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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야 샨티의 참된 명상 / 원제 True Meditation (2006년)
아디야 샨티의 명상은 격식과 전통의 무거움을 어떻게 생생하게
삶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깨달음의 높디높은 장벽을 단번에 넘게 해주는
그의 간결한 선적 언어는 깨닫기 위해서 하는 그 많은 지식과
노력과 방황이 필요치 않다고 위로하는 듯, 합니다.
'참된 명상'이란 무엇인가?
처음 명상을 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알아차림이
항상 어떤 대상에, 즉 생각이나 신체적 감각, 감정, 소리 등과
같은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대상들에 초점을 맞추어 좁혀지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기가 알아차리는 것(대상)을
어쩔 수 없이 기계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에 조건 지어진 대로 결론을 이끌어 내고 근거 없는
추측을 하기 시작한다.
참된 명상에서는 모든 대상이 저마다 자연스럽게 기능하도록 허용한다.
이 말은 어떠한 인식 대상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억누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참된 명상에서는 알아차림으로 있는 데 중점을 둔다.
침묵과 고요함은 어떤 상태가 아니며, 따라서 만들거나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요함은 그 안에서 모든 상태가 일어나고 가라앉는 비(非) 상태다.
침묵, 고요함, 알아차림은 어떤 상태가 아니며 결코 대상으로서 전체적으로 지각될 수가 없다.
고요함은 그 자체로 모양이나 특성이 없는 영원한 목격자다.
당신이 목격자로서 더욱 깊이 휴식할 때, 모든 대상은 저마다 자연스럽게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알아차림은 마음의 좁아지는 버릇과
동일시를 벗어나서 자기의 자연스러운 비(非) 상태인 현존으로 돌아가게 된다.
참된 명상이란 어떠한 기법에 숙달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명상이다. 다른 모든 것은 실제로는 일종의 정신 집중이다.
명상과 정신 집중은 별개의 것이다. 정신 집중은 훈련이다.
정신 집중은 사실 우리의 경험을 감독하거나 이끌거나 통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명상은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며, 우리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참된 명상의 두 번째 측면은 명상적인 자기 탐구이다.
명상적인 자기 탐구란 명상 상태에 있는 마음에 질문을,
강력하고 중요한 영적 질문을 제기하는 수행이다.
이때 우리는 그냥 아무 낡은 질문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치 있는 질문들, 조건화의 단층들을 꿰뚫고
우리의 근원적인 본성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질문들을 한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질문은 그저 '나는 누구인가?
명상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경험을 통제하려 애쓰는 에고(자아)를 계속해서 약화시킨다.
명상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명상하는 자를 넘어서는 것,
즉 에고 또는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명상하는 자가 통제하고 있는 한,
마음 또는 에고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참된 명상은 우리의 생각에서 빠져나와 감각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생각만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리들을 듣는다.
우리는 마음속의 자질구레한 영화들로 완전히 점령당해 있지는 않으며,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본다. 참된 명상에서 우리는 몸을 초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몸 안에 머문다.
역설적이게도, 형상을 초월하는 최고의 출구는 형상 자체를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상을 하기 위해 앉을 때는 자신의 감각들과 연결되어 보라.
느껴지는 느낌, 귀에 들리는 소리, 감지되는 것, 코에 와 닿는
냄새와 연결되어 보라. 그런 감각들은 실제로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게 해 준다.
마음이 산란하게 떠돌 때는 감각들에 관심을 기울여 보라.
귀 기울여 들어 보라.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느껴보라. 몸에서 어떤 느낌이 느껴지는가?
느껴지는 감각 속으로, 운동감각 속으로 들어가라.
몸에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방 안에서 감지되는 것도 알아차려라.
냄새를 맡아 보라. 앉아 있는 동안 무슨 냄새가 나는가?
감각들을 통해서 내부와 주위의 전체 세계에 자신을 열어라.
