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다룬 음악 생산자(사역자) 본인의 문제에 이어, 이번 호에선 시장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주도하는 구매자의 문제, 즉 리스너의 체질 개선을 집중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내가 정의하는 ‘성숙한 리스너’란, ‘안정된 구매층’, ‘진정한 매니아’, ‘진지한 감시자’, ‘건강한 안티’와 동의어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CCM계의 시장 규모[1]에 비해 이러한 성숙한 리스너는 절대 소수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일반 음악과 비교해 볼 때 CCM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합목적성 때문에 음악을 음악 자체로 즐기는 이들은 거의 없고(실제로 ‘즐기는’ 행위 자체를 세속적으로 보기도 한다), 교회의 필요 내지 은혜 받는 수단에 비중을 둔다. 이렇다 보니 음악과 내용에 대한, 좀더 정확히 말해 음악의 본연과 음악의 목적성에 대한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둘 다를 만족시키는 음반이나 아티스트를 가려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적은 이유는, 당연하게도 둘 다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가령 대중 음악계의 서태지, 신해철, 이승환, 김동률, 조규찬 같은 뮤지션들은 어떤 음반[2]이든 냈다하면 최소한 몇 십 만장 이상은 나가는, 소위 ‘골수팬’ 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 음악,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다.
음악가가 대중의 기호나 현재적 흐름에 영합하거나 속수무책 따라가지 않고,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 팬들이 따라와 준다.[3]
외국의 경우 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뮤지션과 함께 늙어가며, 뮤지션 본인은 자신의 나이와 인생여정에 걸맞는 노래를 함으로 시공간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노래를 넘어 삶과 경험의 교통을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다.
10대 위주의 국내 음악시장 [4]과 비교해서, 환갑이 다된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믹 재거(Mick Jagger)의 최근 공연에 50,60대 팬들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구름처럼 몰려와 광란의 공연을 즐겼다는 후문은 차라리 감동이다.
어떤 장르를 선택하든, 어떤 이야기를 화두로 삼든 일단 들어주는 팬들을 일정수준 확보하는 것은 뮤지션 최대의 재산이다. 또한 그런 팬들에게 매번 만족을 주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던 점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 이게 먼저였기에 후자가 가능했을 것이나, 그 배후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뮤지션의 나태를 두고 보지 않는 팬들의 ‘진지한 감시’가, 진보를 자극하는 ‘건강한 안티’ 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팬들이 음악 사역자들을 적극적으로 압박하지 못하면, 즉 그들이 다루는 음악과 메시지의 진지한 감시자가 되어 그들의 단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지 못하면 그들은 정체되기 마련이다. 10여 년 전 가요계를 휘어잡던 이들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극소수 뮤지션들의 특징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 많은 팬들을 거느리던 아이돌 스타들은 다 어디로 갔나?
분명한 자기 음악과 이야기가 없거나, 음악해서 번 돈이 다시 음악으로 환원되지 않은 이들은, 현재 그 시절 잠깐 벌어들인 돈과 명성에 기대어 술장사나 하며 사는 것이 흔한 일이다. 그들이 몰락한 배후에는 역시나 성숙치 못한 리스너, 가짜 매니아, 눈 어두운 감시자, 허약한 안티뿐 이었다. 무조건적인 열광은 쉽사리 식어버리고, 냉정한 눈으로 다른 가수를 찾는 불안한 팬들이 존재하는 한, 음악가의 노후 대책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이야기와 음악을 꾸준히 생산해내며, 그것을 들어주는 팬들과 함께 성숙해 가는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 CCM은 안정된 구매층 대신 ‘잠재 구매자’가 대부분이다.
작년과 올해, 신학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해 본 결과 음반 구매의 30% 이상이 현장 판매를 통한 구입이었다.
즉, 가수가 자신의 교회나 선교단체의 행사에 초청되었을 때, 직접 보고 좋아서 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들은 동일한 가수가 다음 앨범을 내도 현장에서 보지 않으면 살 생각이 없다.(실제로 음반으로 듣는 것보다 간증과 무대가 병행된, 시각과 청각의 동시 자극이 음반의 원래 질보다 훨씬 큰 감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모 CCM 그룹의 1집은 듣기 좋고 따라 부르기 편한 노래들로 가득했는데, 2집에서는 Jazz를 도입하고 외국에서 녹음을 하는 등 음악적으로 눈부신 진보와 완성도를 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비연속성’은 그대로 ‘판매량의 비연속성’으로 이어졌고,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들의 3집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음반의 완성도가 판매량과 직결되지 않아 버릴 때, 뮤지션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도대체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놓치는 것이다.
