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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9 - 메이지 유신과 구미시찰단에 서구 문명을 한자어로 번역하다!
여진족이 후금을 세운후 자기들을 만주족으로 명명하고는 조선을 굴복시킨후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인 강건성세 (康雍乾盛世) 라고
불린 1661년에서 1799년까지만 해도 중국으로 대표된 동양이 서양 보다 강력한 국부를 자랑했습니다.
청나라 영토는 1,470만 km2 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였고 조선과 류큐, 베트남 등 주변에
여러 속국들을 거느렸으며..... 일본의 에도 막부는 복속되지는 않았으나 청나라를
상국(上國) 이라 불렀고 도쿠가와 이에츠나 등 쇼군들은 중국 문화에 관심이
지대했으며.... 중국은 도자기와 차의 수출로 전세계의 부를 은으로 미친 듯이 빨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준가르, 회족, 쓰촨성, 구이저우성 등 제국의 전역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립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니 재정에 막심한 타격이었고 간신배 니오후루 허션이
발호했으며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며 부익부빈익빈은 갈수록 악화되니 소규모 자작농
들의 삶은 비참해졌고... 백련교도의 난등 민란이 발호하니 청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반면에 1770년대에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기의 개량을 시작으로 한 기술혁명 (산업혁명) 은 청나라 건륭제
시기인 18세기 중반에서 시작해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여러나라로 확산되었으니 수공업에 기초한
작업장들이 기계설비를 갖춘 큰 공장(공장제 기계공업) 으로 전환되었으며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습니다.
건륭제시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는 소비재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화는 1차 산업혁명
이고, 19세기 중후반에 전기화학 등 중화학 공업은 2차 산업 혁명인데.... 에너지는 장소적 제약을
받는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에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출현하면서 산업혁명으로 발전합니다.
증기 기관을 이용해 기계화된 방직산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량을 급속히 증대
시켰으며 코크스를 이용한 철 생산과 증기기관의 도입을 통해, 적은 연료로 더 많은 철 생산이
가능해져 19세기 중반 강철 제조법이 탄생했고, 밀링 머신, 보링 머신 등 정밀 기계들이 발명됩니다.
화학에서는 탄산나트륨과 알칼리의 대량 생산법이 개발되고 시멘트를 이용한 콘크리트의
발전은 견고하고 높은 건물들을 건설할수 있게 됐으며, 증기기관을 이용한 운하와
철도의 건설을 통해...... 인류는 먼 곳까지 효율적으로 이동하고 물품을 운송할 수
있게 되이 이런 기술로 무장한 서양 군대가 아프리카, 아시아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1603년에 세워진 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속적 평화와 방만한 국가 경영의
시기 동안 사족 (사무라이) 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막부는 자연재해와 사회
경제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엄격한 신분제는 이어집니다.
13세기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을 통해 성리학이 전래되고 임진왜란때 끌려온 조선 유학자 강항을 통해 주자학이
전해지면서 이를 통치의 기반으로 삼자 성리학의 충(忠) 사상은 막부 보다는 "천황(일왕) 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된 일본" 이라는 생각까지 나타났고 일본 고유의 정신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국학(國學) 이 발생하게 됩니다.
1842년에 상국인 중국 청나라가 영국군에 무참하게 패배한 아편전쟁 소식이 전해지니
일본인들은 주자학의 미몽에서 깨어나 서양의 침략세력으로 부터 일본을 지킬
방책을 고심하던 차에...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돛을 단 100톤 목선이 아닌,
석탄으로 에너지를 얻는 3천톤이나 되는 신식 증기선 전함들을 끌고오니 기겁을 합니다!
페리제독은 1854년 구로후네 (黑船) 군함들을 이끌고와 '평화적으로 교역에 응하는 것' 과 '전쟁을 감수하는 것'
중에 양자 택일을 요구하니, 마침 일본의 수도는 항구도시인 도쿄인지라 서양 군함의 함포사격에 도시가
불바다가 될 위험에 놓이니 에도 막부는 굴복해 시모다 (나중에는 요코하마) 와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 합니다.
