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량(悲凉)
박 태 원
정초면, 으레들 그래야만 할 것같이, 아낙네들은 책력과 토정비결을 펴놓고 앉아서, 나온 괘에, 혹은 좋아도 하고, 또 혹은 언짢아도 하여, 그 풍습을 승호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작 여자가 진숙이네 방에서 그 두 종류의 서적을 빌려가지고 와,
“우리 금년 신주 좀 봅시다.”
하고 그렇게 말하였을 때, 그는 그러나 순간에 눈썹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까짓 것 보아서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고, 그것이 모두 부질없이 어리석은 일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그들의 아무렇게도 변통수 없는 그 궁한 살림은, 혹은, 그러한 것에서라도 무슨 광명 같은 것을 찾고, 그리고 가장 기력 없는 희망을 미래에 갖는밖에 아무런 다른 도리도 없는 것이었는지 몰랐으므로, 그래 도리어 그 까닭으로 하여, 승호는 제풀에 찡그려지는 눈썹을 아무렇게도 하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그러한 남자의 감정 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하고서,
“자아, 어서어.”
하고, 또 한 번 재촉하였을 때, 그는 종시 마음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좀더 불쾌한 표정을 지우는 일 없이,
“어디.”
하고, 가벼이 그러한 말조차 한마디 하여, 책력을 집어들었다. 그러한, 물론 아무러한 이익도 없는, 그와 함께, 별로 이렇다 할 해도 없는 일을 그렇게 굳이 거절할 것도 또한 없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돌이켜서 생각하였던 그뿐이 아니라, 그러한, 이를테면 대수롭지 않은 것을 가지고, 객쩍은 말을 주고받고 한 끝에, 끝끝내는 피차에 얼마간이라도 불유쾌한 감정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것에, 문득, 승호는 생각이 미쳤던 까닭이다.
‘올해는 둘이서 기어코 갈라서게만 되리라고, 그러한 괘라도 나오기 전에는, 토정비결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혼자 그러한 것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고,
“올해 몇 이지.”
우선 여자의 나이를 물으며,
‘스물, 둘이던가? 아니, 셋이던가?’
영자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려니까, 잠깐 망설거린 끝의 그의 대답이,
“스물, 다섯”이라,
‘오오, 참 나보다 바로 세 살 아래였으니까·…….’
승호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떡거리며, 그것은 아직 묻지도 않은 것을,
“삼월 초사흗날.”
하고, 미리, 알려주는 그의 생일이야 언제든 간에, 아무리 보아도 스물두셋보다 결코 더 먹어 보이지는 않는 여자의, 어딘지 모르게 그저 애티가 남아 있는 얼굴을, 일종 질투와 유사한 감청을 가져 곁눈질해 보며,
“그럼, 스물다섯에다, 태세수. 병자년이 십팔이라, 마흔셋을 여덟으로 제하면, 오팔은 사십. 셋이 남고, 삼월, 월건수가, 갑진, 십사. 삼월이 적으니까 스물아홉. 합해서 마흔셋을 육으로 제하면 육칠이 사십이, 하고, 나머지가 하나. 또, 초사흗날이니까, 셋에다, 일진수, 을해, 열일곱을 가하면, 스물. 스믈을 삼으로 제해, 삼칠이 이십일, 그건 안 되고, 삼육은 십팔, 둘이 남으니까…… 그럼, 삼, 일, 이…….”
승호의 계산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자가 책을 빼앗아, 부리나케 찾아본, 그의 올해 신수는 의외에도 좋아, 그것은 이해에 혼인을 하게 될 것이요, 적공〔積功〕은 적어도 효력이 많으며, 또 김가 성 가진 사람이 와서 도우면, 생색이 오 배나 될, 그러한 괘에 틀림없었다.
“올 신수가 아주 늘어졌다.”
