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여름은 호남 일대에 한발이 심했다. 광주에는 식수조차 어려웠다. 육영수 여사는 도지사 관저에 조석으로 전화를 걸어 마음이 불안하여 숭늉도 마음놓고 마실 수 없으며 세수도 못하겠다면서 안타까워 하였다. 그러다가 직접 광주로 나들이를 하였다. 지사부인의 안내로 가장 한발이 심한 나주 공산면 화성리 마을로 갔다. 논바닥이 발이 빠질정도로 쩡쩡 갈라져 있었다. 이 정경을 보자 여사는 마중나온 마을사람들에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정부에서 굶기기야 하겠느냐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리고 저만큼 논구석 말라버린 웅덩이에 걸려 있는 양수기를 직접 돌려보며 혼자 울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75. 8.15)
"앉아 보고만 있을수 없어.."
육여사 나주 지구 한해민 위로
가뭄의 무더위 속에 한해가 우심한 나주군 공산면을 돌아 보며 농민들을 일일이 위로했으며 특히 부녀자들에게는 '희망의 등불'이라는 책자를 나누어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가뭄을 이겨내라고 격려했다. 한해민에게 구호품도 전달한 육여사는 나주군 금천면 국도건설단 수용소에도 들러 위문품을 고루 나누어준후 하오 6시 귀경했다.(1968. .8.12 경향싱문)
65년 6월 육 여사는 나주 현애원에 살고 있는 음성 나환자들의 건강에 도움을 주기위해 10만원(현 5천만원상당)을 보내 목욕탕을 만들어 주었다.
평생을 살아봐도 여름철 이라고 해서 바닷가에 나가 해수욕 한번 할 수 없었던 이들 이기에 목욕탕의 건립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선물이었다."
1971년의 크리스마스날. 세찬 바람이 부는 악천후를 뚫고 한대의 헬기가 전남 나주로 날아갔다.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탑승한 헬기는 나주군 노안면 유송리, 현애원이라는 음성 나환자촌에 착륙했다.
그가 가져온 선물은 좀 별나다 싶은 것이었다. “꿀꿀” 소리가 요란한 씨돼지 20마리였다.
◇1971년 12월 25일 현애원을 방문해서 선물로 가져온 씨돼지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이 돼지들을 잘 길러 훌륭한 살림밑천으로 만들어 보세요. 1년 후 이 돼지들이 새끼를 낳으면 저에게 2마리만 보내주기 바랍니다. 그것을 다른 곳의 환우들에게 보내고, 또 거기서 새끼를 얻어 또다른 곳에 보내 전국의 환우들이 생활하는 데 근심걱정을 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
육영수는 이렇게 부탁을 했고, 현애원 주민들은 이듬해 봄에 2마리의 20배인 40마리를 청와대에 보내고 닭과 한우까지 키우는 대규모 축산단지까지 조성하게 되었으나 계속해서 씨돼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오랜 세월 현애원에 베풀어준 대통령 부인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은덕비를 세우려 했다가 추모비로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김인만 작가)
"사랑의 등불로 우리에게 어둠길을 밝혀주시던 육영수 여사님이 유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여기 천형을 격고도 삶을 영위하는 저희들 에게 자비로운 선물과 희망의 씨앗을 주셨으니..<중략>
벽지인 이곳을 찾아 남이 꺼리는 손목을 만지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기에
생존시 은덕비를 세우려던 것이 추모비로 바뀐 것을 몹시 가슴 아프게 여기며 명복을 삼가 빕니다.
<추모비문중에서.>
◇ 1968년 11월 전북 지방에 가서 한 시민을 만난 모습.
사랑은 아픔에 조용히 귀 기울여주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전북도청
다음은 박정희가 전라도지역을 개발한 업적이다.