중국 무역에 참여 하려는 미국은 서부 해안에서 출발한 증기선이 하와이를 거쳐 북태평양을 통해 일본
근해까지 오면 증기 기관의 연료인 석탄이 떨어지니 이걸 보급받아야 했기 때문에.....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하려면 일본에 보급항을 확보할 필요가 절실한지라 미국은 일본 개항에 결사적 이었습니다.
미국은 석탄과 식량에 식수등 보급을 위해 일본의 항구는 필수적이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1871년에 군함 몇척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긴 했지만
조선의 위치가 외진 곳이라 중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궂이 거칠 필요가 없었고... 또 한성(서울)
은 항구가 아닌 육지 깊숙한 곳이라 개항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채 그냥 쿨하게 물러갔던 것입니다.
막부의 대로 이이 나오스케의 주도아래 1841년 아편 전쟁 청나라 처럼 얻어 맞느니 평화적으로 통상
조약을 맺기로 했는데, 미일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으로, 관세권을 박탈당해 해외의 공산품
으로 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수 없고..... 외국인에게 "치외법권" 을 줌으로써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처벌할 수도 없었으며, 그나마 아편을 금지할수 있는 조항을 넣은게 수확이었습니다.
막부는 개항에 여론이 좋지 않은지라 일왕(천황) 의 허가를 받고 아래로 280개 번주들과 회합을 열어 여론을
수렴하려고 했지만.... 과거 처럼 힘으로 황실과 다이묘들을 찍어 누르던 시대는 지난지라, 고메이 일왕이
"짐은 이인(夷人) 이 싫다" 며 결재를 미뤘고, 다이묘들과 회합은 결사항전을 외치는 성토장이 되어 버립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됐고, 일왕(천황) 의 허가도 받지 못한채 모든 다이묘가
반대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며..... 일단 미국과 조약을 맺게되자 영국을 비롯한 다른
서양 국가들도 몰려왔고 이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을수밖에 없었으니 존왕양이파 세력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오래전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부터 불편한 관계로 내려왔던 조슈번과 사쓰마번등
웅번 (雄藩) 들이 도쿠가와 막부와 대립각을 드러냈고, 젊은 하급 무사들에게는
일왕 (천황) 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황양이 (尊皇攘夷) 사상이 지지를 받게 됩니다!
서양에 문을 연 막부에 반감을 가진 존황양이파 사무라이들은 처음에는 외국인이나 친외국 세력을 모두
베어버리면 된다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가졌지만....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서양과의 전쟁에서 패배
하는 것을 보고는 현실을 깨닫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워 막부를 타도하자는 쪽으로 바뀝니다.
이들을 '토막파 (討幕派)' 라는데 조슈번 (長州藩), 사쓰마번 (薩摩藩), 도사번 (土佐藩), 히젠번 (肥前藩) 에서
영향력이 거셌고.... 조슈번 요시다 쇼인은 토막파 문하생들을 길러냈으니, 결국 1868년에 저 4개번 5천명
반란군은 교토 남쪽에서 1만 5천 막부군을 격파하고 동북지방과 하코다테 전투에서 승리하니 무진전쟁 입니다.
외국 무역상들에 의해 일본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민중 폭동이 줄을 잇기도 했으니, 일본의 금값이 국제
시세 보다 싸다는 것을 알아차린 외국 무역상들이 일본의 금화를 대량으로 유출하자..... 막부 정부는 금화에
불순물을 섞어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대응하니 갑작스러운 화폐가치 저하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킵니다.
곡식 가격이 폭등하였고, 비단을 짜는 생사(生絲) 값이 싸니 외국 무역상들은 생사를 쓸어담아 중국에 팔았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주요 산업이었던 비단 직조 산업이 붕괴돼 버렸으며, 저렴한 외국산 면직물이 밀려들어
왔지만..... 막부는 불평등 조약 때문에 막지 못해 서민 생활이 어려워지자 도시와 농촌에서 폭동이 잇달았습니다.