승호는, 근래에 없게, 그러한 농담 비슷한 말을, 저도 모르게, 한마디 해보았으나, 영자가 그 말에는 아무 대답 없이, 바로 그곳에 씌어 있는 것을 무슨 참된 운명의 계시나 되는 것같이 눈을 반짝거려가며, 몇 번인가 되풀이하여, 또박또박이, 읽고 또 읽고 하였을 때, 승호는 어느 틈엔가 또다시, 불유쾌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 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허황된 것을, 무슨 크나큰 진리나 되는 듯싶게, 일종의 흥분조차 가지고서 연해 외우고 있는 여자의 꼴도 꼴이려니와, 도대체 토정 선생이란 누구인데, 이러한 황당무계한 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감정을 농락하는 것인지, 그것은 불쾌보다도, 오히려 일종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더구나 그것도, 그냥 길하면 길하다거나, 흉하면 흉하다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슨 혼인을 할 수 있느니, 김가 성 가진 자가 어쩌면 어쩌느니 하고, 가장 정말인 듯이나 싶게 늘어놓은 것이 승호의 비위에는 결코 맞지 않았다. 비록 예식을 갖추어서 혼인이라고 한 것은 아니요, 그러니 물론 민적 〔民籍〕을 넣어 아주 내 집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만서도, 그래도 하여튼 자기라는 남자가 어엿하게 있는 영자에게다 대고, 무슨 금년에 시집을 갈 수라고 그러한 말을 일러주는 것이 우선 천만부당한 수작이요, 또 김가 성 가진 자란 대체 누구를 가르쳐 하는 말인지, 자기는 물론, 김가도 이가도 아닌 ‘연일 정씨’니까, 올해에 영자를 도와서 생색이 오 갑절이나 나게 한다는 위인이 자기가 아닌 것만은 사실이라, 그 도와준다는 김가와, 영자가 혼인할 상대자와, 그야 반드시 같은 인물이 아닐지는 모르나, 이렇든 저렇든 간에 그러한 것을 생각해볼 그뿐으로 승호의 마음이 언짢아지기는 일반이다.
그는 재떨이 위에 생담배가 타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잠깐은, 혼자 그러한 생각에, 약간 표정을 험하게도 지어보았으나, 문득,
‘그럼, 나는 이 계집과 갈라서는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 것인가? 언제까지든, 이 굴욕의 생활 속에서 허위대려는 것인가……’
그보다도, 그 묵은 책 속에 적혀 있는 오직 두어 줄 글로 하여서, 자기가 이렇게도 감정의 격동을 받는 이상에는, 결코 남들을 어리석다, 못생겼다, 비웃을 수는 없다고, 쓰디쓴 웃음을 입가에 띠고, 생각난 듯이 영자 편을 보니, 그는 그저 책을 놓지 않고 그대로 눈을 반짝거리며,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는, 어쩌면, 자기에게 가장 다행한 빛을 가져온다는, 그 김가라는 것이 적잖이 궁금하여 아마도 자기가 아는 한도의 온갖 김가들을 은근히 마음속에 상고하고 있는 모양이라, 승호는 이윽히 모멸 가득한 눈초리로 그의 옆얼굴을 흘겨보다가,
‘네 신수가 그러하다면, 너는 너대로 가고, 나는 또 나대로, 나의 금년 신수를 좇아서…….’
하고, 불끈, 그러한 감정이 이는 대로,
“어디, 이리 좀 내애, 나두 좀 보게.”
그래, 승호는 또 한 번 책력과 토정비결을 뒤적거렸던 것이나, 스물여덟 살에, 생일이 칠월 열이렛날인 사나이의 병자년 신수는, 그러나, 무던히도 흉하여, 영자의 앞에서는, 그러한 것이 모두 허황된 것으로, 길하거나 흉하거나 자기는 결코 아무렇게도 여기고 있지는 않은 듯싶게 꾸미면서도, 역시 내심으로는, 먼저 보다도 좀더 우울해지는 것을 그로서는 아무렇게도 하는 수 없었다.
그러한 남자의 눈치 속을 설혹 챌 수 있었다 하더라도, 원래가 그러한 것을 일일이 아랑곳하는 영자가 아니라,
“당신 괘는 어떠우? 어디……”
하고, 책을 빼앗아,
“성내고 연군에 달아나니, 상치 아니하는 곳이 없다. 그날 중에 도망하니, 은혜를 지고 덕을 잊는다. 세 벌레가 먹어 다하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꼬. 패군한 장수가 강 건널 낯이 없다.”
읽기는 하여도 그 뜻을 얼른 알아낼 수가 없어,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다가, 다음, ‘해석’이라는 것의,
“내 몸이 괴로우니 그 해가 타인에 미친다. 전래의 업을 버리고 타업에 종사하면 낭패될 괘.”
그것을 천천히 두 번이나 내리 읽은 다음에, 그것은 또 무슨 뜻인지, 입을 얄밉게 삐쭉 내밀고, 잠깐 승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생각난 듯이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조금 있다, 진숙이네 방에서, 뭐 혼인을 하느니, 신수가 터졌느니, 또 김가 성 가진 이가 어쩌느니 하고, 한바탕을 요망스럽게 재깔대는 영자의 말소리가, 좀더 요망스러운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승호는 잠깐 동안, 멍하니 그곳에 가 그대로 앉아 있다가, 어인 까닭도 없이, 후유 한숨 비슷한 것을 토하고, 문득 책상 위의 목각종에 눈을 주어,
‘새로 두 점 반. 어디나 가볼까?…….’
