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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천백일 봉화 청암정.
삼남지방의 길지 유곡 마을
거북 바위 위에 올라 앉은 靑天白日靑 巖 亭 삼남(三南)지방의길지 유곡 마을 푸른바위 위에 서 있는 옛 정자는 사면에 푸른 못 물이 둘러져 있네 때때로밝은 달밤에는 천떨기 연꽃이 피어 있다네 (창설공 권두경)
바위위에 정자를 지었으니 맑은못 물이 푸른 옥 빛 처럼 둘러쳐 있네 연꽃이사면에 피어 웃고 있으니 향기바람이 앉은 자리를 스쳐가네 (강좌공 권만)
이 詩 는창설공(蒼雪公 1654~1726)과 강좌공(江左公)이 부르고 화답한 ‘청암정’시이다. 청암정에서 만난 바람은 가을 햇살을 잔뜩 머금고 청암정과 벗하며 바쁜 일상을 소요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청암정에서 만난 단풍은 햇살을 받아 맑은 눈빛과 착한 웃음들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 가을을 소요하다 청암정에 들면 숨어서 울던 바위 틈 노란 들국화도 햇살을 데리고 서산을 넘을 준비를 한다. 세월을 벗어 놓은 거북바위 위에 들어앉은청암정. 바람이 놀던 가을 들판엔 아직도 울음이 타고 있다. 그렇게 청암정의 가을은 깊어만 가고 세월은 그 속에 묻혀만 간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 마을은 옛부터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쪾내앞 마을과 함께 삼남 지방의 4대 길지로 꼽힌 마을이었다. 닭실(酉谷)마을은 마을의 진산(鎭山)이 들어 오면서 맺어진 모양이 마치 닭이 날개를 치면서 우는 형상과 같다하여 ‘유곡(酉谷)’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이곳 닭실 마을이 형성 된것은 충재( 齋) 권벌(權 :1478~1548)에 의해서이다. 충재가 닭실 마을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그의 부친이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삼척으로 가는 길에 이곳 봉화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곳 닭실 마을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이후 충재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고향에 돌아와 금빛 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터, 닭실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열었다. 이때 충재는 안동의 도계촌(안동시 북후면 도촌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청천백일(靑天白日)충재 권벌
충재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헌정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사빈(士彬)이고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따님이다. 충재는 1496년(연산군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인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 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고향에서 15년간 보낸후 경상도관찰사, 형조쪾병조참판을 지낸 후 1545년(명종 1) 우찬성이 되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이기(李 )와 정순봉(鄭順朋)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이 되었다가 1547년(명종 4)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서 생을 마쳤다. 충재는 윤임(尹任)의 일로 두번째 계사(啓辭)를 올릴때 밤이 늦도록 초안을 만들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조정에 달려 가려하자 아들과 사위가 가로막고 울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떠난다. 그가 조정에 들어가자 신광한도 그의 뜻을 알고 말리려 했으나 듣지 않았다. 원상이었던 회재 이언적도 충재의 상소 초안을 보고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측량하기 어렵겠소이다.” 하며 위험한 문구는 지워 버리려 하자 그는 “이와같이 지워 버릴 바에야 계를 올리지 않는 것만 못하리라”하였다. 그는 정의에 어긋나면 임금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밝혀 임금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런 그를 정광필(鄭光弼)은 “죽음도 가히 공의 절개를 빼앗지 못할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충재는 왕에게 ”여러 지방의 근본은 조정에 있으며 조정의 근본은 국왕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근래에 사치스러운 생활 풍조가 일어나 재물을 남김없이 다 써버리니 지금이라도 임금님께서 근검절약 하시어 이끌어 나가시면 멀리 지방에서도 자연히 감화되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해로움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직언하면서 선비의 기개를 드높였다. 우곡 정경세 또한 “공의 굳세고 정직한 기상은 사람을 굴복하게 할지언정 사람들에게 굴복당하지 않았다.”면서 충재의 기상을 기렸다. 중종이 일찌기 대신들을 불러 후원에서 꽃놀이 잔치를 베풀고 마음껏 취하며 즐기게 했는데 연회가 끝난후 다 돌아간 뒤에 자리를 정리하던 내시가 조그만한 책인 《근사록》을 주워 중종에게 고하니 중종은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라 하면서 돌려 주도록 하였다. 총재는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 과 《 근사록》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충재는 1567년 신원(伸寃)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암정
이 ‘청천백일(靑天白日)’ 충재의 절의가 살아 숨쉬는 닭실 마을. 이 닭실 마을엔 청암정이 있어 더욱 돋보여진다. 택리지에서는 “정자는 못 가운데 큰 돌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돌아 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 라며 청암정을 소개하고 있다. 청암정은 처음에는 ‘구암정’이라 하다가 이후에 청암정으로 바꾸어 불렸다.
