타의 음률을 즐길 수 있다면......
Rainbow의 Rainbow eyes 정도나 Catch the rainbow 정도면 그저 뻥가겠죠.
여기서 형제봉 활공장 갈림길인 삼거리까지의 거리가 4.1km입니다.
그런데 원부춘이 해발 261m 정도되는 곳이고 활공장 삼거리가 800고지 정도가 되는 곳이니 무려 540m의 고도를 올려야 하니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묵묵히 걸어 올라가야만 하는 그런 구간이겠군요.
12:09
그곳을 오르는데 볼거리라고는 별반 없습니다.
좌측 계곡 건너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하나 있군요.
지통사.
슬슬 시장기가 밀려오고....
계곡에 앉아 어제 남부 터미널에서 떨이로 산 고로케를 먹습니다.
이것마저 안 가져왔으면 배가 고파서 좀 고생했겠습니다.
이정표를 따라 무조건 걷기만 합니다.
길은 외길.
고도를 높일수록 습기가 더 해지는 느낌입니다.
13:01
그러고는 드디어 지도 #1의 '가'의 곳에 위치한 활공장 갈림 삼거리입니다.
4.1km를 1시간 반이나 걸렸군요.
물론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었더라도 길 사정에 비해 좀 많이 걸린 듯한 느낌입니다.
직진을 하면 활공장으로 오르고,
좌틀하여 비포장 임도를 따릅니다.
이제 좀 걷는 맛이 납니다.
천천히 여유있게 걷다보니,
화장실도 있고 우측으로는 계속 임도로 이어지는 지도 #1의 '나'의 곳의 삼거리입니다.
13:06
우측으로 내려갈 경우 상훈사를 경유 쌍계사나 칠불사 혹은 화개장터로 진행할 수 있는 1023번 도로와 만나게 됩니다.
둘레길은 '카페 하늘 · 호수'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카페까지 40분 정도 걸린다고요.
어서 가 봅시다.
돌계단을 내려서면 잠시 바위구간을 지납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러운 길로 연결이 되며 고도를 떨어뜨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삼각점 말뚝 같은 것을 서너 개 보게 되는데 이것의 용도는 무엇인지....
13:21
조릿대 군락지도 산뜻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마냥 고도를 낮춥니다.
이런 바위 구간도 서너 번 만나 심심함을 덜어주고.....
반복해서 나오고.....
13:49
11분 더 가야한다고요?
아까 40분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2시 정도 도착에 약 54분 소요.
중간에 물마시고 세수한 것밖에 없는데.....
지도 #2
11:56
좌틀하고,
14:00
그러고는 카페 하늘 · 호수입니다.
지도 #2의 '다'의 곳입니다.
후덕하신 사장님과 마나님으로부터 푸짐한 대접을 받습니다.
카페 내에 걸려 있는 낯익은 표지띠를 가지고도 한참이나 환담을 나누고.....
그런데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왜 기록이 안 되었는지...
상당히 유감입니다.
아마 몇 가지 작동을 하다가 에러가 난 걸 모르고 그냥 넘긴 거 같습니다.
맥주 한 병에 라면 한 그릇 먹고 서비스로 탁배기 한 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장님 내외와 작별을 합니다.
제 책을 한 권 보내드리기로 약속을 하고....
30분 조금 넘게 머무르다 다시 출발합니다.
14:38
중촌마을의 둘레길은 좀 복잡합니다.
마을이 다 빈 집 투성이어서 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입니다.
14:50
산새소리팬션 안내판에서 좌틀합니다.
쌍계사가 지척인데.....
쌍계사, 칠불사, 불일암은 따로 다룰 예정입니다.
간단하게 냄새만 먼저 맡으면,
하늘호수 차밭을 지나 중촌 마을을 지난다. 호강골에서 내려오는 물은 화개천을 향해 흐른다. 그 호강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도심삼거리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신촌을 거쳐 구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쌍계雙磎와 석문石門이라고 각자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정말 고대하고 고대하던 고운과의 만남이다. 이 글은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로 썼다하여 철장서鐵杖書라 불리는 글씨다. 다소 어눌한 이 서체를 보고 탁영 김일손(1464~1498)은 “광제암문이란 글씨와 비교하건대. 크기는 훨씬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그보다 못하여 아동이 습자習字한 것과 같았다”고 폄하하였으나 이후로는 고운의 필체임을 인정하면서 품평하게 되었다. 가령 유몽인(1559 ~ 1623)은 위 탁영의 평가에 “탁영은 글은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면서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다.”고 하였으며, 양경우(1568 ~ ? )는 “안진경의 글씨보다 우월한데 당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고 하였다. 감수재 박여량(1554 ~ 1611)은 “나는 한 번만이라도 ‘쌍계석문’의 큰 네 글자를 손으로 만져보고. 팔영루 아래의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아득한 옛날의 유선儒仙을 불러보고, 천 길 절벽에서 학의 등에 올라타고서 선경을 유람하여 내 평생의 숙원을 풀고 싶었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남명 조식의 유람 코스도 우리와 같아 그도 악양을 지나 이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그도 제일 먼저 본 것이 바로 이 쌍계석문이었다.
