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趙芝薰씨와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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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번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중부경찰서 강당에서 하룻밤을 학생들과 지낸 일이 있었다.
막 명동 입구로 빠른 걸음으로 나오던 찰나 “선생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통금시간 몇 분 전이었다. 돌아다보니 서울고교 때의 럭비부 학생들이었다. 나의 별명이 술통이어서 그냥 뿌리치고 헤어진다는 것이 좀 멋이 없는 거 같아서 “어, 너희들도 취했구나.” 하자 “한잔 더 합시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하자. 단 10분간.” 이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옆 골목 빈대떡집으로 들어갔다. 한잔 두잔 잔이 돌고, 그들이 서울공대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여섯 명 떠들썩하게 서울고교 시절 이야길 하다가 통금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요란스럽게 났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 정다운 사제지간은 경찰차에 수용되고 말았다. 경찰차에 취객들로 가득했다. 중부경찰서로, 그것도 너무나 많은 인원수라 강당으로, 남자·여자 할 거 없이 한방 자욱히 술 냄새, 담배 냄새, 고함 소리, 술 가져오너라, 물 가져오너라, 담배 가져오너라, 개 새끼들, 말할 수 없는 욕지거리들, 술주정들로 중부경찰서는 떠가는 거 같았다. 처음 보는 이 광경, 이것도 참 좋은 경험이로구나 생각을 하면서 하는 수 없이 이 하룻밤의 수용 생활을 정다운 사제의 정으로 보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니다.” “어떻게 하지요?” “이것처럼 먼 날의 좋은 추억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조지훈씨는 그 통금시간을 나의 집에서 보내곤 했다. 통금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나의 집에 도착한다. 한두 시간 머문다. 순경 나리들이 다 사라질 무렵 다시 길로 나와 성북동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서 안주 없이도 마실 수 있는 술, 양주를 늘 준비해 두곤 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 우리 집에 도달해도 들어오자마자 “술 가져와.” 이것이 첫 말이었다.
그는 사실 호걸이었다. 호주가였다. 아주 섬세한 호걸, 호주가였다.
다음 시가 그를 말하듯이. 그의 시 「정야靜夜·1」.
별빛 받으며
발자취 소리 죽이고
조심스리 쓸어 논 맑은 뜰에
소리 없이 떨어지는
은행잎
하나,
나를 보고 그는 주석에서 ‘대부, 대부’라고 했다. 그도 한양 조씨이고 항렬이 하나 내가 높다는 거다. 그러나 조지훈씨는 1920년생이고, 경북 영양(英陽)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1921년생이고 경기도 안성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나와 같이 술을 마실 때는 ‘대부, 대부’ 이렇게 경상도 선비답게 말해주어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문학에 있어서 대가요, 대선배요, 한국 문단에 큰 기둥이 아닌가. 문단 데뷔만 하더라도 나보다 한 10년을 앞선 사람이다. 그리고 이미 해방 후부터 문단의 지도급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정평있는 시인이었다.
문을 따고 보니 그날은 한 청년, 학생 같은 사람을 대동하고 있었다. 어두운 층계를 올라 찬 기운이 심하게 감도는 나의 침실이요, 서재인 이층 마루방으로 안내를 했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몹시 취해 있었다. 조지훈씨는 술에 취하면 눈이 멀겋게 흐려들고 굵은 로이드 안경테에, 도수 짙은 안경알이 더욱 심하게 부각되어 보이곤 했다. 그리고 연거푸 나오는 굵은 목소리, 그 경상도 액센트와 말소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범벅으로 쏟아져나오는 말, 말, 그저 나는 응, 응, 대꾸 아닌 대꾸만 하고 있을 뿐, 지루하기까지 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의 청년 학생은 박재삼(朴在森)이라 했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학생이라고 했다. 갓 문단에 나온 시인이라 했다. 자기 제자라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큰소리를 치며 계속 자기 제자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있는 게 아닌가. 술을 마시며, 마시며, 그 독한 양주를 흘리며, 흘리며, 나는 양주가 마룻바닥에 흘러 떨어질 때마다 마룻바닥의 니스가 까지는 걸 마음 아프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표정에 나타낼 수도 없고 해서 “술, 오늘은 그거 한 병뿐이여, 한 병뿐이여.” 하며 흘리질 말라고 했다.
주먹으로 맞고 있던 제자는 고개 숙이고 울고 있었다. 콧물까지 흘리면서, 무슨 까닭이었을까. 지금도 궁금한 일이다. 그 후에 박재삼 시인에게 물어도 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이건 조지훈 시인의 주정의 한 버릇이었다. 술이 들어가 취해지면 옆에 있는 사람을 그저 이유도 없이 치고 때리곤 했다. 그에겐 그것이 친하다는 동물적인 애정의 표시였는지는 몰라도 맞는 편에선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술에 취하면 그저 혼잣말이 줄줄줄 끊임없이 나오곤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상도말로,
보다 못해 “이건 너무 심하오.” 정색을 하고 말렸다. “대부는 가만히 있어.” 고함치는 바람에 “이제 혼자 가시오, 당신 제자는 나하고 이곳에서 잘 터이니.” 하자 “아니야, 내 제자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해, 몇 시야?” “새로 두시요.” 하자 “시간되었군.” 하면서 일어섰다. 그 박재삼씨는 지금 온 한국 사람이 다 좋아들 하는 대시인이 되고 있다. 나는 지금 그와 ‘여씨 마을의 화재 사건’을 비롯해서 웃음거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같은 세월을 동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