선공이 유곡과 같은 좋은 기지를 장점하여 산에는 구름이 둘러있고 못에는 물이 둘러있네 정자는 외딴 섬에 있는데 돌다리 건너서 들어가고 연꽃은 맑은 못물에 어렸으니 살아 움직이는 그림일세 농사와 뒤 정원 가꾸기는 원래 학문에 관함이 아니라 벼슬에는 생각이 없으니 관심이 없네 다시보니 어여뿔손 바위틈에 서 있는 소나무가 바람과 서리와 싸우며 늙어 가는 그 모양 우뚝해 _퇴계 이황_
글귀를 읊으려 하니 나의 가슴이 격동하는데 푸른 바위는 예와 같으나 높은 정자는 텅비어 있어 동천(洞天)의 밝은달은 차갑게 창 속을 비추어 주고 세상에 모든 일은 뜬 구름과 같이 지난 꿈 속일세 천고에 삼엄한 법칙은 현인이 지은 법이요 백년간 내려온 순박한 전통은 집안의 풍속일세 언덕과 산에 의지한 집 양담루(羊曇淚:외가를 위해 흘리는 눈물)를 숲속의 못을 향해 뿌리니 나의 한 끝이 없네. _백담 구봉령_
숨어사는 세월에 그윽한 취미는 정말로 너그러운데 옥으로 깎은 듯한 돌병풍은 열렸고 비단결 못물은 둘러졌네 이토록 좋은 터전을 개척함에 산에 귀신은 몇 번이나 울었던고 구름을 헤치고 바야흐로 열려진 땅은 신선의 별장인 듯 정자를 연한 돌길이 열렸음은 보기에 어여쁘고 산밑 지개( )가 닫쳐 있음은 뜻 깊은 운치일세 바람도 시원한 석양(夕陽)이 빗긴 헌함에는 경치가 더욱 기절하니 솔잎 술과 시냇가에 기름진 나물 안주가 금반(金盤)에 담겨져 오네. _백암 김륵_
청암정은 옛 사람들의 시(詩)처럼 그야말로 영남 최고의 정자이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암정에 오르려면 외나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거북 바위는 거북이가 서에서 동으로 걷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암정은 연당 가은데 마치 당주(堂州, 연못속의 섬)처럼 거북바위가 있고 그 등에 정자가 올라 앉아 있다. 바짝 치켜든 거북머리가 장관인데 머리 남쪽면에 큼직한 귀가 새겨져 있다. 청암정은 평면이 T자이고 마루를 낀 다락형의 건물이다. 바위의 높낮이에 따라 기둥을 마름 한 점, 기둥 밖으로 외목도리를 내어 걸었는 점등의 구조가 삼척의 죽서루와 비슷하다. 바위 틈에서 자란 철쭉과 산단풍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왕버들 숲이 청암정을 수놓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정자의 동북쪽 바위 위에는 청암 권동보가 쓴 ‘청암정’ 세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정자의 ‘청암정(靑巖亭)’글씨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쓴것이고 ‘청암수석(靑巖水石)’은 미수 허목 선생이 88세에 쓴 글씨이다. 또한 ‘근사재(近思齋)’ 편액은 강좌 권만이 옛사람의 글씨법에 따라 조각하여 게판한 것이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은 ‘청암정 기문’에서 “돌다리를 가로 질러 들어가면 그 중간이 마치 외로운 섬과 같고 사방이 모두 한 덩어리 큰 반석으로 되었는데 정자가 바위에 우뚝서서 그 삼분의 일을 점령하였고, 정자의 북쪽에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 높이가 약 한길 가량으로 그 빛이 더욱 창고(蒼古)하므로 ”청암” 이라 이름 했다”. 또한 그는 “눈이 쌓여 바위를 묻어 버렸을때 푸른 소나무와 전나무가 독야청청 하여 구부러진 몸으로도 눈과 싸워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은 참으로 구경하는 중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고 하며 청암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한 동암(東巖) 권성오(權省吾) 는 ‘청암정 기문’에서 “집 둘레의 사면을 굴착하고 물을 끌어 들여 못을 만드니 그 형상은 마치 거울을 둘러 놓은 듯 하다. 못 가운데는 연(蓮)을 심으니 맑고 그윽한 향기는 주렴계(周濂溪)가 이를 사랑하여 글을 지었던 것이다. 그 북쪽의 높고 평탄하여 대(臺)가 될 만한 곳에는 십여명의 사람이 앉을수 있는데 그 아래에 오동나무를 심어서 대에 앉아 그 가지와 잎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 남쪽면에는 작은 소나무가 저절로 나서 쌍으로 된 가지가 그 기묘한 자태를 자랑하며 그 서쪽면으로 문을 내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물 속에 비추어 반영토록 하는 동시에 해와 달이 그남은 빛을 머물게 하였다. 큰 돌을 깍아서 동쪽에 다리를 놓아 출입을 통하게 하여 만약 술취한 사람은 부액하지 않으면 건너올 수 없으니, 이것이야 정말 바다 섬 속에서 떠온 듯한 기절함이 아닌가. 그 정자 밖의 미관(美觀)은 구름 덮인 산이 정면으로 들어오면서 가까이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먼 곳도 불과 수백보 내외라. 샘물은 아침부터 밤까지 종쟁(淙 )한 소리를 보내오고 낮에 오는 사람은 그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 공(公)이 기묘(己卯)년부터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석으로 여기에 거처하니 원근(遠近)에서 손님과 벗이 찾아와서 한결같이 ‘땅 위의 신선이라’고 칭송하고 또 곁에 모시는 아이가 있어 지필(紙筆)을 공급하고 또 악기(絲竹)를 구비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는 사람과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운치를 돕게 하니 비록 옛날 사람의 풍류라도 어찌 여기에 지나리요”하였다. 청암정옆 연못가에 2칸의 한서당(寒棲堂)이 있는데 2 칸은 충재가 거처하던 방이다. 이곳에는 ‘충재’라는 단아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방은 충재의 심성이 잘 표현된 곳이라 할수있다.
근사재(近思齋)는 청암정 동쪽 끝에 있었으며 못 뚝에 세워져 있어 정자(亭子)와 마주보고 있어 나즈막하다. 처음에 청암정(靑巖亭)에 방이 없이 마루만으로 되어 있었는데 근사재(近思齋)를 지어 이곳에서 거처했다. 근사재는 3칸 집으로 매우 소박하며 일체의 화려함을 피했다. 서쪽문 위에 충재라는 현판을 걸고 동쪽문 위에는 근사재 현판을 걸었다. 충재와 근사재로 현판을 한것은 충재가 선생의 도호(道號)이며 근사록은 선생이 평생토록 공부하며 애독하던 책이므로 뒤에 사람들이 모두 현판(懸板)으로 만들어 선생이 거처하던 집에 걸어 놓고 높은 덕과 아름다운 자취를 길이 추모(追慕)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항상 자질(子姪)들에게 가르치기를 ‘학문이란 자기를 위함인데 과거하여 벼슬함은 특히 말단의 일이라’하였다. 그는 만년에 더욱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을 좋아하여 자신의 품안과 소매속에서 이 책을 떠나게 함이 없었다 한다. 지금의 충재현판이 게첨된 곳에 근사재와 충재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근사재 현판은 지금 청암정에 걸려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은 ‘근사재기(近思齋記)’에서 “충재 권벌 선생이 평일에 한천유편(寒泉遺編 : 춘추 전국시대에 한천자가 편집한 책으로 내용이 모두 정치학이다)을 특별히 애독하였는데 이듬해에 선생이 작은 책 한 질을 선생에게 기증(寄贈)한 바 있었다. 선생이 갖고 읽기에 아주 편리함을 느껴 항상 소매속에 간직하고 잠시도 떠나게 하지 않았다. 가정 경자년(庚子年,1540) 에 중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여러 재상을 모아 꽃놀이 잔치를 마치고 대신들이 술에 취하여 모두 서로 붙들고 집에 돌아간 뒤 자리를 치우던 벼슬아치가 작은 책을 주어 위에 올리니 임금이 보시고, 이 책은 반드시 권모(權謀)에게서 빠진 것이니 즉각 돌리라 명하였다. 그뒤 이퇴계 선생이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에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금상 병인년(1746)에 곁에 모신 신하의 말에 의하여 이 작은 책을 찾아 올리라하여 십여일 동안을 열람하였다. 다시 선생의 후손 기성랑(騎省郞) 만(萬)을 불러 앞에 이르게 하고 임금이 친히 벼슬아치에게 이 책을 주어 돌리게 하는 동시에 다시 특지(特旨)를 쓰고 대질(大帙)을 내사(內賜)하였다. 시월 무진년에 만(萬)이 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옴에 모든 종족들이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맞아 들이고 즉시로 선생의 대묘(大廟)에 고유(告由)하고 다시 충분하게 의논하여 선생의 정자의 북쪽 벽위에 서가(書架)를 설치하여 두 책자를 안치(安置)하였다. 아울러 중종대왕으로부터 선사받은 옛 책 한 질도 같이 안치하고 드디어 특지를 모각(模刻)하여 정자 벽위에 걸게하고 근사재(近思齋)라 현판하였다. 지금의 한서당이다. 방 2칸과 마루 한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질박하고 선비의 조촐함이 묻어나는 두옥(斗屋, 아주작은 집)이다.
