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金怡)는 자가 열심(悅心)이며, 또 다른 자는 은지(隱之)로 복주(福州) 춘양현(春陽縣) 사람이다. 초명(初名)은 김지정(金之琔)이었으나 뒤에 김정미(金廷美)로 고쳤는데 충선왕이 김이(金怡)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모친이 꿈에서 하늘이 찬란하게 붉은데 해가 붉은 햇무리를 띠고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였다.
김이는 나면서부터 용모가 웅대하였으며 일찍부터 큰 뜻을 가졌는데 안향(安珦)이 일찍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10여 세에 도평의사(都評議司)의 서리[掾吏]가 되었는데, 일이 비록 비천하여도 꺼리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충렬왕 14년(1288) 김이의 나이 24살에 우연히 화장사(華藏寺)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왕이 정전(正殿)으로 거둥하고 신하들이 옹위하고 있었는데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덮고 있었다. 왕이 시 한 구절을 읊기를, “푸른 구름에 붉은 기운이 있으니 신선의 집인 줄 알겠도다.” 라고 하니, 김이가 이를 이어서 말하기를, “윤택한 머리칼[綠髮]에 맑은 말씀을 하시니 바로 귀인이로다.”라고 하였다. 왕이 가상하다고 감탄하며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는데 이로써 귀하고 출세할 조짐을 미리 알았다. 이 해에 장흥부(長興府)의 수령이 되었다.
충렬왕 16년(1290)에 합단(哈丹, 카단)이 쳐들어오니, 나라에서 주현(州縣)에게 험한 곳에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게 하고 민이 〈들에〉 경작하러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명령이 내리자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김이가 안렴사(按廉使) 강취(姜就)에게 말하기를, “황제의 군대가 이렇게 작은 도적떼를 제압하는 것은 상 위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삼키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니, 어찌 〈놈들이〉 변방의 고을까지 오겠습니까? 게다가 곡식은 민에게는 하늘로 삼는 것[食爲民天]이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은 때가 있는 것으로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니, 청컨대 밭으로 나가서 경작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강취가 말하기를, “만약 명령을 어겼다가 견책을 받으면 어쩔 것이오?”라고 하니, 김이가 물러나와서 탄식하기를, “지아비 한 명이 농사를 짓지 못하면 천하가 굶주리게 될 것이다. 명령에 따라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면 굶어죽는 자가 많을 것이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하면 죄를 받는 것은 나뿐이다.”라고 하고는 민에게 밭으로 나가서 경작하게 하였는데, 적이 과연 연기(燕歧)까지 왔다가 섬멸되어 버렸다. 다른 고을들은 모두 수확을 하지 못하였으나 장흥부만은 크게 풍년이 들었으므로 원근(遠近)의 고을들이 다들 의지하였다. 〈충렬왕〉 18년(1292)에 임기가 찼으므로 소환되어 내시(內侍)에 들어갔다.
