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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홍주국 묘갈명(洪柱國 墓碣銘) - 宋時烈
홍 국경(洪國卿, 홍주국을 말함)의 아들 홍만선(洪萬選)이 일찍이 나에게 와서 가장(家狀)을 주었는데, 그의 갓과 신을 살펴보매 진심으로 애척(哀戚)하면서 복상(服喪)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미 그가 그 가문(家門)에 어울리는 아들임을 알았다.
또 그 가장에 이르기를, “선군(先君)은 비갈(碑碣)에 지나치게 미화(美化)하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 가장을 모두 실적(實蹟)에 근거하여 썼다.”고 하였으니, 아! 국경(國卿)은 어진 사람이로다. 그러나 나는 국경과 더불어 현묘(顯廟) 때에 연석(筵席)에 출입하면서 그의 문학(文學)과 조리(操履)에 감복하였으니 국경이 어질다는 것을 안 것은 단지 오늘이 아니다.
국경은 천계(天啓)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 9월 19일에 태어났다. 그 당시 세상의 도의가 다시 태평하고 운기(運氣)가 청명(淸明)하였으니, 공이 품수(稟受)한 바를 알 수 있으며, 또 공은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을 말함)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를 말함)를 내외조(內外祖)로 두었으니 그 숭상하는 바도 닮은 것이 마땅하다.
공은 소년 시절에 시사(詩詞)로써 또래들을 굴복(屈伏)시켰고 또한 선진(先進) 대가(大家)들에게 칭찬과 허여(許與)를 받아 모두 의발(衣鉢)을 전수(傳受)한 곳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윽고 진사(進士)가 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현직(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바,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 많이 재직하였는데, 보도(輔導)하고 논사(論思)하는 것이 반드시 정도(正道)에서 나왔다.
일찍이 소(疏)를 올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학(聖學)에 힘쓰고 현신(賢臣)을 친애하는 것이 요체(要諦)임을 논하였으며, 또 사보(師保)를 잘 골라서 저이(儲貳, 세자를 말함)를 보익(輔翼)하는 일이 급무(急務)라고 하였다.
또 그로 인하여 임금이 선(善)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하고 신하들을 부리는 예의가 극진하지 못하다고 말하였고, 그 아래에 또 임금이 친히 무사(武士)들을 점열(點閱)하는 것의 잘못을 쟁론(爭論)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또 돈종(敦宗)하는 방도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당폐(堂陛)가 점점 무너지고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하다고 깊이 경계를 하였는바, 모두 사정(事情)을 가리키며 진언(陳言)하였고 공연한
말이 아니었으나, 그 돈종(敦宗)에 대하여 말한 일이 마침내 사화(士禍)의 계제(階梯)가 되었고 초옥1)(楚獄)이 벌어짐에 이르러서 더욱 증명되었다.
장령(掌令)에 재임할 때에는 상소하여 임금이 온궁(溫宮)에 행차하는 것을 간절히 간쟁(諫諍)하기를,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가 장차 구성궁(九成宮)에 행차하려고 하자 어사(御史)인 마주(馬周)가 간쟁하기를, ‘태상황(太上皇)의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시선(視膳)을 해야 되는데, 구성궁이 경사(京師)와 3백 리나 떨어져 있으니 조석으로 문안을 올려야 하는 예절에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온궁은 비록 구성궁과는 차이가 있지만 삼전(三殿)이 모두 함께 그곳에 가면 대왕 대비(大王大妃)를 봉양하는 일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라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송연(悚然)히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또 사헌부의 관원이 상소하여 대신(大臣)을 지척(指斥)하였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삭출(削黜)되었는데, 잇달아 그와 함께 간쟁한 자들도 정위(廷尉)에게 문초(問招)를 당하자, 공이 응교(應敎)로서 홀로 차자(箚子)를 올려 그들을 구해(救解)하였고 또 상소를 올려 그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80일 만에야 비로소 임금의 비답이 내렸으며 이 일로 말미암아 여러 번 대각(臺閣)에 의망(擬望)되었으나 임금께서 번번이 개정(改正)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도 일을 당하여 더욱 쟁론해 마지않았고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할 때에도 혹은 문의(文義)를 인하거나 혹은 고사(故事)를 인하여 자세하게 성궁(聖躬)과 시정(時政)에 귀결시켰다.
