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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1-30
▣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마태복음 11장-
마태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에 봉착하게 된다. 왕의 출현은 이제 완성되었고(1-10장) 이제는 왕에 대한 반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11-13장).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계시하신 모든 것을 반역한다.
● 요한에 의해 알려지심-요한이 체포되도록 방관함 / 11장1-19절
● 많은 기적들을 이루심-성읍들이 회개하기를 거절함 / 11장20-30절
● 자신의 원리를 알리심-그들이 원리에 대해 논박함 / 12장 1-21절
● 자신의 인성을 보이심-그를 사단의 공역자로 몰아세움 / 12장 22-50절
물론 그 결과로 예수께서는 그 백성에게서 돌아 서셨고(14-20장) 십자가로 향하신다. 여기에서 시작된 반역은 후에 노골적인 거절로 변한다.
1. 세례(침례)요한에 대한 설명(11:1-19)
의뢰(1-3절)-이 때 요한은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4:12). 성령께서 그에게 누가 메시야인지를 말씀하셨는데도(요 1:29-34) 그는 왜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의심하였는가? 그 답은 “다른 이“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다. “다른“ 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한 경우는 같은 종류로 하나 더란 뜻이고, 예수께서 “나와 같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하신 단어이다. 마태복음 11장 3절에서 사용된 “다른“은 다른 종류 하나라는 뜻이다. 요한은 왕의 오심을 알렸고 심판과 고난의 날이 온다고 확언했었다(마 3:7-12).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비의 사역을 하고 계셨다. 요한은 “당신은 메시야이십니까? 아니면 이 백성을 징계하고 죄를 심판할 또다른 종류의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으므로 요한의 시각이 어둡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한에게 임했던 성령이 구약의 엘리야와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왕상 19:1-4 참조).
대답(4-6절)-예수께서는 부드럽게 그의 종에게 확신을 주시며 요한의 믿음을 격려하신다. 이 구절을 누가복음 7장 18절과 비교해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병을 고치는 사역에 대하여 요한에게 보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예수께서 “가서... 요한에게 다시(우리 말 성경에는 없음) 알리라“고 하신 이유도 이것이다(11:4).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께서는 구약이 이루리라고 말해주던 그 기적들을 성취하고 계심으로써, 자신이 그 왕이라고 요한에게 확신을 주고 계신다(사 35:5-6/사 61:1).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사야 8장 14-15절을 가리키신 듯하다. 그리스도는 요한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의심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도 좋은 교훈이 된다.
승인(7-15절)-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인정하신 말씀은 굉장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드리려는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잘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 종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사역으로 말라기 3장 1절이 성취된 것이라고 언급하신다. 만일 그 민족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요한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엘리야였을 것이다(14절/ 마 17:10-13 참조). 이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말라기 3장 1-3절의 문자적이고 최종적인 성취는 말세에야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요한은 구약예언자들의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왕국을 전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천국 안에서 가장 못한(겸손한) 사람보다 낫지 못하다(11절).
책망(16-19절)-그리스도는 그 세대 사람들이 어린 아이인 것을 책망하신다. 민중을 기쁘게 하는 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요한과 예수님은 생활이나 사역에 있어서 반대였으나, 그 어느 쪽도 어린 아이인 군중을 만족시킬 수없었다. 25-26절에서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만이 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오늘날 세상은 마치 항상 오락과 새 것만을 찾는 응석받이 아이들과 같다. 이들은 삶이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해지기를 거부한다."
2. 성읍들에 대한 저주(11:20-24)
예수께서 저주를 담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많은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으며 그의 제자들도 기적을 행했다. 그런데도 성읍들은 주님을 거절하셨다. 가버나움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그리스도의 사령부를 두었던 곳이기 때문이다(마 8:5-17/9:1-).
가장 밝은 빛에 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개인이 받은 빛의 정도의 많고 적음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알고도 등을 돌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
3. 짐진 자들에 대한 초대(11:25-30)
이 시기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어려운 시기였다. 왕에 대한 반역이 이미 형성되었고 공개적인 거절도 최고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드린다 !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따라야 할 참다운 본보기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우리의 생활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혜있고 분별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나 단순하고 믿음 있는 보통사람들을 구원을 위하여 택하셨다(고전 1장).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비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찬양하고 순종할 수는 있다. 여기 나오는 그리스도의 초청은 그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10장 5-6절에 보면 멧세지가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아오게 될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놓으신다.
나의 멍에를 메라-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짐을 지웠다(마 23:4). 그런데 그들의 종교는 백성들에게 쉼과 평안을 주지 못했다. 어떤 종교라도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괴롭히며 결박하는 바리새인들의 멍에와는 대조적으로 평안한 멍에를 주신다. “쉼“이란 말이 이중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 쉼이란 구원과 함께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는 말씀 중의 “쉼“이란 헌신(항복)할 때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빌 4:6-9).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 실천적인 교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실망에 빠지기도 하며 믿음의 빛을 잃을 때도 있다. 세례(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으나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의 바울의 태도와 비교해 보자(빌 1장).
