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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호-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성령에 대한 연구
성령에 대한 연구: 계속 흘러 들어오는 기름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기름을 흘려 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슥 4:12~14).
선지자 스가랴에 의해서, 교회에 대한 성령의 간단없는 교통이 다른 상징으로 대표되었습니다. 그 상징에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격려의 공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1~4,6,12,14).
두 감람나무에서 금기름은 금관을 통해 등잔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음에는 성소를 밝히는 금등대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있는 거룩한 자들로부터, 그의 성령은 그의 봉사에 헌신한 인간 도구들에게 나누어집니다. 두 기름 발리운 자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빛과 능력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앞에 서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기름을 금관으로 흘러보내 자신을 비우는 것처럼, 하늘의 기별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것을 나눠 주려 애씁니다. 하늘의 모든 보화는 우리의 요구와 수령(受領)을 기다립니다. 축복을 받으면, 우리는 이번에는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거룩한 등대에 기름이 채워지며, 교회는 세상에서 빛을 나르는 자가 됩니다.
이 비유는 각 개인의 심령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모습을 좇아 교회를 꼴 짓는, 복음의 침투력과 동화력을 예시하고 있다. 누룩이 가루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성령은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 모든 역량과 능력을 흡수 동화 시키고, 영과 혼과 몸을 그리스도에게 일치하게 만든다. 비유에서 여자는 누룩을 가루에 넣었다. 그것은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 비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력으로는 구원을 소유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진리는 마음속에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신령한 누룩은 작용을 시작한다. 변화시키고 생기 넘치는 능력으로, 신령한 누룩은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킨다. 새로운 사상들, 새로운 느낌들, 새로운 목적들이 일깨워진다. 마음은 변화되고, 기능들은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에게 새로운 재능들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재능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죽어 있었던 양심이 일깨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이 변화를 만들 수 없다. 단지 성령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이 진리가 제시되어 있다.“육에서 난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 3:6~8).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을 다스릴 때, 우리는 누룩의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을 이해할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품성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도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각 개인의 심령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모습을 좇아 교회를 꼴 짓는, 복음의 침투력과 동화력을 예시하고 있다. 누룩이 가루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성령은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 모든 역량과 능력을 흡수 동화 시키고, 영과 혼과 몸을 그리스도에게 일치하게 만든다. 비유에서 여자는 누룩을 가루에 넣었다. 그것은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 비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력으로는 구원을 소유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진리는 마음속에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신령한 누룩은 작용을 시작한다. 변화시키고 생기 넘치는 능력으로, 신령한 누룩은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킨다. 새로운 사상들, 새로운 느낌들, 새로운 목적들이 일깨워진다. 마음은 변화되고, 기능들은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에게 새로운 재능들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재능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죽어 있었던 양심이 일깨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이 변화를 만들 수 없다. 단지 성령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이 진리가 제시되어 있다.“육에서 난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 3:6~8).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을 다스릴 때, 우리는 누룩의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을 이해할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품성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도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복음이 무엇이며 갈라디아 형제들의 형편과 바울 개인의 생애에 대해서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인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개종한지 17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회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회의의 주제가 무엇이며 그 회의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유일한 책임은 형제들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보존시키는 것입니다. 1장의 내용을 마음에 분명히 새긴 후에 2장 연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장은 1장의 연속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라디아서 2:1~10)
14년 후에라는 뜻은 사도 바울이 개종한 지 3년 후에 있었던 첫 번째 방문(갈1:18) 14년 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루살렘의 두 번째 방문은 그의 개종 17년 후 이며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총회의 때와 일치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다루고 있는 회의는 바로 이 총회이며 이 총회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이 연구를 위해서 사도행전 15장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갈라디아 1장 6, 7절에서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켜 거짓 복음을 전하고 그것이 마치 참 복음인 것처럼 하여 형제들을 괴롭히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새 가르침에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한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말한 대로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행 15:2) 있었을 정도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성경대로 이해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에 관한 것이고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기에 그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흩어진 형제들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으로 세워진 안디옥교회의 형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의하면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한 성령의 음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유대로부터 어떤 자들이 전한 거짓 복음으로 문제가 일어나자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거짓 복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거짓 복음을 가르친 사람들을 “가만히 기어들어온 거짓 형제”라고(데마크역) 했습니다. 이들은 구원에 대한 이해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구원이 인간의 능력의 행사에서 온다는 결과를 퍼뜨리게 해서 새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실제로 무엇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에는 표면적 육신의 할례와 이면적 유대인이 받게 되는 마음의 할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의 실패를 기억나게 하고 육신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할례의 표 곧 육을 절단하는 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성령을 통하여 육신의 죄의 몸을 벗어 버림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롬4:11).