또 잠깐, 그렇게 앉아 있다가, 뜻 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떡거리고, 담뱃갑을 집어 주머니에 넣은 다음, 벌떡 일어서 외투를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진숙이네 방 앞을 지날 때,
“제 몸이 괴로우니까, 그 해가 남에게까지 미친대요. 그러니까……”
어쩌니, 어쩌니 하고, 늘어놓고 앉았던 영자가, 앞창도 잠깐 열어보는 일 없이,
“어디, 나가우?”
경박하게 소리를 지른다.
“응.”
하고 대답을 하니까, 잼처¹ 한다는 말이,
“오늘은, 나, 일찍 나갈 테니까, 저녁은, 어디, 딴 데서 잡수우. 돈, 드리리까?”
승호는, 순간에, 얼굴이 화끈, 하여지는 것을 깨달으며, 그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그냥 대문 밖으로 나와버렸다.
‘어떻게든 해서, 이 오탁〔汚濁〕에 물든 생활을 깨끗이 청산해버리지 않으면…….’
그 생각은 엊그제 비롯한 것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그것을 좀더 절실히 느끼면서, 하루에 한두 번은 으레 들르는 찻집으로, 별로 다른 데라 향하여 갈 곳도 없는 발길을 들여놓으려니까, 마침 난로에다 석탄을 넣고 있던 아이가, 어젯밤 늦게, 어떤 손님이 와서 한참 동안이나 승호를 기다리다가, 내일이라도 들르시거든 이것을 전해달라고, 그러고 갔다고, 편지를 꺼내준다.
‘내게, 편지가 웬일인구?…….’
생각하며 뜯어보니, 그것은 뜻밖에도 벌써 이삼 개월이나 그렇게 만나지 못하였던, 어느 보통학교에 훈도로 있는 사나이가 한 것으로, 자기는, 결코 승호가 그것에 적임이라거나, 또는 일찍부터 그러한 자리라도 구하고 있는 것이라거나, 그렇게 생각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몸이니, 어쩌면 이러한 방면에 의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래 만나보고 알려나 주려는 것이라고, 우선 길게 늘어놓은 서두에 비해서는 그 내용이 지극히 간단하여, 동소문 밖, × ×보통학교에, 촉탁교원 자리가 하나 났는데, 교원 면장²이 없어도 될 수 있는 노릇이라, 혹, 마음이 있다면 자기로서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주선을 해보겠노라고, 공교롭게, 시골 생가에 일이 있어, 내일 아침에 떠나, 모레 밤에나, 돌아오므로, 곧 만날 수 없는 것이 딱하나, 하여튼 글피 수요일 오후 네 시경에 집으로 찾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 × 보통학교라면, 무네미에 있는 사립학교가 아닌가? 통근하기에는 좀 먼데…….’
승호는 우선 그러한 것을 생각하며,
‘또, 촉탁이라니까, 보수도 삼십 환이나 그밖에는 더 되지 않을 게고…….’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일찍이 해본 일도, 마음먹어본 일도 없는 학교 교원 노릇을, 시작해가지고 능히 그 소임을 감당해갈 듯싶지 않았고, 더구나 경력있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지 않더라도, 그 직업이 옆에서 보는 것보다는 엄청나게 힘든 것임에 틀림없어, 승호는, 벗의 친절도 그다지 고맙게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그러나, 자기가 오늘 집을 나올 때 영자가 하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는, 보통학교 교원 말고, 소사 노릇을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옳고 또 떳떳한 일이 아닌가 하고, 승호는 혼자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현재의 이 생활에서 몸을 빼치려 마음먹은 바로 그때에,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그러한 방면에서 이야기가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것 같아,
‘좀 멀긴 허지만, 아주 영자와 떨어져서, 그 근처에 하숙이라도 정하면 그만일 게고…… 처음 하는 노릇이 힘들고 어렵기는 하겠지만, 누군, 태날 적부터 보통학교 훈도였던가?’
몇 번이든 고개를 끄떡거리며, 자기 혼자만은 벌써 그렇게 하기로 마음에 작정 해버렸다.
승호는 자기의 마음이 얼마쯤이나 가든해지는 것을 느끼며, 평소에는 결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던 보통학교 선생님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쾌하고, 또 의의 있는 것만 같아,
‘그래, 그것하고, 현재의 생활하고, 어딜 비교나 될 말인가?…….’
문득, 요란스러이 소리를 내어가며, 난로 밑에 재를 긁어내고 있는 아이의 머리와 등허리를 내려다보며, 승호는, 저도 깨닫지 못하고, 흥, 코웃음 쳤다.
