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2)
<빈처>
아내의 옷을 정리하였다. 이사하기 전에 처리하였으니 8월 말의 일이다. 더 이상 그 옷을 입을 사람이 없어, 옷을 가져다 버리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이유로 슬픔에 빠졌다. 옷이 별로 없었다. 명색이 배우인데, 배우의 옷장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게다가, 그것들은 하나 같이 제값 주고 정상적으로 구입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신혼초부터 아내는 자기 동생 — 7살이나 차이가 나는, 고등학교 교사 하는 작은 동생 — 의 옷을 갖다 입기 시작했다. 싸우다 싸우다 지쳐서 언제부터인가는 나도 묵인해왔다. 한 무더기 가슴에 가득 안고 경비실 옆에 마련되어 있는 의류수거함에 던져 넣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동생에게서 얻어온 옷도 몇 점 있었을 것이다.
드레스가 예닐곱 벌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것이다. 이것들은 그 곳 사람들이 ‘쓰리프티 샵’(thrifty shop)이라고 부르는 중고품 가게에서 한 벌 당 20불내지 30불을 주고 산 것들이다. 그 중 한 벌을 딱 한번 (큰 아이의 결혼식 피로연 때) 입었다. 이것들이 또 한 아름이 되었다. 나는 낑낑거리면서 안고 내려가 의류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아내의 옷 가운데에서 제일 크고 제일 무거운 것은 밍크 코트였다. 이 물건 역시 자기 돈 주고 산 것은 아니다. 장모님이 실버하우스로 옮기실 때 딸들을 불러 물건들을 나누어주었는데, 그 때 아내는 이 옷을 받아왔다. 약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코트들과 같이 안고 내려가 버렸다. 그 다음 날 큰 아이(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그 옷이 얼마짜리인 줄 알아?” 이 아이 말로는 그 옷은 지금도 50만원은 받을 수 있다. 밍크 코트 리폼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도로 찾아오지, 뭐. 그리하여 그 옷은 우리와 같이 이사를 하였고, 지금 새 집의 장롱에 떡하니 걸려있다. 큰 아이에게 “니가 팔고, 그 돈은 니가 가져라”라고 말했지만, 큰 아이는 아직 처분을 못하고 있다. 생각대로 시세가 나오지 않아서 그러는지, 엄마 옷을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그러는지......
<꿈>
9월 초순 경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아이(작은 딸)가 울었다. 소리내어 울었다. 엄마 꿈을 꾸었단다. 진정이 된 뒤 털어놓았다. “엄마 목소리를 들었어.” 뭐라고 그러디? “생각이 안 나...... 아, 생각났다. 엄마한테 이불을 덮어주었더니, 엄마가 ‘한번도 이불을 덮어준 적이 없으면서’라고 말했어. 그래서 속 썩여서 미안하다고, 보고 싶다고 그랬어.” 엄마 꿈을 세 번 꾼 것이구나. 그 뒤에 아이는 또 엄마를 꿈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9월 16일 아침) 나도 이 사람을 보았다. 꿈이 끝나면서 깨어났다. 모든 것이 흐릿한데, 아내와 전화를 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도 보았다. 마치 화상 통화를 한 것처럼 말이다. 통화의 내용은 집에 관한 것인 듯했다. 이사한 집이 어떤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보이는 집의 모습은 예전에 우리가 살던 어떤 집이었다.
그러더니, 10월 7일, 새벽녘일텐데, 이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세 번째 꿈이다. 그녀는 마치 사진처럼 나타났다. 무표정하고 약간 창백하였으며 평소보다 얼굴이 조금 길어보였다. 그렇게 나를 보고 있다가 사라졌다. 아니, 내가 꿈에서 깨어났다. 10월 10일, 아이가 또 엄마 꿈을 꾸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엄마를 안아보려고 하니 꿈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아빠한테 말하지 않았을 뿐, 자기는 요즘 들어 엄마 꿈을 제법 자주 꾼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엄마를 안아보려고 하면 깨어난다고 한다. 아이는 “엄마가 나하고 밀당을 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덧붙였다. “꿈에 좀 나타나 줘라고 하면 나타나지 않거든. 그래서 잊어버리고 있으면 또 슬며시 나와주거든. ㅋㅋ”
<추석>
그 사이에 추석이 있었다. 올 해 추석은, 물론, 예년의 추석과 같지 않았다. 올 추석, 나는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내 조부의 기일(忌日)은 추석 전전날인데, 나는 지난 해까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내가 입대하여 원주통신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을 때 내 동생이 “형이 없으니까 추석 때 한 송편이 확실히 오래까지 가네.”라고 쓴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제는 안다. 당시 중학생이던 어린 동생은 명절을 맞아, 식구가 한 사람 준 것을 알고 슬픈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조부가 돌아가신 해의 추석? 당연히 명절을 쇠지 못했을 것이다. 장례 기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 해의 추석은?