굳센 절개는 청암정에 뿌리를 내리고
일찌기 공자는 “착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내 몸이 마치 지초(芝) 나 난초(蘭)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 그래서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 만큼 자기 자신도 그와 같이 변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또 착하지 못한 사람과 같이 있노라면 마치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다. 그래서 오래 있으면 그 냄새를 자기 자신이 맡을 수 없으리만큼 거기에 화해 버린다. 주사(朱砂)를 간직해 둔 곳은 저절로 붉어지고 옷(漆)을 간직해 둔 곳은 저절로 검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자기와 함께 있을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라는 말이다. 착한 사람과 사귀는 처세 방법, 학문하는 사람과 사귀는 처세 방법, 이것이 우리 동양 고대의 처세에 대한 큰 교훈이었던 동시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러한 처세에 대한 명훈(明訓)은 역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금언(金言) 아닌 것이 없다. 충재와 그리고 청암정과의 만남 또한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아닐런지. 부귀와 명예가 도덕으로부터 온 것은 마치 산속 숲 가운데 핀 꽃과도 같아서 저절로 잎이 피고 뿌리가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또한 부귀와 명예가 만일 공업(功業)으로부터 온것이라면 마치 화분속에 심어 놓은 꽃과도 같아서 이리 저리 옮기기도 하고 또는 심어 가꾸기도 하여 뽑아 없앨수도 있다. 만일 부귀와 명예가 권력으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화병에 꺾어다 꽂은 꽃과 같아서 그 뿌리가 없으니 그것은 서서 기다릴 정도로 금방 시들 것이다. 나는 청암정과 한서당에서 지초와 난초향 가득한 당대 최고의 선비 충재를 만날 수 있었다. 충재는 따뜻하고 온화했지만 불의 앞에서는 송죽처럼 푸르고 강했다. 그는 직신(直臣)이었다. 부러질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신하가 충간하는 말을 따르면 착해진다는 말이 있다. 죽음으로 올린 충재의 직간은 굽은 시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다. 청암정 헌함에 걸터 앉아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청천백일 충재를 생각하며 촘촘히 집으로 발길을 돌리며 오상렴(吳尙濂)의 청암정 시를 되뇌어 본다.
“영남(嶺南) 땅에유람함이 나의 본뜻에 알맞아 청암정이우뚝하게 푸르게 개인 공중에 솟아있네 바위와돌은 헌함과 창 밖에 첩첩이 깔려 있고 물기운은 멀리 나부껴 책상과 자리까지 올라오네 연꽃은향기를 토하니 군자의 덕을 생각하고 소나무는대신(大臣)의 바람을 띄어 우뚝하구나 해가추워진 후 굳센 절개를 그 누가 짝하랴 탄식하며공을 추모하니 끝없는 회포만 간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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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천백일 봉화 청암정.
삼남지방의 길지 유곡 마을
거북 바위 위에 올라 앉은 靑天白日靑 巖 亭 삼남(三南)지방의길지 유곡 마을 푸른바위 위에 서 있는 옛 정자는 사면에 푸른 못 물이 둘러져 있네 때때로밝은 달밤에는 천떨기 연꽃이 피어 있다네 (창설공 권두경)
바위위에 정자를 지었으니 맑은못 물이 푸른 옥 빛 처럼 둘러쳐 있네 연꽃이사면에 피어 웃고 있으니 향기바람이 앉은 자리를 스쳐가네 (강좌공 권만)
이 詩 는창설공(蒼雪公 1654~1726)과 강좌공(江左公)이 부르고 화답한 ‘청암정’시이다. 청암정에서 만난 바람은 가을 햇살을 잔뜩 머금고 청암정과 벗하며 바쁜 일상을 소요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청암정에서 만난 단풍은 햇살을 받아 맑은 눈빛과 착한 웃음들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 가을을 소요하다 청암정에 들면 숨어서 울던 바위 틈 노란 들국화도 햇살을 데리고 서산을 넘을 준비를 한다. 세월을 벗어 놓은 거북바위 위에 들어앉은청암정. 바람이 놀던 가을 들판엔 아직도 울음이 타고 있다. 그렇게 청암정의 가을은 깊어만 가고 세월은 그 속에 묻혀만 간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 마을은 옛부터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쪾내앞 마을과 함께 삼남 지방의 4대 길지로 꼽힌 마을이었다. 닭실(酉谷)마을은 마을의 진산(鎭山)이 들어 오면서 맺어진 모양이 마치 닭이 날개를 치면서 우는 형상과 같다하여 ‘유곡(酉谷)’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이곳 닭실 마을이 형성 된것은 충재( 齋) 권벌(權 :1478~1548)에 의해서이다. 충재가 닭실 마을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그의 부친이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삼척으로 가는 길에 이곳 봉화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곳 닭실 마을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이후 충재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고향에 돌아와 금빛 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터, 닭실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열었다. 이때 충재는 안동의 도계촌(안동시 북후면 도촌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청천백일(靑天白日)충재 권벌