- 광주 내연 준공(1962. 11. 15)
- 제2비료(호남비료) 나주공장 준공(1962. 12. 28, 현 L/G화학 나주공장)
- 동진강지역종합개발공사 착공(1963. 3. 15, 준공 : 1972. 12. 31, 김제 부안)
- 전남지구 6천여 정보 간척공사 기공(1965. 5. 18) (2천만평)
- 군산화력발전소 기공(1965. 12. 1, 준공 : 1968. 10. 31)
- 광주공업단지 착공(1966. 12. 16)
- 여수 제2정유공장 기공(1967. 2. 20, 준공 : 1969. 6. 3)
- 전주 제1공업단지 기공(1967. 3. 22)
- 최대의 공군 광주기지 준공(1967. 5. 25)
- 전남 고흥 간척사업 완공(1969. 7. 15)
- 호남 야산개발단지 준공(1969. 10. 6)
- 호남고속도로 착공(1970. 4. 15, 개통 : 1973. 11. 14)
- 남해고속도로 착공(1972. 1. 10, 개통 : 1973. 11. 14)
- 군산항 개발 확정(1972. 11. 24)
- 전주, 이리, 광주, 목포 지방공업개발 장려 지구로 지정(1973. 5. 4)
- 호남종합화학기지 내 에틸렌계열공장 4개, 프로필렌계열 2개, 기타 7개 총 13개 공장건설계획 확정(1973. 8. 2)
- 이리 수출자유지역 착공(1973. 10. 17, 준공 : 1974. 12)
- 여수화력 2호기 준공(1977. 6. 30)
- 여수 제7비료공장(남해화학) 준공(1977. 8. 4, 기공 : 1973. 10)
- 호남선 복선 준공(1978. 3. 30, 대전~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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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대통령이라면 어디에 항구를 만들겠는가. 고래까지 출몰할 정도로 수심이 깊은 동해안인가 아니면 수심이 얕아 큰배도 못들어오고 전체 갯벌의 85프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해안인가. 경부고속도로와 남동공업단지는 미국일본과의 무역 비중이 절대적인 시대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중국과는 수교도 안했고 동남아 호주 이런 나라와의 무역은 극히 미미 했다. 대부분이 미국 일본과의 교역이었다. 미국 일본의 선진물품을 부산에서 받으면 서울에 운송할 고속도로 역시 당연히 필요하고, 그 길을 따라서 공업단지가 쭉 들어서는 것 역시 입지요건상 당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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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의 회고록을 본다.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김대중)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
지금도 경북 북부 지역은 전북보다도 넓은 면적에.. 5층 이상 건물이 없다.. 진중권이 한말이다.. "박통 때 호남 차별을 했다는 것도 그래요. 정책적으로 차별 받은 적이 없어요. 남동지역을 공단으로 키운 것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어찌 보면 필연적인 거였어요. 내가 경제적인 지표들을 뽑아 봤는데, 영호남인의 1인당 총생산에 아무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제일 낮은 게 경북이에요."
출처: http://gall.dcinside.com/list.php?id=news&no=2172791&page=1
저는 몇년전만 해도 요즘 젊은이들 처럼 정치성향이 진보쪽이었는데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지역감정으로 인해 전라도 지역만을 차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증오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젠 그것이 잘못 됐음을 깨달았고
혹시 다른분들도 저처럼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이렇게 글을 정리하게 됐습니다.
첫댓글 박대통령의 호남지역 개발에 관한 업적 중 광양제철은 빠진 것 같네요.. 포철에 이어 광양 제2종합제철공장이 1976년인가 준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 국토개발에 관하여, 한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항구도시인 부산과 서울을 잇는 고속도로가 급선무였음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 보는데, 이미 지역감정에 젖어버린 호남인들은 그것조차도 반감을 갖고 있죠.. 꼭 그런 목적이 아니더라도 대구와 부산 인구가 호남권 인구의 2배가 훨씬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부고속이 1순위 인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도 호남인들의 이기심과 김대중이 부추긴 지역감정 때문에...
현재 국민들 중 육여사님의 저러한 자애로우신 모습에 대해 아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의문입니다. "감탄고도"라는 말도 있듯, 딱 우리 일부 국민에게 어울리는 말인 듯 합니다. 우리 국민은 과거 어려운 시절의 따뜻한 보살핌에 대해 배가 불러지면 언제 은혜를 받았느냐는 듯 금방 잊어버리는 까마귀 같은 민족이라 무척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