그나마, 밥이라고 풍로에다 끓여 먹을 때에는, 영자가 일하는 옆에서, 자기가 방에다 불 좀 때기로서니 그다지는 남 볼썽도 흉없게 생각은 되지 않던 것이, 지난해 겨울 들어서서는, 춥다고, 귀찮다고, 사흘에 이틀은 설렁탕이라, 장국밥이라, 시켜다 먹기가 일쑤라, 영자가 그런 것 나는 모른다고, 그만 옷을 떨쳐입고 그의 일터, 카페로 나간 뒤에, 아궁이 앞에 가 쪼그리고 앉아서, 밤마다 밤마다 군불을 때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의 변변치 못하게 궁한 꼴이, 불현듯, 눈앞에 떠올라, ‘그러한 생활도 있을 수 있나?…….’
자기가, 그나마, 일자리를 잃고, 따라서, 달에 푼전도 벌어들일 아무런 방도를 갖지 못하였던 작년 가을에, 둘이 마땅히 갈라선다면, 그때 아주 갈라서는 것이었다. 졸연히는 승호의 취직도 용이할 것 같지 않아, 영자가 생각 끝에, 다시 자기를 여급으로 내어달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을, 그에게 대한 아직 남은 애정과, 또 남자로서의 자존심으로, 우선은 반대도 해보았던 것이나, 마침내는 당장 그렇게라도 하는밖에, 별 아무런 도리도 있을 턱 없이, 여자가 하겠다는 대로 그대로 모른 체 내버려둔 것이, 이를테면, 이 굴욕의 생활의 시초였다.
‘그렇게도 위인이 변변치 못할 수가 있을까?…….’
승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며, 그저 난로 곁에 가 서 있는 애 녀석이,
“선생님, 카이다³만 잡수십니다그려.”
무심히 한마디 하는 말에도, 스스로를 비웃는 웃음을 픽 웃고, ’참말이지, 계집이 얻어다라도 주지 않으면, 담배 한 대, 변변히 태우지를 못하고……술을 따라, 아양을 떨어, 벌어 온 몇 푼의 돈이 아니고는, 한 끼, 설렁탕 한 그릇이나마…….’
또 한 번, 픽 웃고, 그러나 그와 함께 계집이 오늘은 일찍 나간다고 그러던 말을 생각해내고
‘흥, 누가 너더러 밥 사달랬던?’
대체, 남들이 듣는 데서, 어디 딴 데서 잡수우, 돈 드리리까, 가다 무엇이냐고, 그는 새삼스러이 그러한 것에 분개도 해보았으나, 사실 푼전을 몸에 지니지 않고 저녁 구할 길이 망연해 잠깐 눈살을 찌푸리다가,
‘뭐, 아무렇기로서니, 저녁 한 끼쯤이야·…‥ 저엉 뭣하면, 예서 외상으루 토스트를 먹더래두…… 그런 건, 다아 객쩍은 근심이요, 이제 며칠 안 있으면, 보통학교 교원으로…….’
하고, 문득, 그것을 생각하니까. 기운이 나서,
“얘, 너 보통학교, 졸업 했지?”
어느 틈엔가, 카운터로 돌아가 앉아 있는 아이 쪽을 돌아보고,
“댕겼지? 그럼 다아 알겠구나…… 아이우에오. 가끼구께꼬.⁴ 소가 가오. 말이 오오.”
그리고 승호는 어리둥절해하는 아이 얼굴에다 대고, 유쾌하게 한바탕을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는 일로, 이 시절에 있어서는, 보통학교 촉탁교원 자리나마 차지하기 수월치 않아, 이틀 지나, 약속한 수요일에, 승호가 시간을 어기지 않고, 벗을, 그의 집으로 찾았을 때, 분주히 문간으로 달려나온 젊은 교원은, 승호를, 채, 자기 집 사랑으로 정하여 들이기도 전에, 민망스러운 얼굴로, 우선,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그러한 말부터 늘어놓았다.
원래가 그러한 일이란,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 하는 밖에 아무 다른 도리가 없는 것으로, 그날 밤, 찻집에서 만날 수만 있었다면, 장담은 못하더라도 픽이나 유망하다 할 수는 있었을 것을, 일은 공교롭게도, 가장 긴한 이틀 동안을 서울에서 떠나 있어, 그러지 않아도 그사이에 어디서 또 유력한 후보자라도 나와, 어떻게 쉽사리 결정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속으로 은근히 염려하였던 것이 뜻밖에도 사실로 나타나, 바로 어제, 논산이라든가 어디서 한 이 년 선생 노릇 하다가, 무슨 일로 그만두고, 그간 일 년 동안이나 놀고 있었다는 사람이 취임하기로 작정되었다고, 만약, 자기로서 승호의 의향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면, 그대로 소개를 하여두는 것을, 그것을 자기 생각만으로 어찌할 수 없어, 그냥, 후보자가 한 명 있기는 있다고, 그렇게만 모호하게 말하였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그는 마지 승호에게 무슨 크나큰 죄라도 저지르기나 한 듯싶게 미안쩍어 하였다. 그러한 벗의 모양이 도리어 승호는 민망스러워,
“뭐,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러지 않아도, 토정비결에 나온 괘가 괘라,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었네.”