금상(今上, 효종을 말함)이 춘궁(春宮)에 계실 때 현묘(顯廟)께서 요속(僚屬)을 신중하게 골라 임명하였는바, 공은 맨 먼저 이 선발에 뽑혔다. 공은 나이가 어린 세자를 훈도하는 데 더욱 마땅히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을 귀에 가득히 들려주고 가슴에 가득히 채워줘야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성심을 다하여 개진(開陳)하면서 특히 효도와 공경의 이야기를 애써 말해주었다. 그 사이에 잠깐씩 외직(外職)에 나가기도 하였으나 모두 오래 있지 않았다. 삼자함(三字啣, 지제교(知製敎)를 말함)을 오랫동안 겸대하였는데 무릇 글을 지으면 입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었으며, 전후로 과제(課製)에서 1등으로 뽑힌 것이 16번이나 되었다.
또 일찍이 연달아 세 차례나 1등을 차지하여 특별히 품질(品秩)이 승진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인묘(仁廟) 이후로부터 이러한 은전(恩典)을 받은 사람이 단지 4인 뿐이었는데 공이 그중의 1인이었다. 인선 대비(仁宣大妃, 효종비(孝宗妃))의 국상(國喪) 때에는 예조 참의(禮曹參議)로서 고례(古例)에 따라 자의전(慈懿殿)이 대공(大功) 9개월 상복을 입도록 청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앙화(殃禍)를 요행수로 여기는 자에게 무함(誣陷)을 받아 오랫동안 사적(仕籍)에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금상(今上) 기미년(己未年, 1679, 숙종 5)에야 비로소 다시 기용되어 안악 현감(安岳縣監)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특지(特旨)를 내려 어서 부임하여 임무를 교대하도록 재촉하였다. 이에 공은 부임하여 여섯 달이 되었을 때 사신(使臣)을 영접하러 나갔다가 마침내 병에 걸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 3월 6일에 끝내 공관(公館)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아! 태평한 기운이 조짐을 보이고 성상(聖上)의 교화가 새로워지는 마당에 갑자기 이렇게 별세하고 말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임금께서 공의 부음을 듣고 매우 놀라고 애도하였으며 특별히 그 상사(喪事)를 도와주게 하였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서 형과 누님을 마치 부모처럼 섬겼다. 일찍이 중씨(仲氏)의 애사(哀辭)를 지었는데 그 글을 본 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젖었다. 성품이 청빈(淸貧)함을 좋아하여 산업(産業)을 세우지 않았으며 쓸쓸한 두옥(斗屋)에 살면서 채소와 쌀겨조차도 넉넉하게 먹지 못하였다.
또 항상 점잖고 차분하게 절조(節操)를 지키면서 세상 사람들이 서로 추어주며 붙좇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 관위(官位)가 오히려 부족한 면이 있었는데, 공은 대체로 밀어서 남에게 주려는 뜻이 있었으며 공에게 앞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자가 있었으니, 어찌 이른바 조용한 우물에는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 것2)과 같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 공의 문학(文學)과 사화(詞華)는 마땅히 국가의 성대함을 울렸어야 하는데도 시대를 만난 것이 좋지 못하여 이미 중화(中華)의 대아(大雅)들과 더불어 수창(酬唱)하며 겨룰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공을 아는 자들이 공의 죽음을 거듭 탄식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공의 뜻을 살피건대, 또한 남들이 애석히 여기는 것을 스스로는 애석히 여기지 않았으며 항상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는 뜻이 있었으니, 또 어찌 남들보다 한 등급 뛰어난 사람이 아니겠는가?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과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원년) 사이에 한번 사류(士類)들이 상잔(傷殘)하고 유리(流離)하였고 또 어처구니가 없는 죄명(罪名)을 뒤집어씌워 큰 앙화가 조석(朝夕)간에 닥칠 판국이었는데, 공은 느긋한 마음으로 탄탕(坦蕩)하게 지내면서 마치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는 듯이 강호(江湖)에서 기오(寄傲)하며 만물(萬物)의 밖에 홀로 서있었으니, 공은 그야말로 진애(塵埃) 속의 관골(鸛骨) 같은 사람3)이라고 하겠다.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공은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하여 공과 기류(氣類)가 서로 통하였는데, 일찍이 시를 지어 칭찬하고 흠모하였다. 한때 추상(推尙)하고 교유한 자들도 모두 문학과 행실이 깨끗하게 닦여진 선비들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산을 보지 않고 단지 그 초목(草木)만 본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또한 공이 살았던 세상을 논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금상(今上, 숙종을 말함) 초기에 공이 이미 배척을 당했으나 특별히 주연(胄筵)에서의 성의(誠意)를 생각하여 애도와 영예를 빠짐없이 내려주었으니, 또한 예우(禮遇)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풍덕(豐德)의 송산(松山)은 곧 공을 임시로 장사지낸 땅인데, 장차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양주(楊州) 풍양(豐壤) 현창리(縣倉里)의 모향(某向) 자리에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일찍이 여러 아들들에게 훈계를 남겨 상제(喪制)를 준봉(遵奉)할 때 절약(節約)하도록 하였으니, 이 또한 세속의 폐단을 바로잡을 만하다.