충선왕이 선위(禪位)를 받았다가 곧 왕위를 내어놓고 전왕(前王)으로서 원(元)에 있다가 왕에게 참소를 받아서 〈본국에서〉 물자가 끊어지자, 보물로 장식한 띠[寶帶]를 팔려고 하니, 김이가 말하기를,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가볍게 팔아서는 아니 됩니다.” 라고 하고, 드디어 돈을 빌려서 비용을 충당하였다. 〈충렬왕〉 30년(1304)에 유청신(柳淸臣)과 박경량(朴景亮) 등이 나라의 실권을 오로지하려고 충선왕을 속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는 세조(世祖) 황제께서 이미 2품으로 〈관질을〉 올리셨고, 또 관인(官印)까지 주어서 총애하셨으며, 현재 관리들도 황제의 명령을 받아 제배(除拜)된 것입니다. 〈우리가 상국(上國)의〉 조정(朝廷)과 하나가 되면 조정의 대신들도 감히 능멸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확실히 보전하는 계책입니다.” 라고 하였다. 충선왕이 마음 깊이 옳다고 여겨서 장차 표문(表文)을 지어서 보고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대녕군(大寧君) 최유엄(崔有渰)이 몰래 김이에게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되면 동국(東國)의 왕업(王業)은 끝날 것입니다. 정령(政令)이 중국(中國)으로부터 나온다면 어찌 병합당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이가 기회를 보아 갖추어 설명하자 충선왕이 이에 중지하였다. 뒤에 〈충렬〉왕이 충선왕과 함께 원에 있었는데, 충렬왕이 군소배(群小輩)들의 참소를 듣고는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아들로 삼고, 또 충선왕의 〈비(妃)인〉 공주를 왕전에게 개가(改嫁)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두 왕의 신하들이 대립하며 서로 다투었는데, 김이는 화가 장차 일어날까 걱정하여 몰래 충선왕이 책봉받은 〈황제의〉 조서를 가져다 몰래 허리춤에 감추고 다른 종이를 빈 조서 상자 속에 넣어서 전처럼 봉해두었다. 며칠 있다가 조서 상자가 결국 도난을 당하자 충선왕이 크게 놀랐는데, 김이가 몰래 아뢰기를, “신(臣)이 예상하지 못한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일찍이 상자 속의 조서(詔書)를 취하여 감추어 두었으니 청컨대 놀라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달포쯤 지나 군소배들의 계책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 김이가 차고 있던 책명(冊命)을 꺼내어서 〈충선왕이 책봉 받은〉 증거로 대자, 일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김이는〉 이후 여러 번 관직을 옮겨서 판도정랑(版圖正郞)이 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왕이 훙서(薨逝)하자, 충선왕이 복위하여 환국하였는데, 처음에 충선왕이 원에 있을 때 비용이 다 떨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부유한 사람에게서 돈을 빌리고, 본국으로 하여금 갚게 하자.”라고 하였다. 김이가 말하기를, “본국에는 평소 저축이 없는데다가 근래에 부왕(父王)께서 대도(大都)로 오시는 바람에 부고(府庫)에 저장한 것이 바닥나 버렸으며 또 민간에서 거두어들였으므로 공사(公私)가 모두 탕진해버렸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스스로 빌려 쓰고는 민으로 하여금 갚게 하려고 한다면 아래 있는 민은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 후〉 김이를 민부의랑 시내부령 겸 선공부령 도진장(民部議郞 試內府令 兼 繕工副令 都津長)으로 임명하였다가, 개성소윤 겸 풍저창․광흥창․의영고․제용사사(開城少尹 兼豊儲倉·廣興倉·義盈庫·濟用司事)를 맡겨 모든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을 김이에게 위임하였다.
〈김이는〉 〈충선왕〉 원년(1309)에 사헌집의(司憲執義)로 옮겼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했으며, 이듬해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충선왕〉 5년(1313)에 왕이 원에 있으면서 김심(金深)과 이사온(李思溫)을 곤장을 쳐서 임조(臨洮)로 유배보냈는데, 김이가 김심 등에게 편당하였는지 의심하여 찬성사(贊成事) 권한공 등으로 하여금 〈본국으로〉 돌아와서 김이와 그 아들인 호군(護軍) 김문귀(金文貴)를 순군(巡軍)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김이를 기장감무(機張監務)로 쫓아내고 김문귀를 합포(合浦)로 유배보내었으며 그의 가산을 적몰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선위(禪位)를 받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임명하였다가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전임시키고 수성보절공신(輸誠保節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의비(懿妃)가 원에서 훙서(薨逝)하였을 때, 장례를 치르는 도구가 미처 갖추어지지 않으니, 김이가 〈시신을〉 화장하여 상자만한 관에 뼈를 넣어서 몸소 묻어 주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마다 양과 술을 마련하여 직접 제사를 올리면서 3년을 마쳤다. 뒤에 왕이 유골을 그대로 대도(大都)의 서산(西山)에 매장하려고 하였는데 김이가 온갖 계책으로 막았으나 듣지 않으니, 이에 술사(術士)에게 뇌물을 주어서 거짓말로 왕을 설득하게 하였는데, “본국에 안치(安置)하면 나중에 화(禍)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으며, 환국하여 연릉(衍陵)에 장사지냈다.
