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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황(龍荒)! 고구려(高句驪)와 전한(前漢)
○「용 황(龍荒)」이란 무슨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말은 “지명(地名)”을 말한다고 보아진다.「龍 荒 朔 漠」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 말은 「용성(龍城)은 황 복(荒服)의 북쪽 사막에 있다」라는 뜻이다.
「용 황(龍荒)」이란 곳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전한(前漢)시대와 고구려(高句驪)시대에 같이 등장(登場)한다는 것이 또한 관심(關心)을 갖기에 충분(充分)한 것이다. 【몇 년 전(前)엔가 한 번 설명한 적이 있는 것 같다.】
➊ 태평어람(太平御覽) 황 왕 부(皇王部) / 전한(前漢) : 中 宗 孝 宣 皇 帝 : 〔后漢班固宣帝述曰:中宗明明,寅用刑名.時舉傅納,聽斷惟精.柔遠能邇,燀燿威靈.龍荒朔漠,莫不來庭.丕顯烈祖,尚於有成.〕●〔龍 荒 朔 漠, 莫 不 來 庭 : 북쪽 사막(沙漠) 용 황(龍荒)에, 막(莫 : 흉노추장)은 아장(牙帳)에 오지 못하였다.〕
➋ 晩 靜 堂 集 第 四 / 詩 / 瀋 陽 城 (심양 성) : 〔曾識遼東是我疆.高句北界近龍荒.隋唐遙統提封蹙.丹鞨交爭壁壘長.昭代百年同漢輔.本朝何日復河湟.中宵勑勒奚歌發.俛仰山川淚數行. 近. 一 作 接.〕 ● 〔曾 識 遼 東 是 我 疆. 高 句 北 界 近 龍 荒 : 일찍이 요동 땅은 본시 우리나라 땅으로 명확하였고, 고구려(高句驪)의 북쪽 지경가까이에 용 황(龍荒)이 있다. 근(近), 또 하나의 본(本)에는 접(接)으로 기록되어 있다.〕
➌ 주석(註釋)을 보면 / 【孟 康 曰 :「謂 白 龍 堆 荒 服 沙 幕 也.」 : ‘맹 강(孟康)’이 이르기를 : 『‘백룡 퇴’ 는 ’황 복’의 사막이라 한다. 師 古 曰 :「龍, 匈 奴 祭 天 龍 城, 非 謂 白 龍 堆 也. 朔, 北 方 也.」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용(龍)은 흉노(匈奴)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용성(龍城)이다. ‘백룡 퇴’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삭(朔)’은 북방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주석(註釋)에서 말하는 것은,
(1) 용 황(龍荒)의 「용(龍)」은 백룡 퇴(白龍堆)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 흉노(匈奴)가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설명(說明)이며,
(2)「삭(朔)은 북방(北方)을 말한다.」는 설명(說明)이다.
➍ 위의 글 태평어람(太平御覽) / 황 왕 부(皇王部) / 전한(前漢) 중종(中宗)편에 기록(記錄)된 「용 황(龍荒)」이란「황 복(荒服)에 있는 용성(龍城)」이란 뜻이다.
“황 복(荒服)”이란 「왕기(王畿)」를 중심(中心)으로, 주위를 5백 리씩 기준(基準)하여 순차적(順次的)으로, 다섯 구역으로 나눈「전복(甸服). 후 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을 말하는 것으로 “황 복(荒服)”은 기내(畿內)로부터 가장 먼 곳인데, 이곳에 흉노(匈奴)들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➎ 이러한 조선(朝鮮) 사대부(士大夫)의 시문(詩文)속에서, 「용성(龍城)」이 고구려(高句驪) 북계(北界 : 북쪽지경)가까이에 있었다(近).【 접(接) : 이어져 접(接)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➏ 그렇다면 “용성(龍城)”이란 어디에 있었을까? 이게 문제(問題)인데,
(1) 현 역사통설(歷史通說)은, “하 북 성(河北省)동북 요 녕 성(遼寧省) 북쪽에 있다.” 하고,
(2) 사기(史記)와 통전(通典)등은 서방(西方)의 흉노(匈奴)들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인 “대림(蹛林)”이라 하였고,
(3) 수경 주(水經注)에는 「현 신강 성(新疆省) 백용 퇴(白龍堆)와 포창해(蒲昌海)사이」에 있다고 하였으며,
(4) “북연(北燕)”이라 칭했다는 선비(鮮卑) 모용황(慕容皩)의 도읍지(都邑地)가 또한 “용성(龍城)”이다. 그렇다면 순서(順序)대로 “황 복(荒服)”에 있었다는 “용성(龍城)”을 찾아보자. “이곳은 고구려(高句驪) 북쪽지경에 접(接)해있었다, 또는 가까이에 있었다(近).”고 하니, 고구려(高句驪)의 땅이 “반도(半島)에 있었는가?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는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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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史記) 흉노(匈奴)전 속의 「용성(龍城)」은?