“장례를 치른 후 처음으로 맞는 명절이 제일 힘들다고 하던데.....” 올해 추석 며칠 전 누이동생이 말했다. 큰 아이는 “엄마 없이도 잘해낼 수 있을 꺼야. 우리 잘해 봐.”라고 말했다. 잘해낸 것인지, 하여간 추석을 쇠었다. 차례는 지냈으니까. 물론 이것 저것 미비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추석 전날 밤, 나는 제사상에 씌울 마분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시간에 어디 가서 사올 데도 없고...... 집사람은 유난히 마분지를 챙기곤 하였는데...... 술잔도 한 개가 모자라고 시접도 한 개가 모자랐다. 원래 우리는 제기(祭器)를 세 셋트, 즉 내 할아버지, 내 할머니, 그리고 내 아버지 — 이렇게 세 분을 위한 세 셋트를 갖추고 있었다. 한 셋트를 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차례상은 30만원 주고 전문 배달 업체에 주문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배달 차례상은, 약간 과장을 하면, 보라고 만든 것이지 먹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올 해 추석의 차례에는 이 사람이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도리어 위패가 되어 차례상에 떡하니 올라가 가족들의 절을 받았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위패의 상태로라도 참석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까? 처가의 행사에는 그렇게도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명절 다음날 장인을 모신 절두산의 납골당을 찾곤 하였다. 올해도 그렇게 하였다. 물론 한 사람은 빼먹은 채로 말이다. 나는 어느 쪽의 행사가 더 슬픈지를 생각해 보았으며, 남은 사람들 중 어느 쪽 사람들이 더 힘들어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장인 유골단지 앞에서 장모님이 소리내어 우셨다. “여보, 영복이가 못 왔어. 영복이가 죽었어.” 이번에 유심히 세어 보니 처가 모임의 정원은 12명이다. 4인용 테이블 세 개가 딱 맞았다. 얼마 전까지는 13명이었던 모양이다. 항상 가던 그 식당이었다. 명절 때 문을 여는 곳이 별로 없어 우리는 벌써 몇 년째 그 식당을 찾고 있다. 우리는 항상 가던 그 식당에서 항상 시키던 그 메뉴로 식사를 하였다.
<친정 어머니>
내 누이동생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장난삼아 “우리 고모가 변했어요”라고 말한다. 특히 자기 친정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이 달라졌다. 어머니한테 더 자주 간다. 갈 때마다 어머니 드실 반찬을 만들어서 간다. 내 큰 처제는 그 동안 몸무게가 5키로나 빠졌다고 한다. 워낙 마른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언니와 연년생이니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친하기도 그 만큼 친했었다. 우리 아이들(나의 두 딸)도 변했다. 워낙 다정다감하던 아이들이었지만, 한층 더 그렇게 되었다. 제 아빠한테도 그렇게 대하고 자기들끼리도 그렇게 대한다. 어떤 때는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심지어 집착을 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서로를 찾는다.
여자들 사이에는 뭔가 각별한 것이 있는 것 같다. 남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뭔가 애틋한 것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불리하고 약한, 억울하고, 그래서 슬픈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긍휼히 여기다가 생겨난 감정일지도 모른다. 자매들 사이에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딸과 어머니 사이에, 특히 출가한 딸과 친정 어머니 사이에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 집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 사람이 특별히 소중히 간직해 온 엽서 세 장과 사진 몇 장을 발견하였다. 엽서 세 장은 출가한 큰 아이가 보낸 것이다. 모두 작년 겨울에 쓴 것이다. 그 중 한 장을 스캔하여 주인의 허락도 없이 (프라이버시를 크게 건드릴 만한 내용은 아닌 듯 보여서) 여기에 싣는다.
첫댓글 2015 가을은 우리 생애에 단 한번 뿐..정리 잘 하며 넘어 가기 바래..그래야 또 새롭게 정돈하지 않겠나~
본인은 잘 못 느끼겠지만 참 힘겨운 가을이네. 10월 마지막 날 계룡산서 희주 엄마 위한 산신제도 지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