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교회에서 대림 시기에 기억되는 대표적 인물은 마르티노 성인입니다. 9백 년경까지 유럽의 대림절은 마르티노 성인의 축일인 11월 11일 다음 날부터 시작됐을 정도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며 성문에서 구걸을하고 있는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하나를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거지에게 준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님을 보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 후 마르티노는 세례를 받고 수도원을 세워 수도생활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천적 자선행위가 바로 대림의 정신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늘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그의 영성에 감회를 받아 많은 수도원들이 생겨났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여행을 했습니다. 또 그는 임종 때에도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받은 다른 형제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아직 주님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저를 통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마르티노 성인의 겸손한 모습은 죽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하고 나서도 늘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한지 여섯 달 된 몸이었는데 마리아의 인사를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화답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의 겸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조차 겸손하게 그대로 믿고 순종하신 분이었습니다.
겸손한 마리아야말로 신앙인의 귀감이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분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겸손한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행복으로 흘러넘칠 것입니다.
성탄이 다가올 즈음 되면 한 해를 보내면서 마쳐야 하는 일과 각종 송년회 모임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차분하게 보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대림시기를 잘 준비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삶의 현실은 이것과 동떨어져 있어 때론 자책감과 당혹감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대림 3주간 동안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구원의 메시지에 희망을 두고 마음의 평화를 갖도록 합시다. 아무리 죄스럽고 세속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새롭게 출발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 늦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는 바로 세상 속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는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다 지나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남은 며칠만이라도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지금까지 들었던 예언자들의 말과는 달리 메시아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루살렘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주님은 특별한 장소가 아닌 평범한 곳에 계심을 상기시켜줍니다. 대략 150여 년 전, 필립스 브룩스라는 한 남자가 성탄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을 보기 위해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그리스도가 장엄한 전례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이 함께 하는 곳에도 현존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 영감을 받아 지은 시가 ‘오 작은 고을 베드레헴’ 이라는 잘 알려진 성탄곡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가족은 마치 작은 고을 베들레헴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주님께서 오실수 없을 정도로 너무 좁거나 어둡지도 않고 시끄러운 삶도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성탄의 강력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열린 마음을 가진 이라면 누구에게나 기꺼이 다가가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께 삶을 열어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또 하나의 성탄의 단순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부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이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처럼 성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에 충실한 사람은 새로운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주님께 최고의 선물입니다.
끝으로 성탄에 관한 세 번째 소박한 진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주님의 일과 가장 소중한 선물이 극적인 순간뿐만 아닌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남과 돌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탄을 잘 맞이하기에는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탄의 소박한 진리들 안에서 마음의 여유와 평화를 누리면서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곧 오실 예수님과 여러분의 성탄을 축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게 될 구원의 역사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세례자 요한과 구세주 예수님을 잉태하고 계신 두 어머니의 만남을 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을 방문한 마리아를 보자마자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그녀의 외침은 강생신비에 대한 찬송이었고, “당신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함으로써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다가옴을 기쁨으로 찬미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히“주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써가며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마리아라는 한 연약한 여인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는데…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는 성령을 통한 이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는 힘이나 재물, 재능, 능력 따위가 기준이 되어 구세주나 주님의 뜻까지도 그렇게 바라보고 알아보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성령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연약한 여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보고 찬미할 수 있도록 해 주심 또한 성령을 통해서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세주 아기예수님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우리는 마리아처럼 성령의 이끄심을 감지하고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를 제공하고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성탄을 잘 준비하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서 서로에게 펼쳐진 걱정과 체면의 분심들을 뒤로한 채 하느님의 업적을 이야기하며 찬미 찬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지녔던 열린 마음과 성령을 통한 통찰력으로 구세주를 알아보고 기뻐할 줄 아는, 은총을 감지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 기쁜 성탄을 맞이합시다. 그리고 배려와 나눔으로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어주는 뜻깊은 성탄이 되도록 합시다.
