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한국 교육의 길을 묻다
일시 : 2016.11.12(토) 14:00-16:30
장소 : 이화여자대학교 교회 소예배실
주관 :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1. 가는 길에
하필 이날은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지하철 안은 시위참가자 들로 인해 정말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농담하며,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을 보고 '과연 우리 국민의 수준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대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만추의 은행나무들이 노란잎들로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더군요. 중국인 관광객들이 거리에 가득하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한 포장마차들이 즐비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김교신 선생 추모 학술대회 가는 길'을 표시한 종이가 붙어 있어 수월하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좀 늦었기 때문에 박의수 교수의 강의부터 들었습니다. 입구에는 조촐하게 차와 과자 등을 준비해놓고 있어서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대접 받았습니다.
2. 순서
인사말과 학술대회로 이루어졌 습니다.
익두스 출판사 대표 박찬규 씨의 사회로 기념사업회 이만열 씨와 유족대표 김정옥 여사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발표 순서가 있었습니다.
1) 발표 1. "김교신일보 발간에 붙여" 김철웅 선생(전 석관고 교장)
그동안 김교신 일보(日步)의 해역에 동참해 온 한 사람으로서 이제 그 해역을 마치고 무사히 출간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해역을 하다보니 느낀 점이 많았다.
김교신은 누구보다도 많은 일기를 남겼다. 그리고 그 일기는 공개일기와 미공개일기의 두 종류가 있다. 그러나 김교신은 타의에 의해 두 가지를 모두 중단해야 했다. 공개일기는 성서조선 폐간과 함께 중단되었고, 개인일기는 30여권에 이른다고 하는데 모두 소각하고 두 권이 남아 이번에 해역하여 세상에 빛을 본 것이다. 소각을 한 이유는 이렇다. 김교신의 권유로 일기를 쓰던 학생 하나가 그 일기로 인해 화를 당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모조리 소각하라 말하고 자신도 소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변잡기에 불과할 수 잇는 '일보'가 성서조선의 원천이었고, 그의 삶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실생활을 응용한 성서주해"라 평하고 싶다.
2) 발표2. "김교신의 교육관과 실천" 박의수(강남대학교 명예교수)
은사이신 김정환 선생에게서 '김교신'이라는 책을 받고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교육학 전문자로서 김교신의 교육관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 본질에 충실한 교육을 했다. 교육의 본질과 목적을 참 인간을 기르는 데 있다고 보고, 모든 교육활동과 교육적 노력을 '사람됨'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업은 죽은 지식이 아니라, 감동적 이야기로, 대화와 설득으로, 때로는 눈물로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다.
- 신앙에 기초한 참의 교육이었다.
참된 인간을 기르는 일이 참된 나라사랑의 길이라고 생각한 김교신은, 참된 신앙에 사는 것이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고자 한 김교신의 이상은 '교육을 신앙 위에'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내적 동기와 흥미에 기초한 교육이었다.
"학창에 있는 학생이 그 수업과정에 흥미를 잃었다면 그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가. 기독교 신앙에 사는 자의 한 가지 특색은 모든 일에 흥미진진하여 끝없는 취미를 자아내어 달콤한 생활을 도처에서 발견한 일이다."(전집2권 102쪽)
- 민족의식에 투철한 교육이었다.
김교신의 경우 조국과 민족을 빼고는 신앙과 교육을 논할 수 없다.
김교신 선생의 삶 자체가 가장 훌륭한 인생의 교본이고, 지도자의 표본이며, 신앙인의 모범ㅇ며, 국민교육의 텍스트이다. 그는 국권을 상실한 악조건 속에서도 온 몸을 던져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 이상의 텍스트가 어디 있는가!
3) 발표3 "만남의 교육가, 김교신" 강선보 교수(고려대학교)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만남'의 교육철학과 김교신의 교사로서의 삶을 비교하였다. '만남'의 교육을 실천한 김교신의 교육은 아래와 같은 양상으로 분석할 수 있다.
- 인격적 감화를 통한 사람됨의 교육
- 구도적 동반자를 자임한 스승
- 종교적 평화주의자로서의 피스메이커
- 독특함을 강조한 개성교육
- 비에로스적인 교육의 구현
- 세계 자체가 교육의 마당
- '영원한 너'로의 인도자
- 아가페적 사랑의 실천
김교신은 부버가 지적한 대로 자신의 교과에 정통하였고, 인간적인 품성을 지녔으며,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풍부한 인간적 활동을 통해 나타내 보이면서 제자들과 인격적 교감을 나누었다. 이러한 근거로 우리는 김교신을 만남의 교육가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3. 논찬 박상익 교수
발표자 세 분의 발표내용에 대한 소감발표가 있었습니다. 역시 학자이다 보니, 자신의 주전공인 밀턴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좋은 발표를 해주신 세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4. 질의 응답
(1) 노승무 : 강교수님의 만남의 교육을 잘 들었습니다. 교수님의 전공분야가 부버인가요?