“토정비결?”
“응. 전래의 업을 버리고 타업에 종사하면 실패한대서·…‥”
그리고 승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소리를 내어 웃었으나, 그날 새벽에 눈 쌓인 운동장에서 아이들 체조를 가르치는 꿈을 꾸기조차 한 그는, 역시, 적잖이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사실, 벗의 편지를 본 뒤, 요즈음 며칠 동안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염두에 두었고, 또 그것 위에 온갖 계획과 희망을 세우려 하였던 것이라, 승호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 듯싶은 것을 깨달았다.
바쁘지 않으면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굳이 붙드는 것을, 별 까닭없이 사양하고, 골목을 나오며, 문득,
‘다시, 고향으로나…….’
괴로우면 언제든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저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오오, 내 고향…… 그리고 내 집…….’
입안말로 오직 그렇게 중얼거려보았을 그뿐으로, 고향의 산이, 벌이, 강이, 집이, 사람이…… 결코 대단치 않은 고향의 온갖 풍물이, 한껏 아름답게 그의 눈앞에 떠올라, 일순간, 승호는 그곳에 가 그렇게 서서, 저도 모르게, 거의 눈물지었으나 다음 순간,
‘이제 이르러, 대체, 무슨 낯짝을 들고…….’
힘없이 머리를 모로 흔들며, 큰길까지 나와,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순간에, 시선이 마주친, 젊은 부인의, 확실히 자기를 알아본 듯싶은 그 눈치에, 승호는 당황하게 외면을 하고 그리고 고개 숙여 빠른 걸음결이로 전찻길을 횡 단하였다.
‘분명히, 혜숙이다……
오직, 가만히, 입안말로 중얼거려보았을 뿐, 다시 한 번 그편을 돌아볼 용기도 있을 턱 없이 그는 그대로 고개 숙여 걸으며, 생각은 이 년 전으로 뒷걸음질 치고, 그의 가슴은 다시 무를 길 없는 뉘우침과, 또 부끄러움으로 가득 찼다.
오직, 두 달이나 그밖에 더 안 되는 시일……그것의 이르고 또 늦었던 것이 승흐의 장래를 그렇게도 용이하게 그르쳐놓았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멀리, 진천서 승호의 어버이가 몸소 서울로 올라와, 전부터 서로 말이 있었던 유박사의 둘째 딸과 사이에, 승호의 혼담을 진행시켜, 거의 결정을 보게 되었을 그때는 이미 늦어, 그는, 그보다 두 달 전에 우연히 안 영자를 아무리 해도 단념하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 본다면, 영자가 일개의 교양 없는 여급인 것에 비겨, 혜숙이는 이른바 문벌 있는 집 귀한 규수로, 그 용모나 재질에 있어 결코 아무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삼 남매 중에서도 유달리 그를 귀여워하는 그 조모 되는 이는, 신혼부부를 위하여 삼백 석인가, 그보다 적지 않은 땅을 떼어주겠노라고 선언하였던 것으로, 그 구비된조건에, 승호의 마음은 결코 냉담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쉽사리 그의 태도를 결정 못하고, 마침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유박사의 집을 찾아, 혜숙이와 한자리에서, 결코 짧지 않은 동안을 이야기로 지냈던 것이요, 그 결과는, 승호의 마음을 좀더 끌었던 것에 틀림없었으나, 그러나, 경력 없는 젊은 사람의 단순한 생각과, 또 그 인도주의적 의협심은, 도리어 그러하면 그러할수록에, 영자의 처지가 한없이 가여워 보였고, 그 가여운 영자를 버리고 그보다는 모든 조건이 우수한 혜숙이에게로 달리는 것이, 남자로서 퍽이나 떳떳지 못한 것같이, 또 큰 죄악인 거나 같이, 그렇게만 꼭 생각되어, 자기가 사실 얼마나 영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또 영자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자기들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지, 그러한 온갖 중요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보는 일도 없이, 그의 부모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와 또 질책이 크면 클수록에, 그의 먹은 마음은 더욱 굳어져, 거의 부자의 의를 끊어서까지 자기의 열정을 고집하였던 그것이, 뒤에 생각하여, 결코 옳지 않았다. 자기를 잃었을 때의 영자의 슬픔만을 생각하기에 바빴던 승호는, 서로 보기까지 하고, 드디어 혼약이 성립될 그 임시하여, 별 이유도 없이 거절당한 처녀가, 당연히 그 가슴에 받을 상처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하여, 일시는 그가 절망한 나머지에 병석에까지 누웠었다는 그 말을, 어떻게 전하여 들었을 때에는, 승호는 자기가 저지르고 만, 뜻하지 못하였던 죄악에 스스로 마음을 상하였고, 그러한 까닭에, 그뒤, 혜숙이가 달리 혼처를 구하여, 무사히 결혼을 하였다 알았을 때에는 마음의 짐이 적이 덜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과 함께, 일변, 제 가슴 한구석에 구할 길 없는 공허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 내가 그릇하였다. 오오, 내가 그릇하였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제는 결코 보일 턱 없는 그를, 그가 사라진 편에 찾으며
‘오오, 혜숙이. 혜숙이…….’