이렇듯이 외적인 할례는 마음의 할례의 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사실에 기인하지 않는 할례는 하나의 거짓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신자들에게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들 자신들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인간을 높이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자들이 외적인 할례의식을 신뢰하도록 하여 성령의 역사를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오직 참 할례는 성령으로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구원의 도를 신뢰하였던 신자들을 꾀어 육신을 의지하게 하려던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진리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고 참되다 할지라도 불완전하며 죄 외에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 오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64:6)과 같으며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14:23)라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이제는 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는지, 여기에는 어떠한 교훈이 담겨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은 “계시로 인하여”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권장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고 같은 성령께서 바울을 감동시켜 그 지시에 따라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진리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받은 것과 같이 그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나 통로로 사용하실 수는 있으나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그 진리를 주실 수 있으십니다. 어떤 사람의 명성이나 권위, 부유함은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 족속 중에 작”(미5:2)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며 거의 모든 생애를 평판이 좋지 않은 나사렛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는 항상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워지셨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하나님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사57:15)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지위에 가치를 부여하시지 않으십니다. 권세를 주는 것은 지위가 아닙니다. 수많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욱 높고 위대한 권세를 차지하였습니다. 권세는 영혼 안에 있는 확고한 하나님의 임재이시기에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보시고 그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고”(행15;12)하였을 뿐이며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1:28)하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하는 것은 가장 겸손한 신자의 특권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빌2:13)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이 믿음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고백과 사도 바울의 고백은 완전한 하나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도들 간에나 교회들 간에 조금도 의견의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에베소서 4장 13절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는 말씀을 잘못 읽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오직 주도 하나인 것처럼 “믿음도 하나”(엡4:5)이며 곧 “예수의 믿음”(계14:12)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물론 아는 지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정도의 차이를 갖고 어떤 논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빛이십니다. 촛불 외에 평생 다른 불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전등불을 보고서 그것이 불빛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고 알아가는 일에 성실하고 충성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일 뿐이기에 그러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1.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
엄마!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모습대로 창조 받은 것 맞죠?” 이제 막 글 읽기에 재미를 붙힌 준이가 성경 창세기를 펴서 읽다가, 엄마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그런데 엄마, 하나님이 여러 명이야? 여기 읽어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네요! ‘우리’가 누구야?” 엄마는 어린 준이가 알아듣기 쉽게 차근 차근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삼위일체, 그것은 자칫 지루한 신학적인 논제로 생각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냥 한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됐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인간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세 분의 하나님께서 각각 한 목적, 한 사상, 한 마음으로 역사하시는 그 모든 역사들을 알고 연구할 때, 우리는 구속의 신비,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신 사랑에 대하여 더욱 감탄하게 되고,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숭경심도 더욱 고양되어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하여 함께 차근 차근 연구해 보자.
1) 삼위 하나님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세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세 분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분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가 부른다. 이 세 분의 하나님, 곧 동일하게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 하나님은 불멸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항상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 가르침 중 하나이다. 삼위일체란 세 분의 다른 인격과 서로 다른 개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목적과 사명과 뜻과 마음이 한 분처럼 완전한 일체를 이루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쉬신 사흘 동안은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언제나 존재하여 왔다고 말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하단).
2). 구약에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표현되어 있는가?
1. 하나님의 유일성
성경에서 구약 시대를 보면, 주변 이교국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믿었다(신 4:35, 6:4; 사 45:5; 슥 14:9). 신약 성경도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하여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막 12:29-32; 요 17:3; 고전 8:4-6; 엡 4:4-6; 딤전 2:5). 이러한 유일신론적 강조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 개념(성부, 성자, 성령)과 모순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것은 여러 종류의 신들을 모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2. 하나님의 복수성
비록 구약이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으나, 구약은 하나님의 복수성을 시사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 창 1:26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창 3:22 -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 창 11:7 - “우리가 내려가서”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엘로힘”인데, 이 말은 복수(復數)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를 통하여 계시하시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신 6:4)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단어는 “엘로힘”, 즉 복수 명칭이다. 그 복수 명칭을 쓰시는 하나님이 곧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신 것이다. 여기서, “오직 하나”라고 한 히브리 말은 “에하드”로서, 복합적 단일을 나타내는 말이다. 절대 단일을 나타내는 말인 “야히드”는 성경에서 오직 하나인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일이 없다. 그래서 복수 명칭인 엘로힘이신 그분이 바로 지존자이신 “오직 하나”, 곧 에하드이신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라는 말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 성경에서 계시해 주신 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로 계시는 엘로힘이신데, 그 엘로힘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다 지존자시라는 말이다.
3).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그 관계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는 하나님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관계를 지닌 삼위의 영원한 신격의 연합체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혀준다. 그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버지와 아들, 보혜사로서의 사랑의 관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곧 신약시대에는 삼위일체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돕는 보혜사로서의 관계로 표현되었다. 이 관계는 인간이, 신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준다. 세 분의 하나님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하고 돕는 관계로 표현되었는데, 이 관계는 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나타내어진 관계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때,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4)라고 외치셨다. 주님은 죄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하셨으며, 그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었다.
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수님의 사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 분의 하나님 사이의 일체감과 결속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분들은 상호간에 전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속에서 동일하게 영원성을 지니신 채 공존하셨다.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내부에 존재했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는 말씀은 삼위의 각 분께서 전적으로 다른 분을 위해 사셨기 때문에 모두 다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개체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니시지만, 목적, 정신, 품성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사랑의 관계로 표현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역사를 서로 사랑하며 돕는 관계 속에서 하신다
2. 활동상의 관계
▶ 하나님은 불필요하게 중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질서는 하늘의 첫 번째 법칙이므로 하나님은 질서 있게 활동하신다. 이러한 질서는 신성 내부의 연합에서 나오며 신성 내의 연합을 보존한다. 성부는 근원으로, 성자는 중보자로, 성령은 실행자로 행동하신다.