충재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헌정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사빈(士彬)이고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따님이다. 충재는 1496년(연산군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인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 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고향에서 15년간 보낸후 경상도관찰사, 형조쪾병조참판을 지낸 후 1545년(명종 1) 우찬성이 되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이기(李 )와 정순봉(鄭順朋)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이 되었다가 1547년(명종 4)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서 생을 마쳤다. 충재는 윤임(尹任)의 일로 두번째 계사(啓辭)를 올릴때 밤이 늦도록 초안을 만들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조정에 달려 가려하자 아들과 사위가 가로막고 울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떠난다. 그가 조정에 들어가자 신광한도 그의 뜻을 알고 말리려 했으나 듣지 않았다. 원상이었던 회재 이언적도 충재의 상소 초안을 보고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측량하기 어렵겠소이다.” 하며 위험한 문구는 지워 버리려 하자 그는 “이와같이 지워 버릴 바에야 계를 올리지 않는 것만 못하리라”하였다. 그는 정의에 어긋나면 임금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밝혀 임금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런 그를 정광필(鄭光弼)은 “죽음도 가히 공의 절개를 빼앗지 못할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충재는 왕에게 ”여러 지방의 근본은 조정에 있으며 조정의 근본은 국왕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근래에 사치스러운 생활 풍조가 일어나 재물을 남김없이 다 써버리니 지금이라도 임금님께서 근검절약 하시어 이끌어 나가시면 멀리 지방에서도 자연히 감화되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해로움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직언하면서 선비의 기개를 드높였다. 우곡 정경세 또한 “공의 굳세고 정직한 기상은 사람을 굴복하게 할지언정 사람들에게 굴복당하지 않았다.”면서 충재의 기상을 기렸다. 중종이 일찌기 대신들을 불러 후원에서 꽃놀이 잔치를 베풀고 마음껏 취하며 즐기게 했는데 연회가 끝난후 다 돌아간 뒤에 자리를 정리하던 내시가 조그만한 책인 《근사록》을 주워 중종에게 고하니 중종은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라 하면서 돌려 주도록 하였다. 총재는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 과 《 근사록》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충재는 1567년 신원(伸寃)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암정
이 ‘청천백일(靑天白日)’ 충재의 절의가 살아 숨쉬는 닭실 마을. 이 닭실 마을엔 청암정이 있어 더욱 돋보여진다. 택리지에서는 “정자는 못 가운데 큰 돌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돌아 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 라며 청암정을 소개하고 있다. 청암정은 처음에는 ‘구암정’이라 하다가 이후에 청암정으로 바꾸어 불렸다.
선공이 유곡과 같은 좋은 기지를 장점하여 산에는 구름이 둘러있고 못에는 물이 둘러있네 정자는 외딴 섬에 있는데 돌다리 건너서 들어가고 연꽃은 맑은 못물에 어렸으니 살아 움직이는 그림일세 농사와 뒤 정원 가꾸기는 원래 학문에 관함이 아니라 벼슬에는 생각이 없으니 관심이 없네 다시보니 어여뿔손 바위틈에 서 있는 소나무가 바람과 서리와 싸우며 늙어 가는 그 모양 우뚝해 _퇴계 이황_
글귀를 읊으려 하니 나의 가슴이 격동하는데 푸른 바위는 예와 같으나 높은 정자는 텅비어 있어 동천(洞天)의 밝은달은 차갑게 창 속을 비추어 주고 세상에 모든 일은 뜬 구름과 같이 지난 꿈 속일세 천고에 삼엄한 법칙은 현인이 지은 법이요 백년간 내려온 순박한 전통은 집안의 풍속일세 언덕과 산에 의지한 집 양담루(羊曇淚:외가를 위해 흘리는 눈물)를 숲속의 못을 향해 뿌리니 나의 한 끝이 없네. _백담 구봉령_
숨어사는 세월에 그윽한 취미는 정말로 너그러운데 옥으로 깎은 듯한 돌병풍은 열렸고 비단결 못물은 둘러졌네 이토록 좋은 터전을 개척함에 산에 귀신은 몇 번이나 울었던고 구름을 헤치고 바야흐로 열려진 땅은 신선의 별장인 듯 정자를 연한 돌길이 열렸음은 보기에 어여쁘고 산밑 지개( )가 닫쳐 있음은 뜻 깊은 운치일세 바람도 시원한 석양(夕陽)이 빗긴 헌함에는 경치가 더욱 기절하니 솔잎 술과 시냇가에 기름진 나물 안주가 금반(金盤)에 담겨져 오네. _백암 김륵_
청암정은 옛 사람들의 시(詩)처럼 그야말로 영남 최고의 정자이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암정에 오르려면 외나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거북 바위는 거북이가 서에서 동으로 걷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암정은 연당 가은데 마치 당주(堂州, 연못속의 섬)처럼 거북바위가 있고 그 등에 정자가 올라 앉아 있다. 바짝 치켜든 거북머리가 장관인데 머리 남쪽면에 큼직한 귀가 새겨져 있다. 청암정은 평면이 T자이고 마루를 낀 다락형의 건물이다. 바위의 높낮이에 따라 기둥을 마름 한 점, 기둥 밖으로 외목도리를 내어 걸었는 점등의 구조가 삼척의 죽서루와 비슷하다. 바위 틈에서 자란 철쭉과 산단풍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왕버들 숲이 청암정을 수놓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정자의 동북쪽 바위 위에는 청암 권동보가 쓴 ‘청암정’ 세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정자의 ‘청암정(靑巖亭)’글씨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쓴것이고 ‘청암수석(靑巖水石)’은 미수 허목 선생이 88세에 쓴 글씨이다. 