1865년부터 막부는 일본 근대화를 진행시켰으니 프랑스 지원을 받아 서양 무기와 서구식 훈련을 도입했고, 과학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자 했지만, 막부 내에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속도는 미진했으며, 웅번에서는
광범위한 사회정치개혁이 벌어졌는데, 조슈번에서는 출신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개혁을 합니다.
조슈번 (야마구치현) 토막파는 1864년 1차 정벌로 힘을 잃었지만 살아남은자는 서양무기와 서양식 편제를 이용
해서 비정규군을 육성했고, 다카스기 신사쿠는 무사 아닌 농민 입대를 허용했으니 1865년에 벌어진 조슈번
의 내전에서 요시다 쇼인의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는 불과 80명 (이 중에 이토 히로부미 부대는 30명) 으로
궐기해 토막파의 무사 + 농민 혼성 부대는 4천명 조슈번 군대(보수파) 를 격파하고는 번의 지배권을 탈환합니다.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은 풍부한 재정이 있었지만 막부편에 서 있었던지라 조슈번과는 원수지간이었는데, 사쓰마
번의 가로(家老) 고마쓰 다테와키와 번사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 정사 기도 다카요시가 밀약을 논의하고
도사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와 사쓰마 사이를 적극 중재하니, 1866년 비밀리에 삿초 동맹이 맺어집니다.
막부는 조슈 토막파를 용납할수 없었기에 1866년 각 번에서 10만 대군을 동원하니 제2차 조슈 정벌이지만
사쓰마는 병력 파견을 거부했고...... 사기가 낮았던 10만명의 막부군은 결사항전하는 4천명
조슈군에 고쿠라성이 함락되는등 참패를 당하니 일본인들은 막부 체제의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고 여깁니다.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사카모토 료마등의 조언으로 막부에 중재안을 제시하였는데, 다이묘 회의가 담당하는
상원과 사족과 서민들로 구성된 하원이 천황(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부를 폐지하고 권력을 천황에 봉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평화롭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조슈와 사쓰마의 강경 토막파들을 만족시킬수 없었으니
1867년 10월 조슈의 히로사와 사네오미와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가 맺은 막부 토벌을 위한
밀약을 통해 1867년 11월 조슈와 사쓰마번 동맹군은 교토로 진군하여 황거를 확보하니 보신(문진) 전쟁 입니다.
그리고 즉위한 메이지왕(천황) 에게 왕정복고와 도쿠가와 가문의 축출을 선언히게하니 막부군
진압을 위해 출병했지만 교토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고 에도로 퇴각한 막부군은
1868년 4월 에도를 내주고 항복했지만 잔류 막부파에 사쓰마번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
하는 신정부군은 동북 일본과 하코다테 까지 진격하며 치열한 전투 끝에 1869년에 승리합니다.
메이지 유신은 19세기에 일본이 도쿠가와 막부 (幕府) 를 타도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복구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개혁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면하고 오히려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메이지 유신이 끝나는 시기를 중앙 집권을 이룬 1871년의 폐번치현 (廢藩置縣) 으로 보기도 하지만
길게 보자면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이 공포되는 시점까지로 보기도 하는데....
1868년 9월 10대의 메이지 일왕이 즉위해 메이지유신이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앞날은 불투명했습니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일왕(천황)) 이 통치에 나서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일부 사족들이 벌인 군사쿠데타에
불과했고..... 다른 번들은 이들이 새로운 막부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또한 유신에 참여한 사족들은 본래 서양을 배척하자는 양이 (攘夷) 에서 출발했는데, 결국 막부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기모순적이었며,
유신의 주요 인사들 앞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결정에 따라 일본 미래가 크게 바뀔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왕정복고 쿠데타후에 신정부에 급한 과제는 중앙 집권화, 세수의 확보, 서양 문물의 도입
등이 있었으니.... 먼저 신정부는 막번제라는 구시대의 정치 질서를 해체하려고
했는데, 수백년을 내려온 세습 다이묘들이 쉽게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저항이 충분히 예상됐으나, 신정부는 면밀한 전술을 세워 3년 만에 목적을 달성합니다.