A. 성육신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활동
▶ 성육신은 신성의 삼위께서 가지고 계신 활동상의 관계를 훌륭하게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주셨으며,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주셨고, 성령은 예수님이 태어나도록 하셨다(요 3:16; 마 1:18, 20).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증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신비적 사건 속에서 세 분 모두의 활동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아버지 하나님)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B. 침례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활동
▶ 신성의 각 위께서는 그리스도의 침례 시에 임재하셨다. 아버지는 격려하셨고(마 3:17),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으로서 침례를 받으셨고(마 3:13-15), 성령은 예수님께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눅 3:21, 22). 예수님은 지상 생애 말기에 조언자와 조력자로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6). 여러 시간 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향해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C. 구속의 절정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활동
▶ 구속의 역사가 절정에 달하였던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등장하셨다.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접근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간절한 염원은 각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려 주시는 것과(요 17:3)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인간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임재를 실제화하는 것이다(마 28:20; 히 13:5 참조).
▶ 사도 베드로가 말한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벧전 1:2).
▶ 사도 바울이 말한 삼위일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 성경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가 맨 첫머리에 나와 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접촉은 과거에도 현재도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록 성삼위 일체 모든 분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함께 일하셨지만 오직 예수님만 인간으로 사셨고, 인간으로 죽으셨으며,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요 6:47; 마 1:21; 행 4:12).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후 5:19)었으므로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주라 부를 수 있다(딛 3:4참조). 왜냐하면 그분은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엡 5:23; 빌 3:20; 딛 3:6 참조).
▶ 삼위일체의 활동상의 관계를 연구하여 보면, 세 분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각기 다른 과업을 수행하신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재하시게 됨으로 십자가에서의 객관적인 대속 사업이 주관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골 1:27)에 대해 말하였다.
4). 질문들을 통하여 연구하는 삼위일체
질문 1. 신성 안에 구별되는 인격적 존재가 몇 분이나 되는가?
답: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9).
☞ 이 본문은 세 이름을 기술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르게 구별된다.
질문2. 신성(神性)의 각위들은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가?
답: ①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포함한 우주의 머리이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14:28; 고린도전서 11:3을 읽으라.
②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요한복음 3:16; 마가복음 5:2을 읽으라.
③ 성령은 신성의 세 번째 인격체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일하신다. 창세기 1:2을 읽으라.
☞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성의 각각 세 분은 특정한 위치를 가지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죄와 구원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견해를 반포하신다. 아들 하나님은 성육신 되셔서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속죄를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 인간의 대표자로서 서 계신다. 우리의 대표자로서 그는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이해하도록 하신다(요 20:17 참조). 성령 하나님은 회심과 변화를 통하여 인간 심령에 구원을 적용시키신다.
질문 3. 구원의 계획과 관련하여 신성의 각 위들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답: ① 아버지의 사역
ⅰ. 아들을 주셨다(요 3:16).
ⅱ. 악을 용서하신다(미 7:18).
② 아들의 사역
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마 1:21).
ⅱ.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신다(요일 2:1, 2).
③ 성령의 사역
ⅰ. 선지자들을 감동시키신다(벧후 1:21).
ⅱ.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 16:8).
ⅲ.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ⅳ. 거듭남을 이루신다(요 3:3-8).
◎ 삼위일체의 결론 ◎
신성의 세 존재자들은 본질과 성품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요 3:16), 그는 영원히 주셨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께 자원하여 복종하셔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모본되는 삶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지금 그는 우리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계신다. 우리의 거룩한 구주의 복종은 영원할 것이다(고전 15:24-28).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효능이 있도록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도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유한한 마음으로 무한하신 분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삼위일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깊이 명상하고 연구할 때, 우리의 마음과 신앙은 무한하신 신의 사랑으로 고무되고 격려될 것이다.
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2. 신.구약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 (1)
성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 근원, 유지자, 통치자이시다. 그분은 공의롭고 거룩하며, 자비롭고 인자하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하심이 한량없는 분이시다. 성자와 성령 안에 드러난 성품과 능력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관여 증거하는 계시이다.
지금껏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보다 덜 친근하고 두렵고 위엄 있는 존재로 느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정말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성자, 성령과는 대조적으로, 이 세상과 전적으로 동떨어져 계신 분이신가? 그분은 정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의 하나님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 5:38; 출 21:24 참조)라는 격언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복수의 하나님, 완벽한 행위만을 요구하는 엄격한 하나님이신가?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것처럼, 다른 편 뺨도 돌려대며 십리까지 동행해 주기를 강조하는(마 5:39-41) 사랑의 하나님과 전적으로 대조되는 하나님이신가?
오랫동안 기독교에서 만들어 온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예수님이 증거하려고 오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많이 대치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에 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오신 것도 포함된다. 사단은 인간들에게, 마치 하나님은 허물을 찾아내어 벌을 주시는 엄한 재판관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타내신 사랑의 성품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것이다.
1).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구속의 경륜의 통일성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 2).
비록 구약 성경은 신성의 각 개체들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그분들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 즉 아들 하나님은 창조의 활동적 실행자요(요 1:1-3, 14; 골 1:16),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낸 하나님이셨다(고전 10:1-4; 출 3:14; 요 8:58)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창조와 출애굽에서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역할에 대해 신약 성경이 말하는 것은, 구약 성경까지도 아들을 대리인으로 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구약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저술을 살펴보자.
