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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妙覺의 行
何等이 爲住兜率天所作業이며 何故로 於兜率天宮歿이며 何故로 現處胎며 何等이 爲現微細趣며 何故로 現初生이며 何故로 現微笑며 何故로 示行七步며何故로 現童子地며何故로 現處內宮이며 何故로 現出家며 何故로 示苦行이며 云何往詣道場이며 云何坐道場이며 何等이 爲坐道場時奇特相이며 何故로 示降魔며 何等이 爲成如來力이며 云何轉法輪이며 何故로 因轉法輪하야 得白淨法이며 何故로 如來應正等覺이 示般涅槃이니잇고 善哉라 佛子야 如是等法을 願爲演說하소서
“무엇이 도솔천에 계시면서 짓는 업이며, 어째서 도솔천궁에서 없어지며, 어째서 태에 들어감을 나타냄이며, 무엇이 미세한 길을 나타냄이며, 어째서 처음 태어남을 나타냄입니까?
어째서 미소를 나타내며, 어째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어째서 동자의 지위를 나타내며, 어째서 궁전에 있음을 나타내며, 어째서 출가함을 나타냅니까?
어째서 고행함을 보이며, 어떻게 도량에 나아가며, 어떻게 도량에 앉으며, 무엇이 도량에 앉았을 때의 특수한 모습이며, 어떻게 마군을 항복받음을 보입니까?
무엇이 여래의 힘을 이룸이며, 어떻게 법륜을 굴리며, 어째서 법륜 굴림을 인하여 깨끗한 법[自淨法]을 얻음이며, 어째서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열반에 드심을 보이십니까? 훌륭하신 불자시여, 이와 같은 법들을 원컨대 연설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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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각(妙覺)의 행(行)
*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주도솔천소작업(爲住兜率天所作業)이며 : 도솔천에 머물러서 짓는 업이냐?
도솔천에 머무는 사람들의 짓는 업은 무엇인가?
하고(何故)로 :어떠한 까닭으로
어도솔천궁몰(於兜率天宮歿)이며 : 도솔천에서 죽어서 내렸다가
하고(何故)로 : 어떠한 까닭으로
현처태(現處胎)며 : 또 태에 들어서, 태에 처하는 것을 나타내고, 태에 드는 것, 처태하는 것을 나타내고
하등(何等)이 : 어째서
위현미세취(爲現微細趣)며 : 아주 미세한 취를 나타내는가?
흔히 유가사전 같은 데 보면 이렇게 나온다.
‘축생이나 인간 세상에 태어날 사람들은 중음신의 색깔이 황금색이다. 그리고 아귀도에 태어날 사람들은 물빛이다.
지옥도에 태어날 사람들은 타다 남은 숯검정처럼 중음신의 모습이 보인다.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하듯이 색계천에, 좀 좋은 데서 선정을 닦았던 사람들의 중음신은 아주 얇은 비단결처럼 고운 색으로 중음신이 보인다.’
이런 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경전에 그렇게 기록되어있다.
축생이나 인간이 될 중음신은 거의 황금색으로 누리끼리한가 보다.
그리고 아귀도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물색이라고 하니까 푸르딩딩한가 보다.
지옥도의 중생들은 장작타다가, 숯타다가 남은 것처럼 거무티티하다고 한다.
저는 저를 항상 백옥이라고 주장한다.
‘지옥이나 그런 데에 갈 중음신들은 머리 모양이 아래로 향해 있다. 천상은 위로 향해 있고, 축생 인간은 옆으로 향해 있다’ 행도(行道)라고 하는데 상도 하도 행도 이런 것들을 옛날 어른들이 근거 없이 말씀하시진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중음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해놓은 경전들이 있다.
여기서 처태(處胎)라는 말이 나와서 말씀드렸다.
<불설 포태경>에도 보면 ‘한 줄기 바람이 지나고 열기가 돋아나고, 물기운이 뻗어나고 유야무야 만져지든지 물렁뼈가 생겨지고 눈코입귀가 벌어지고’ 이런 것이 자세하게 설명해 놨다. 저는 능엄경하고 불설 포태경을 잘못 읽고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날까, 참 신기하다.’ 이렇게 궁금하게 여기다가 벡스코에서 하는 ‘인체의 신비전’에 가서 여자 자궁 밑에 가만히 앉아서 보았다.