이제 이르러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스러움을 느끼며, 그러기에 그것이 애달파, 승호는 안타깝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다.
“혜숙씨 . 혜숙씨.”
그렇게 가까이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에, 그지없는 행복을 깨달으며, 승호는 혜숙이의 이 년 전 처녀 시절에 비겨, 그 기품과 또 아름다움을 더한 얼굴을 우러러 찬미한다.
영자와의 오락의 생활도 이미 청산하였고, 이제는 한가지로 자유로운 몸이 된 혜숙이 앞에 그는 무릎을 꿇어, 지난날의 잘못을 비는 것이다.
오직, 혜숙이가 가벼이, 한 번, 고개를 끄덕일 때, 그의 모든 죄는 깨끗이 사라지고, 두 사람은, 본래 그랬어야만 하였던 것같이, 서로 손을 이끌어, 희망이 가득 찬 새로운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승호는, 열정을 가져, 진심을 다하여, 그의 대답을 재촉하였다.
“혜숙씨. 혜숙씨.”
그러나, 승호가,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기 전에, 그는 우선 자기 소리에 놀라고, 한때의 헛된 꿈은 애달프게 깨어져, 승호는 멋없이 입맛을 다시고는, 그저 곤하게 잠을 자고 있는 영자 쪽을, 잠깐 동안, 우울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한껏 난잡한 방 안을 둘러보고, 가만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베개 위에서 모로 흔들었다. 자기가 이 계집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 혐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 사실,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리고 그 전날에도 벌써 여러 날을 두고 이 계집과 떨어질 것만을 생각해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밝는 날이면, 으레, 이 저주할 방 안에서, 이 저주할 계집 옆에서, 그리고 이 저주할 자리 속에서, 제 몸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승호에게는 안타깝게 슬펐다.
‘이렇게, 하루, 또 하루…… 이 계집과 나와의 저주받아 마땅할 인연은, 오직 죽음으로밖에는 끊을 도리가 없는 것 일까…….’
승호는, 얼마를 물끄러미 천장만 우러러보다가,
‘어디라도, 가버리면…… 어디, 먼 곳으로라도 가버리면…….’
문득, 오늘, 동경을 향하여 떠나는 벗이 있음을 생각하고, 그를 가장 축복받은 인생인 거나 같이 부러워하며,
‘내게, 우선 백 원 하나만 있으면…… 아니 오십 원만 있어도…… 아니, 오직, 동경까지의 차비만 되더라도……’
그러나, 그 즉시, 그는 호젓한 웃음을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친구에게나 가볼까?……’
아직, 한 점이 좀 지났을 뿐이었고, 벗은 분명히 밤차로 떠나겠노라, 말하였던 것에 틀림없었으나, 좀더 그 우울한 방 안에 있기가 싫어, 잠깐 세수만 하였을 뿐으로, 외투를 들쳐 입고, 밖으로 나가사려니까, 어느 틈엔가 영자가 눈을 뜨고.
“참, 방세 재촉, 또 헙디다!”
볼멘소리를 하고는 저편으로 돌아눕는다.
‘오냐, 걱정 마라. 내, 해놓으마. 내, 해놓으마…….’
여자에게보다도, 오히려 제 자신에게 다지듯이 승호가 그러한 말을 거의 입 밖에까지 내어 중얼거리며, 골목을 나서려니까, 전화상회에 있는 김가라는 자가 막 단장을 휘두르며 오다가,
“아, 어디, 가십니까? 날이 매우 춥습니다.”
간사스러운 웃음을 지어 인사를 하고, 서로 지나치기에 미쳐,
“참, 집에 있죠?”
있다고 알려주니까, 뜻 없이 싱끗 웃고,
“그럼, 나중에 또…….”
그리고, 그는 휘파람조차 불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승호는, 저도 모르게 그곳에 가 서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필연적으로, 그저, 영자가 자리 속에 누워 있을 방 안에, 그 불쾌하게 비대한 사나이가 찾아들 광경을 눈앞에 그려보았던 것이나, 그 즉시, 승호는 그러한 생각에, 적지 않은 굴욕을 스스로 느끼고, 머리를 세게 뒤흔든 다음,
‘저이들끼리 어쩌거나, 말거나……’
마침, 옆을 지나는 아낙네가, 의아스러이 쳐다보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승호는 씹어뱉듯이 한마디 하고,
‘오라, 참, 그자가 김가지? 흥!’