1. 인자하신 하나님
죄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출 33:20).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의 행동들과 모세 앞에 말씀으로 그려 보여주신 모습들을 통하여 당신의 품성을 나타내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7; 히 10:26, 27 참조). 인자하심은 맹목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공의의 원칙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다. 그분의 인자하심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심은 악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것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언약의 하나님
인간과 늘 함께 하시는 영구적인 관계를 맺기 갈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창 9:1-17), 아브라함(창 12:1-3, 7, 13:14-17, 15:1, 5, 6, 17:1-8, 22:15-18)과 같은 인물들로 더불어 엄숙한 언약을 맺으셨다. 이러한 언약들은 당신의 백성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준다. 노아에게 그분은 규칙적인 계절의 순환을 보증하셨으며(창 8:22), 또한 전 세계적인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임을 약속하셨다(창 9:11). 아브라함에게 그분은 허다한 후손들(창 15:5-7)을 두게 될 것과 그와 그의 후손들이 거할 한 땅을 약속하셨다(창 15:18, 17:8).
3. 구속자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노예 민족을 기적적으로 자유케 하셨다. 이 위대한 구속적 행동은 온 구약 성경의 배경이며, 또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려는 그분의 갈망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서 홀로 계시는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우리 일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는 분이다. 시편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써 깊이 관여하고 계심에 크게 감동되어 이렇게 기술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3, 4).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 2).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시 22:24).
4. 피난처이신 하나님
다윗은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 - 무죄한 도피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던 이스라엘의 6대 도피성과 전적으로 같은 분으로 보았다. 시편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피난처”란 주제는 그리스도와 성부를 모두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피난처이셨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시 27:5).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5. 용서하시는 하나님
간음과 살인죄를 범한 후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 11)라고 열렬하게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놀랍도록 인자하시다는 보증에 의하여 위로를 받았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1-14).
6. 선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시 146:7-9)는 분이다. 시편 속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되어있는가!
7.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방황하였다(레 26; 신 28). 하나님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호세아서는 악명 높은 불성실과 배반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뼈 속 깊이 느끼도록 묘사한다. 계속해서 용서하시는 모습을 통해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성실 때문에 야기된 재난 속에 들어가도록 허용하셨지만 - 이것은 이스라엘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이셨다 - 여전히 이스라엘을 자비하심으로 감싸주셨다. 그분은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9, 10)고 이스라엘에게 보증하신다. 그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부드럽게 약속하신다.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 26:40-42; 렘 3:12 참조).
8. 구원과 보응의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구속적 자세를 상기시키신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1, 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
그러나 공평하신 정의의 하나님은 그들의 심은 것들을 거두게 하신다. 하나님을 복수의 하나님으로 기술하는 구약적 묘사는 악인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파멸되는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여호와의 날” 주제를 통하여 선지자들은 종말에 당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 복수의 날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4).
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2. 신구약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 (2)
2) 신약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니시다. 성부 하나님은 만물의 기원자요 모든 참 신자들의 아버지로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1. 모든 창조물의 아버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분시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히 12:9; 요 1:17 참조). 그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 15)라고 증거했다.
2.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
영적인 아버지와 자녀 관계는 구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족속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 하나님과 신자 개인 사이에도 존재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를 제시하시는데(마 5:45, 6:6-15), 이것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확립된다(요 1:12, 13).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통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5, 6; 롬 8:15, 16 참조).
3.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우리는 창조에서, 베들레헴에서, 갈바리에서 그분이 주시는 모습을 본다. 창조 시에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행동하셨다. 아버지는 인간의 창조 행위가 결국 당신의 아드님의 죽음을 초래하게 될 줄을 아시고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베들레헴에서 그분은 당신의 아드님을 주신 것처럼 당신 자신도 주셨다. 당신의 아들이 죄로 오염된 이 땅에 들어오실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셨을까! 당신의 아들이 천사들의 사랑과 찬송을 죄인들의 미움과 바꾸시고, 하늘의 영광과 광채를 사망의 길과 바꾸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아버지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가장 깊이 있게 알게 되는 곳은 다름 아닌 갈바리이다. 하나님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와 분리되는 고통을 겪으셨는데 이것은 어떤 인간도 겪어 보지 못한 혹독한 것이었다. 그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똑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으셨다. 그 무엇이 아버지에 대해 이보다도 더욱 잘 증언해 줄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어떤 다른 것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4.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이 좋아하셨던 주제는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충만한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7, 45)고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5, 36).
몸을 굽혀 당신을 배반한 자의 발을 씻기심으로써(요 13:5, 10-14)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을 계시하셨다.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막 6:39-44, 8:1-9), 귀머거리를 고치시고(막 9:17-29), 벙어리가 말하게 하시고(막 7:32-37),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눅 5:18-26),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눅 5:12, 13),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막 5:35-43; 요 11:1-45), 죄인들을 용서하시고(요 8:3-11), 마귀를 내쫓으시는 모습 속에서(마 15:22-28, 17:14-21)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해 주시며, 그들을 자유케 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며, 장차 임할 새 땅을 그들에게 가리켜 보이시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의 고귀한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 백성들을 회개로 인도하는 열쇠가 됨을 아셨다(롬 2:4). 그리스도의 세 가지 비유가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눅 15). 잃은 양의 비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제 행동을 통해 이르러 오는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찾기 때문에 이르러 오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잃었을 때 자기 양을 사랑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처럼, 이보다 훨씬 크게 하나님은 타락한 각 사람을 향해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신다.