〈충숙왕〉 5년(1318)에 왕이 사헌지평(司憲持平) 장원조(張元組)를 서북면(西北面)으로 보내어 민의 어려움을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나〉 장원조는 재능이 부족하여 적발해낸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김이가 〈민으로부터〉 가죽을 함부로 거둬들인 폐단만 들추어내었다. 충선왕은 이를 보고받고, 김이는 당시 임금을 호종하고 있었으므로, 도리어 장원조를 인월도(引月島)로 유배보냈다. 〈충숙왕〉 7년(1320)에 〈김이에게〉 찬성사 경산군(贊成事 慶山君)을 더해주고, 8년에는 권한공과 채홍철 등의 죄에 연루되어 순군(巡軍)에 붙잡혀갔다가 곧 풀려났다.
당시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옹립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마침 〈원〉 영종(英宗)이 붕어(崩御)하고 태정제(泰定帝)가 등극하게 되어 유청신 등이 그 음모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또 〈고려에〉 행성(行省)을 세우고 국호(國號)를 없앨 것을 청하자, 황제가 옳다고 생각하고 평장정사(平章政事) 활아찰(闊兒察)과 중서(中書) 겁렬(怯烈) 등을 고려로 보냈다. 충선왕이 토번(吐蕃)에서 돌아와서 이 말을 듣고는 김이를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태조께서 삼한을 통일하여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세우신지 지금까지 400여 년이 되었다. 우리 고종(高宗)[忠憲王]께서는 제일 먼저 원에 귀순하였고, 원종(元宗)[忠敬王]께서는 조어산(釣魚山)에서 황제에게 친히 조회하였으며, 또 변량(汴梁)에서 세조황제를 알현하고 옥대를 하사받는 은혜를 입었다. 아버지 충렬왕께서는 부마(駙馬)가 되시어 대대로 황제의 총애를 이었으므로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찌하여 불행하게도 나에 이르러 두 세 간신의 음모 때문에 우리의 왕업이 끊어지게 되었는가? 조상들께서는 무슨 잘못으로 다시는 제사를 받지 못하신단 말인가?”라고 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김이에게 이르기를, “‘고려’라는 국호를 되찾는 것은 경에게 달려 있다.
옛날 황경(皇慶) 초에 반역자의 후손인 홍중희(洪重喜) 등이 황제께 아뢰어 행성을 설치하고 국호를 없애라고 하였을 때 경은 선왕(先王)들께서 신하로서 복종한 공을 두루 아뢰어 황제의 명을 받아 결국 행성을 혁파하였다. 지금 다시 힘을 다하여 〈국호를 회복할 것을〉 도모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김이가 최성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입성(立省)에 대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설명하자 도당(都堂)에서 그대로 따랐다. 〈김이는〉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었다가 〈충숙왕〉 13년(1326)에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중찬(中贊)으로 고쳐 임명되고 추충보절동덕공신(推忠保節同德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공신당(功臣堂)에 초상이 안치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죽으니 나이 63살이었으며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김이는〉 성격이 활달하였으며 윗사람의 풍모가 있었다. 오랫동안 충선왕을 시종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다.
〈김이의〉 아들 김문귀(金文貴)는 충혜왕 초에 밀직사(密直使)로서 전주(銓注)를 맡았다. 상호군(上護軍) 박련(朴連)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근 들어 전주가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비판(批判)을 거두어들이라고 하여 살펴보니 과연 전주를 고친 것이 있었으므로 김문귀를 장형에 처한 뒤 가라산(加羅山) 방어소(防禦所)로 유배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