그러면 마음보다 더 깊은 실재에 자리 잡게 되며,
마음이 아닌 한곳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 명상을 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할 때도 그 바탕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혁명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과거에 있던 그대로, 지금 있는 그대로, 미래에 있을 그대로 허용한다는 것.
만약 당신 삶의 바탕 자체가 고요히 앉아 있지 않는
하루의 나머지 시간 전부가, 모든 것을 온통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으로 채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명상을 단지 안전한 장소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명상은 무척 흥미로워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고 벗어나기 시작하면, 삶은 강력한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다.
가장 깊고 단순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그럴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어느 정도 맛을 보게 되면, 이제 명상의 다음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요소는 명상적 자기 탐구이다.
간과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명상의 한 부분이다.
명상이 단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깊이 허용하는 데에만 머무른다면,
그 명상이 아무리 심오하고 아무리 자유롭게 해 주더라도,
그러한 접근 자체만으로는 영적인 무관심 상태나
내적인 무 집착 상태에 그칠 수 있다.
탐구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의 에너지,
영적 열망의 에너지 자체를 이용하여 우리 존재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계발하는 방법이다.
일을 마친 뒤 저녁이면 커피숍에 가서 하나의 질문을 떠올린다.
그리고 손에 펜을 쥐고서 마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종이에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장이 진실이라고 느껴지기 전에는,
어떤 식으로든 나 자신의 경험을 벗어나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기 전에는
단 한 문장도 완결하지 않는다.
영적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올바른 질문이란 진실로 당신을 위한 에너지를 가진 질문이다.
영성에서 처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이 영성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어야 한다고 당신이 배운 질문이 아니라
그런 질문들 말고, 무엇이 당신 자신의 질문인가?
만약 당신이 명상을 한다면 왜 명상을 하는가?
당신이 답을 찾으려 애쓰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진짜로 알게 될 때,
그때야 당신은 자기 탐구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고요히, 명상하듯, 그 질문을 자신에게 물어보고,
그 질문이 당신을 어디로 인도하는지 지켜보라.
'나는 누구인가' 알려면 '무엇이 내가 아닌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밀접한 질문, 가장 큰 영적 힘을 가진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또는 누구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 하기 전에,
질문을 하고 있는 '나'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러한 질문을 제거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하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것들이 다 무엇인지에 대한
영적인 이야기들, 철학적인 담론들, 종교적인 대화들을 읽으며
지낼 수도 있다.
우리는 평생 그렇게 허송세월하다가 결국 더 많은 생각들, 더 많은 관념들,
더 많은 믿음들만 얻은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실로 무엇인지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깨닫기 전에,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라고 하는 가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가정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고는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있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분명히 있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안다. 생각들은 오고 가지만,
그 생각들을 목격하는 그것은 늘 그대로 있다.
1. 생각은 내가 아니다.
만약 생각들이 오고 간다면 그것들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들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라는 '생각'을 실제 자기 자신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경험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당신은 자기의 생각들을 보는 목격자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든지 간에 그런 생각들은 지정한 당신이 아니다.
2. 느낌은 내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낌들이 있다. 우리 모두는 행복, 슬픔, 근심,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적인 느낌들을 경험한다.
우리는 몸에서 느낌들을 경험하는데, 그것들은 여기서는 수축되고
저기서는 열려 있는 에너지의 느낌일 수도 있고,
그저 발가락에서 느껴지는 가려움일 수도 있다.
몸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느낌들이 있고,
그러한 느낌들을 보는 목격자가 있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느낌을 보거나 알아차리고 있는 어떤 무엇이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느낌들이 있고, 느낌들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다.
느낌들은 오고 가지만, 느낌들에 대한 알아차림은 늘 그대로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은 어느 하나도 부정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의 가장 깊고 진실한 정체성은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느낌은 우리의 정체성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느낌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느낌들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이다.
3. 믿음은 내가 아니다.
믿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믿음들이 많이 있고,
그럼 믿음들에 대한 알아차림도 있다.