이 비유는 우주적 의미를 갖고 있다. 잃어버린 양은 우리의 반역한 세계, 하나님의 광대한 우주 속에서 불과 하나의 원자에 불과한 지구를 대표한다. 이 지구를 우리 안에 이끌어 들이려고 하나님께서 값비싼 선물이신 당신의 아들을 주신 사실은 우리의 타락한 세계가 그분께는 당신의 나머지 창조물과 같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크게 값진 존재로 여기시는지를 강조한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통회하는 자녀들을 집으로 환영해 들이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늘에는 무한한 기쁨이 있다(눅 15:7).
우리 주님의 재림 때 우주가 경험하게 될 기쁨이 어떠할는지를 상상해 보라.
신약은 당신 아들의 재림에 아버지가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마 16:27), “인자가 권능(아버지)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갈망하는 심정으로 재림을 고대하신다.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그 때 구속 받은 자들은 마침내 그들의 영원한 본향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는 말씀이 헛되지 않았음이 입증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원수였지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롬 5:10)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타적인 사랑만이 설명해 줄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연구해 볼 때,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3.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1)
영원하신 아들 성자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이 계시되었고, 인류의 구원이 성취되었으며,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신 분이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죽어가는 인류들을 위하여 하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1) 성육신, 그 사랑의 신비
아앗! 여기도 뱀이야!”, “오, 오 나도 물렸어...”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광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광야는 이제 독사들 때문에 악몽 같은 장소가 되었다. 뱀들이 음식 그릇 밑에서 꿈틀대고 다녔으며, 장막 지주를 감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른들과 아이들의 잠자리 속에조차 기어 들어왔고, 사람들에게 독사의 이빨이 깊이 박혀서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 넘어졌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모세의 장막을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다. “놋뱀을 만들어 높이 매달라.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이마다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그분의 보호를 거절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회복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한 상징이었다. 뱀은 사단과 죄의 상징이었다. 무는 뱀의 형상이 장대 위에 달렸던 것처럼,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이 되신 예수님이 수치스러운 십자가 위에 달리시게 될 것이었다(요 3:14, 15). 그분은 죄가 되셔서 이미 살았거나 살게 될 각 사람의 모든 죄를 스스로 담당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분을 쳐다볼 때에 소망 없는 인간이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성육신이 인간에게 어떻게 구원을 갖다 줄 수 있었는가? 이것은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셨으며 이 일은 왜 필요했는가?
1. 성육신의 불가피성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결과로 생명의 구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즉시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창세 전부터 만들어 놓으신 계획(벧전 1:20, 21) 즉 “평화의 의논”(슥 6:13)에 따라, 성자이신 아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대속물이 되셔서 사망을 제어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은총 때문에 죄인들은 살 수 있었으며, 구원을 보증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하나님은 뱀과 여인 사이에, 또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초자연적인 적대감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계획에 대하여 그들에게 발표해 주셨다(창 3:15). 뱀과 그 후손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를 대표하고, 여인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구주를 대표한다. 이 진술은 선악간의 쟁투가 하나님의 아들의 승리로 종결짓게 될 것이란 점을 처음으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여자의 후손[구주]은 네 [사단]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사단]는 그[구주]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쌍방이 다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을 고소해 왔다. 하나님의 법은 지킬 수 없는 법이고, 또 하나님의 법을 범한 자는 죽어야 한다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으로 죄 없는 생애를 사시고, 선악의 대 쟁투에 걸린 논제, 곧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셨을 뿐 아니라, 법을 어긴 인간들의 죄와 생명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놓으셨다.
2. 구속의 실질적인 예시
죄가 들어온 이 후에 하나님은 오실 구주의 사명을 예시하기 위하여 동물 제사를 제정하셨다(창 4:4을 보라). 이 상징적 체계를 통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도말하실 것을 예시하여 주셨다. 죄 -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 - 때문에 인류는 사망에 직면했다(창 2:17, 3:19; 요일 3:4; 롬 6:23).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한히 자애로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주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요 3:16)셨다. 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자비하신 사랑이신가! 그리고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친히 죄값을 대신 갚으시며,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마련하셨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에 희생 제물은 언약 관계의 한 부분으로 성막에서 드려졌다. 하늘의 식양에 따라 모세가 만든 성소와 그 제사제도는 구속의 경륜을 예시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출 25:8, 9, 40; 히 8:1-5). 용서받기 위하여 죄인은 전혀 흠이 없는 희생제물을 가져왔는데, 이 제물은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죄인은 무죄한 동물 위에 손을 얹고 자기 죄들을 고백했다(레 1:3, 4). 이 행위는 죄인으로부터 무죄한 희생 제물에게 죄가 전가되는 것을 상징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을 묘사하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심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며,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피조물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을 피조물로 믿는 교리는 3세기에 일어난 아리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리우스주의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한 분 뿐이요,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감화력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천지와 만물은 최초의 피조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즉 아들을 시켜서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이 사상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1. 여호와 하나님 홀로 창조하심
이사야 44장 24절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 입으로 이렇게 선포하신 말씀이 나온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이 선언은 바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분과 함께한 다른 분은 결코 없었다. 그분은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만물을 지으셨다. 만일, 그가 최초에 창조한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만물을 창조하는 창조사업에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함께할 수도 없고, 함께한 존재도 없었다.
