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규장각을 세운 뜻은?
우리 역사에서 정조 시대(1776~1800:생몰년,1752~1800)는 ’왕조 중흥과 문화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문제는 11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힘겹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정치의 냉엄함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죄인의 아들’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역량을 총집결시킨다. 정조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규장각은 그 결실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기관으로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에 의해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나 어필(御筆) 등 일부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던 규장각은 정조가 ’계지술사(繼志述事: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의 명분 아래 그의 정치세력 내지 문화정책의 추진기관으로 힘을 실어 주면서,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본궁인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 어필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이라 이름하였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쏙쏙 규장각에 모았다.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함께 규장각에 나와 연구하면서 정조 개혁정치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제 조선후기의 문화중흥을 이끌어 가는 두뇌집단의 산실이. 특히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와 같은 서얼들을 적극 등용한 점이 주목된다.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대 왕들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옛법을 본받아 새 것을 창출한다)’은 규장각을 설립한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정신이었다.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권력의 핵심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이곳에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아라)’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정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의 전당과 유교정치이념을 전파는 중심기관으로 만든 것처럼 규장각을 통하여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를 수행하였다.
규장각은 규장각 신하들인 각신(閣臣)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우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을 두었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하여, 국내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하였는데, 이러한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물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 초계문신제도와 「일성록」의 편찬
정조는 젊은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로서, 이들은 매월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루는 등 강도 높은 교육을 받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의 방향을 학습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총 138명이 뽑혔는데, 이 제도는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정치적 장치이기도 하였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으로서, 이후 정약용은 탁월한 재능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개혁정치의 중심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초계문신제도와 함께 정조가 규장각에서 수행한 주요한 작업이 「일성록」의 편찬이었다. 「일성록(日省錄)」 ’하루를 반성하는 기록’이란 뜻으로, 정조의 일기 형식으로 출발한 책이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중대사를 낱낱이 적어 놓음으로서 정조대에 수행한 각종 정책을 정리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일성록」은 정조 5년까지는 국왕 개인의 일기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규장각의 신하들이 기록함으로서 국가의 공식적인 일기가 되었고, 당시 이 일기를 기록했던 규장각은 그 무렵부터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벗어나 학술연구기관으로 대대적인 개편을 이루게 되었다. 「일성록」 은 정조 사후에도 계속 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2,329책이 국보 제153호로 지정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일성록」은 정조대 개혁의 추진 과정과 그 결과를 꼼꼼하게 기록해 놓음으로써 후대에도 통치 자료로 크게 활용되었다. 1798년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온 냇가에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으로 정하는데, 이러한 자부심의 바탕에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행한 정치, 문화운동의 성과를 확인하고 스스로 성인 군주가 되겠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규장각은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중심되는 공간에 위치해 있다. 그만큼 정조의 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규장각을 찾아서 18세기 개혁정치를 진두지휘했던 정조와 정약용, 박제가, 이덕무 등 실학자들의 열정을 만났으면 한다.
글 : 사진 = 신병주/현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석사, 박사).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의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 과 교육방송의 어린이 역사드라마 [점프]의 자문을 맡았다.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조선시대사학회 연구이사,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