먼저 이들은 1869년 조슈, 사쓰마, 도사, 사가 와 같은 웅번의 다이묘들을 설득해 토지와 백성에
대한 소유권을 자발적으로 천황에게 반환케 하는 판적봉환을 실시했는데, 어디까지나
요식 행위로 여전히 각 다이묘는 지번사 (知藩事) 로 번의 통치를 계속하였으나,
신정부는 다이묘들을 압박해 개혁 찬성파 사족들이 번 정부의 행정직을 차지하도록 획책합니다.
그리고 각 번의 유력 인사들을 포섭하는 동시에 사쓰마와 조슈의 군대를 중심으로 구성한 황군을 이용해
일련의 공포 분위기를 형성했으니, 마침내 1871년 기도 다카요시를 비롯한 메이지 개혁가들은
기습적으로 천황(일왕) 에게 모든 번을 폐지하고 현(縣) 으로 대체한다는 선언을 하게 하니 폐번치현 입니다.
대신에 다이묘들에게는 과거 자신들이 다스리던 번에서 나오던 연간 징수액의 10% 에 상당하는
봉록을 매년 지급받도록 했는데, 이러한 조치를 통해 3년 만에 일본 전국의 행정 단위는
280여개 번에서 72개 부현으로 대폭 감소했고.... 정부가 각각의 현에 현지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정부는 폐번치현으로 옛 번 지역의 징세권을 손에 쥐었지만 다이묘에게 지급할 상전록, 과거 다이묘들
이 대량으로 고용하던 사족에게 지급할 가록을 감당해야 하는 의무도 떠안았으니.... 정부는
국가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1874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발안한 지조 개정 (地租改正) 조례를 발표합니다.
조례에 따라 1870년대 중반에 토지 측량이 실시돼, 토지 1필 마다 소유자가 정해져 권리증이 발행되었고, 토지에
대해 시장가격을 조사해 지가 3% 를 지조 (地租) 로 부과했는데, 막부 시절은 세금을 마을 단위로 수확량에
따라 쌀을 납부하게 했는데, 지조 개정을 통해 농작물의 풍흉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세입을 확보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토지 개인 소유가 인정되고 농민이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생산성은 증가했지만
지조는 농민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정부가 농작물의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농민에게 전가하는
형태였으며, 토지 측량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이후 농민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니 세율을 2.5% 로 낮춥니다.
세수는 자본주의 산업 경제의 사회 간접자본을 세우는데 투입되었으니 신정부는 항만을 준설하고
등대를 설치해 항로를 정비하였으며, 전신용 회선을 부설하고 영국을 본뜬 우편 제도도 발족합니다.
또한 정부가 철도 부설에 나서 1872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일본 최초의 철도가 자체기술로 개통됐고
1880년대 철도 투자 붐에 힘입어 1890년에는 총철도 연장 길이가 2,250km 에 달하게 되고, 1871년
엔을 공용 화폐로 정하고 1880년대에는 유럽을 본 떠서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발권은행으로 지정합니다.
***** 이와쿠라 사절단 : 1872년 영국 런던에 체류할 당시 촬영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사진.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는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871~ 73년 기간에 서양으로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는데, 이미 유신 이전인 1860년대에 막부뿐만 아니라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이토 히로부미 등을 런던 대학교등 유럽으로 유학을 보낸 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집행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 은 일본 과도정부에서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선교사 휘도 베르덱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으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해 제안 하였다는데, 이전에 에도 막부는 1860년에 미국 파견 사절단을,
1862년에 제1차 유럽 파견 사절단과 1863년에 제2차 유럽 파견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쿠라 도모미에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마스카등을 비롯 신정부 내의
인사 46명과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등 107명 일행이 18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여행했으니
과거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정부 고위 관료들의 해외 견학이었습니다.