안정된 구매층의 형성은 뮤지션과 시장이 함께 해결해 가야할 중요한 과제다.
또 하나, 시장의 규모가 정체되는 이유로 ‘매니아의 교집합’ [5]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인터넷 팬 카페나 홈페이지 등을 보면 CCM계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음악 사역자들에게는 최소한 1000명에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모든 CCM가수 팬 까페의 실제 동호인 수는, 각 동호회별 인원 총합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중복된 동호회의 가입(나의 경우도 열개 이상 가입되어 있다)층이 여러 가수에 걸쳐있어, 한마디로 CCM계는 장르에 상관없이 듣는 사람만 듣고, 사는 사람만 산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한국 CCM의 매니아의 규모, 안정된 구매층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5000명을 넘지는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CCM에서 소위 매니아(인터넷을 중심으로 몇 몇 눈에 띄는 이름들이 있는데)로 일컬어지는 이들[6]의 특징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일단 음반을 이것저것 사긴 한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별점이나 평을 올린다.
2. 그러나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기에, 혹은 기독교의 정서 상 대부분 어중간한 칭찬 일색이다.
3.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서는 무비판적 지지자인 경향이 많고,
4. 자신의 마음에 든 음반이나 노래에 대해서는 팬 까페 등에서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친다.
이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데는 거품투성이 인터넷의 공이 크다. 사실 홍보루트나 방송영역 등이 극히 제한적인 CCM계에서 온라인은 유일한 활동의 장이며, 피드백이 가능한 공간이긴 하다.
그렇기에 한국음악사역계에서 이들을 안정시키고 그 규모를 늘려 가는 것이 CCM 시장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이들의 위치는 그나마 음반을 사주거나, 들어주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줄 필요가 있다.
이들 역시 현재 안정된 구매층과 잠재구매층 사이를 오가는 중이므로, 이들을 안정시키는 것과 균형감 있는 리스너로의 성숙도가 한국 CCM의 미래라고 봐도 된다.
이들이 음악 자체만큼이나 한국 CCM의 현재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전망하는 시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글이 읽히길 원하는 주된 목표 역시 이들이다.
이들을 성숙시키는 것은 마구잡이식 별점주기의 권한을 함부로 주는 것보다, 깊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평론을 맛보게 하는 쪽이 우선이라고 본다. 물론 성숙한 평론가의 절대적 부족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고, ‘평론’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의 잣대로 재단질 하는 것쯤으로 인식하여 밑도 끝도 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크리스천과 음악 사역자들의 인식을 개도하는 것 또한 선행 되어야 한다.
제대로 검증된 눈과 귀를 통해 일단은 좋은 것(기호에 따른 논란의 여지가 있음으로 여기서는「최소한의 완성도를 만족 시킬만한 수준의 음반」이라 해두자)의 기준을 보여주고, 그 후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눈을 소유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은 아니되 현 상황에서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겨진다.
또한 ‘상식과 합리’를 가르쳐 컴필레이션 음반에 관한 논쟁과 같은 시비를 가려야할 자리에서 의견자체보다 다소 과격한 입장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7]으로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매니아들과 사역자들의 힘이 결집되어 컴필레이션에 맞서지 못해 시장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온 지난 3년은 한국 CCM 역사의 치욕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매니아의 성숙도와 결속력이야말로 시장과 사역의 가장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주리라 기대해 본다.
결론적인 얘기는 사회와 교육의 전반적인 개선을 전제로 하는, 너무도 광범위하고 지극히 당연한 소리라 선 듯 꺼내기가 쑥스러운 생각마저 든다.
음악을 생산하는 사람의 존립은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기에, 예술을 대하는 대중들의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MP3, 불법복제 등의 문제에 앞서서 ‘음악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선결 과제이고 동시에 해결책이기도 하다.
한 장의 음반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이 반드시 필요한데, 가령 나는 CD 자켓을 잃어버리면 CD를 다시 산다. 현대에 있어 ‘한 곡의 노래’가 아니라 ‘한 장의 음반’은 종합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노래하는 가수만이 그 음반의 전부가 아니다. 최소한 작・편곡자, 연주인, 녹음기사, 자켓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이것을 CD와 TAPE으로 제작하는 이들, 일일이 비닐 포장을 하는 수공업자들, 소매점으로 나르는 유통사 직원.....등 무수한 이들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 음반은, 동시에 이 모든 이들의 생계 수단이기도 하다.
