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내가 살던 강원도에서는 초가지붕을 그래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집들이 그 때만 해도 슬라브 지붕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간혹 초가지붕을 올린 집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난 요즘은 초가지붕은 민속촌에나 가야 보는 희귀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래서 가족들과 1박2일 가을 나들이에서 만난 초가지붕 올리는 모습이 더욱 큰 감회로 다가온 것 같다.
정성드려 새끼를 꼬아 지붕을 만드는 어르신의 익숙한 손놀림도 이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이에게 새끼를 꼬아 지붕을 만드는 광경을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아이는 뛰어노느라 바빠 미쳐 초가지붕의 소중함이나 아빠의 어린 시절 추억에는 영 공감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사진을 다 찍고 나서야 쌓인 짚단을 보여 이걸로 볏집 삼겹살을 구워먹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만 쏟아낸다.
아마 전에 먹었던 볏집 삼겹살이 맛있었나 보다.
일주문을 통과해서 잠시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수덕여관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수덕여관이다.
수덕여관은 수덕사(修德寺) 경내에 위치해 있어 수덕사 입장료만 내면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수덕여관은 1054㎡ 부지에 건평 182㎡ 크기의 ‘ㄷ’자형 초가로 지난해 10월부터 군비 등 4억 원을 들여
7개의 방, 장지문, 툇마루, 부엌, 구들을 깔아놓은 온돌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놓았다.
예산군은 당초 초가지붕 등만 개축하려 했으나 정비과정에서 서까래, 연목 등 건물 대부분의
부재가 썩거나 훼손이 심해 전면 해체 복원했다고 한다.
‘수덕여관’이란 옥호는 고암의 친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과거의 수덕여관은 관광객들이 숙박을 하고 산채정식을 파는 곳이었지만
복원을 통해 객실은 고암의 작품이 걸린 전시관으로 변모했다.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44년 구입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묵으면서
덕숭산 수덕사 일대의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으로 뜰에는 69년 동백림 사건 당시
이 화백이 잠시 머물며 화강암에 새긴 추상 암각화 2점도 남아있다.
이응호 화백이 프랑스로 건너 간 뒤에는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식당과 여관 등으로 사용해왔으나 박여사가 사망한 후
수년간 방치되다 96년 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수덕사가 여관을 매입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어 큰 다행이다.
수덕여관에 처음 들르는 사람들에게는 현대식 건물형태와는 달리 이채롭게 보일 것이다.
특히 여관의 뒤뜰에는 대한민국 근현대기에 동서양을 화풍을 접목시킨 가장 빼어난 화가중의 한 사람인
이응로(李應魯)화백이 새긴 바위그림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림은 암각화로 고암이 60년대에 한창 빠져있던 문자추상으로서 넓적한 바위에 새겨진 한글 자모들이
풀어져 서로 엉키면서도 아름답게 풀려나가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암은 이 무렵 동백림 공작단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이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 한다.
수덕여관은 그의 부인이 꾸려나가던 것으로서 이미 이혼하고 프랑스에서 재혼한 고암이었건만
옥바라지와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시켰던 전 부인의 내조에 존경하는 마음이 묻어나온다.
이응로화백이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이 자리를 지켰다고 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마무리 공사가 잘 되어 또 하나의 좋은 볼꺼리로 오래오래 사람들의 발길이 닿길 바라며 수덕사로 발길을 돌렸다.
- 퍼온 글 -
첫댓글 볏짚으로 만든 초가지붕 재료를 " 이엉 " 이라고 한 것 같은데.....오랜만에 보네요.^^덕분에 구경 잘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