우리의 직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어린 아이같은 일시적인 기분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는 마태복음 11장 16-20절이 사실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이 세대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죄이다.음란한 일들로 가득 찼던 소돔은 종교심으로 가득 찬 가버나움보다 심판 때에 견디기 쉬울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사셨는데 그들은 그를 거절하였다! 특권에는 책임이 수반되며 책임은 언제나 해명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빛이 밝을수록 심판도 크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미약한 이해와 설명을 초월해 계신다(롬 11:33-36).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눈이 멀었고, 교회가 부름을 받게 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에 겸손히 경배하여 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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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50
▣ 용서받지 못할 죄-마태복음 12장-
12, 13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어려운 날들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왕에 대한 반역이 점점 더 맹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주님의 사자인 세례(침례)요한을 거절했다(11:1-19).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능력의 일들을 행하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11:20-30). 이제 그들은 주님의 원리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논쟁을 벌이며(안식일의 문제), 주님이 사단과 맺어져 있다고 힐난하기조차 하였다 ! 이 장은 대결로 가득 채워져 있다.
1. 안식일 문제로 인한 대립(12:1-21)
그들의 비난(1-2절)-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그 민족과 맺으신 특별한 언약의 표시였다(출 31:12-17).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영적인 축복과 기쁨의 날을 의식 수행의 날로 전환시켰으며, 바리새인들의 법은 이 날을 축복이 아닌 짐으로 만들어 놓았다. 안식일은 교회에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의 언약일은 첫 날, 주의 날(主日) 곧 부활의 날이다.
그리스도의 대답(3-8절)-예수께서는 적들에게 대답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곤 하셨는데, 여기서는 배고팠던 다윗이 안식일에 성막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었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신다(삼상 21:1-). 그 때 다윗은 예수님처럼 거절당한 왕이었다. 그리스도는 또한 제사장이 안식일에 일하며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율법(민 28:9-10)에 대해 언급하신다.
마지막으로는 선지서에서 인용하여(호 6:6)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해 주셨음과, 공허한 외적인 의식보다는 마음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는 담대하게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언급하시는데, 이 말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한 방편이었다.
그들의 두번째 비난(9-21절)-바리새인들은 “일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엄격하게 규율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죄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규율이 잘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평범한 논리를 사용하신다. 그들은 주일에 가축을 도와 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양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 예수께서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임을 주장하셨던 것이다.
14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멸하려는 계획을 시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구절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대처하셨는가? 주님은 스스로 철수하셨다. 이것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을 성취한 것이다(사 42:1-3). 주님은 적들과 논쟁을 하거나(19절) 그들을 심판하려 하지 않으셨다(20절). 어떤 이들은 20절의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가 연약하고 곤핍한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 같다. 그리스도는 정당한 때가 오기까지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18절과 21절에 나타나 있는 “이방인들“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왕이 그의 민족에게 거절을 당하시고 이방인들을 향하시게 될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41-42절에서 이방인들이 다시 나오는데, 주님은 니느웨와 스바의 여왕에 대해 말씀하신다."
2. 사단에 대한 논쟁(12:22-27)
오늘날의 세상적인 사람들과 같이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무엇인가 비판할 것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인간을 치료하는 것을 기뻐하는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논쟁이 논리적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왜냐하면 이 말은 사단이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귀신을 내쫓을수 있었다(27절/ 행 19:13 이하). 그렇다면 이 말은 그들도 사단과 결탁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언급하신 것은(29절) 주께서 먼저 귀신들의 지도자 사단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귀신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인데, 주님이 사단을 이미 정복한 사실은 4장에 나온다.
이 논쟁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게 만든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다음의 사실들을 명심하자.
입술의 죄가 아니라 마음의 죄이다(34-35절). 입술의 말은 마음의 상태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고 악한 말들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밝은 증거의 빛 가운데서 저지른 죄이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는데도 주님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적인 죄였고, 지속적인 불신앙이며, 결정적인 거부였다. 간음이나 살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다(요 8:1-11 /행 9장에서의 바울).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거절하며 마음이 지나치게 부패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때는 늦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세례(침례)요한의 멧세지를 설교하시는 데에 주목하자(3:7).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들은 옛뱀, 곧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다(23:33). 그들은 형식상으로는 경건하였으나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 사단처럼 이들은 참된 경건의 흉내자들이었다(고후 11:13-15)."
3. 표적에 관한 대결(12:38-50)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도 이들은 표적을 구하였다(요 12:35-43).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의 표적만을 약속하셨는데, 곧 요나의 표적에 비유한 자신의 죽음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이었다. 요나가 이방인을 위한 사자였음을 기억하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될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요나보다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41절) 주님의 인격이 보다 위대하시다. 요나는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주님은 헌신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의 멧세지에 있어서 더 위대하시다. 주님은 심판이 임할 것을 전하지 않고 구원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또다른 이방인으로서 스바의 여왕(왕상 10장 참조)을 언급하시는데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왔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43-45절에 나오는 비유는 “거듭남이 없는 개혁“이라고 말하면 어울린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에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 그 “집“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나 비어 있었다. 이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도덕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으며 그들의 종교도 공허하였다. 결국, 사단이 다른 죄들을 가지고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나빠졌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그들 자신의 메시아를 죽였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각 개인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는데도 자기의 생애를 “개혁“하고 교회에 등록하여 존경을 받고 살기는 쉽다. 이러한 “거짓 의(義)“는 잠시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사단이 그 공허한 생애를 주장하여 몰락시킬 것이다. 종교란 외부를 정결케 함을 뜻하나, 구원이란 새 생명과 내적인 거룩함을 뜻한다. 구원을 참으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비유가 있다.
11장의 끝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모두“ 초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12:46-50) “누구든지“라는 놀라운 단어를 사용하신다. 주님은 본성적으로 묶여진 모든 것들을 풀어 놓으신다. 그 민족은 주님의 멧세지와 주님의 사역을 반역하였다. 이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세계적인 가족이 됨을 말씀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