‘1주차 태아 2주차 태아’ 이렇게 다 써놨다.
어릴 때 경전에서 배울 때, 분명히 태아가 7주 차가 되면 눈코입귀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그 전시회에는 6주 차가 있고 8주 차는 있었는데 7주 차가 없었다.
8주 차 태아를 보니까 손톱 발톱이 생겨지고, 눈코입귀가 생겨진다고 써놨다. 옛날 분들은 해부학도 안 해봤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자세하게 봤을까?
능엄경에 보면 ‘갈라람(羯囉藍) 알포담(遏蒱曇)’ 이렇게 쭉 나오는 것 있잖은가.
산부인과적으로 불설 포태경, 능엄경 같은데 자세하게 써놨잖은가.
그래서 느낀 것이 옛날 분들이 굉장히 의식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현미경 같이 그런 것이 다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약 잘 다루는 사람들도 산에 가면 ‘이것은 약 될 나무다. 독이다. 약이다’ 판단할 수 있잖은가. 사람들도 그런 걸 잘 아는 사람은 전생사가 다 보인다고 하듯이 그런 것 같다.
그래 그 밑에 앉아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중이 여자 자궁 밑에 앉아 있다고 나를 구경했다.
‘왜 스님이 여기 앉아있나’ 제가 궁금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다가 죽는가’ 이게 궁금해서 쳐다보고 앉아 있는데, 범어사의 모 스님이 와서 이틀이나 거기 앉아 있더라고 곳곳에 소문이 나서 그 욕도 한 참 몇 년 뒤에 들었다.
욕도 제 귀에 들리기까지는 몇 년 걸렸다.
여기서 태에 들고 안 들고 이런 얘기 하다가 잠시 옆길로 갔다.
하고(何故)로 : 어떤 것이
현초생(現初生)이며 : 처음 태어남을 나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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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何故)로 :어째서
현미소(現微笑)며 : 미소를 나타내고 미소의 반댓말은 댕기소다.
하고(何故)로 :어떠한 것이
시행칠보(示行七步)며 : 칠보를 걸으며,어떠한 까닭으로, 어째서 부처님은 행칠보를 보이셨느냐?
언젠가 대강백스님, 각자 성자 각성스님께서 그러셨다.
“그거 송아지도 태어나면 바로 걷는데?”
부처님 칠보를 갖다가 그렇게 격하시켜서 망아지 송아지도 태어나면 바로 걸어버린다고 하하.
‘그거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더만’꼭 음성이 그러셨다.
하고(何故)로 : 어떠한 까닭으로
현동자지(現童子地)며 : 동자의 지를 나타내며
하고(何故)로 : 어떠한 것이
현처내궁(現處內宮)이며 : 내전에 있음을 나타내고
하고(何故)로 :어떠한 것이
현출가(現出家)며 : 출가를 나타내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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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何故)로 : 어떠한 것이
시고행(示苦行)이며 : 고행을 나타내느냐?
운하왕예도량(云何往詣道場)이며 : 어떻게 도량에 나고
운하좌도량(云何坐道場)이며 : 어떻게 도량에 앉으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좌도량시기특상(爲坐道場時奇特相)이며 : 도량에 앉았을 때에 특수한 모습이냐?
하고(何故)로 : 어떠한 것이
시항마(示降魔)며 : 마구니를 항복받으며
항마(降魔) 항마진언을 많이 하잖는가?
어떤 선배 스님이 그러셨다.
“무식한 마구니는 항마진언도 못 알아들어서 제압이 안 된다.”
마구니를 항복받으려는데, 마구니가 자기를 제압하는 진언인줄 모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 안 듣는 도반보고 ‘니는 항마진언도 못 알아듣는 마구니 같아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말귀를 먹는다’고 한다.
선배 스님들하고 같이 있으면 배울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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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何等)이 :어떠한 것들이
위성여래력(爲成如來力)이며 :여래의 힘을 이루는 것이고
운하전법륜(云何轉法輪)이며 : 어떠한 것이 전법륜이냐. 어떻게 법륜을 굴리느냐? 문수선원 입구 삼거리에 오다 보면 전법륜사라고 있다.
