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의 아낙네들이 두르는 머릿수건에 대해서.
들일이며 밭일이며 치러내야 하는 농촌 아낙네로서 수건을 머리에 두르는 맵시를 익히는 것은 부잣집 여인네들이 비단저고리 옷고름 매는 맵시를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농사일을 하는 아낙네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은 들일이나 밭일을 나가면서 농구를 챙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뉴월 땡볕 아래서 농사일을 할 때 그것은 직사광선을 막는 모자였고, 팥죽땀을 닦아내는 수건이었고, 그늘에서 쉴 때는 깔개였고, 일을 마치고 나면 옷털이개였고ㅛ, 임질을 할 때는 또아리였고, 예기치 않은 물건이 생겼을 때는 보자기였고, 길을 가다가 내외해야 할 남자라도 마주칠 때면 눈길가리개였다. 머릿수건은 여름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부족함이 없는 방한모자으 구실을 해냈다. 겨울 마파람을 받고 걸을 때 귀는 그 얼마나 시린가. 그런데 머릿수건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흩어짐이 없도록 꼭꼭 붙여 빗어 추위를 잘 타는 쪽진 머리만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귀까지 넉넉하게 감쌀 수 있도록 매는 것이라서 더없이 좋은 방한모자였다.
다만, 머릿수건은 여름에는 삼베로, 겨울에는 무명으로 바뀔 뿐 농가의 아낙네들은 사시사철 머릿수건을 두르고 살았다. 머릿수건을 두르는 맵시는 쪽진 뒷머리 위에 매듭을 짓는 솜씨에 따라 좌우되었다. 수건의 두 귀가 한데로 모아져 느슨한 듯 낙낙한 듯 매듭을 지어야 수건이 바람결에 날아와 머리에 가볍게 얹힌 듯 살포시 내려앉은 듯 자연스러운 태가 나는 것이다.
매듭을 그렇게 짓는 것은 외관상으로 태를 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수건이 그처럼 얹힌 듯 내려앉은 듯해야만 머리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이 더위나 추위를 막아내는 효용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건의 두 귀는 무작정 '묶는 것'이 아니라 그런 효용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솜씨 있는 '매듭짐'이었다. 그런데 그 매듭이라는 것이 기묘했다. 쪽머리에서 비녀를 빼면 머리채가 엃히거나 맺힘이 없이 풀려내리듯 머릿수건도 그 끝을 손으로 잡아당기기만 하면 매듭이 그냥 풀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매듭은 웬만한 바람이나 어지간한 몸놀림에는 풀리는 법이 없었다. 느슨한 듯 낙낙한 듯 매듭을 짓되 손을 대기 전에는 풀리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가의 사내아이가 누구에게 특별히 배운 바 없이 낫질이며 지게질을 익혀 장성한 농사꾼이 되듯 아낙네들도 언제부터인지 자신도 모르게 머릿수건을 맵시 있게 두르게 되는 것이었다.
(143~144)
화순탄광의 소문이 빠르게 펴져나가면서 사람들은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쳐졌다. 미군정의 미곡수매에 반감이 쌓일 대로 쌓이고, 그 정책을 강압적으로 수행하는 경찰들의 횡포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사람들에게 화순탄광의 사건은 큰 충격인 동시에 행동에 불을 붙이게 하는 더없는 계기였다. 거기다가 인민위원회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켰다. (153)
동학란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지. 첫째. 내적인 중요성으로, 농민의 힘으로 농민이 원하지 않는 집권세력을 타도하려 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농민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그만큼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지. 내가 서두에 동학란을 들먹이는 이유도 거기 있고, 둘째, 외적인 중요성인데, 외세배격이 그것이야. 동학란은 전반부에는 착취를 일삼는 부패한 봉건체제의 타도를 목적으로 싸우다가, 일본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일본놈들을 상대로 싸운 거야. 조선왕조가 그때 무너졌다는 것은, 자체 방어능력이 없어서 청국과 일본을 끌어들인 사실이 입증하는 것이지. 일본이 발악적으로 동학란의 진압에 총력을 쏟았던 것은, 첫째, 청국세를 압도하려는 것이었고, 둘째, 반도땅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도를 방해하는 국내 세력을 일소하고자 함이었지. 결국 일본놈들의 우세한 무기 앞에 동학군은 패했지만, 그 의의만은 참으로 다대한 것이었네. 안으로는, 봉건왕권체제를 타도하고 자기 권리를 찾으려는 사회혁명이었고, 밖으로는 외세를 배격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전쟁을 수행했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동학란'이라는 명칭은 잘못된 게야. 그건 어디까지나 집권세력 입장에서 붙인 것이고, '난'이란 대의명분 없이 개인적 야망만으로 무력을 행사했을 때 쓰는 명칭이야.(167)
