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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횔덜린, 퍼시 비시 셸리, 존 키츠,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마리나 츠베타예바,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김소월, 이상, 실비아 플라스 등의 공통점은? 시인이다. 그것도 위대한 시인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다 갔다. 이런 시인들을 폴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이라 했다.
스스로 '저주받은 시인'의 길을 선택한 이들의 불행한 사건
베를렌은 1884년 트리스탕 코르비에르, 스테판 말라르메, 랭보 등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의 시를 논하면서, 책의 제목을 보들레르의 시 <축복>에서 빌린 듯한 ‘저주받은 시인들’이라 붙였다. 위대한 작품을 썼으나 세속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시인들을 일컬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 책과 제목은 즉각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켜 랭보를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으며, ‘저주받은 시인’은 근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시인들을 일컫는 문학용어가 되었다. 고대에는 선각자이자 예언자로서 높은 지위를 누렸던 시인이 이제는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했음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그리고 베를렌은 자신이야말로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삶을 살았다.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자신의 책 <활과 리라>에서 ‘저주받은 시인들’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저주받은 시인들’은 낭만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동화되지 않는 것들을 추방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시는 부르주아지에게 계시를 주거나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부르주아지 사회는 시인을 추방하고 사회의 기생충이나 걸인으로 만든다. 역사상 처음으로 시인이 자신의 일을 직업으로 갖지 못하게 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일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는 특별한 실험을 하고자 했다. 남자들끼리 서로 사랑하여 살림을 꾸리고 시인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꿈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를 쓰는 행위가 경제적인 행위가 되지 못하는 한 천재시인은 사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으므로, 경제행위를 책임질 베를렌이 새로운 직업을 가져야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베를렌이 아내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베를렌은 아내와 재결합하기를 바랐지만, 랭보를 떠나 보내기도 싫었다.
1873년 7월 10일 벨기에의 브뤼셀, 어느 호텔에서 결국 세계의 문학애호가들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파리로 떠나겠다는 랭보를 가로막던 술취한 베를렌이 급기야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 두 발의 탄환 중에 한 발이 랭보의 손목에 박혔고, 그들은 병원으로 갔다. 일차적인 치료를 받은 후 호텔로 돌아왔는데, 랭보가 다시 떠나겠다고 했다. 역까지 바래다주면서 베를렌은 또 광분했다. 한번 총에 맞은 랭보는 겁을 먹고는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경찰에게 신고했다. “저 사람을 잡으세요. 나를 죽이려고 해요!” 랭보가 고소취하서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은 2년 징역형에 200프랑의 벌금형을 받고 복역하게 된다.
베 를렌이 랭보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질이 괴팍하고 술주정이 심하긴 했지만, 베를렌은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아내 마틸드와 혼인한 후, 파리코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베를렌은 나름대로 행복했다. 문단에서도 제법 인정받는 작가였으니, 랭보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훨씬 순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순탄한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고, 스스로 ‘저주받은 시인’의 길을 갔다.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본능대로 움직이는 성격이 강했던 풀 베를렌.
폴 베를렌은 너무도 귀하게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한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다. 이들 부부는 매우 행복했으나 오랫동안 아기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두 번째 유산할 때 어머니는 너무도 아쉬웠던 나머지 죽은 태아를 알코올병에다 넣어 정성껏 보관하기도 했다. 1884년 3월 30일 오전 9시, 그렇게도 학수고대하던 자식을 낳았으니 베를렌 부부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이 아이는 성모 마리아의 아이가 될 것입니다. 이름은 폴 마리라 할 것이며, 7세가 될 때까지 푸른색 옷을 입히겠습니다.” 베를렌이 얼마나 귀하게 자라났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어린 폴 베를렌은 온 집안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스타였다. 그가 조금만 우스운 말을 해도 온 집안 식구가 경탄했고, 어떤 변덕을 부려도 식구들은 무조건 감내하였다. 어린 베를렌이 때로 폭군이 되어버리는 것을 본 방문객이 이런 조언을 할 정도였다. “어린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로 하여금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 길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나려고 할 때에는 올바른 길로 다시 되돌려놓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어린 베를렌의 버릇을 고쳐주기보다는 귀여워해주기에 바빴다.
