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독립 만세 삼창을 외친 권병덕(權秉悳)"
권병덕(權秉悳, 1868. 4. 25.∼1943. 7. 13.)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33인 민족대표로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권문영(權文永)과 어머니 신문화(申文嬅)사이에서 태어났다. 호(號)는 우운(又雲)·청암(淸菴)·정암(貞菴), 자(字)는 윤좌(潤佐)이다.
어려서 경북 상주로 이사하여 한학을 배운 뒤, 1876년 다시 미원 용곡리로 돌아왔다. 1885년에 스승 임약호(任弱鎬)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들어가 최시형을 만난 뒤 동학의 연구에 매진하였다. 1887년에는 부친의 명으로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이해 보은에 동학의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되자 중정(中正)의 직책을 맡았다.
1894년에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 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면서 동학 재건에 힘썼다. 1896~1898년까지 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이 체포될 때까지 보필하였고, 최시형 사후 김연국을 보필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1월에 권병덕은 김연국 등과 함께 손병희를 찾아가 천도교에 입문하여 여러 활동을 하며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송배헌과 권병덕(1903)[독립기념관 발췌]
그러나 천도교가 만들어 질 때 이미 손병희 중심의 개화파와 김연국 중심의 국내파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손병희가 일본으로 넘어간 뒤 천도교는 이용구의 동학 배반과 송병준 등의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손병희는 귀국 하여 이들을 축출하였다.
1906년에 천도교에서 나온 이용구가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고 김연국을 교주로 임명하자 권병덕은 김연국을 따라 천도교에서 시천교로 옮겼다. 여기에서도 그는 종교적 활동과 정치·사회활동, 교육활동을 하며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3년 초 송병준이 시천교의 전권을 장악하자 모든 활동과 직위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권병덕과 김연국은 시천교총부를 설립하였으나, 1914년에는 김연국과 대립하여 1915년 4월에 출교 당하였다.
1916년에 그는 출교 당한 이들과 함께, 천도교의 참회식을 거친 뒤 복귀하였다. 이후 장석승례(丈席承禮),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에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의 권유로 3.1 독립 만세 운동의 민족 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또한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오세창(吳世昌), 임예환(林禮煥), 최린(崔麟),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등의 문서를 검토하고, 이들과 함께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민족대표 독립선언식 모습[독립기념관 발췌]
3월 1일 오후에 그는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서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조선 독립 만세 삼창을 외친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출옥 후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하여 민족의 사랑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그 이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中央敎會 審計院長)·감사원장(監査院長)·선도사(宣道師) 등을 역임하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0년 중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1935년 ≪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 1938년 ≪조선총사(朝鮮總史)≫·≪궁중비사(宮中秘史)≫를 발간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청주대 교수 겸 지역가치창출센터장≫
출처 : 충청미디어(https://www.thec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