만일, 예수님이 창조된 피조물이라면, 그는 창조에 참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 곧 지존자가 아니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사 40:13~14).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결코 누구와 의논하신 일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2. 구약의 여호와의 특성과 같은 예수님의 특성
A. 여호와는 구속주: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32).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B. 여호와는 창조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사 44:24).
예수님은 창조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C. 여호와 우리의 의:
“...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D. 여호와는 자기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음: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마 16:27).
3)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
아들 하나님의 성육신은 신비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육신 속에 나타나신 것을 “경건의 비밀”(딤전 3:16)이라고 부른다. 자신 속에 신성의 충만함이 거했던 세상의 조물주께서 구유 안의 속절없는 아기가 되셨다. 그 어느 천사보다도 뛰어나시고, 존귀와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이신 분께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형체를 입으셨다. 사람은 이 신성한 신비의 의미를 거의 파악할 수 없으며, 오로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신적 속성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기술 속에서 요한은 심오한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A. 전능하심과 편재성(무소부재성):
그분은 전능하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편재성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보증의 말씀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약속을 통해 주장하셨다. 비록 그분의 신성은 어디든지 계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성육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이 점을 희생하시고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편재하기로 선택하셨다(요 14:16-18).
B. 불변성과 자존성:
히브리서는 그분의 불변성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5)는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분의 자존성은 그분께서 당신 안의 생명을 주장하셨을 때(요 5:26) 분명해졌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분 안에는 “빌려오지 아니하고 파생되지 아니한 고유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음을 확언한다.
C. 거룩함과 사랑의 속성:
거룩함은 그분의 본성의 일부를 이룬다. 수태를 초지할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했다. 예수님을 보고 마귀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고 외쳤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요일 3:16)안다고 기록했다.
D. 영원의 속성:
그분은 영원하시다. 이사야는 그분을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라고 불렀다. 미가는 그분에 관해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말했다. 바울은 그분의 존재 시기에 관해,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골 1:17)셨다고 말했다. 또한 요한도 동의하기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2, 3)라고 했다.
E. 그분의 신적 능력과 고유 권한:
그분은 창조주요(요 1:3; 골 1:16), 유지자 혹은 붙드는 자로 인식되고 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히 1:3).
F. 그분의 신적 칭호들:
그분의 이름들은 그분의 신적 본성을 나타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라는 뜻이다. 신자들과 마귀가 모두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막 1:1; 마 8:29; 막 5:7 참조). 하나님의 신성한 구약적 칭호인 여호와, 혹은 야훼가 예수님께 적용된다.
G. 예수님의 개인적 증언:
예수님은 친히 당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주장하셨다. 그분은 “내가(나는) 있느니라”(I AM)(요 8:58)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구약의 하나님[“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출 3:14 참조]과 일치시키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는 말 대신에 “내 아버지”(요 20:17)라고 부르셨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그분의 진술은 그분이 아버지와 “한 본질”이요 “동일한 속성들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주장을 공포하는 것이다.
♣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요 5:30)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분의 뜻을 이 땅에서 이행하셨다. 신적 능력을 통하여 그분은 고치고, 회복하고, 죄를 용서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사랑의 구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눅 6:19, 요 2:11, 5:1-15, 36, 11:41-45, 14:11, 8:3-11).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위해 개인적인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적을 결코 행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3.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2)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시다. 성경은 그분의 신성에 추가하여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갖고 계심을 증거한다. 이 교훈을 수용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일 4:2, 3)다.
A.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탄생: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여기 “육신”이란 말은 “인간 본성”, 곧 그분의 하늘 본성보다도 열등한 본성을 의미한다. 명백한 언어로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갈 4:4; 창 3:15 참조)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습”과 “사람의 형체”(빌 2:7, 8 RSV)가 되셨다. 하나님이 인성으로 나타나신 것은 “경건의 비밀”(딤전 3:16)이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그분을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일컫는다(마 1:1). 인간적 본성에 따라 그분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9:5) “마리아의 아들”(막 6:3)이셨다. 마리아는 처녀였으며, 이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마 1:20-23; 눅 1:31-37). 그분은 당신의 모친을 통하여 참된 인성을 취할 수 있으셨다.
B. 그의 인간적 성장:
예수님은 인간의 성장 법칙을 따르셨다. 그분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눅 2:40, 52)여지셨다. 12세 때 그분은 당신의 신성한 사명을 자각하셨다(눅 2:46-49). 소년기를 통해 그분은 당신의 부모님께 복종하셨다(눅 2:51).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그분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히 5:8, 9, 2:10, 18)었다. 그분은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으나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C. 그분의 본성:
♣ 하나님은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시 8:5). 성경은 예수님을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난외주:조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히 2:9)라고 말한다.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창조된 것이었으며 초인간적 능력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셨다. 이것은 그분의 사명의 일부였다. 그분이 인간적 본성의 특성을 필히 소유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은 “혈육”(히 2:14)이셨다. “범사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동료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분은 인간과 같은 본성을 가지셨으므로 우리 인간들이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도와주실지 아신다.