하고(何故)로 :어떠한 것이
인전법륜(因轉法輪)하야 : 법륜을 굴리는 것을 인해서
득백정법(得白淨法)이며 : 백정법을 얻는냐? 지난 시간 우리가 여래출현품에서 백정법을 잠시 공부했다
백법과 흑법을 일단은 유위법이라고 한다.
백법은 선법이고, 흑법은 악법이다.
선악을 백법 흑법이라 한다.
백정법이라 했을 때, 정(淨)자는 청정한 법이다.
통괄적으로 여기서 백정법이라고 했을 때는, 부처님 법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일체 유위법 일체 제법이 자성무소유다’ 이 정도를 깨친 것을 백정법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부처님이 행하시는 법, 불법을 말한다.
하고(何故)로 :어떠한 까닭으로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이 :여래의 응 정등각께서
시반열반(示般涅槃)이니잇고 : 반열반하심을 보이십니까?
반열반 이것을 흔히 다른 말로 반자는 해석하면 구경열반을 반열반이라고 한다. 앞의 반자는 들어간다는 입(入)자와 같다. 입열반이다.
입열반, 열반을 다른 말로는 적멸이라 한다. 그래서 ‘열반에 드셨다’ 하는 것을 입적이라 한다. 입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반자다. 입적 이렇게 되겠다. 인도말로 하면 반열반이고, 우리 말로 옮기면 입적하셨다, 원적하셨다. 원만할 원(圓)자, 이것이 구경 퍼팩트하다.
완전한 구경을 뭐라 하는가?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 이야기한다. 시반열반(示般涅槃)이라고 했을 때, 반자는 그런 뜻이다. 반야심경에 구경열반(究竟涅槃) 하는데 그것이 바로 반자에 해당하는 글자다. 구경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간다는 말이 완전히 퍼팩트하게 됐다는 말이다. 증입했다,들어갔다, 이런 뜻이다. 어떻게 반열반하심을 보이나이까?
선재(善哉)라 :선재라, 거룩하신
불자(佛子)야 :불자여
여시등법(如是等法)을 :이와 같은 법을
원위연설(願爲演說)하소서 :. 원컨대 연설해 주십시오.
이래서 보현보살한테 보혜보살이 10회향 10지, 여러 가지를 쭉 질문해서 다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四. 普賢菩薩의 二千答
1. 二十門의 十信答
1) 菩薩의 十種依支
爾時에 普賢菩薩이 告普慧等諸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依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以菩提心爲依니 恒不忘失故며 以善知識爲依니和合如一故며 以善根爲依니 修習增長故며 以波羅蜜爲依니 具足修行故며 以一切法爲依니究竟出離故며 以大願爲依니 增長菩提故며 以諸行爲依니普皆成就故며 以一切菩薩爲依니同一智慧故며 以供養諸佛爲依니信心淸淨故며 以一切如來爲依니 如慈父敎誨不斷故라 是爲十이니라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爲如來無上大智所依處니라
이때에 보현보살이 보혜보살 등 모든 보살에게 말하였습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의지가 있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보리심으로 의지를 삼나니 항상 잃어버리지 않는 연고이니라.
선지식으로 의지를 삼나니 화합하여 한결같은 연고이니라.
착한 뿌리로 의지를 삼나니 닦고 익혀서 증장하는 연고이니라.
바라밀다로 의지를 삼나니 구족하게 수행하는 연고이니라.
일체 법으로 의지를 삼나니 구경에 벗어나는 연고이니라.
큰 서원으로 의지를 삼나니 보리를 증장하는 연고이니라.
모든 행으로 의지를 삼나니 널리 다 성취하는 연고이니라.
일체 보살로 의지를 삼나니 지혜가 같은 연고이니라.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으로 의지를 삼나니 믿는 마음이 청정한 연고이니라.
일체 여래로 의지를 삼나니 자비하신 아버지와 같은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큰 지혜의 의지할 곳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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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천답(二千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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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가지의 물음에 답하는 보현보살의 이천 답이라.
흔히 이천 답을 병사이천(甁瀉二千)이라고 한다.
동이째로 쏟아붓듯이 소나기 쏟아붓듯이 답을 하셨다.
운흥이백(雲興二百) 질문에 구름이 올라가서 장대비를 쏟아붓듯이 이천 가지로 답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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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문(二十門)의 십신답(十信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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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왔던 스무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신다는 말이다.