공의 휘(諱)는 주국(柱國)이고 호(號)는 범옹(泛翁)이며 본관은 풍산(豐山) 사람이다. 상조(上祖)인 홍지경(洪之慶)은 고려 조에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벼슬이 국학 직학(國學直學)에 올랐으며, 이로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후손들이 잇달아 배출되었다.
중세(中世)에는 조금 진기(振起)하지 못하다가 모당공(慕堂公) 홍이상(洪履祥)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는데 경술(經術)과 덕행(德行)으로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선고(先考)는 홍영(洪霙)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공의 부인은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경증(李景曾)의 딸이다. 맏아들은 곧 홍만선(洪萬選)으로 진사(進士)이고, 차남은 홍만적(洪萬迪)으로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壯元)으로 뽑혔다. 딸은 여섯 명인데, 사인(士人) 이속(李涑), 심충(沈沖), 김유(金濡), 조정만(趙正萬), 정수곤(鄭壽崑), 심봉휘(沈鳳輝)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김유와 조정만은 진사(進士)이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나이가 어리다.
공의 백씨(伯氏)인 문의공(文懿公) 홍주원(洪柱元)은 의리를 숭상하고 선비를 좋아하였는데 나를 가문(家門)이 다른 사람으로 여기어 외면하지 않았다. 이에 내가 외람되게 더불어 벗으로 사귀었으며, 그 까닭에 공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으므로, 지금 또 공의 두 고자(孤子)를 위하여 이 글을 서술하고 명(銘)을 붙인다.
공의 유집(遺集) 12권이 집안에 간직되어 있다. 공의 시(詩)는 처음에는 선시(選詩)를 위주로 하였는데 만년(晩年)에는 장경(長慶, 당대(唐代)의 백거이(白居易)를 말함)과 회옹(晦翁,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를 말함)의 시풍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시를 평론하여 말하기를, “변(變)을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시를 이백과 두보처럼만 지어내면 또한 멈출 만 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로 공을 논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메추리 새끼도 태어나면 천길 높이 날려고 하는데, 올빼미와 솔개는 부질없이 위협하며 빠르게 날아가려 하네. 나의 오장(五章)을 온전히 하여 자황(紫皇)으로 돌아가니, 덕망과 광채가 이제 길이 묻힌 것을 상심하네. 나는 이제 누구와 더불어 긴긴 밤을 보낼거나.
[각주]
1) 초옥(楚獄) :
여기서는 광해(光海) 5년(1613년)에 일어난 계축 옥사(癸丑獄事)를 가리킨다. 본래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초왕(楚王) 영(英)의 옥
사(獄事)를 지칭하는 말인데, 수천 명이 애매하게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은 원옥(冤獄)이었음.
2) 고정무파(古井無波)는 명리(名利)에 초연하거나 물욕(物慾)이 없는 것을 말한다. 또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는 허정(虛靜)한 마음 상
태를 표현하거나, 절개를 지키고 개가(改嫁)하지 않는 과부(寡婦)의 정절을 이르기도 함.
3) 진애(塵埃)는 혼탁한 세상을 비유하고, 관골(鸛骨)은 황새처럼 홀로 우뚝하게 돋보이는 대장부(大丈夫)를 비유한다. 황새가 높은 나뭇