〔歳 正 月, 諸 長 小 會 單 于 庭, 祠. 五 月, 大 會 蘢 城,(一) 祭 其 先、天 地、鬼 神. 秋, 馬 肥, 大 會 蹛 林,(二) 課 校 人 畜 計. (中略) : 매년 정월에 여러 우두머리들이 선우 정(單于 庭: 뜰)에서 작은 집회를 열고 제사를 지낸다. 5월, 용성(蘢 城)에서 대회(大會)를 열어, 그들의 선조와 하늘과 땅, 귀신(鬼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가을, 말이 살찌면 대림 (蹛 林)에서, 대회를 열어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조사한다.〕
(一) 索 隠 漢 書 作 『龍 城』,亦 作 「蘢」 字. 崔 浩 云 『西 方 胡 皆 事 龍 神, 故 名 大 會 處 為 龍 城』. 後 漢 書 云 『匈 奴 俗, 歳 有 三 龍 祠, 祭 天 神』. : 색은(索隱)은 한서(漢書)에는 「龍城(용성)」이라 하였고, 또한 蘢(룡)으로 되어있다. 최호(崔 浩-북위의 학자)는『서방의 호(胡)들은 모두 용신(龍神)을 섬겼으므로 그들이 대회한 곳을 용성(龍城)이라 한다.』고 했다. 후한서(後漢書)에서는,『흉노의 풍속으로 매년 세 번 용과 천신(天神)에 제사 지낸다』고 했다
(二) 集 解 漢 書 音 義 曰:『匈 奴 秋 社 八 月 中 皆 會 祭 處. 蹛 音 帶.』 : 집해(集解) 한서(漢書)음의(音義)에서 이르기를 : 흉노(匈奴)가 추사(秋社 : 가을제사)하여 8월 중에 모두 모여 제사지내는 장소이다. 蹛(대)의 음은 帶(대)이다. 索 隠 服 虔 云: 『音 帶. 匈 奴 秋 社 八 月 中 皆 會 祭 處.』 鄭 氏 云: 地 名 也. 晉 灼 云 李 陵 與 蘇 武 書 云『相 競 趨 蹛 林』,則 服 虔 說 是 也. 又 韋 昭 音 多 藍 反 : 색은(索隱) 복건(服 虔)은, 『음(音)은 帶(대)이다. 흉노(匈奴)가 8월중에 추사(秋社)하기 위해 모두 모여 제사지내는 장소』이다. 정씨(鄭 氏)는『땅 이름』이다. 진작(晉 灼)은, 이릉(李 陵)이 소무(蘇 武)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로 대림까지 쫓았다」고 했다』고 했으니, 즉 복건(服虔)의 설이 옳다. 또 위소(韋 昭)는 음이 多 藍의 반(反)이라 했다. 姚 氏 案 : 李 牧 傳 『大 破 匈 奴, 滅 襜 襤』,此 字 與 韋 昭 音 頗 同, 然 林 襤 聲 相 近, 或 以 『林』為 『襤』也. : 요 씨 (姚 氏)는 : 이목 전(李 牧 傳)에서 「흉노를 대파하고 첨 람(襜 襤)을 멸했다」고 했는데, 이 글자(襤)가 위소(韋 昭)가 말한 음과 상당히 비슷하며 林(림)과 襤(람)의 소리는 서로 유사하므로 혹 林(림)을 襤(람)으로 쓴 것 같다』고 했다. 正 義 顔 師 古 云:『蹛 者, 遶 林 木 而 祭 也. 鮮 卑 之 俗, 自 古 相 傳, 秋 祭 無 林 木 者, 尙 豎 柳 枝, 衆 騎 馳 遶 三 周 乃 止, 此 其 遺 法 也.』 : 정의(正義) 안사고 (顔 師 古)는 이르기를 : 「蹛(대)는 숲과 나무 주변에서 제사지내는 것이다. 선비(鮮卑)의 풍속으로 예로부터 전하는 것으로 가을에 숲과 나무가 없는 곳에서 제사지내며 버드나무 가지를 받들어 뭇 기병들이 말을 달려 3바퀴 돌고 그치는 데, 이것이 흉노의 유법(遺法-남겨져 전해오는 법속)이다. 」라 하였다.