이십 가지로 십신을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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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의지(十種依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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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이때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 보현보살께서
고보혜등제보살언(告普慧等諸菩薩言)하사대 : 보혜 등 제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의(有十種依)하니 : 열 가지의 의지가 있다.
하등(何等)이 : 어떤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가 되느냐?
소위이보리심위의(所謂以菩提心爲依)니 : 소위 보리심으로, 이것이 넘버원이다. 이른바 보리심으로 그 의지처를 삼나니
항불망실고(恒不忘失故)며 : 항상 잊지 않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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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지식위의(以善知識爲依)니 :선지식으로써 의지를 삼나니
화합여일고(和合如一故)며 : 화합하여 한결같은 여일한 연고이고
이선근위의(以善根爲依)니 :선근으로 의지를 삼나니
수습증장고(修習增長故)며 : 수습하고, 닦고, 익히고, 반복 반복해서 점점 자기를 자라게 하는 연고다. 증장시키고 성장시키는 연고다. 착한 뿌리, 뿌리가 있어야 자꾸 올라간다.
이바라밀위의(以波羅蜜爲依)니:바라밀다로써,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법성이 공한 줄 알고, 제법공상을 체득했을 때, 모든 행동을 바라밀행이라고 한다.
바라밀행은 댓가 없이 베푸는 모든 것이다.
법성이 공한 줄 알고 법성이 원융한 줄 알고서 베푸는 모든 행을 바라밀행이라고 한다. 무착(無着)으로 집착 없는 행이 바라밀행이다.
바라밀다로 의지를 삼나니
구족수행고(具足修行故)며 : 구족하게 제대로 잘 갖춘 수행인 까닭이다. 우리가 수행이라 하면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십바라밀이다.
십바라밀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했을 때는 보현행원이라고 하고, 조금 좁은 의미에서는 십바라밀을 십지수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십지품에 보면 34권부터 39권까지가 전부 그것이다.
초지 환희지에서는 보시, 이구지에서는 지계, 발광지에서는 인욕바라밀 이와 같은 십바라밀 순서대로 배대해서 십지수행이 끝난 뒤에 등각에 올라간다.
원효스님께서는 ‘등각 금강유정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밝음이 환한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그전 8지까지는 해는 안 보이고 환한 여명이 보이는 것 같이 보이는가 보다. 날은 샜는데, 아직 중천에 태양이 확 올라오지는 않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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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체법위의(以一切法爲依)니 : 일체법으로써 의지처로 삼나니, 진리로써 삼나니, ‘법’이라고 했을 때, 그 개념이 어디에 쓰였는가에 따라서 다 다르다.
구경출리고(究竟出離故)며 :완벽하게 출리, 벗어나는 까닭이다. 출가해서 세간을 벗어난 것을 출리라고 한다.
‘자타카’나 이런 경전에 보면, 임금이 출가하는 것은 대출리라고 하는가 보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임금이 출가하는 것은 대출리이고 우리가 출가하는 것은 소출리인가 보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왕이 출가하든지 누가 출가하든지 다 출리일 뿐이지, 무슨 대출리가 있고 소출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 내지는 벼슬이 높은 사람이 가진 것을 버리고 출가하기는 참 어렵다. 쉽지 않은 일이고 대단한 일이다.
회장스님이나 저나 우리나 어려서 잘못 팔려서 소출리가 됐든지 대출리가 됐든지 출리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개 얻었다. 우리는 대출리보다 더 좋은 구경출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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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위의(以大願爲依)니 : 대원력으로 의지를 삼나니, 읽기만 해도 신심 나는 대목들이다.
증장보리고(增長菩提故)며 : 보리를 증장케 하는 연고다.
이제행위의(以諸行爲依)니 :여러 행으로써 의지로 삼나니
보개성취고(普皆成就故)며 :널리 모두 보개성취다.
보현행원품에는 이 보개성취(普皆成就)를 보현행원품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놨다.
마지막 결론은 항상 자타일시성불(自他一時成佛道)라고 하듯이 보개회향이라고 한다.
보개회향(普皆廻向) 보개라는 말은 함안(咸安)이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락(咸樂)이다.
다 보개성취(普皆成就)한다.
여러 행을 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족시킨다. 밀가루를 가지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서 짜장면 좋아하는 사람은 짜장면을 주고, 콩국수 좋아하는 사람은 콩국수를 준다. 있는 대로 다 보개성취하게 한다.