그것들은 영적인 믿음들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 대한 믿음들일 수도 있고,
부모에 대한 믿음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들일 수도 있으며,
온갖 잡다한 것들에 대한 믿음들일 수도 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생각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들은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인생을 경험함에 따라
변해 왔음을 우리 모두는 알 수 있다.
믿음들은 오고 가지만, 믿음들에 대한 알아차림은 믿음 이전에도 언제나 있다.
알아차림이 더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들은 우리 자신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쉽게 알 수 있다.
4.에고-개성은 내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에고(자아)가 있고, 개성이 있다.
우리는 대개 각자의 에고가 우리 자신이며, 각자의 개성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들, 느낌들, 믿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에고-개성을 보는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신'이라고 불리는 에고-개성이 있고, 에고-개성을 보는 무엇,
애고-개성을 알아차리는 무엇이 있다. 에고-개성에 대한 알아차림은 개성 이전에 늘 있다.
알아차림은 판단 없이, 비난 없이, 개성을 알아차리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에고나 개성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개성이 있고 개성을 보는 목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의 본질적인, 가장 깊은 본성은 당신의 개성일 리가 없다.
당신의 애고-개성은 더 근원적인 어떤 것에 의해 목격되고 있다.
그것은 알아차림에 의해 목격되고 있다.
5. 알아차림만 있다.
우리는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사람에게 알아차림이 있다.
만약 당신이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실제로 이 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알아차림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생각을 알아차린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는 느낌을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명백히 현존한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함양하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존재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게 하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다.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아차리고 있는 '나'라는 어떤 개인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추정을 명상하듯, 고요히, 단순하게 조사해 보면, 알아차림은 있지만,
알아차리고 있는 '나'개인을 실제로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나'라는 개인이 알아차리고 있다는 가정은 마음이 배워 갖게 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어, 누가 알아차리고 있는지,
무엇이 알아차리고 있는지를 찾아본다면, '그것'이라는 개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더 많은 것을 알아차릴 뿐이다. 알아차리고 있는 '나' 개인은 없다.
바로 이 순간, 우리 자신이 바로 알아차림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알아차림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알아차림 자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몸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에고도, 개성도, 믿음도, 다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인간적 자아의 이 모든 외적 요소들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있을 뿐이다.
몸과 마음, 믿음과 느낌이란 알아차림이 입고 있는 옷과 같고,
우리는 이러한 옷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동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며, 당신의 믿음들이 아니며,
당신의 개성이 아니며, 당신의 에고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당신은 그런 것이 아닌 어떤 것이며, 내면에, 당신 존재의 가장 깊숙한 핵심에 늘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우선 '알아차림' 자체라고 부르고 있다.
알아차림은 당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며, 훈련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며,
알아차리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 통찰의 혁명적인 특징이다. 알아차림은 진정한 당신 자신이며,
당신 존재의 본질이다. 알아차림은 당신 자신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알아차림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림 자체로 인식하게 되면, 우리의 정체성이
그 본질 안에 머물기 시작할 수 있다. 진정한 우리 자신은 더 이상
우리의 몸, 마음, 개성, 생각, 믿음들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진정한 우리 자신은 그 근원에서 편히 쉰다.
우리가 우리의 근원에서 편히 쉬고 있을 때,
우리의 몸과 마음, 개성, 느낌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조화란 우리가 더 이상 둘로 나뉘어 자기 자신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에고는 어떤 내적 분열과 불화에 의해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우리 에고들 중 어떤 일부는 우리 에고들의 다른 일부와 전쟁을 하거나 반목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실제 우리 자신일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실제 생각할 수 없는 생각들을 생각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보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실제 우리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기를 원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애고-개성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이 모든 상충하는 관념들과 느낌들, 감정들을 갖게 된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애고-개성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면,
애고-개성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감정적인 힘들은 더 이상 서로 불화를 겪지 않는다.