그자면, 돈푼도 있겠다, 어쩌면, 영자를 도와 생색을 오 갑절이나 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흥!”
또 코웃음을 쳐보았으나, 문득 그러한 자기가 오히려 누구보다도 천한 것같이 생각되어,
‘이제 이르러서도, 나는, 그저, 그 계집에게 무슨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잠깐, 눈썹을 찡그려보다가,
‘무얼, 당치두 않은 소리…….’
거의 자신을 가져, 속으로 중얼거리고, 때마침, 모질게 불어드는 매서운 바람에, 승호는, 한껏 문을 웅숭그리며, 이제 좀더 심한 굴욕을 느끼기 전에, 한시라도 바삐, 계집과 갈라서는 것밖에는 아무 다른 도리가 없다고, 결심을 또 새로이 하였으나, 그 즉시 집을 나올 때 계집이 볼멘소리로 하던 말을 생각해내고는, 반감과 증오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역시 풀이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하여, 단 한 달 치라도 방세를 치러주지 않으면…….’
계집이야 어떻든 간에, 자기로서 너무나 떳떳하지 못하다고, 승호는 외투 주머니 속의 차디찬 손으로 몇 번인가 주먹을 줘었다, 폈다, 하다가,
‘외투래두 잡혀서……’
문득, 그러한 생각을 하고 새삼스러이 몸을 둘러보았으나, 또 한차례 지나는 모진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고, 이제 눈이 날릴지도 모를 흐린 겨울 하늘 아래, 역시 승호는 딱하게 망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안집, 마루 기둥에 걸린 시계가, 태엽이 다 풀렸는지, 느리게, 열두 점을 쳤다. 승호는, 몇 번이나, 실패한 뒤에 가까스로 광솔⁶에 불을 붙였으나, 의지간⁷ 하나 없이, 처마 끝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았던 장작은 두 시간 전부터 소리 없이 내린 눈에 쉽사리도 젖어, 용이하게는 불이 댕기지 않았다. 변소를 다녀 나오던 진숙 어머니가, 보기에 민망하였던지,
“신문지, 같은 걸 좀, 넣어보시오.”
한마디 일러주는 것에도, 승호는 변변치 못하게 당황해하며,
“네, 그래두 어떻게 불이 좀 당기나 봅니다.”
겨우 그렇게 말하였을 뿐으로. 맨머리에, 목덜미에, 사정없이 내리는 진저리치게 찬 눈송이에 부르르 몸을 떨고, 좀더 불이 이는 것을 보고야, 승호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휑한 방 안에는 언제나 싸늘한 기운만이 휘돌았고, 낡은 몇 권의 책과 잡지와 또 목각종과, 그러한 것들이 질서 없이 놓여 있을 뿐인 책상과, 방에 들어와 그중 먼저 눈에 띄는 계집의 빈약한 경대와, 그 위에 난잡하게 벌여놓은 값싼 화장품과, 그리고 벽에,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걸리고 처박히고 한 인조견 나부랭이들과…… 그러한 모든 것들에, 새삼스러이 눈을 줄 때, 승호의 마음은 한껏 추웠다. 제풀에, 아랫목, 추레한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들며, 승호는, 바로 조금 전에, 경성역에서 멀리 떠나는 벗을 배웅하며,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거의 눈물지었던 것을 생각해내었다. 벗의 멀리 떠남이 애달팠던 것도, 역두의 분위기가 그러하였던 것도, 그리고 또 외투 없는 몸에 밤기운이 그렇게 찼던 것도, 아무것도,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게도 호화롭게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그리고 그렇게도 희망에 가득 차서, 벗이 여정에 오를 수 있는 것에 비겨, 자기의 구할 길 없이 외로운 신세가 새삼스러이 생각났던 까닭이다.
그러하였기에, 역에 같이 나갔던 몇 명의 친구가, 어디 가 차라도 먹자고 이끄는 것을, 굳이 듣지 않고 아는 이들의 눈을 피하여, 눈 오는 거리를 혼자 잠시 헤맸던 것이나, 그러할수록에 추위는 더하였고, 마음은 견디기 어려워, 거의 이름도 모르는 술집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다, 그것을 억제하고, 울분을, 고독을 한 몸에 싸가지고, 기력 없이 이곳에 돌아온 승호였다.
문득, 아랫방에서 진숙이 어머니가,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를 들으며,
‘참, 저러한 아낙네 눈에, 우리들의 이 생활이 어떻게 비칠 것인구?…….’
또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가만한 한숨을 쉬었으나,
‘하여튼, 내일 아침에, 한 달 치 방값이라도 치러주고 나서……’
그 뒤에 어떻게든 방침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망한 자식. 작년 동짓달에도 팔 환은 내어주더니…….’