“김홍지와 이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쌍계사 동문이다.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짓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는 ‘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놓았다. 지금까지 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서쪽으로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며 저 백 리 밖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신응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줄기고, 동쪽으로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쌍계’라고 부른 것이다.”
884년 귀국한 최치원은 경주에 있다가 886년 이 쌍계사에 있었으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1130년 전이다. 772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대비, 삼법 등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스님의 정상頂相을 모셔와 이 절을 창건할 때의 사찰명은 옥천사였다. 이후 840년 진감선사(법휘法諱는 혜소慧昭, 774 ~ 850)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뤘을 때 근처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기도 하여 정강왕이 쌍계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진감선사에 이르러 이 사찰의 이름이 쌍계사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 절의 동쪽에는 886년 최치원이 쓰고 이듬해 승려 환영이 글을 새긴 진감선사비가 있다.
고운 최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라말의 대사상가로 한국 유학의 종조宗祖이자 한국 한문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사람이니 만큼 수려한 그 글은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내용인즉슨 혜소의 집안 내력과 그의 남다른 효심, 당나라에 들어가 불가에 입문하게 되는 과정, 신라 구산선문 가지산파의 개조 도의선사를 만나 도반을 얻게 되는 과정, 귀국하여 지리산 아래에 있는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즉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범虎의 인도로 쌍계사 터로 와서는 절을 건립하고 후에 절의 이름이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바뀌게 되는 과정 등을 상세히 적었다. 그리고 혜소 본인이 입적한 다음에 절대로 탑塔을 세워 내 형체를 간직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 내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고 한 유언까지도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을 우리는 이 비碑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887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쓴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는 知異山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 이우성 선생이 교열하고 번역한 '신라 사산비명新羅四山碑銘'에는 智異山이라고 나오지만 이는 독자들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지금의 한자어를 사용한 것이고 어디까지나 원문은 知異山입니다. 그 후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에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는 기사가 최초입니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나 기타 문서의 기사에도 한자어는 地理山으로 되어 있어 발음은 같으나 한자어 표기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이르러서야 智異山이 오늘날과 같이 표기되게 됩니다. 그러니 지리산이라는 발음만큼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렸으니 그때부터 지리산이라는 지명이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졸고 ‘지리산 주릉종주’ 중에서
멀리 화개천을 봅니다.
차밭들이 나오면서 이 마을이 정금마을인 것을 실갑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이 차나무 시배지가 있는 곳과 가까운 곳입니다.
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종자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사실 시배지에 대해서는 설이 갈립니다.
화엄사 주변이라는 '마사면 황전리' 설, 쌍계사 주변인 이곳 '운수리' 설 등이 있는데 어쨌든 지리산 일대가 차 재배에 좋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불교의 영향도 한몫 하였을 테고....
점필재 김종직의 점필재집에 보면 공납의 폐해로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근무하던 함양에도 차를 재배하게끔 장려하던 내용이 나오죠.
지리산 산행을 하면서 공납으로 인해 고생하는 백성들의 실상을 직접 봤던 것이죠.
15:06
지도 #2의 '라'의 곳입니다.
여기서 좌틀하여 대비마을을 따릅니다.
15:10
그런데 이 대비마을에서 들레길 진행하는 루트가 좀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지도 #2의 '가는 선'을 따라 진행을 했었는데 지금은 이 대비교에서 우틀하여 바로 정자우측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리는 단축된 모양새입니다.
생각건대 보통 이 정도면 구간이 막바지에 이르기 때문에 둘레꾼들이 힘들어하는 사정을 배려한 듯한 느낌입니다.
우측 불무장등 능선의 촛대봉727.9m이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군요.
상당히 높이 있는 느낌입니다.
아래 화개천이 흐르고 정금교도 보이는군요.
그런데 갑자기 양희은 노래가 나오는군요.
'사랑. 그 쓸쓸함에대하여....'
어디서 나오는가 했더니.....
이게 야생동물들로부터 차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음악이 나오는 그런 장치 역할도 하는군요.
잔머리 싸움입니다.
15:29
가탄 소류지를 지나고,
지도 #2의 '마'의 곳에서 정자를 바라보고 우틀.
이제 곧장 내려 가기만 하면 됩니다.
농부 마을.
굉장히 말끔하군요.
멀리 화개초교가 보이고.....
15:42
예전 구도로를 만나면서,
15:44
가탄교에사 화개천을 보면서 오늘 전구간 진행을 마무리합니다.
13.4km 진행하는데 4시간 16분 걸렸습니다.
30분 정도 놀았으니 이 구간의 난이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구간만 남았으니 한 번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첫댓글 좀처럼 접하기 힘든 소중한 내용 감사합니다. 좋은 산행 많이 하세요
지리산 둘레길은 전체적으로 봐야 제대로 된 모습이 보일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