그 중 전자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
받고 있으니..... 사절단은 학교, 공장, 의회 등을 비롯한 모든 기관, 제도,
관행을 시찰하였는데, 이때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서양식 공공 기관이나 시설을 도입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입안하고 집행한 사절단은 1871년 12월 23일 미국 태평양 우선회사의 증기선
‘아메리카 호’ 를 타고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해 미국을 횡단하여 워싱턴 D.C.를 방문했고 미국에서 8개월간의 장기 체류를 하게 됩니다.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국을 순방했으니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비엔나
만국박람회), 스위스등 12개국에 이르며 프랑스에서 아돌프 티에르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귀로는 지중해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아시아 각지에 유럽의 식민지(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
방문도 이루어졌는데, 1년 10개월 후인 1873년 9월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는데, 이들의 부재중
정부에서는 조선 출병을 둘러싸고 정한론 논쟁이 가열되었고, 사절이 귀국한후‘메이지 6년 정변’을 겪게 됩니다.
한 나라의 정부 수장들이 그것도 막부를 뒤엎은 쿠데타 이후 매우 불안한 시기에 모두
나라를 떠나 장기간 외유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직접
서양 문명과 사상에 접하고 국정을 비교 체험할수 있는 기회를 얻은게 큰 소득이었습니다.
유학생도 귀국후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래 일본의 문명개화에 크게 공헌
했으며 조약을 개정하고, 협상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과도 정부와의 마찰을
빚었으며 또한 외유 기간의 연장과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불화 등 정치 문제를 야기합니다.
사절단의 대부분은 상투를 자른후 삭발하고 양장을 입었지만 이와쿠라는 일본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투와 기모노를 입은 모습으로 도항을 했으니
이 모습은 미국의 신문 삽화에도 남았으니, 미국에 유학중이던 아들 이와쿠라 도모사다
에게서 “미개 국가로 멸시를 받는다 ” 고 설득을 당해 시카고에서 삭발하고 양복을 입었습니다.
이후 일본 최초로 여학생들이 선발되어 미국에 유학을 가는데.... 나가이 시게(10),
우에다 테이(16), 요시마스료(16) 쓰다우메(9) 야마카와 스테마츠(12) 등입니다.
서구의 강한 힘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판단한 신정부는 의무교육과 국민개병도 추진했으니 1872년
어린이에게 4년간 의무적인 초등교육을 받게하는 새로운 교육 제도를 공표했고
미국과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본떠 소학교, 중학교, 대학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체계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소학교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세를 추가로 거두었기 때문에, 의무 교육에
반발하는 폭동이 발생해 학교 2천 곳이 불에 타서 파괴되기도
하였는데, 의무교육에 대한 반발 때문에 1880년까지 아동의 취학률이 50% 를 밑돌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보다 거대한 국가인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이서 연달아 승리하며 국민들이 교육에 대해
갖는 긍정적인 생각과 군국주의를 흡수하며 교육이 천황의 신민이 다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면서 취학률이 상승해 1905년에는 남아의 경우 98%, 여아의 경우에는 93% 에 달하게 됩니다.
군제 개혁인 국민개병은 주료 조슈 출신(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무라
마스지로 등) 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유신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조슈의 농민 + 무사 혼성 부대가 탁월한 전투력을 보여줬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쓰마는 평민으로 군대를 구성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오히려 사족이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되기를 원했으니 신정부 초기 군대는 사쓰마의 반대로
무사 중심으로 편성되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이와쿠라 사절단 이었습니다.
서양을 시찰한후 정부내에서 국민개병 의견이 우세해져, 1873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도한 징병령이
시작되었고, 20세가 된 모든 남성에게 3년간 병역을 지고 4년간 예비군에 편입됨이 의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징병제 여론은 좋지않아 징병사무소를 습격해 파괴하는 폭동이 수도없이 발생하고 처벌받은 자가 무려
10만명이나 될 정도였으니, 일본인이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광신적으로 군국주의에 매몰
되는 모습은 수십년간의 의무 교육을 통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주입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건 것입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에서 사용하는 한자어 중에는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에서 근대식 번역어로 채택되어
사용하게 된 것이 매우 많으니 서구에서 근대적 개념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많이 쓰이던
한자어나 중국의 고전에 있던 한자어로 번역하여 차용한 것으로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석학은
1873년 메이로쿠샤 (明六社) 라는 학술 단체를 결성하여 한자 용어를 번역어로 차용하기 시작합니다.