MP3나 불법복제가 무서운 것은, 특히 CCM계에서 무서운 이유는 이 모든 중간 과정이 무시된 채 최종적인 대표자 “가수”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컴필레이션 음반 역시 기본적인 음악 제작과정 전체가 생략되기에 가수를 제외한 모든 음악인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MP3나 불법복제의 방법으로라도 노래 한 곡이 뜨면 그 가수는 이 교회, 저 교회 불려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며 돈도 좀 만지게 될 수 있을 것이나, 결국 황폐해진 이 시장에서 홀로 살아남아, 독재자가 되어 자기 배 불리기에만 몰두하거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어떤 음악적 결과물도 내 놓을 수 없어 서서히 고립되어 버릴 것 이다.
외국에서는 거리에서 연주하는 아마추어 악사들의 연주도 5분 이상 들었으면 당연스레 모자에 돈을 던지고 자리를 뜬다고 한다. 그들 사회에서 MP3와 불법복제가 기승을 부린다 하여도 예술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 자체가 탄탄하기에, 음악 잘하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이들은 꾸준히 음반을 내며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링크보이의 2집이 듣고 싶다. 은구, 이길승, 냉수한그릇, 쿨대디, 손영지, 드림, 한정수, 한정실, 조준모, 이무하, 홍순관의 다음 앨범이 듣고 싶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수의 다음 음반을 들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칼을 제대로 휘둘러 줘야할 사람도 여러분 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음악 사역자를 대신해 머리를 조아린다.
“잘 부탁드립니다.^^;;”
<각주>
[1] 일반적으로 대중음악계의 1/20 정도의 수준으로 보고 있느나, 컴필레이션 음반의 범람 이후의 급격한 감소세는 최근 음반시장 전체의 불황을 고려한다 손 치더라도 그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타종교의 음악시장 수준과 비교해 볼 때, 크리스천 음악의 시장규모는 특정 종교의 것으로만은 보기 힘들만큼 큰 것이 사실이다.
[2] 베스트, 라이브, 싱글, 리메이크, 다른 가수와의 합동 프로젝트....등의 형태로 정규음반 외에 다양한 음반들을 발매하고 있고, 그것들 역시 일정 수준 이상, 때때로 정규 음반 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해 주기도 했다.
[3] 음악사역을 하는 필자 본인도 외워서 따라 부르기 힘든 서태지의 ‘하여가’를 한 목소리로 합창하는 팬들을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과 그의 음악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느껴진다. 외모와 재치로만 승부하려는 ‘만들어진’ 가수들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자들을 ‘빠돌이’, ‘빠순이’라 부른다는데,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진정한 뮤지션이길 원하는 이들 소수의 뮤지션들에 대한 팬들의 지지, 그 힘은 무섭도록 놀랍다.
[4]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중후반을 전후해서 시장에 연령대별 역전이 이루어졌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과 미국의 음반시장은 연령대 분포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문화적 성숙도와 시장의 안정감을 그대로 반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02년 한국과 미국의 연령대별 시장규모-
한국 : 미국 (%)
10대 47 21.5
20대 31 23.1
30대 16 20.5
기타 6 34
[5] 최근 발매된 음반 ‘예수원 가는 길 3집’은 강명식 ,꿈이 있는 자유, 소망의 바다, 이길승, 조준모 등이 함께 모여 만든 음반이다. 참여자 대부분이 고유한 색깔과 비슷한 방향성을 가진 이들이라 각 팀이 일정수준 이상의 고정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데다, 그중 몇몇은 앨범이 나온 지 2~3년 이상이 지나 그들의 새 노래를 기다리는 팬들이 많았을 텐데, 의외로 판매는 각 팀의 고정 팬의 총합계에 어림도 없이 미치질 못했다. 이것은 ‘매니아의 교집합’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6] 물론 이들 중에는 말 그대로 ‘매니아’란 말에 손색이 없는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는 예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수준을 다소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므로, ‘매니아’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대충이나마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7] 무조건적인 용납과 포용이 christianity의 표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다. 구약의 황금률 ‘미가서 6장 8절’은 공의를 행하는 것을 인자함을 사랑하는 것에 우선하여 말씀하고 있다. 선후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공의의 실현과 그 방법적인 선량함은 언제나 동시에 이루어질 때 성경적이며 성공적일 수 있다. 과격한 성향을 가진 이들은 표현의 수위를 절제함으로 christianity를 이루고, 다른 이들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에 기초하여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하고 공의를 세워감으로 christianity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