제행으로 의지로 삼나니 다 성취하는 연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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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체보살위의(以一切菩薩爲依)니 :모든 보살로써 의지처로 삼나니
동일지혜고(同一智慧故)며 : 일체 보살이 동일지혜다. 내지는 동일법성이다. 아미타불도 이름이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등도사 금색여래 아미타불’ 하듯이 동명동호다.
무한극수 아미타불의 이름이 다 똑같다.
옛날 아미타불이나 지금 아미타불이나 싹 다 아미타불이다.
동일지혜(同一智慧), 이 말은 화엄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다.
4회차 설법의 공덕림보살이 가피를 받을 때 누구에게 받는가? 공덕림불에게 받는다. 3회차는 법혜보살이 법혜불에게 가피를 받는다. 동일 이름이다.
5회차는 금강당보살이 금강당불에게 가피를 받는다.
6회차는 금강장보살이 금강장불에게 가피를 받는다.
동일지혜이고 동일법성이다.
사과꽃이 사과가 됐고 배꽃이 배가 됐다. 딸기꽃은 딸기가 됐다. 여지없다. 동일지혜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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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양제불위의(以供養諸佛爲依)니 :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의지처로 삼나니
신심청정고(信心淸淨故)며 : 신심이 청정한 까닭이며
이일체여래위의(以一切如來爲依)니 :일체 부처님으로 의지처를 삼나니
여자부교회부단고(如慈父敎誨不斷故)라 : 사생자부 시아본사라고 하듯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이 부단고다. ‘조심해라 조심해라’ 하듯이 끊이지 않는 연고이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시위십이니라.
지금 우리가 화엄경을 이렇게 공부하니까 불종부단고(佛種不斷故)다. 부처님의 종자를 끊지 않으려고 오늘도 우리가 문수강당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불종부단고라. 우리가 안 앉아 있으면 종성이 끊어지니까 무조건 앉아 있어야 된다.
진짜다. 부처님도 우리한테 고맙게 생각하셔야 된다. 지금 우리 없으면 화엄경 할 사람도 없다. 스님들이나 저나 다같이 없으면 부처님은 멀리 계신다고 치고, 제일 답답하신 분은 어른스님이실 것이다. 왜 안하는가 싶어서 ‘저놈이 저러다가 도망 안갈까?’ 스님께서는 아마 노심초사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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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일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안주차법하면, 안주(安住)라고 하는 것은, 펄떡펄떡 뛰어다니던 야생마가 길들여져서 집에 들어와서 앉는 것이다. 그처럼 바깥 경계에 치달리던 마음이 안으로 가라앉아서 앙금 가라앉듯 집에 들어온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 십지회향 마지막이 안주지신(安住地神)이다.
안주지신 다음에 누가 나오는가?
바산바연저주야신이다.
입법계품 안주지신 앞에는 누가 있겠는가?
대천신(大天神)이다.
약찬게에 대천안주 이렇게 나오잖는가.
천신이 나오면 마음이 하늘처럼 툭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안주지신이 나오면 땅처럼 자비로운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마음대로 되니까 이제 제대로 수행에 들어가 는 것이다.
대천안주주지신 바산바연저라고 하는 것이 춘생(春生)이다.
봄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때부터는 십지, 진정한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오온개공이 된 상태다.
경전을 자세히 보고, 옛날 어른들 과판(科判)해 놓은 것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해놨을까 싶다.
안주지신이 사는 땅은 어디겠는가?
부동(不動)이다.
선견비구가 있다. 선견(善見) 잘 보는 비구스님 있잖은가.
선견자재주동자(善見自在主童子)하는 것, 선견비구는 어디에 사시겠는가? 선견(善見) 잘 보려면 눈이 두 개겠는가 세 개겠는가? 눈이 세 개다. 삼안국(三眼國)에 사신다.
그러면 사람 이름을 지었을 때는, 그 지명하고 이름하고 딱 걸맞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
사(事)는 자꾸 이(理)를 머금고 있다. 화분의 잎이 시들시들하면 ‘힘이 있다 없다’ 안의 이(理)가 다 보인다.
이 법에 머무르면
즉득위여래무상대지소의처(則得爲如來無上大智所依處)니라 :즉득 천천히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여래의 위 없는 큰 지혜의 의지할 곳이 된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씀이다.