'사회' (社會) 라는 단어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외국어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전에 있던
단어를 서구의 society 에 맞춰서 번역한 한자어이며 이후 'society' 의 의미에 대응하는 한자어로 널리
쓰이는 반면에 '회사' (會社) 는 사회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지만 영어의 'company' 에 대응하는 번역어 입니다.
'철학'(哲學) 도 마찬가지니 영어의 'philosophy' 를 '철학'으로 번역했으며 또한 '개인'(個人)
도 후쿠자와 유기치가 영어의 'individual' 을 한자어 '개인' 으로
번역했고 '민주주의' (民主主義) 도 'democracy' 를 민주주의라는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자유'(自由) 라는 단어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서구권의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한자 번역어 (翻譯語) 이니, 중국 고전에도 있었던 단어이고, 영어의 liberty
나 freedom 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던 '自由' 를 근대적 의미로 새롭게 전용한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에 일본에서는 자유를 '제멋대로' 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의 일본인들은 '자유 (自由)' 라는 단어에 대해 방종으로 생가해서 그다지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점차 인식이 바뀌어 오늘날의 자유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석학이 서구권에서 유입된 외국어와 개념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자(漢字)를 사용해 만든
단어는 '학교(學校)', '민족(民族)', '자유'(自由), '권리'(權利), '사진'(寫眞), '헌법'(憲法),
'내각제'(内閣制), '대통령'(大統領), '공화국'(共和國), '물리'(物理), '경제'(經濟) 등 정말 다양합니다.
오늘날 한국, 북한, 중국에서 사용하는 상당수 근대 한자 단어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일본의 학자들이 주로
중국의 고전에서 발굴하고 채택하여 번역한 것이니..... 오늘날 한국군의 계급 명칭도 일본식 한자어로
번역한 것에서 유래한 계급이 있으니...... 이병 ~ 병장, 하사 (下士), 소위 (少尉), 소장 (少將)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주요 근대 한자어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이미 조선과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쓰이던
단어들에 단순히 서구식 개념만을 추가하는 방식 또는 이미 고전에 있던
단어를 그대로 번역어로 선택해서 차용하는 방식으로 재탄생한 경우가 상당수 입니다.
실제로 인민(人民), 문화(文化), 공화제(共和制), 국가(國家), 주의(主義), 사상(思想),
운동 (運動), 노동 (勞動), 국민 (國民), 경제 (經濟) 같은 단어는
검색을 해 보면..... 조선왕조실록 에서도 이미 오래전 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새로운 어휘를 창조하기 보다는 이미 한자 문화권에 존재하던 기존의 명칭에 서구식 의미만을
번역과 차용 과정에서 "새롭게 의미 부여" 를 해준 경우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을 뜻하는 '사회' (社會) 라는 단어도 원래는 중국의 고전인
<근사록> 에 이미 나오던 단어였지만...... 이후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서 영어 society 의
번역어로서 중국 고전에 나오던 사회(社會) 라는 단어를 선택함에 따라 지금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어 위키백과 에서도 근대 일본식 한자어에 대해 "일본제 한자 조어 (和製漢語)
(화제한어, 와세이칸고 [わせいかんご]) 는,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한자어로서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을 기반으로 참조하면서,
때에 따라 일본어의 어휘·어법·문법의 영향(일본스러운 뉘앙스) 을 섞어서 조어(造語)되었다.
일본제 한자 조어 (和製漢語) 가 의미하는 범위는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르고, 통일된 견해가 없으며,
「공화(共和)」 처럼, 고전 중국어에 용례가 있어도, 새롭게 일본인이 근대적 개념·
의미를 넣어 사용하게 된 경우도...... 「일본제 한자 조어 (和製漢語)」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순 한자어였어도 일본에서 오랜 세월 어떤 일정한 의미 변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확장만으로 일본제 한자 조어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도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화(共和) 나 인민(人民), 주의(主義) 같은 이미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단어
들에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이 단순히 서구식 의미만을 새롭게 추가한 경우들에는 과연
그러한 단어들도 일본식 근대 한자어로 볼 수 있는지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서구의 여러 개념들에 해당하는 적절한 단어들이 없어서 고심하던 근대화 당시
일본의 일면을 보여주는데, 일본 지식인들의 한학 (漢學) 전통에 대한 존중과 낯선 외국어를
한자가 아닌 가나를 이용해서 원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기하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보다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따라, 조어력이 빈약한 일본 고유어에 견주어
왕성한 조어력을 갖춘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을 기반으로 참조하면서, 때에 따라
일본어의 어휘·어법·문법의 영향을 섞는 방식을 통해 서구 용어의 번역어로서 원어들을 가나로 표기하기 보다는...