또한 ‘근사재(近思齋)’ 편액은 강좌 권만이 옛사람의 글씨법에 따라 조각하여 게판한 것이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은 ‘청암정 기문’에서 “돌다리를 가로 질러 들어가면 그 중간이 마치 외로운 섬과 같고 사방이 모두 한 덩어리 큰 반석으로 되었는데 정자가 바위에 우뚝서서 그 삼분의 일을 점령하였고, 정자의 북쪽에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 높이가 약 한길 가량으로 그 빛이 더욱 창고(蒼古)하므로 ”청암” 이라 이름 했다”. 또한 그는 “눈이 쌓여 바위를 묻어 버렸을때 푸른 소나무와 전나무가 독야청청 하여 구부러진 몸으로도 눈과 싸워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은 참으로 구경하는 중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고 하며 청암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한 동암(東巖) 권성오(權省吾) 는 ‘청암정 기문’에서 “집 둘레의 사면을 굴착하고 물을 끌어 들여 못을 만드니 그 형상은 마치 거울을 둘러 놓은 듯 하다. 못 가운데는 연(蓮)을 심으니 맑고 그윽한 향기는 주렴계(周濂溪)가 이를 사랑하여 글을 지었던 것이다. 그 북쪽의 높고 평탄하여 대(臺)가 될 만한 곳에는 십여명의 사람이 앉을수 있는데 그 아래에 오동나무를 심어서 대에 앉아 그 가지와 잎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 남쪽면에는 작은 소나무가 저절로 나서 쌍으로 된 가지가 그 기묘한 자태를 자랑하며 그 서쪽면으로 문을 내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물 속에 비추어 반영토록 하는 동시에 해와 달이 그남은 빛을 머물게 하였다. 큰 돌을 깍아서 동쪽에 다리를 놓아 출입을 통하게 하여 만약 술취한 사람은 부액하지 않으면 건너올 수 없으니, 이것이야 정말 바다 섬 속에서 떠온 듯한 기절함이 아닌가. 그 정자 밖의 미관(美觀)은 구름 덮인 산이 정면으로 들어오면서 가까이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먼 곳도 불과 수백보 내외라. 샘물은 아침부터 밤까지 종쟁(淙 )한 소리를 보내오고 낮에 오는 사람은 그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 공(公)이 기묘(己卯)년부터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석으로 여기에 거처하니 원근(遠近)에서 손님과 벗이 찾아와서 한결같이 ‘땅 위의 신선이라’고 칭송하고 또 곁에 모시는 아이가 있어 지필(紙筆)을 공급하고 또 악기(絲竹)를 구비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는 사람과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운치를 돕게 하니 비록 옛날 사람의 풍류라도 어찌 여기에 지나리요”하였다. 청암정옆 연못가에 2칸의 한서당(寒棲堂)이 있는데 2 칸은 충재가 거처하던 방이다. 이곳에는 ‘충재’라는 단아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방은 충재의 심성이 잘 표현된 곳이라 할수있다.
근사재(近思齋)는 청암정 동쪽 끝에 있었으며 못 뚝에 세워져 있어 정자(亭子)와 마주보고 있어 나즈막하다. 처음에 청암정(靑巖亭)에 방이 없이 마루만으로 되어 있었는데 근사재(近思齋)를 지어 이곳에서 거처했다. 근사재는 3칸 집으로 매우 소박하며 일체의 화려함을 피했다. 서쪽문 위에 충재라는 현판을 걸고 동쪽문 위에는 근사재 현판을 걸었다. 충재와 근사재로 현판을 한것은 충재가 선생의 도호(道號)이며 근사록은 선생이 평생토록 공부하며 애독하던 책이므로 뒤에 사람들이 모두 현판(懸板)으로 만들어 선생이 거처하던 집에 걸어 놓고 높은 덕과 아름다운 자취를 길이 추모(追慕)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항상 자질(子姪)들에게 가르치기를 ‘학문이란 자기를 위함인데 과거하여 벼슬함은 특히 말단의 일이라’하였다. 그는 만년에 더욱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을 좋아하여 자신의 품안과 소매속에서 이 책을 떠나게 함이 없었다 한다. 지금의 충재현판이 게첨된 곳에 근사재와 충재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근사재 현판은 지금 청암정에 걸려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은 ‘근사재기(近思齋記)’에서 “충재 권벌 선생이 평일에 한천유편(寒泉遺編 : 춘추 전국시대에 한천자가 편집한 책으로 내용이 모두 정치학이다)을 특별히 애독하였는데 이듬해에 선생이 작은 책 한 질을 선생에게 기증(寄贈)한 바 있었다. 선생이 갖고 읽기에 아주 편리함을 느껴 항상 소매속에 간직하고 잠시도 떠나게 하지 않았다. 가정 경자년(庚子年,1540) 에 중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여러 재상을 모아 꽃놀이 잔치를 마치고 대신들이 술에 취하여 모두 서로 붙들고 집에 돌아간 뒤 자리를 치우던 벼슬아치가 작은 책을 주어 위에 올리니 임금이 보시고, 이 책은 반드시 권모(權謀)에게서 빠진 것이니 즉각 돌리라 명하였다. 그뒤 이퇴계 선생이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에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금상 병인년(1746)에 곁에 모신 신하의 말에 의하여 이 작은 책을 찾아 올리라하여 십여일 동안을 열람하였다. 다시 선생의 후손 기성랑(騎省郞) 만(萬)을 불러 앞에 이르게 하고 임금이 친히 벼슬아치에게 이 책을 주어 돌리게 하는 동시에 다시 특지(特旨)를 쓰고 대질(大帙)을 내사(內賜)하였다. 시월 무진년에 만(萬)이 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옴에 모든 종족들이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맞아 들이고 즉시로 선생의 대묘(大廟)에 고유(告由)하고 다시 충분하게 의논하여 선생의 정자의 북쪽 벽위에 서가(書架)를 설치하여 두 책자를 안치(安置)하였다. 아울러 중종대왕으로부터 선사받은 옛 책 한 질도 같이 안치하고 드디어 특지를 모각(模刻)하여 정자 벽위에 걸게하고 근사재(近思齋)라 현판하였다. 지금의 한서당이다. 방 2칸과 마루 한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질박하고 선비의 조촐함이 묻어나는 두옥(斗屋, 아주작은 집)이다.
