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화요일) 여섯째날 -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신명남의 ‘겟세마네’
말씀제목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신명남의 ‘겟세마네’
말씀본문 - 요한일서 4장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개역개정)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새번역)
말씀묵상
“아,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이미 한 아들과 한 딸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왜 저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남의 자식이 평생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겠노라 서원했다는 소식에는 ‘좋은 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기뻐하고 축복했다는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그런데 열 남매 중 제일 똑똑하고 어렵사리 의대 공부를 마친 ‘태석’이 신학교에 진학하고 신부가 되겠다니! 일찍 남편을 잃은 뒤 배운 것도 짧고 가진 것도 없는 홀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열 남매를 길러냈으니, 그 고생을 어찌 다 헤아릴까요. 바쁘고 고단한 어머니가 생계형 노동으로 집을 비운 동안 아이들은 동네 성당을 놀이터삼아 자랐습니다. 그곳 사제들과 수녀들의 헌신을 보면서 성직자의 삶이 참 좋아보였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의 누나와 남동생이 모두 성직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신통했습니다. 남들처럼 뒷받침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까!”
어려운 환경에서도 의대에 들어간 아들이 너무나 대견했겠지요. 허리 휘고 눈 침침해지는 것쯤은 고통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사제가 되겠다니요! 그래도 몇 번의 기도 끝에 기꺼이 허락한 모성이었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식도 막을 방법이 없는데, 하물며 좋은 일 하겠다는 걸요.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셨을 겁니다. 그런데 사제 서품을 받는 날, 아들이 아프리카, 그것도 내전으로 어수선하고 위험한 수단에 파송 신청을 했다는 말을 듣곤, 기가 막혔습니다. 왜 하필 아프리카냐? 의술을 가진 사제로서 일할 수 있는 곳은 가까이에도 많은데…. 아들도 딱히 이유를 대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신비한 이끌림이 있었다고만 했습니다.
“5일은 앓다 죽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야 먼 곳에서 오는 시간을 벌 수 있을테니까. 아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죽게 해달라고”
<울지마 톤즈>에 담긴 어머니의 말은 그 뒤가 너무 희미했습니다. 세심하게 귀 기울여야 간신히 들려집니다. “이렇게 뒤바뀔 줄은 모르고….”
필시 신명남 여사의 ‘겟세마네’는 아들의 마지막 병상이었겠지요. “태석아, 내가 누구냐?” 의식을 잃어가던 아들의 마지막 대답, “엄마.” 그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이후 어머니는 수많은 ‘태석’이가 세워지는 기적을 보셨습니다. 가난도 질병도 운명이구나, 그렇게 포기했던 톤즈에서 수많은 의사가 배출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님을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것 같아요.”
어눌한 입술로 고백한 아프리카 한센씨병 환자의 말처럼,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어린이들이 그렇게 또 하나님의 아이들로, 또 하나의 헌신된 태석이로 자라났습니다.
찬송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기도
주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를 신앙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깨닫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또 하나의 나를 세워내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