고전에 등장하거나 이미 오래전부터 쓰였던 익숙한 중국식 한자와 한자어를 써서 번역, 차용함으로써 이 문제
를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니 예를 들어 서구 용어인 democracy 를 가나를 사용해 デモクラシー
(데모크라시) 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인 民主主義 (민주주의) 로 번역 (조어) 하는 식 이었습니다.
만약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한자어와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족했다면 society
(사회) 나 company (회사), liberty (자유) 같은 '서구식 용어' 들은 중국식
한자어가 아닌 텔레비전 (テレビ) 의 경우 처럼...... 일본의 가나로 주로 표기하고 음차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민주주의' 에서 민주 (民主) 라는 단어도 단어 그 자체는 중국의 고전인 '서경'
에도 등장하는 오래된 단어였지만 의미는 오늘날의 민주와는 다른 의미
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데모크라시 (democracy) 의 번역어로 채택된 경우입니다.
가나를 사용해 '데모크라시 (デモクラシー)' 로 발음 그대로 직번역 해서 사용하지 않고 한자인
민주주의 (民主主義) 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는 당대 일본 지식인들이 고전 중국어· 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 어법· 문법에 대해서 해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과 차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외래어를 음차하지 않고 동아시아 고전에 있는 단어로 번역한 것은 당대의 일본인
학자들이 서구에 못지 않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서니, 중국식 한자어 인데.....
일본식 한자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니 삐라의 번역어인 전단(傳單) 의 경우
1920년대 쑨원 혁명 세력이 군벌을 상대로 뿌린 선전물을 가리키던 중국식 근대 한자어 입니다.
19세기에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Train 을 중국은 화차 (火車) 라 하고 일본은 기차 (汽車)
라고 했으며, 차 Automobile 는 중국은 기차 (汽車) 일본은 자동차로 번역 (造語 조어)
했으며, bicycle 는 중국은 자행차(自行車), 일본은 자전거(自轉車) 로 조어 (造語) 했습니다.
Limited of Company 와 President 는 중국은 유한 공사와 총경리로, 일본은 주식회사와 사장으로 번역하는
등 수천자를 각기 번역 내지 조어했으니 일본인들의 번역한 단어 들은 국어, 영어, 사회, 문화, 문명, 전기,
전화, 민주주의, 의사, 약사,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의회, 내각, 대통령,
비행기, 지하철, 수도, 전기, 전자, 잠수함, 자유, 개인, 낭만, 축구, 야구, 배구, 농구, 정당등 수천자에 달합니다.
그런데 번역과 조어(造語) 는 중국이 먼저 였기 때문에 후발 주자인 일본은 중국인들이
번역한 것 중에 훌륭하다고 생각한 단어들은 그대로
차용했으니 과학, 대수, 물리, 기하 에다가 천주 (天主) 그리고 경찰과 파출소 등 입니다.
한국인들은 서구문명 수천자 중에 단 한글자도 스스로 번역(조어) 하지 못하고 정부와 총리, 의사와 약사,
과학과 전기, 전화, 축구, 야구, 농구등 일본인들이 번역한 것을 지금 현재까지도 빌려쓰는 중인데
십수년 전에 어느 교수가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로 번역한건 "일본인들이 무지" 하기 때문이니,
정치체제로 전제정이나 과도정에 대한 것이니, "민주정" 이라고 쓰야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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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아이돌, 내비, 스마트폰, 핸즈프리, 주니어, 스마트폰, 웰빙등... 번역을 않고 미국말를 그대로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