한 번은 어른들이 식탁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어린 베를렌은 또 짓궂은 장난을 했다. 베를렌은 정원 구석에서 아버지의 실크 모자를 조각조각 잘라내고 있다가 그것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건 당근이고, 이건 파, 이건 콩이야!” 그리고찢어진 모자를 흔들면서 “이것은 상이군인의 냄비예요!”라고 말했다. 베를렌은 어른들이 식탁에서 상이군인의 식이요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베를렌은 조숙한 듯하면서도 철이 없었고, 호기심 많고 참을성 없고 제 고집대로만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한마디로 어린 베를렌은 본능대로 움직이는 활동적인 성격이었는데, 이런 성격을 평생 유지했다.
귀 하게 자란 아이일수록 교육시키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다행히 명민한 베를렌은 쉽게 적응한 편이었다. 베를렌이 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파리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생 시르 사관학교를 나와서 장군이 되거나 이공계 대학을 나와서 기술자가 되기를 바랐다. “이 집토끼는 기숙사에 넣어야만 사람이 될 것 같아.” 아버지는 교육을 위해 사랑스런 아들을 기숙사에 보내기로 했다. 1853년 10월, 베를렌은 아홉 살의 나이로 ‘랑드리 기숙사’에 들어갔다. 시간은 점차 베를렌을 의젓한 소년으로 키워가고 있었다. 성적은 제법 우수한 편이었다. 제5학급(1857~58년) 때 베를렌의 학교 성적은 정점에 도달했다. 그는 2학기 말에 71명 중 6등을 했으며, 불어 문법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라틴어 작문에선 2등상, 라틴어 번역에선 3등상,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4등상을 받아 언어감각이 탁월했음을 보여주었다.
베를렌은 소년 시절 의외로 개성이 강하지는 않았다. 규율을 잘 지키는 모범생이었으나, 제4학급(1858~59년) 때 돌변했다. 그때부터 베를렌은 다른 공부에는 흥미를 잃고 오직 시를 짓는 데만 골몰했다. 그야말로 문학소년이 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문학소년이 꽤 많았다. 그중에서 베를렌과 함께 두각을 나타냈던 친구는 에드몽 르펠티에였다. 그도 베를렌처럼 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쓴 글들을 교환해서 읽으며 우정을 키워나갔다. 두 친구는 프랑스 문단의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 테오도르 드 방빌의 <여인상을 새긴 기둥들>, 알버트 글라티니의 <황금화살> 등 시집은 물론이고,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등 많은 소설도 읽었다. 문학에 몰두하는 동안 학업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마지막 시기에 노력함으로써 베를렌은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문학인생의 성공적인 출발, 마틸드와 혼인하면서 행복을 예약한 듯했으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자 했지만, 베를렌의 관심은 온통 문학에 있었다. 대학 시절에 만난 루이 크자비에 드 리카르라는 친구를 만난 것은 베를렌 문학인생의 출발이었다. 리카르는 1863년 3월 <정신과 학문과 예술의 진보지>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 잡지에 베를렌은 ‘파블로’라는 가명으로 풍자시 <프뤼돔 씨>를 발표했는데, 이로써 그는 자신이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은 직업운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파리시청에서 직원을 뽑을 때 응시하였고 무난히 합격하여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리카르를 통해 파리의 유명 시인들을 만나면서 베를렌은 점차 시야가 넓어지고 있었다. 안정된 직업을 토대로 베를렌은 순조로운 문학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865년 리카르가 창간한 잡지 <예술>에 베를렌은 보들레르에 관한 평론을 발표했다. 그는 보들레르를 통해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예술가를 꿈꾸게 되었다. “그렇다. 시의 목적은 유용한 것, 진실된 것과 정의로운 것의 합성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며, 그것도 순수한 아름다움이다”라고 베를렌은 생각했다. 이때 이미 베를렌은 보들레르의 후계자가 된 셈이었다.
1866년 <현대 고답파 시집>에 시 7편을 발표하면서 베를렌은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고, 외사촌누이 엘리자의 도움으로 첫 시집 <사투르누스의 시>를 펴냈다. 이 시집은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 기성 시인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스테판 말라르메의 칭찬은 베를렌의 사기를 한껏 드높여주었다. “지금 나는 <사투르누스의 시>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시들을 외울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흥분된 상태이므로 그 시들에 대해 설명을 붙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시들에서 받은 기쁨에 빠져 있기를 원합니다.” 이후 두 번째 시집 <사랑의 향연>(1869), 세 번째 시집 <고운 노래>(1870)를 잇따라 펴냄으로써 베를렌은 프랑스 문단의 중요한 신인이 되었다.