♣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다른 인간들과 같은 심리적, 육체적 감수성을 갖고 계셨다.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걱정 등(마 4:2; 요 19:28, 4:6; 마 26:21, 8:24 참조). 그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실 때 동정, 의로운 분노, 슬픔을 나타내셨다(마 9:36; 막 3:5). 그분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으며 한번은 피땀이 나도록 기도하셨다(히 5:7; 눅 22:44). 그분의 기도의 생애는 그분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셨음을 나타낸다(마 26:39-44; 막 1:35, 6:46; 눅 5:16, 6:12). 예수님은 죽음을 겪으셨다(요 19:30, 34). 그분은 영으로서가 아니라 신체를 갖고서 부활하셨다(눅 24:36-43).
♣ 죄있는 육신의 모양;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심을 계시한다.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 혹은 “죄 많은 인간의 모습”(롬 8:3, 공동 번역)으로 사셨다. 성육신 전에 예수님은 신적 본성을 소유하셨다(요 1:1; 빌 2:6, 7). 그러나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그분은 신적 고유 권한(prerogatives)을 유보하셨다. 그분은 인성으로 신성을 옷 입으셨으며, “죄 있는 육신의 모양” 혹은 “죄 있는 인간 본성” 혹은 “타락한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롬 8:3 참조). 그러나 비록 그분이 “죄 있는 육신의 형체” 혹은 “모양”이 되셨지만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며 그분의 무죄하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유전의 법칙; 예수님께서는 죄로 저주받은 이 땅에서 4,000년에 걸쳐 이미 타락해 버린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과 비교해 볼 때 신체적, 정신적 활기가 떨어진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결과를 지니고 있는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을 때 그분은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연약성과 약점을 가지셨다.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연약에 싸여 있”었으며,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 하시”었다(히 5:2; 마 8:17; 사 53:4). 이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의 인성, 곧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이 가졌던 인성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우리의 인성과 같되 죄는 없는 것이다.
♣ 시험을 당하심; 그리스도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라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준다. 시험과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분에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만일 그분께서 죄를 지을 수 없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셨거나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굴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여 온갖 불리한 조건을 지닌 인간 본성을 지니셨다. 모든 시험 속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문제는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가의 여부이다. 시험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셨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그분은 인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상 혹심한 시험도 성공적으로 저항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 2:10)되셨다. 그분은 친히 시험의 권세를 직면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시험 당하는 모는 사람을 도우실 길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인간 본성이 당하는 시험에 인간과 하나되어 고난을 당하셨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무죄함;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을 무죄한 것으로 제시한다. 그분의 탄생은 초자연적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 1:20). 신생아로서 그분은 “거룩한 자”(눅 1:35)로 기술되었다. 그분은 타락한 상태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는데, 이것은 죄의 결과들을 지닌 것이지 그 죄 됨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히 4:15, 7:26 참조)신다. 바울은 그분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고후 5:21)라고 기록했다.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벧전 2:22)다고 증언했으며, 또한 그분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벧전 1:19; 히 9:24)으로 비유했다. 요한은 그분은 죄가 없고 의로우시다고 했다(요일 3:5-7).
4).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이유
1.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메시야로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혹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위치를 차지하셔야만 했다(슥 6:13; 히 4:14-16). 이 직능(職能)을 행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취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리스도는 이런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셨다.
a) 그분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으로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으셨다(히 5:2).
b) 그분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에 “자비하고 충성된” 분이시다(히 2:17).
c) 그분은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 2:18).
d)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이시기에 연약함에 대해 동정하시는 분이시다(히 4:15).
2.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가장 타락한 인간과 가장 속절없는 자까지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종의 수준까지 내려가시는 것이 필요하였다(빌 2:7). 그리고 당신의 생명을 세상의 죄를 위해 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는데,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은 죽을 수 없으므로 죽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인간적 본성을 소유해야만 했다. 그분은 인간이 되셔서 죄의 값을 치르셨는데, 그것은 사망이었다(롬 6:23; 고전 15:3). 인간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히 2:9).
3.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무죄한 생애를 사셔야만 했다. 둘째 아담으로서 그분은,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거나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신화를 추방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첫째 아담이 타락한 곳에서 둘째 아담은 죄와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시고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 되셨다. 그분의 능력 안에서 그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요 16:33).
◈ 결론
그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 하신 사랑의 신비는 우리 인간들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주제이다. 신이기를 포기하시고 인성을 취하셔서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우리가 영원히 감사하고 찬양할 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자!
삼위 하나님, 그 영원한 신비
4. 성령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제자들에게 좌절과 고뇌와 공포를 안겨 주었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들의 생애는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 가운데 거친 장벽을 쌓게 했던 불화는 이제 모두 녹아 버리고, 그들은 서로 자신의 허물을 고백했으며, 한때 흩어졌던 이들의 마음은 날마다 기도로 연합하였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그들에게 이르러왔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 중에 들려왔으며 맹렬한 불길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 강한 불길처럼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셨다.
성령으로 충만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해 새롭게 타오르는 사랑과 기쁨을 그냥 간직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그리고 열렬하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국가에서 온 순례자들과 지방민으로 구성된 군중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건물 앞으로 몰려들었다.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채, 그들은 순박한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 능력 있게 증거하는 소리를 그들의 언어로 듣게 되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저들이 술 취했다”라고 말하며 무시하려고 했다. 그때, 무리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뚫고 베드로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침 아홉 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들으시고 본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높임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지금 성령을 주고 계시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행 2).