이런 조화가 금세 가장 깊은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여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몸과 마음, 개성과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몸, 마음, 개성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한한 포용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과 믿음, 개성과 에고로부터 빼내고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이 있음을 이해하고 나면, 정체성은 알아차림 자체 안에서 편히 쉬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는 마음이 '나는 알아차림이다'라고 하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도록 놓아두지 말아야 한다.
그런 개념은 유용할 수 있지만, 그 개념 역시 스스로를 제한하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알아차림과 동일시하면, 자기를 어떤 생각의 형태나 에고, 개성과 동일시할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진다. 다른 모든 사람 역시 알아차림이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유로움을 준다.
그렇더라도 우리 자신을 어떤 것과 동일시하는 새로운 방식에 새로운 개념에 갇히지는 말아야 한다.
알아차림은 어떤 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알아차림은 어떤 것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기 안에 이러한 알아차림이 현존하며,
이 알아차림은 당신의 인간 됨됨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차 알아 갈 수 있다.
알아차림은 당신을 개조하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도 개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포용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그냥 있는 그대로 좋은 존재의 상태이다.
역설적이게도 애고-개성이 조화롭고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고칠 필요가 없는
이러한 상태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애고-개성은 자기를 바꾸려 하지 않는 현존을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참된 본성은 그의 인간성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그럴 때 인간성은 편안히 쉬게 되고, 더 이상 자기의 근원과 분리되었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임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의 내면이 분열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알아차림과 우리의 애고-개성 사이에는
둘을 나누는 경계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 둘 사이에는 분리가 없다.
만약 다양한 형상들(몸, 마음, 에고, 개성)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결과는 고통이다. 그러나 탐구와 명상을 통해서 우리의 근원인 알아차림이
우리 자신임을 깨닫기 시작하면, 이제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포함된다.
모든 것이 영의 표현으로 보이기 시작하며, 여기에는 당신의 인간성도, 그 모든 장점과 단점들,
그 모든 이상하고 사소한 버릇들까지도 예외 없이 포함된다.
당신은 자기의 인간성이 내면의 신성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 신성이 바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무한한 포용'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장 진실한 본성은
우리의 인간 경험 전체를 포함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 개성이란 단지 영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부디 이것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정말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앎은 우리 내면의 더 깊은 지점, 더 깊은 자리에 존재한다.
다른 무엇이 이해하고, 다른 무엇이 안다.
마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깨어남이 일어날 때, 그 깨어남은 잠시 동안 일어날 수도 있고,
더 긴 시간 동안 일어날 수도 있으며, 영구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든 그런 깨어남은 더없이 좋다. 당신은 당신이다.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당신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없다.
설령 당신이 어떤 열림을 경험하고 자기의 본성을 깨달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잃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더욱더 깊이 쉬고, 어떤 통찰이나 경험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고수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대신에 항상 밑바탕에 있는 실재를,
결코 변하지 않는 그것을 인식하기를. 20세기의 위대한 인도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는
'오는 것은 오게 놓아두고, 가는 것은 가게 놓아두어라.
그리고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라.'라고 말했다.
명상적 자기 탐구는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 언제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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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미국에서 태어난 영적 스승으로, 모든 존재들이 깨어나도록 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그는 멈추어서 진실한 것을 탐구하고 알아차리며,
모든 존재의 중심에서 자유로워지라고 열린 마음으로 권한다.
14년 동안 선(禪) 스승이었던 분에게서 가르침을 펼치라는 요청을 받은
1996년부터 전통이나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그는 “내가 가리키는 ‘진리’는 어떤 종교적 관점, 신앙 체계, 교리에도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쓴 책으로는 『공의 춤(Emptiness Dancing)』,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The End of Your World)』,
『아디야샨티의 참된 명상(True Meditation)』,
『해탈의 길(The Way of Liberation)』,
『완전한 깨달음(The impact of awakening)』,
『은총에 빠지다(Falling into Grace)』,
『예수 부활시키기(Resurrecting Jesus)』가 있다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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