※ 사기지명 고(史記地名考) 주석(註釋) : 〔案 : 遼史國語解.蹛林卽松林故地.新唐書太宗以鐵勒部思結爲蹛林州,隷燕然都護府.考唐蹛林州當在今甘肅凉州府境,永昌,武威,民勒,古浪諸縣,境內諸山多以産松著.今古浪縣,漢爲蒼松縣,屬武威郡.或蹛林在匈奴右方也. : “요사국어 해”에 대림(蹛林)은 곧 송림고지(松林故地)이다. 신당서(新唐書)에 태종(太宗)이 철륵(鐵勒)부의 사결에 대림(蹛林)주를 설치하였는데, 연연(燕然)도호부에 예속하였다. 당서(唐書)를 고찰하면 대림(蹛林) 주는 지금의 감 숙성(甘肅省) ‘량 주 부 경’(영창. 무위. 민늑. 고랑의 여러 현)의, 경내(境內) 여러 산에서 많은 소나무(松)가 생산되는데, 지금 ‘고랑 현’이다. 한(漢)나라의 ‘창송 현’인데 무위 군에 속했다. 혹은 대림(蹛林)은 흉노의 서쪽지방(右方)에 있다. 〕라 하였는데, 말미(末尾)에 “흉노(匈奴)의 서방(西方)에 있다.”라고 말한다.
감 숙성(甘肅省)의 “옛 량 주 부(凉 州 府) 경(境)”이란 말은 전형적(典型的)인 왜곡(歪曲)수법이다. 말미(末尾)에 「혹(或) 대림(蹛林)은 흉노(匈奴)의 우방(右方) 곧 서방(西方)에 있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전(古典)에서도 모두 서방(西方) 땅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숨길 수만은 없는 것이다.
● 서방(西方)이란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일까? 원전(原典)으로 보는 “서방(西方)”이란, 바로 “서토(西土)”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최소한(最小限) 현 신강 성(新疆省)과 그 서(西)쪽 지방을 일컫는 것이다.」라 할 수 있다.
개인적(個人的)으로는, 서방(西方)이란 서토(西土)이며, 이는 총령(蔥嶺) 서쪽을 지칭(指稱)한다고 보아지지만, 원전(原典)에 의한 “용성(龍城)”의 위치(位置) 때문에 “최소한(最小限)”이란 말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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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 경 주(水經注) : 「용 황(龍荒)은 용성(龍城)」이라고 하였으니,
〔수경 주(水經注) 하수(河水) / 山海經曰:龍城,故姜賴之虛,胡之大國也.蒲昌海溢,盪覆其國,城基尚存而至大,晨發西門,暮達東門.澮其崖岸,餘溜風吹,稍成龍形,西面向海,因名龍城.地廣千里,皆為鹽而剛堅也.行人所逕,畜產皆布氈臥之,掘發其下,有大鹽,方如巨枕,以次相累,類霧起雲浮,寡見星日,少禽,多鬼怪.西接鄯善,東連三沙,為海之北隘矣.故蒲昌亦有鹽澤之稱也. : 용성(龍城) : 옛 ‘강 뢰 (姜 賴)’의 터이다. 오랑캐의 큰 나라였다. 포창해가 넘쳐 그 나라를 씻어버리고(盪), 무너지게(覆)하였다. 그 나라의 성 기초가 대단히 커 상존하고 있는데, 새벽(晨)에 서문을 출발하여, 해질 무렵(暮)에 동문에 닿는다. 증(물 이름)이 그 언덕 가에, 바람이 불면 남아있는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점점 용의 형상을 만든다. 서쪽 면이 바다를 향해 있다. 이로 인하여 용성(龍城)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땅은 넓어 천리다. 모든 땅의 소금은 굳어 단단하다. 행인이 이곳을 지나가려면 가축과 모두 양탄자(氈)로 온 몸을 싸고 잠을 자야하며, 땅을 움푹 파내면 그 아래에 큰 소금이 있다. 큰 베개와 같이 각을 내고 그 다음 서로 묶는다. 무리지어 안개가 일어나 구름처럼 떠오르며, 작은 해와 별을 보는 것과 같다. 날짐승은 작고, 많은 귀신과 도깨비가 있다. 서쪽으로 선선(鄯善)과 접하고, 동쪽으로 삼사 (三 沙 : 백 용 퇴를 칭?)가 연해 있고, 바다의 북쪽으로는 좁고 험하다. “포창(蒲 昌)”이라 하고, 또 염 택 (鹽 澤)이라고 칭한다.〕
〔即經所謂蒲昌海也.水積鄯善之東北,龍城之西南.龍城,故姜賴之虛,胡之大國也; 곧 경(山海經)에서 말하는 소위 “포창해(蒲昌海)”이다. 물은 선선(鄯善)의 동북에 모인다. 이곳은 용성(龍城)의 서남(西南)이다. 용성(龍城)은 옛 강 뢰(姜 賴)의 터이다. 오랑캐의 큰 나라였다.〕고 하였다.