그들은(지주들) 일제치하에서 누린 부귀와 지은 죄로 해방과 동시에 마땅히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했어야 했고, 민족 앞에 사죄했어야 했네. 그리고 모든 소작인들은 일제치하에서 겪은 굶주림과 당한 고통의 대가로 마땅히 지주들의 소유를 분배받았어야 하네. 그런데, 미국의 세력이 작용하고, 이승만은 집권야욕으로 민족을 배반하고, 지주계급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뭉쳐지고, 서로를 위해 상호 작용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네. 내가 크게 우려하는 바는 지주계급들로 이루어진 현 정권이 농민이나 반대세력권을 일본놈들 식으로 무작정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것이야. 그 방법은 모든 계층, 모든 분야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한테까지 퍼져나가 공산주의를 자기네들의 방어를 위한 적극적인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 아닌가. 이거야말로 어불성설이고 주객전도야.(181)
우남(이승만)은 상해 임정의 수반이 될 때부터 말썽이 많았지 않았나. 그가 수반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분이 단재 신채호 선생인데, 미국 정부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매국노 이승만을 어찌 수반으로 앉힐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 그러나,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획득이라는 외교론 쪽이 우세하여 이승만이 수반으로 결정되었네. 물론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감안한 조처였지. 이에 분개한 단재는 임정과 관계를 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등을 돌리고 말지 않았나.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미국에서 상해 임정으로 온 이승만은 얼마 머물지 않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네. 미국 교포들이 모금해 준 독립자금을 우남이 유용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는 가운데,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미국 정부에 낸 위임통치 청원서 문제가 계속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탄핵재판소가 개정되었고, 이승만은 대통력직에서 파면되는 선고를 받았지. 그런 이승만이 해방과 함께 미국의 힘에 얹혀 민족의 영웅이 되어 귀국해서 민중 앞에 군림하지 않았나. 백범과의 사이에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대한 공방이 치열해졌을 때 우남은 임정의 법통을 부인하는 공개연설을 해찌. 그리고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는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정통성을 앞세웠어 그게 우남의 면모야. 우남이 35년에 걸쳐 망명 항일 투쟁을 했다는 사실은 존경해야 겠지. 허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네. 상해 임정에 잠시 머물렀던 것을 제하면 그는 위험의 무풍지대인 미국에서만 살았던 것이 사실이야. 그가 내세운 외교독립론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247~248)
그분은(단재 신채호) 1936년에 돌아가신데다가 자넨 어린 나이였으니까. 그분의 글을 대충 모아놓았으니 필요하면 가져다가 읽게나. 독립운동에 몸 바친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단재 선생은 그중에서도 출중한 분이셨지. 사학자고 독립투사며 문장가고 논객이었는데, 그분은 어느 한 부분에서도 소홀함이 없었네. 민족의 자존을 일으킨 투철한 사관은 단재사학의 산맥을 이루었고, 민중을 힘의 주체로 파악하고 끝까지 행동 투쟁을 벌인 독립운동은 가히 독립투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네. 우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백범이다, 도산이다, 그 누구든 단재 옆에 서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노릇일세. 나도 감옥살이를 해봤지만,변호사를 거부한 채 법정투쟁을 벌여 10년형을 받았고, 겨울이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 시달리며 지장 하나만 찍으면 가축옥을 시켜주겠다는 끊임없는 유혹을 뿌리치며 어찌 8년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숙인 머리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네. 끝끝내 옥사하고만 그분의 영혼이나 도처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수 많은 희생들 앞에 오늘의 현실은 치욕일 뿐이고 우리들 모두는 죄인일 뿐이지.(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