(2) 菩薩의 十種奇特想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奇特想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於一切善根에 生自善根想하며 於一切善根에 生菩提種子想하며 於一切衆生에 生菩提器想하며 於一切願에 生自願想하며
於一切法에 生出離想하며 於一切行에 生自行想하며 於一切法에 生佛法想하며 於一切語言法에 生語言道想하며 於一切佛에 生慈父想하며 於一切如來에 生無二想이 是爲十이니라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無上善巧想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기특한 생각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착한 뿌리에 자기의 착한 뿌리라는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착한 뿌리에 보리의 종자라는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중생에게 보리의 그릇이란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서원에 자기의 서원이란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법에 벗어나는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행에 자기의 행이라는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법에 불법(佛法)이라는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언어의 법에 언어의 도(道)란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부처님에게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생각을 내느니라.
일체 여래에게 둘이 없다는 생각을 내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위없이 교묘한 생각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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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기특상(十種奇特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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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기특상(有十種奇特想)하니 :열 가지의 기특한 상이 있다.
영명지각연수(永明知覺延壽) 선사의 이런 글이 있다.
‘학도지문(學道之門)은 별무기특(別無奇特)이라.
지요세척근진하(只要洗滌根塵下)에
무량겁래업식종자(無量劫來業識種子)라’
믿고 들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특한 상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처럼 수행이 부족한 사람한테는 기특한 상을 보여줘야 믿는다는 말이다.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의 기특한 생각이 있다.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소위어일체선근(所謂於一切善根)에 : 말하자면 모든 착한 뿌리에 대해서
생자선근상(生自善根想)하며 : 모든 착한 좋은 일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일으켜야 되느냐?
생자선근상이다. 자기 스스로 ‘내 선근상이구나, 나도 저래야지’ 하는 생각을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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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일체선근(於一切善根)에 : 일체 선근에 대해서 어떤 선근이 있으면 거기에
생보리종자상(生菩提種子想)하며 : 저것이 전부 다 내가 이 착한 일을 함으로써 보리 종자가 생기겠구나
어일체중생(於一切衆生)에 : 일체 중생에 대해서는
생보리기상(生菩提器想)하며 : 일체 중생은 못난 중생이 없고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전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담고 있는 법기로구나, 하는 생각을 낸다.
그런데 우리는 어중이 떠중이라 해서 사람들을 막 무시한다.
어일체원(於一切願)에 : 일체 원력에 대해서,원력이 있으면 사람이 악해지지 않는다.
생자원상(生自願想)하며 : 이 사람은 이런 원력이 있고, 저 사람은 저런 원력이 있구나 하고 ‘나도 그와 같은 원력을 좀 내야겠다’ 공짜인데 생각이라도 못하겠는가.
저것이 다 내 생각하고 똑같다는 생각을 내야 되는데 ‘니나 잘하세요’ 이러면 골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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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일체법에 대해서
생출리상(生出離想)하며 : 생출리상이라.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생노병사 희노애락 성주괴공 생주이멸 이와 같은 법들, 색성향미촉법이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 없는 마음을 낸다.
항상 벗어날 생각을 낸다.
그래야지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육문(六門)이 상방자금광(常放紫金光)이라’
생각이 벗어났을 때 아미타불이 보인다.
어일체행(於一切行)에 :온갖 행, 모든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생자행상(生自行想)하며 : 나도 저렇게 행할 것이다,라는 생각과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온갖 법이
생불법상(生佛法想)하며 : 부처님의 법이라는 생각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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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일체어언법(於一切語言法)에 : 모든 말하는 법에
생어언도상(生語言道想)하며 : 말, 언어도의 길이라는 생각을 낸다. 말도 거의 신통에 가깝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기적이다. 말하는 것도 기적이고 듣는 것도 기적이다. 말에는 뜻이 없는데 어떻게 그 뜻을 알아차리는지 신기하다.
그러니까 ‘아 다르고 어 다르고’ 해도 다 알아듣는다.
어일체불(於一切佛)에 :모든 부처님께
생자부상(生慈父想)하며 : 아버지라는 생각을 낸다. 불자(佛子)가 되어야 그 정도 된다.
어일체여래(於一切如來)에 : 모든 부처님 여래께
생무이상(生無二想)이 : 둘이 없다는 생각을 내나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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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모든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러한 법에 안주한다면
즉득무상선교상(則得無上善巧想)이니라 : 최고의 아름답고, 정교한 생각을 얻을 것이니라.