강선보 : 감사합니다. 저는 교육학자로서 부버에 관해 연구해 왔습니다.
(2) 장문강 vs 강선보
장 : 김선생의 교육은 인간과의 만남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출발한 것이다. 부버의 만남의 교육은 인간 사이의 관계였기 때문에 김교신 교육에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하지 않는가?
강 : 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부버는 유대교인이다. 유대교인과 개신교인의 차이가 아닐까?
장 : 그의 신앙이런 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김교신 선생의 교육에 관한 논의가 허사이다.
강 : 신을 사랑하는 자는 먼저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유대교나 김교신이나 매일의 삶을 중시하였다. 김교신도 ‘사랑으로 사랑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나?
(3) 양현혜 : 김선생은 신앙가에 교육자였으나, 모든 제자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신념을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자신의 신앙은 철저히 지키되 다른 사람을 무리하게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교회 정신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5. 인사말씀
(1) 김선생의 경기중학 제자 구본술 선생의 인사말.
김선생님은 중학 2학년때의 담임. 중국지리를 배웠는데, 교과서 보다는 중국의 중경, 사천 이야기를 하시다가 느닷없이 제갈량 이야기를 꺼내셨다. 사람이 성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출사표를 외워오라는 과제를 내주시는 등 독특한 방법을 쓰셨다. 강의는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를 섞어 쓰셔서 ‘대단한 분이구나’ 생각했다.
학창시절, 김선생 댁을 찾아가 진로에 대해 고민상담을 한 적이 있다. 의학공부가 너무 중요하니, 사람의 생명을 고치라고 하셔서 어렵게 공부하였다. 과를 정하려 하였을 때, 성조지에 헬렌켈러 이야기가 실려 안과를 택하고 전공하였다. 당시는 사람들이 안과에 못 오는 사람들이 많아 의사들과 모임을 만들어 개안수술을 3만 명 이상 해주기도 하고, 3-4세 이하의 유아 시력검사와 무료수술을 해주었다. 김선생님 말씀을 따라 사느라고 노력을 했지만, 부족하기 그지없다. 나중에 만나면 꾸지람을 많이 듣지 않을까?
우리나라 요즘 사회 실정을 보면 마음이 아픈데, 이런 때에 김교신 선생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암흑 속에 큰 서광이 되는 것 같다.(92세)
(2) 유달영 선생의 아들
김교신 선생의 아들 정손이 형이 우리 매부이니, 나는 사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저는 지금 80세인데, 우리 아버지(유달영)를 생각해보면, 철저히 김교신 정신으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구속된 아버지를 일곱 살때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갔던 기억이 있다. 김선생은 아버지를 사위삼고자 하셨는데, 아버지가 열네 살때 이미 결혼하셨던 것을 나중에 알고, 실망을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으로서 이런 기념사업회에 감사한다.
(3) 경기중학 시절 조선어 사용 문제로 학생과 충돌이 있었나요?(박상익)
(구본술) 충돌은 없었어요. 학급 50명 학생중 친일파 자녀가 많았지만 교사에게 절대복종이었죠.
(양현혜) 누구의 증언에 의하면, 황국신민서사를 ‘망국신민서사’로 바꾸어 말씀하셨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맞나요?
(구본술)그건 모르겠어요. 다만 일본병사를 전송하는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했고, 신사참배에 참석하지 않으셨던 것은 분명합니다.
6. 이화여대 교회의 소예배실이었으므로 아담한 장소였습니다. 40여명 정도 모였는데, 무교회인이 반 이상 차지하였습니다. 주최측에서 김밥과 여러 종류의 차도 준비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현장에서 김교신 일보 해역본과 영인본을 20,000원에 팔고 있었습니다.
끝나고 참석자들 몇몇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한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깊은 가을의 이대거리입니다.
첫댓글 그 날 다른 일이 겹쳐 후반부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김교신선생님의 신앙이 제대로 전해지는지
파수꾼처럼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신앙가가 아닌 학자들의 이야기라서 많이 걱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도덕책 정도를 생각하고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책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도 김교신의 신앙안에서의 삶이 자연스럽게 배출되어 올바른 교육을 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학자들은 신앙이 아닌 그의 삶에 초첨을 맞추어 교육자니 애국자니 하니 본질이 왜곡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