굳센 절개는 청암정에 뿌리를 내리고
일찌기 공자는 “착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내 몸이 마치 지초(芝) 나 난초(蘭)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 그래서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 만큼 자기 자신도 그와 같이 변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또 착하지 못한 사람과 같이 있노라면 마치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다. 그래서 오래 있으면 그 냄새를 자기 자신이 맡을 수 없으리만큼 거기에 화해 버린다. 주사(朱砂)를 간직해 둔 곳은 저절로 붉어지고 옷(漆)을 간직해 둔 곳은 저절로 검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자기와 함께 있을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라는 말이다. 착한 사람과 사귀는 처세 방법, 학문하는 사람과 사귀는 처세 방법, 이것이 우리 동양 고대의 처세에 대한 큰 교훈이었던 동시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러한 처세에 대한 명훈(明訓)은 역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금언(金言) 아닌 것이 없다. 충재와 그리고 청암정과의 만남 또한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아닐런지. 부귀와 명예가 도덕으로부터 온 것은 마치 산속 숲 가운데 핀 꽃과도 같아서 저절로 잎이 피고 뿌리가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또한 부귀와 명예가 만일 공업(功業)으로부터 온것이라면 마치 화분속에 심어 놓은 꽃과도 같아서 이리 저리 옮기기도 하고 또는 심어 가꾸기도 하여 뽑아 없앨수도 있다. 만일 부귀와 명예가 권력으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화병에 꺾어다 꽂은 꽃과 같아서 그 뿌리가 없으니 그것은 서서 기다릴 정도로 금방 시들 것이다. 나는 청암정과 한서당에서 지초와 난초향 가득한 당대 최고의 선비 충재를 만날 수 있었다. 충재는 따뜻하고 온화했지만 불의 앞에서는 송죽처럼 푸르고 강했다. 그는 직신(直臣)이었다. 부러질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신하가 충간하는 말을 따르면 착해진다는 말이 있다. 죽음으로 올린 충재의 직간은 굽은 시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다. 청암정 헌함에 걸터 앉아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청천백일 충재를 생각하며 촘촘히 집으로 발길을 돌리며 오상렴(吳尙濂)의 청암정 시를 되뇌어 본다.
“영남(嶺南) 땅에유람함이 나의 본뜻에 알맞아 청암정이우뚝하게 푸르게 개인 공중에 솟아있네 바위와돌은 헌함과 창 밖에 첩첩이 깔려 있고 물기운은 멀리 나부껴 책상과 자리까지 올라오네 연꽃은향기를 토하니 군자의 덕을 생각하고 소나무는대신(大臣)의 바람을 띄어 우뚝하구나 해가추워진 후 굳센 절개를 그 누가 짝하랴 탄식하며공을 추모하니 끝없는 회포만 간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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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천백일 봉화 청암정.
삼남지방의 길지 유곡 마을
거북 바위 위에 올라 앉은 靑天白日靑 巖 亭 삼남(三南)지방의길지 유곡 마을 푸른바위 위에 서 있는 옛 정자는 사면에 푸른 못 물이 둘러져 있네 때때로밝은 달밤에는 천떨기 연꽃이 피어 있다네 (창설공 권두경)
바위위에 정자를 지었으니 맑은못 물이 푸른 옥 빛 처럼 둘러쳐 있네 연꽃이사면에 피어 웃고 있으니 향기바람이 앉은 자리를 스쳐가네 (강좌공 권만)
이 詩 는창설공(蒼雪公 1654~1726)과 강좌공(江左公)이 부르고 화답한 ‘청암정’시이다. 청암정에서 만난 바람은 가을 햇살을 잔뜩 머금고 청암정과 벗하며 바쁜 일상을 소요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청암정에서 만난 단풍은 햇살을 받아 맑은 눈빛과 착한 웃음들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 가을을 소요하다 청암정에 들면 숨어서 울던 바위 틈 노란 들국화도 햇살을 데리고 서산을 넘을 준비를 한다. 세월을 벗어 놓은 거북바위 위에 들어앉은청암정. 바람이 놀던 가을 들판엔 아직도 울음이 타고 있다. 그렇게 청암정의 가을은 깊어만 가고 세월은 그 속에 묻혀만 간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 마을은 옛부터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쪾내앞 마을과 함께 삼남 지방의 4대 길지로 꼽힌 마을이었다. 닭실(酉谷)마을은 마을의 진산(鎭山)이 들어 오면서 맺어진 모양이 마치 닭이 날개를 치면서 우는 형상과 같다하여 ‘유곡(酉谷)’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이곳 닭실 마을이 형성 된것은 충재( 齋) 권벌(權 :1478~1548)에 의해서이다. 충재가 닭실 마을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그의 부친이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삼척으로 가는 길에 이곳 봉화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곳 닭실 마을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이후 충재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고향에 돌아와 금빛 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터, 닭실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열었다. 이때 충재는 안동의 도계촌(안동시 북후면 도촌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청천백일(靑天白日)충재 권벌
충재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헌정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사빈(士彬)이고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따님이다. 충재는 1496년(연산군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인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 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고향에서 15년간 보낸후 경상도관찰사, 형조쪾병조참판을 지낸 후 1545년(명종 1) 우찬성이 되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이기(李 )와 정순봉(鄭順朋)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이 되었다가 1547년(명종 4)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서 생을 마쳤다. 충재는 윤임(尹任)의 일로 두번째 계사(啓辭)를 올릴때 밤이 늦도록 초안을 만들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조정에 달려 가려하자 아들과 사위가 가로막고 울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떠난다. 그가 조정에 들어가자 신광한도 그의 뜻을 알고 말리려 했으나 듣지 않았다. 원상이었던 회재 이언적도 충재의 상소 초안을 보고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측량하기 어렵겠소이다.” 하며 위험한 문구는 지워 버리려 하자 그는 “이와같이 지워 버릴 바에야 계를 올리지 않는 것만 못하리라”하였다. 그는 정의에 어긋나면 임금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밝혀 임금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런 그를 정광필(鄭光弼)은 “죽음도 가히 공의 절개를 빼앗지 못할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충재는 왕에게 ”여러 지방의 근본은 조정에 있으며 조정의 근본은 국왕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근래에 사치스러운 생활 풍조가 일어나 재물을 남김없이 다 써버리니 지금이라도 임금님께서 근검절약 하시어 이끌어 나가시면 멀리 지방에서도 자연히 감화되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해로움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직언하면서 선비의 기개를 드높였다. 우곡 정경세 또한 “공의 굳세고 정직한 기상은 사람을 굴복하게 할지언정 사람들에게 굴복당하지 않았다.”면서 충재의 기상을 기렸다. 중종이 일찌기 대신들을 불러 후원에서 꽃놀이 잔치를 베풀고 마음껏 취하며 즐기게 했는데 연회가 끝난후 다 돌아간 뒤에 자리를 정리하던 내시가 조그만한 책인 《근사록》을 주워 중종에게 고하니 중종은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라 하면서 돌려 주도록 하였다. 총재는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 과 《 근사록》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충재는 1567년 신원(伸寃)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암정
이 ‘청천백일(靑天白日)’ 충재의 절의가 살아 숨쉬는 닭실 마을. 이 닭실 마을엔 청암정이 있어 더욱 돋보여진다. 택리지에서는 “정자는 못 가운데 큰 돌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돌아 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 라며 청암정을 소개하고 있다. 청암정은 처음에는 ‘구암정’이라 하다가 이후에 청암정으로 바꾸어 불렸다.