젊은 베를렌의 인생 항해는 그가 1870년 8월 친구의 여동생인 마틸드 모테와 혼인하면서 더욱 순항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틸드는 상냥하고 착한 처녀였고, 베를렌도 고약한 술버릇만 빼고는 신랑감으로서 손색이 없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신혼부부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베를렌의 고난이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전쟁 때문에 순조로웠던 운명이 얽혀버렸을 수도 있다. 그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이 일어나 많은 남자들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겁이 많은 베를렌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틸드가 겁쟁이로 취급하자 그는 마지못해 프랑스 국민병에 입대했다. 야간보초를 선 후 베를렌은 집에 돌아와 술주정을 하곤 했는데, 마틸드는 피곤한 탓이라고 여겼다. 1871년 파리코뮌 봉기에 협력하여 베를렌은 홍보관련 일을 하기도 했는데, 봉기가 진압된 후에는 지레 겁을 먹고 시청을 퇴직하고 말았다. 안정된 직장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 무렵 베를렌의 술주정이 훨씬 심해졌고, 랭보의 파리 입성 후 베를렌 부부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되었다.
추문은 끊이지 않았으나, 꾸준한 창작활동으로 '시인의 왕'되다
브뤼셀 사건으로 복역한 것을 시작으로 아내와 이혼하는 등 불행은 끝이 없었지만, 베를렌의 문학은 오히려 꽃을 피웠다. 특히 가톨릭에 귀의하여 참회하는 마음으로 쓴 다섯 번째 시집 <예지>(1881)는 감동적이었다. 그 동안의 방탕한 생활을 반성하면서 이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 시집은 간명하면서도 진실하고 절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평범한 도덕적 진술이 될 뻔한 주제를 영감이 번뜩이는 리듬과 이미지로 창출해내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었다.
희망은 외양간의 지푸라기처럼 빛난다.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말벌을 겁낼 필요 뭐 있을까?
보라, 햇빛은 항상 어느 틈에선가 뿌옇게 반짝이고 있는데,
팔꿈치 탁자 위에 기댄 채, 너는 왜 잠들지 못하는가?
창백하고 가련한 영혼이여, 차가운 이 우물물이라도,
좀 마시거라. 그리고서 잠들라, 자, 나 여기 그대로 있으니.
너의 낮잠이 꾸는 꿈을 내가 보듬어주리라,
그럼 넌 안겨 흔들리는 아이처럼 콧노래를 부르리.
정오의 종소리. 부디 물러가주오, 부인.
그가 잠들려 하니. 이상한 일이지, 여인의 발자욱 소리는
가련한 이들의 머릿속에 슬프게 울려퍼지거든.
정오의 종소리. 이젠 방 안에 물을 뿌려두었으니,
어서 잠들라! 희망은 물결 속의 조약돌처럼 빛나는데.
아, 구월의 장미는 언제 다시 피려는가! -<예지> 연작 중 한 소네트(최수철・김종호 역)
'시인의 왕'으로 인정받았음에도 가난과 병마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출소 후에 베를렌은 신을 알려주기 위해 랭보를 찾았으나, 랭보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베를렌도 완전하게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예지> 이후 마음을 다잡은 듯했으나, 자신의 버릇은 쉬 버릴 수 없었는지 베를렌은 또 추문을 떠나지 못한다. 한때 시골 사립중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나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로 문제되었고 술주정마저 살아나 면직당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베를렌은 많은 시집을 냈고,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인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있었다. 빅토르 위고에게서 그 호칭을 물려받은 르콩트 드 릴이 1894년 세상을 떠나자 시인들은 새로운 ‘시인의 왕’을 뽑아야 했다. 1894년 9월 조르주 도코아가 <르 주르날>에 의뢰하여 18세부터 25세까지 거의 400명에 달하는 문학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프랑스의 생존 시인 중에서 누가 가장 훌륭한 시인이냐는 질문이었다. 189명이 응답한 결과 77표를 얻은 베를렌이 호세 마리아 드 에레디아(38표), 슐리 프뤼돔(36표), 말라르메(36표), 프랑소아 코페(12표)를 누르고 ‘시인의 왕’이 되었다.
시인으로서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병마는 베를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1896년 1월 8일이 그의 마지막 날이었다. 베를렌의 마지막 말은 “프랑소아……”였다. 프랑소아? 동거녀인 외제니 크란츠는 베를렌이 시인 프랑소아 코페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를렌의 평전을 쓴 피에르 프티필은 10년 전 1월 어느 날 저녁 생 프랑소아 안뜰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모친을 향한 것이었다고 짐작했다. 베를렌의 어머니야말로 아들을 아무 조건 없이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으며, 그 사랑 때문에 못 볼 것을 본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베를렌이 랭보를 쏜 그날도 어머니는 베를렌과 같은 호텔에 있었으니, 피 흘리는 랭보를 데리고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특이한 아들을 둔 죄로, 어쩌면 아들을 지나치게 애지중지한 나머지 버릇을 잘못 들인 죄로 베를렌의 어머니는 크나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마지막 이승을 떠나는 순간에 그 어머니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말해봐!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갖고 뭘 했니?"