● 현 신강 성(新疆省)의 포창해(蒲昌海) 동쪽지방에 ‘선선(鄯善)’이 있으며, 예전에 이곳에 강 뢰(姜賴)라는 큰 나라가 있었으며, 용성(龍城)이 바로 그 증거(證據)라고 말한다. 이곳은 포창해(蒲昌海)와 옥문관(玉門關) 사이에 있는 땅을 말한다.
「새벽에 서문(西門)을 출발(出發)해서 계속 걸어, 저녁 무렵이면 동문(東門)에 닿는다고 했으니, 그 성(城)이 얼마나 컸겠는가!」성(城)의 기초(基礎)석(石)이 상존(尙存)하고 있다지 않은가! 이렇게 큰 나라가 “포창해(蒲昌海)가 넘치는 바람에 모두 수몰되었는데, 그 땅이 천리(千里)이다.”라는 이야기다.
선선(鄯善)지방의 유물유적(遺物遺跡)이 모래사막(沙漠) 가운데에서 발굴(發掘)되었는데, 성(城)과 마을의 터이며, 얼마나 많은 유적(遺跡)들이 모래땅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전엔 풍성(豊盛)한 곳이었는데, 포창해(蒲昌海)가 넘치는 바람에 수몰(水沒)이 되고, 그 물이 증발(蒸發)되는 과정(過程)을 거치면서 모래와 염분이 쌓여, 사막(沙漠)의 황무지(荒蕪地)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 “용성(龍城)”이 있었다는 것이 “수경 주(水經注)”의 설명(說明)이다.
● 글 서두(序頭)에서 “용 황(龍荒)”의 주석(註釋)에 / 【孟 康 曰 :「謂 白 龍 堆 荒 服 沙 幕 也.」 : ‘맹 강(孟康)’이 이르기를 : 『‘백룡 퇴’ 는 ’황 복’의 사막이라 한다.】라는 “맹 강(孟康)”의 말과 같은 맥락(脈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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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서(晉書) 열전(列傳) 모용황(慕容 皝) 편의 “용성(龍城)”에 대하여 :
〔 使 陽 裕、唐 柱 等 築 龍 城, 構 宮 廟, 改 柳 城 為 龍 城 縣。 於 是 成 帝 使 兼 大 鴻 臚 郭 希 持 節 拜 皝 侍 中、大 都 督 河 北 諸 軍 事、大 將 軍、燕 王, 其 餘 官 皆 如 故。 封 諸 功 臣 百 餘 人. : 양유, 당주 등이 용성(龍城)을 쌓고, 궁실과 묘당을 지으니 유성(柳城)을 고쳐 용성(龍城)현으로 하였다. 그제서 성제(成 帝)는 대 홍로 ‘곽 희’를 보내어 모용황(慕容皩)에게 ‘시중, 대도독 하 북 제 군사, 대장군, 연 왕 (燕 王)’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 나머지 관리들을 모두 같게 하였다. 여러 공신 백여 인을 봉하였다. 鹹 康 七 年, 皝 遷 都 龍 城. : 함 강 (鹹 康) 7년, 모용황은 용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
● 이 글을 보아도, 모용황(慕容皩)에게 “시중(侍中) 대도독 하 북(河北) 제 군사 대장군 연 왕(燕王)”이라는 관작(官爵)을 하사(下賜)하는데, 도대체 “하 북(河北)”이란 어디냐? 하는 것이다. 하 북(河北)이란 “하(河)의 북쪽”을 뜻하는 것이고, 이곳이 하 북 성(河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 북쪽이라면, 「발해(渤海)가 하수(河水)였는가?」반문(反問)해 본다.
이것은 본시(本是)부터, 현재(現在)의 “하 북(河北)지방”이란 존재할 수 없는 “이름만을 빌려 온 가짜 지명(地名)”이란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줄기차게 그것이 옳다고 60년 세월(歲月)을 이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강심장(强心臟)에 그저 놀라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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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를 논(論)함에 있어, 다양(多樣)한 의견(意見)과 주장(主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위의 예를 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07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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