선공이 유곡과 같은 좋은 기지를 장점하여 산에는 구름이 둘러있고 못에는 물이 둘러있네 정자는 외딴 섬에 있는데 돌다리 건너서 들어가고 연꽃은 맑은 못물에 어렸으니 살아 움직이는 그림일세 농사와 뒤 정원 가꾸기는 원래 학문에 관함이 아니라 벼슬에는 생각이 없으니 관심이 없네 다시보니 어여뿔손 바위틈에 서 있는 소나무가 바람과 서리와 싸우며 늙어 가는 그 모양 우뚝해 _퇴계 이황_
글귀를 읊으려 하니 나의 가슴이 격동하는데 푸른 바위는 예와 같으나 높은 정자는 텅비어 있어 동천(洞天)의 밝은달은 차갑게 창 속을 비추어 주고 세상에 모든 일은 뜬 구름과 같이 지난 꿈 속일세 천고에 삼엄한 법칙은 현인이 지은 법이요 백년간 내려온 순박한 전통은 집안의 풍속일세 언덕과 산에 의지한 집 양담루(羊曇淚:외가를 위해 흘리는 눈물)를 숲속의 못을 향해 뿌리니 나의 한 끝이 없네. _백담 구봉령_
숨어사는 세월에 그윽한 취미는 정말로 너그러운데 옥으로 깎은 듯한 돌병풍은 열렸고 비단결 못물은 둘러졌네 이토록 좋은 터전을 개척함에 산에 귀신은 몇 번이나 울었던고 구름을 헤치고 바야흐로 열려진 땅은 신선의 별장인 듯 정자를 연한 돌길이 열렸음은 보기에 어여쁘고 산밑 지개( )가 닫쳐 있음은 뜻 깊은 운치일세 바람도 시원한 석양(夕陽)이 빗긴 헌함에는 경치가 더욱 기절하니 솔잎 술과 시냇가에 기름진 나물 안주가 금반(金盤)에 담겨져 오네. _백암 김륵_
청암정은 옛 사람들의 시(詩)처럼 그야말로 영남 최고의 정자이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은 청암정에 오르려면 외나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거북 바위는 거북이가 서에서 동으로 걷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암정은 연당 가은데 마치 당주(堂州, 연못속의 섬)처럼 거북바위가 있고 그 등에 정자가 올라 앉아 있다. 바짝 치켜든 거북머리가 장관인데 머리 남쪽면에 큼직한 귀가 새겨져 있다. 청암정은 평면이 T자이고 마루를 낀 다락형의 건물이다. 바위의 높낮이에 따라 기둥을 마름 한 점, 기둥 밖으로 외목도리를 내어 걸었는 점등의 구조가 삼척의 죽서루와 비슷하다. 바위 틈에서 자란 철쭉과 산단풍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왕버들 숲이 청암정을 수놓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정자의 동북쪽 바위 위에는 청암 권동보가 쓴 ‘청암정’ 세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정자의 ‘청암정(靑巖亭)’글씨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쓴것이고 ‘청암수석(靑巖水石)’은 미수 허목 선생이 88세에 쓴 글씨이다. 또한 ‘근사재(近思齋)’ 편액은 강좌 권만이 옛사람의 글씨법에 따라 조각하여 게판한 것이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은 ‘청암정 기문’에서 “돌다리를 가로 질러 들어가면 그 중간이 마치 외로운 섬과 같고 사방이 모두 한 덩어리 큰 반석으로 되었는데 정자가 바위에 우뚝서서 그 삼분의 일을 점령하였고, 정자의 북쪽에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 높이가 약 한길 가량으로 그 빛이 더욱 창고(蒼古)하므로 ”청암” 이라 이름 했다”. 또한 그는 “눈이 쌓여 바위를 묻어 버렸을때 푸른 소나무와 전나무가 독야청청 하여 구부러진 몸으로도 눈과 싸워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은 참으로 구경하는 중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고 하며 청암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한 동암(東巖) 권성오(權省吾) 는 ‘청암정 기문’에서 “집 둘레의 사면을 굴착하고 물을 끌어 들여 못을 만드니 그 형상은 마치 거울을 둘러 놓은 듯 하다. 못 가운데는 연(蓮)을 심으니 맑고 그윽한 향기는 주렴계(周濂溪)가 이를 사랑하여 글을 지었던 것이다. 그 북쪽의 높고 평탄하여 대(臺)가 될 만한 곳에는 십여명의 사람이 앉을수 있는데 그 아래에 오동나무를 심어서 대에 앉아 그 가지와 잎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 남쪽면에는 작은 소나무가 저절로 나서 쌍으로 된 가지가 그 기묘한 자태를 자랑하며 그 서쪽면으로 문을 내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물 속에 비추어 반영토록 하는 동시에 해와 달이 그남은 빛을 머물게 하였다. 큰 돌을 깍아서 동쪽에 다리를 놓아 출입을 통하게 하여 만약 술취한 사람은 부액하지 않으면 건너올 수 없으니, 이것이야 정말 바다 섬 속에서 떠온 듯한 기절함이 아닌가. 그 정자 밖의 미관(美觀)은 구름 덮인 산이 정면으로 들어오면서 가까이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먼 곳도 불과 수백보 내외라. 샘물은 아침부터 밤까지 종쟁(淙 )한 소리를 보내오고 낮에 오는 사람은 그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 공(公)이 기묘(己卯)년부터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석으로 여기에 거처하니 원근(遠近)에서 손님과 벗이 찾아와서 한결같이 ‘땅 위의 신선이라’고 칭송하고 또 곁에 모시는 아이가 있어 지필(紙筆)을 공급하고 또 악기(絲竹)를 구비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는 사람과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운치를 돕게 하니 비록 옛날 사람의 풍류라도 어찌 여기에 지나리요”하였다. 청암정옆 연못가에 2칸의 한서당(寒棲堂)이 있는데 2 칸은 충재가 거처하던 방이다. 이곳에는 ‘충재’라는 단아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방은 충재의 심성이 잘 표현된 곳이라 할수있다.