1). 성령은 누구이신가?
성령은 삼위 하나님 중에 세 번째 분으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게 자존하시는 분이다.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능력을 충만케 하셨다. 그분은 인간들을 이끄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시도록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되신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부여하시며, 교회에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시고, 성경과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2). 성령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어떤 힘이 아닌 한 인격체로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을 별개의 인격체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라고 말씀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성경절들은 성령을 한 인격체로 묘사하고 있다(마 28:19; 고후 13:14). 성령은 개성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노력하시고(창 6:3). 가르치시고(눅 12:12), 죄를 책망하시고(요 16:8), 교회 일을 지시하시고(행 13:2), 도우시며 중보하시고(롬 8:26), 영감을 주시고(벧후 1:21), 성화시키신다(벧전 1:2).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행해질 수 없다. 오직 한 인격체만이 이것들을 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을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성령께 거짓말한 것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 4)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 32). 이런 일은 성령이 하나님이실 때에만 진실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성령과 신적 속성들을 관련시킨다. 그분은 생명이시다. 바울은 그분을 “생명의 성령”(롬 8:2)이라고 했다.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진리의 성령”(요 16:13)이라고 부르셨다. “성령의 사랑”(골 15:3)과 “하나님의 성령”(엡 4:30)이라는 표현은 사랑과 거룩함이 그분의 본성 중 일부임을 계시한다.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전 12:11)신다. 그분은 편재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것”(요 14:16)이다. 그 누구도 그분의 영향권에서 도피할 수 없다(시 139:7-10). 그분은 또한 전지하시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며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전 2:10, 11)기 때문이다.
3). 성령의 사역과 사명
하나님의 사역들은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창조와 부활 모두에 그분이 관여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고 말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시 104:30)라고 말했다.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주장했다. 성령의 사역과 사명을 구체적으로 연구해 보자.
1. 성령은 신자들을 도우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요 14:16)라고 부르셨다. 이 헬라어는 “돕는 자”(Helper, NBU), “위로자”(Comforter, KJV), “상담자”(Counselor, RSV)로 번역이 되었으며, “간구자”(Intercessor), “중보자”(Mediator) 혹은 “대언자”(Advocate)를 의미하기도 한다.
2. 성령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져 오신다; 성령의 기능은 “내(예수님)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요 14:26)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요 16:13)는 것이다. 그분의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15:26). 성령의 사명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요 16:8)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 특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죄를 깊이 슬퍼하도록 하신다(요 16:9). 또한 성령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강권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는데, 심판은 죄로 어두워진 심령들에게 회개와 회심의 필요를 깨닫도록 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3. 성령은 그리스도를 임재케 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우리에게 가능케 하신다. 인성으로 제약 받으신 인간 예수님은 편재하실 수 없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떠나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나 계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 17).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요 14:17, 18)라는 보증을 주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신자들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요 14:23)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을 통해서이다.
4. 성령은 교회의 활동을 주관하신다; 성령은 사도 교회를 치리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셨다. 선교사를 선발할 때 교회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그분의 지도를 얻었다(행 13:1-4). 개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묘사한다(행 13:9, 52 참조). 그들의 활동은 그분의 지배하에 있었다(행 16:6, 7).
5. 성령은 교회에 특별한 은사들을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 구약시대에는 “주의 영”께서 개인들 “위에” 임하셨으며,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구출할 수 있도록 탁월한 능력을 주셨었다(삿 3:10, 6:34, 11:29, 등). 또한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민 11:17, 25, 26; 삼하 23:2).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로 사울과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임하셨다(삼상 10:6, 10, 16:13). 어떤 백성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 독특한 공예 기술이 임하였다(출 28:3, 31:3, 35, 30-35).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은사들을 교회에게 부여하신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을 통해서였다. 성령은 이러한 은사들을 당신께서 적합하다고 보시는 이에게 분배하심으로 온 교회에 유익을 끼치신다(행 2:38, 고전 12:7-11). 그분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능력을 준비하셨다(행 1:8; 본서16장 보라).
6. 성령은 신자들의 심령을 거듭나고 성화하게 하신다; 죄를 자각하게 되는 일, 회개하는 일, 그리고 죄를 자복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은 성령의 사역이시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의 필요성을 지적하셨고(요 3:5), 승천 직전에 그분은 새 신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다. 바울은 성령의 침례의 중요성(본서 14장)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호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중생 때 시작된 성화사업을 계속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비를 좇아 구원하시며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딛 3:5, 6)셨다.
7. 성령은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지도록 역사하신다; 복음 사역이 그토록 힘이 없는 것은 성령의 부재 때문이다. 지식, 재능, 능변, 각종 천부적이거나 후천적인 자질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그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없고, 한 사람의 죄인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할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면, 성령의 은사를 그들이 갖고 있다면, 가장 보잘것 없고 무식한 그분의 제자라 할지라도 심령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우주에서 가장 고상한 감화가 흘러가는 통로로 삼으실 것이다.
(성령에 대한 더 자세한 연구를 원하시는 분은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61호 “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읽으십시오).
◈ 우리가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화시키셔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늘 하나님께 머무르도록 역사하신다.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사는 비결은 성령께서 늘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체험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을 통하여 마음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늘 체험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