시인 폴 베를렌은 랭보, 말라르메, 폴 발레리와 함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를 계승한 시인이면서도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개성을 보여주었다. 베를렌은 보들레르의 감성적인 측면을 이어받아 시의 음악성과 언어적인 묘미를 중시하였다. 랭보는 보들레르의 감각적인 면을 이어받았고, 말라르메는 지성적인 면을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랭보도 철학적인 성향이 강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베를렌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중에서 지성과 철학을 강조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시인이 되었다. 그는 지성을 무장해제함으로써 본능에 충실하고자 했고, 분명한 언어를 지양하고 애매모호한 시어를 사용해야만 상징의 무궁무진한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장된 수사법을 버리고 그 대신 형식적인 측면을 중시하면서 각운을 존중하였다. 이러한 시작태도가 상징주의 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난해성을 극복하고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서정의 세계를 연출해냈다. 그가 누구보다 랭보의 시를 사랑했고 랭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랭보와는 다른 시세계를 구가한 것은 시에 있어서만은 자신이 뚝심 있는 시인이었음을 웅변한다.
그의 인생을 돌이켜볼 때, 그는 순진하고 단순하고 독특하고 퇴폐적인 시인이었을 뿐 위인이었다고 평가할 근거는 없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폭력을 가했던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만 그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조건을 생각해본다. 그는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그는 아내 마틸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르주를 끝내 만나지 못했고, 조르주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아버지를 잊어버렸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위대한 문학(예술)작품을 남긴 작가가 반드시 위대한 인간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숨어 있다. 특히 베를렌 같은 솔직하고 순진한 작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의 한 축에는, 또는 그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문학(예술)작품에는 분명히 존경할 만한 부분이 있다. ‘존경’ 대신에 ‘감동’이라는 단어가 적당할 듯싶다. 그에게는 뭔가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 다음 시를 읽으면서 생각해보자. 이 시는 <예지>의 한 부분인데, 동시에 베를렌의 한 부분이자 혹시 전부일지도 모른다(<하늘은 지붕 위로>가 제목은 아니지만, 번역서에는 편의상 제목처럼 표기되었다).
하늘은 지붕 위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지붕 위에 잎사귀를,
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우는데.
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봐,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하늘은 지붕 위로> 전문(곽광수 역)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삐에르 쁘띠필의 <광인 뽈 베를렌느>(나애리・우종길 옮김, 역사비평사, 1991)는 폴 베를렌의 생애를 마치 내시경으로 찍어놓은 것 같다. 너무도 세밀해서 거친 피부가 다 드러나는 인물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 베를렌의 생애를 읽는 것은 아픈 상처를 만지는 것처럼 아프다. 절판된 것이 아쉽다. 도서관에서는 빌려볼 수 있다.
앙 리 뻬이르의 <저주받은 시인들>(최수철・김종호 옮김, 동문선, 1985)은 베를렌과 랭보가 주고받은 편지, 그들 생애와 관련된 시를 중심으로 쓴 독특한 평전이다. 편지를 읽으면서 생애에 접근하기 때문에 그들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생애를 확인하면서 시를 읽으니 시가 훨씬 쉽고 실감나게 다가온다. 역시 절판된 것이 안타깝다.
베를렌의 시집은 번역된 것이 별로 없다. 먼저 곽광수가 옮긴 <예지> 가 있다. 베를렌의 명시집 <예지>에서 뽑은 시편들을 번역한 것이다. 단순한 비범함으로 안내하는 곡진한 시들을 들여다보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윤정선이 옮긴 <사투르누스의 시> 는 훨씬 많은 시편을 수록하고 있어서 반갑다. 역자 해설 중 다음 부분은 참고할 만하다. “베를렌 시들의 ‘순진’은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하지만, 그 순진은 거짓도 아니고 또 인공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도덕적 순결에 대한 그의 추구는 놀라울 정도로 순수하여 원초인에 걸맞은 세계관에 대응한다. 그것은 거의 신비적인 의미를 띤,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의, 타락 이전 세계의 직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