하고, 새삼스러이, 육 원밖에는 더하여 주지 않은, 전당포 주인 녀석을 원망하려니까, 대문이 삐걱하며, 방정맞게 안으로 뛰어든 구듯발이, 그대로 그곳에 서서,
“잠깐, 게서 기대려어. 또 언제같이 어디루 가지 말구……”
누굴 데리고 왔는지, 그러한 말을 한 뒤에, 성급하게 방 앞까지 걸어와서, 앞창을 드윽 열어젖힌 다음에, 그래도 역시 잠깐은 망설거리는 모양이더니,
“여보. 자우?”
바락 지르는 계집의 말소리가 분명히 술에 취하였다.
승호는, 계집의 다음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순간에, 불덩어리가 목 너머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러한 중에도 번개같이,
‘대체, 안집에서 뭐랄꾸? 진숙이 어머니가 뭐랄꾸? 또, 이, 내 꼴이…….’
그러한 것을 두서없이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툇마루 아래에, 구두를 찾아 신었다.
마루 위에 올려놓을 것을 잊은 구두 속에는, 그사이에도 끊임 없이 내린 눈이, 더러는 녹아, 그 촉감이 오한과 같이 그의 전신을 돌았으나, 승호는 그것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도망질치듯 대문을 나섰다.
“외투, 안 입구, 나가우?”
이러한 경우에도 그러한 소리를 하는 계집에게, 승호는, 좀더 강렬한 증오를 느끼며,
‘흥, 내가 다시 돌아올까, 염려가 되니?’
마음속으로 한껏 외치고, 승호는, 흘낏, 눈에 띄는 저편 전신주 뒤에 가 외면을 하고 서 있는 그 마르고 키 큰 자의 전신에다, 혐오와 모멸이 뒤섞인 시선을 쏘고, 그대로 거의 달음질쳐서 골목을 나갔다.
그가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예감하고, 그리고 은근히 두려워해 마지않았던 것은, 드디어 사실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사나이가 계집에게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크고, 또 가장 추악한 굴욕 앞에 모든 사려 분별을 잃고, 지금 어디로 향하여 걷고 있는 것인지, 물론 그러한 것을 생각하여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턱 없이, 승호는, 눈을 맞으며, 눈을 차며, 얼빠진 듯싶게 거리를 헤맸다.
‘한 개의 계집이, 오직 반년이나 그밖에 안 되는 동안에 그렇게도 타락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도 대담하게…… 또 그렇게도 추악하게…….’
그러나, 눈바래⁸ 치는 깊은 밤거리 위에 흥분은 차츰차츰 식어가고, 승호가 굴욕에보다도, 오히려 추위에 몸을 더 떨었을 때, 그는, 거의 문을 닫을 임시의 술집을 찾아들었다.
연거푸 마신, 세 곱보의 더운 술에, 승호는 어처구니없이 취하고, 서너 꼬치 집어 먹은 ‘오뎅’에도 뱃속은 든든하여, 바로 요전 순간에, 자기가 그렇게도 흥분할 수 있었던 것이 도리어 우습기나 한 것같이, 이미 오래전에 버리려 마음먹은 계집이, 설혹, 어떠한 짓을 하든 그것이 대체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차차 몽롱해지는 눈으로, 맞은편 벽에 붙은 미인 포스터를 바라보며,
‘사실, 그동안에 딴 여자하구 연애를 못헌, 내가 빙충이지……’
너털웃음을 웃어보고, 승호는 담배에 새로이 붙을 붙이다가, 분주히 점 안을 비질하는 아이의 모양이 눈에 띄어, 새삼스러이 시계를 쳐다보고,
‘참, 이제 나가서 어딜 가누?……’
잠깐 그것이 염려되었으나, 문득,
‘흥, 너는 너대루, 나는 나대루…….’
오늘 밤은, 어디, 오래간만에 ‘미생정’⁹으로라도 가리라고, 그것이 무슨 한 개의 신기한 생각이나 되는 것같이, 그는, 흥, 웃고, ‘나는 돈을 쓰고, 너는 돈을 벌고…….’
그 생각에 일종 기괴한 마음의 유열¹⁰을 느끼며,
‘네가 오늘 밤에, 적어도 육 환을 벌지 못하면, 결국 우리의 결손이다. 밑져서는 안 되지.’
그리고, 승호는 한바탕을 껄껄대고 웃으려 한 것이, 나온 것은 뜻밖에도, 울음으로, 술집 주인과 또 아이가, 어리등절한 채, 잠깐 동안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시리, 그는, 쉬지 않고 뺨 위를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으려고도 안 하고 엉엉 소리조차 내어, 오직 울었다.
-끝-
2016년 6월7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