근사재(近思齋)는 청암정 동쪽 끝에 있었으며 못 뚝에 세워져 있어 정자(亭子)와 마주보고 있어 나즈막하다. 처음에 청암정(靑巖亭)에 방이 없이 마루만으로 되어 있었는데 근사재(近思齋)를 지어 이곳에서 거처했다. 근사재는 3칸 집으로 매우 소박하며 일체의 화려함을 피했다. 서쪽문 위에 충재라는 현판을 걸고 동쪽문 위에는 근사재 현판을 걸었다. 충재와 근사재로 현판을 한것은 충재가 선생의 도호(道號)이며 근사록은 선생이 평생토록 공부하며 애독하던 책이므로 뒤에 사람들이 모두 현판(懸板)으로 만들어 선생이 거처하던 집에 걸어 놓고 높은 덕과 아름다운 자취를 길이 추모(追慕)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항상 자질(子姪)들에게 가르치기를 ‘학문이란 자기를 위함인데 과거하여 벼슬함은 특히 말단의 일이라’하였다. 그는 만년에 더욱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을 좋아하여 자신의 품안과 소매속에서 이 책을 떠나게 함이 없었다 한다. 지금의 충재현판이 게첨된 곳에 근사재와 충재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근사재 현판은 지금 청암정에 걸려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은 ‘근사재기(近思齋記)’에서 “충재 권벌 선생이 평일에 한천유편(寒泉遺編 : 춘추 전국시대에 한천자가 편집한 책으로 내용이 모두 정치학이다)을 특별히 애독하였는데 이듬해에 선생이 작은 책 한 질을 선생에게 기증(寄贈)한 바 있었다. 선생이 갖고 읽기에 아주 편리함을 느껴 항상 소매속에 간직하고 잠시도 떠나게 하지 않았다. 가정 경자년(庚子年,1540) 에 중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여러 재상을 모아 꽃놀이 잔치를 마치고 대신들이 술에 취하여 모두 서로 붙들고 집에 돌아간 뒤 자리를 치우던 벼슬아치가 작은 책을 주어 위에 올리니 임금이 보시고, 이 책은 반드시 권모(權謀)에게서 빠진 것이니 즉각 돌리라 명하였다. 그뒤 이퇴계 선생이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에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금상 병인년(1746)에 곁에 모신 신하의 말에 의하여 이 작은 책을 찾아 올리라하여 십여일 동안을 열람하였다. 다시 선생의 후손 기성랑(騎省郞) 만(萬)을 불러 앞에 이르게 하고 임금이 친히 벼슬아치에게 이 책을 주어 돌리게 하는 동시에 다시 특지(特旨)를 쓰고 대질(大帙)을 내사(內賜)하였다. 시월 무진년에 만(萬)이 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옴에 모든 종족들이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맞아 들이고 즉시로 선생의 대묘(大廟)에 고유(告由)하고 다시 충분하게 의논하여 선생의 정자의 북쪽 벽위에 서가(書架)를 설치하여 두 책자를 안치(安置)하였다. 아울러 중종대왕으로부터 선사받은 옛 책 한 질도 같이 안치하고 드디어 특지를 모각(模刻)하여 정자 벽위에 걸게하고 근사재(近思齋)라 현판하였다. 지금의 한서당이다. 방 2칸과 마루 한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질박하고 선비의 조촐함이 묻어나는 두옥(斗屋, 아주작은 집)이다.
굳센 절개는 청암정에 뿌리를 내리고
일찌기 공자는 “착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내 몸이 마치 지초(芝) 나 난초(蘭)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 그래서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 만큼 자기 자신도 그와 같이 변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또 착하지 못한 사람과 같이 있노라면 마치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다. 그래서 오래 있으면 그 냄새를 자기 자신이 맡을 수 없으리만큼 거기에 화해 버린다. 주사(朱砂)를 간직해 둔 곳은 저절로 붉어지고 옷(漆)을 간직해 둔 곳은 저절로 검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자기와 함께 있을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라는 말이다. 착한 사람과 사귀는 처세 방법, 학문하는 사람과 사귀는 처세 방법, 이것이 우리 동양 고대의 처세에 대한 큰 교훈이었던 동시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러한 처세에 대한 명훈(明訓)은 역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금언(金言) 아닌 것이 없다. 충재와 그리고 청암정과의 만남 또한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아닐런지. 부귀와 명예가 도덕으로부터 온 것은 마치 산속 숲 가운데 핀 꽃과도 같아서 저절로 잎이 피고 뿌리가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또한 부귀와 명예가 만일 공업(功業)으로부터 온것이라면 마치 화분속에 심어 놓은 꽃과도 같아서 이리 저리 옮기기도 하고 또는 심어 가꾸기도 하여 뽑아 없앨수도 있다. 만일 부귀와 명예가 권력으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화병에 꺾어다 꽂은 꽃과 같아서 그 뿌리가 없으니 그것은 서서 기다릴 정도로 금방 시들 것이다. 나는 청암정과 한서당에서 지초와 난초향 가득한 당대 최고의 선비 충재를 만날 수 있었다. 충재는 따뜻하고 온화했지만 불의 앞에서는 송죽처럼 푸르고 강했다. 그는 직신(直臣)이었다. 부러질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신하가 충간하는 말을 따르면 착해진다는 말이 있다. 죽음으로 올린 충재의 직간은 굽은 시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다. 청암정 헌함에 걸터 앉아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청천백일 충재를 생각하며 촘촘히 집으로 발길을 돌리며 오상렴(吳尙濂)의 청암정 시를 되뇌어 본다.
“영남(嶺南) 땅에유람함이 나의 본뜻에 알맞아 청암정이우뚝하게 푸르게 개인 공중에 솟아있네 바위와돌은 헌함과 창 밖에 첩첩이 깔려 있고 물기운은 멀리 나부껴 책상과 자리까지 올라오네 연꽃은향기를 토하니 군자의 덕을 생각하고 소나무는대신(大臣)의 바람을 띄어 우뚝하구나 해가추워진 후 굳센 절개를 그 누가 짝하랴 탄식하며공을 추모하니 끝없는 회포만 간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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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 여기를 다녀오셨습니까? 참 멋지군요...
예 거기가 저희 고향 동네 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를 드립니다.언제고 다녀오고픈곳 입니다.
지나시는 기회 되시면 한번 가보세요
보는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네요.....정말 한번 가보고싶은곳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