오늘 여기까지 하겠다.
근념하셨다.
(죽비소리)
하강례
화엄경을 수용하다
“구름 떼 화엄학인이 몰려와서 아주 아주 화엄경 법석이 풍성해졌습니다. 화엄경은 어디를 넘겨도 아주 풍성하죠. 너무너무 풍성해서 우리가 초기에는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화엄경과 가까이 인연을 맺다 보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고 우리가 수용하게 됩니다.
화엄경의 풍성함을 우리가 수용한다, 화엄경의 부유함을 우리가 수용한다, 그것이 곧 내 삶이 된다.”
3월 21일 아침 화엄경 법문을 열어주시는 큰스님 목소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셨다.
매일 아침 7시 56분에 시작되던 <유튜브 염화실TV> 화엄법회가 1분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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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떤 스님으로부터 큰스님의 사진들을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독사진을 찾아봤는데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항상 청중들과 같이 계셨다. 특히 일반 신도분들에게 둘러싸여 한없이 행복하게 웃으시는 장면이 많았다.
그것은 큰스님이 선택하신 삶 같았다.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큰스님께서 화엄경을 보통의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시는 것과 용궁에서 화엄경을 가져오시는 용수보살님의 이야기가 늘 오버랩되어 상상되었다.
이제 구름이라고 우리를 표현하시고 아침마다 기꺼이 신통하게 여겨주시는 칭찬 말씀을 하셔서 그 시간의 청중들은 일단 행복한 마음부터 충전을 한다.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복덕을 쌓는 일이고 ‘자리를 빛내주신다’고 늘 고마워해주시니 아침마다 햇님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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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는 화엄경은 벌써 22권 승도솔천궁품을 마쳤다.
요즘에 숙제 검사를 맡으러 화엄전에 오시는 분들이 있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큰스님은 제19권 야마천궁게찬품을 공부할 때 각림보살의 게송이나 사구게나 아니면 야마천궁게찬품 100번을 써오면 숙제검사도 맡아주겠다고 하셨었다.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 게송을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모두들 최소한도 그 구절을 100번 써라, 그래서 숙제를 내줬습니다. 일찍이 끝마친 분도 있고 또 계속 그것을 반복해서 쓰시는 분도 있어요.”
“염라대왕 앞에 가서 염라대왕이 네가 세상에 있을 때 뭘 했나 한 거 있으면 내놔 봐라, 아니 대왕님 내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를 여기까지 불렀습니까? 오라고 해서 할 수 없어 오기는 왔지만 나는 무비스님이 숙제를 내준 화엄경 사구게 100번 이상 쓰라고 해서 100번이 뭡니까 200번도 쓰고 300번도 쓰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왜 불렀습니까?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조건이 됐어요. 화엄경을 100번 이상 쓰면 염라대왕 앞에 가서 염라대왕이 부를 까닭도 없고 이미 염라대왕 수준은 넘어섰습니다. 무슨 염라대왕이 화엄경 사구게를 100번 썼겠어요? 지는 바빠서 그런 거 못써요. 이 화엄경의 위신력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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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첫번째 월요일 문수선원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는 막 재미난 대목을 듣고 있는데 뒷사람이 물건을 떨어뜨렸느냐고 말을 걸어서 그만 그 대목을 놓쳐서 법문이 다 끝난 다음에 다시 듣기를 하였다. 고마웠지만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이런 기분이었다.
그 대목은 큰스님께서 해인사에 사실 때 대중스님들이 온갖 어려운 일들을 부탁하길래 아예 선언을 하셨다는 대목이었다.
그 선언이 뭔지가 진실로 궁금했었다.
그러면서 답도 추정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들은 그 답은 전혀 예상과 달랐다.
“내가 아예 사람들을 불러 놓고 선언했습니다. 이번 한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 내게 가져오라고.”
너무나도 젊은 날의 큰스님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머릿속이 띵했고, 얼마만큼 멀어진 걸까 가늠해 봤고, 다시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화엄경 쪽으로, 스승이 계신 쪽으로.
생기발랄 화엄경
구름같이 들썩이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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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환희로움으로 하는 화엄경~ 나무 대방광불 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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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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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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