가지에 둥지를 짓고 비가 오려는 것을 먼저 알아채고 소리 내어 우는 까닭에 비롯된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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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禮曹參議洪公墓碣銘 幷序。
洪國卿之胤萬選嘗來, 授余以狀, 余觀其冠屨應制, 哀戚由衷, 余已知其稱家兒。 又其狀曰: “先君惡碑碣之溢美者, 故其狀皆據實蹟。” 嗚呼! 國卿賢乎哉! 然余與國卿, 顯廟時出入筵席, 服其文學、操履, 知國卿賢, 非直今日也。 國卿生於天啓癸亥九月十九日。 時世道回泰, 運氣淸明, 公之所稟受可知。 又公以慕堂、月沙爲內外祖, 其尙類也宜矣。
公在丱角, 以詞詩伏儕流, 亦爲先進大家流所稱許, 咸以爲衣鉢之傳有在也。 旣成進士, 闡大科, 歷踐華顯, 多在玉堂、春坊, 其輔導、論思必出於正。 嘗上疏論爲治, 以務聖學、親賢臣爲要道, 又以擇師保輔翼儲貳爲急務, 因言受善之量未弘、使臣之禮未盡, 而其下又爭親閱武士之失, 末又及敦宗之道, 而深以堂陛漸壞、宮禁不嚴爲戒, 皆指陳事情, 不爲空言。 而其敦宗一款, 卒爲士禍階梯, 至於楚獄之成而益驗焉。 掌令時, 以疏切諫溫宮之幸曰: “昔唐宗將幸九成宮, 御史馬周諫曰: ‘太上皇春秋已高, 陛下宜朝夕視膳。 九成去京師三百里, 溫淸之禮, 切有所未安也。’ 今玆溫宮, 雖與九成有異, 而三殿竝行, 大王大妃奉養, 其將屬之何人?” 聞者竦然危怖。 憲官有疏斥大臣, 忤旨削黜, 繼而竝諫者, 廷尉問。 公以應敎獨上箚救解, 又以疏申之, 疏入八十日始下。 由是屢擬臺閣, 輒命改正。 其後遇事, 益爭論不已。 經席進講之際, 或因文義, 或因古事委曲, 以歸之上躬及時政。
今上在春宮, 顯廟妙簡僚屬, 公首膺是選, 以爲沖年訓迪, 尤當以格言至論盈耳充腹, 故竭誠開陳, 而尤拳拳於孝敬之說。 間嘗略爲外職, 而皆未久。 久帶三字銜, 凡所述作, 脫口而膾炙於人。 前後魁課製者十六。 又嘗連三次居首, 特陞品秩。 蓋自仁廟以後, 獲蒙是恩者只四人, 而公其一也。 仁宣大妃國恤, 以禮曹參議, 依古例請慈懿殿大功九月服, 因被幸禍者構誣, 久罹錮籍。 今上己未, 始起廢爲安岳縣監, 屢以狀求免, 上特旨催使交事。 公赴任六朔, 而出候使臣, 卒遇疾, 以庚申三月六日, 竟至公館復。 噫! 泰運先幾, 聖化將新, 而遽至於斯, 豈非天哉? 上聞甚加驚悼, 特庀其終事。
公早孤哀, 事兄姊如父母。 嘗有仲氏哀辭, 見者不覺淚濕。 性喜淸貧, 不立産業, 蕭然斗屋, 疏糲不給。 又常恬靜自守, 惡世之詡詡徵逐, 以故其官位猶有歉焉。 公蓋有推而與之之意矣, 人有愧於先之者, 豈所謂古井無波者非耶? 嗚呼! 以公之文學、詞華, 宜鳴國家之盛, 而遭時不淑, 旣不能與中華大雅上下其酬唱, 此知公者之所以重爲噓唏也。 然觀公之志, 亦不以人之所以惜之者自惜, 而常有逡巡却步之意焉。 公於是又豈不加人一等矣乎? 惟甲寅、乙卯間, 一番士類創殘流離, 且加以無將罪名, 大禍非朝伊夕, 而公悠然坦蕩, 若不聞也, 寄傲江湖, 獨立萬物之表, 公可謂塵埃中鶴骨也哉! 久堂朴公長遠, 孝友篤至, 氣類相感, 嘗以詩稱慕。 而一時推尙交遊, 皆是文行修潔之士。 古語云“不見其山, 但見草木”, 此亦可以論公世矣。 今上初服, 公已擯斥, 而特念胄筵時誠意, 哀榮備至, 亦不可謂不遇矣。 豐德松山卽公寓墳地, 將以某年月日, 改葬于楊州豐壤之縣倉里卯向原。 公嘗有遺戒, 諸子遵奉, 喪祭務從節約, 亦足以矯俗弊矣。
公諱柱國, 號泛翁, 豐山人。 上祖之慶, 麗朝文科壯元, 官國學直學。 自後軒冕蟬聯, 中世稍不振。 至慕堂公始大顯, 諱履祥, 以經術、德行, 爲宣廟朝名臣。 考諱霙, 文科, 禮曹參判。 夫人德水李氏, 吏曹判書景曾女。 男長卽萬選, 進士; 次萬迪, 進士壯元。 六女: 適士人李涑、沈沖、金濡、趙正萬、鄭壽崑、沈鳳輝。 金、趙, 進士。 孫男女皆幼。
公伯氏文懿公諱柱元, 尙義好士, 以余之不有其家, 而辱與友焉。 余故知公尤稔, 今又爲公二孤述此文而係以銘。 公有遺集十二卷, 藏于家。 公之詩, 始主於選, 而晩好長慶、晦翁。 嘗評詩以爲“變不可易言。 然此李、杜之所不免, 詩得如李、杜, 亦可以止矣”。 然詩可以論公也哉? 銘曰:
鵷雛下地志千仞, 鴟鴞空嚇翔欲迅。 全我五章返紫皇, 德輝今辰傷永藏, 吾誰與歸厚夜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