어느덧,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제 성탄이 이틀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그때 성모님보다 6개월 먼저 세례자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는 매일 성모송을 바칠 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성모님께선 매우 불행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은총이 가득하고, 복되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본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7장 14절에서 아하즈 왕을 향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장 9절에도 아하즈 왕의 아들이 히즈키야임을 말합니다. 열왕기 하권 16장과 18장에 따르면 아하즈는 주님을 거역했지만, 히즈키야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8장 7절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 이처럼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이가 바로 주님을 잘 섬겼던 히즈키야 임금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신약에 와서는 주님께 대입시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은 이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처음, 중간, 끝에서 각각 나타내며 복음서 전체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1장 23절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했던 말을 다시금 반복합니다. 단지 젊은 여인을 처녀라고 번역하여 반복합니다. 중간 부분은 18장 20절에서 말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마치며 마지막 절인 28장 20절에서 말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도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생활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앞둔 이 시간, 우리의 삶 또한 성모님과 같이 임마누엘이 될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기쁜 성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 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는 ‘하느님 뜻에 맞는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받쳐짐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었다’(히브 10,10)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로 우리 인류의 죄는 쌓여 왔지만, 하느님의 은총도 쌓여서 그 은총의 꽃이 마리아라는 여인에게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 존재 자체로 엘리사벳의 영의 눈이 뜨이게 되고,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놀게 됩니다. 모든 것이 마리아께서 하느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잉태한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와가 뱀에게 속아 유혹에 떨어져 남편에게 선악과를 주어 인류에 죽음이 들어왔다면, 제2의 하와인 마리아를 통해 죄악에 떨어진 인류에게 생명의 열매가 전해지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성체로 다가옵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마리아를 통해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고 외쳤다면 그 길은 이미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 중에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고 성인이 된 분이 없을 정도로 마리아는 모든 성인 중에 성인이요, 우리의 정배가 되는 말씀이신 예수님께 우리가 믿음으로 가야하는 모델이 되십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는 성령과 함께 했으며, 성자이신 말씀을 잉태하였고, 죽기까지 순명하신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십니다. 이처첨 성령, 성자, 성부와의 삼위일체적 일치와 친교를 마리아께서 이루셨듯이 우리도 마리아를 통해 성령께 성자께 성부께 가야 합니다. 성 루도비꼬 마리아는 말씀하시기를, “마리아는 하느님의 주물이다”라고 했듯이, 성인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리아께 봉헌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새로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림 막바지에 이른 오늘, 하느님 뜻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봉헌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었듯이, 하느님 뜻에 순명하신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봉헌함으로 인해 그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를, 그래서 성탄을 우리의 영 안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탄생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로서 제대 앞의 초 4개가 다 밝혀져 주님의 성탄이 가까웠음을 알립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는 즉시 나자렛에서 예루살렘 근처의 유다 산악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하느님이 주신 아기를 잉태해 모든 면에서 조심해야 할 텐데, 마리아는 왜 서둘러 먼 길을 가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까요? 아기를 못 낳는 여자였고 나이가 많은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가진 지 6개월이나 되었다는 것을 알고 산달이 가까워져 오는 엘리사벳을 돕기 위해 기꺼이 먼 길을 갔습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늙은 사라에게 이사악을 낳게 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서 놀라운 일이 이루어집니다. 두분의 만남도 서로에게 기쁨과 축복이었지만, 두 분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들도 그 어머니들을 통해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벳 안의 아기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의 온몸과 마음을 통해 미래의 메시아 아기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은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다고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깊이 묵상해 보면, 성모님은 늙은 나이에 해산이 가까운 엘리사벳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고 성모님과 태중의 아기 예수께‘복되다’고 찬미한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예수님은 제물이나 예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즉 세상 구원을 위해, 죄의 무게에 짓눌려 힘든 인류를 돕고 사랑하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또한 성모님도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을 당신 태 안에 품고 엘리사벳에게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현존하는 그 자리에 기쁨과 찬미가 터져나온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 안에 계신 예수님이 엘리사벳과 그녀의 아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성모님은 성탄을 뜻깊게 맞이하려는 우리에게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요 사랑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실 것이고 그 이웃은 기뻐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일이 이틀 남았습니다. 참으로 기쁜 성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전례력으로 「다」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다」 해에는 주로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며 지내는 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구약시대, 예수시대 그리고 교회시대로 구분하여 구원의 역사를 소개한 분이셨습니다. 나아가 세례자 요한과 성모 마리아를 구약시대와 예수시대를 잇는 아주 중요한 인물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대림시기 마지막 주일에 성모 마리아를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느님의 총애로 예수님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임신 수락을 하시고 떨리는 마음으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신앙심에 감탄하며 칭송하고, 마리아는 노래(마리아의 노래)로 화답합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두 아기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만남의 장소는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루살렘 주변 마을이었습니다. 서기 6세기경부터 예루살렘에서 6km 떨어진 ‘에인카림’이라는 도시를 이곳으로 믿어 오고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녀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을 때에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날도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이해하지 못할 일인데, 하물며 2000년 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당대의 풍습을 생각하면 마리아의 결단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앞으로 당할 모욕, 수치, 치욕 이 모든 것을 감수인내하며 수락을 한 것입니다. 수락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느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성모 마리아님이셨습니다. 모든 것의 최우선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참 신앙인이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참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복되도다. 하느님께 그 믿음을 두는 사람!”(루카1,45)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성모님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은 진정 복된 자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상과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지 못하면 사랑도 생명도 사라지고 그 끝은 멸망이고 죽음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생명을 낳고, 생명은 영원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 메시아, 주님)로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찬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우리 님을 모시고 님 따라 살기로 다 함께 다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한마당 놀이 대동제”라고 평생 동안 주장한 어느 성서학자의 말씀에 따라 우리도 주님의 성찬을 생각하며 다시 오시는 우리 님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믿음의 여인이신 성모 마리아님의 신앙심을 본받아, 아기 예수님이 내 마음에 다시 태어나는2012년 성탄이 되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굉장히 역동적이고도 신비로운 장면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성모님께서는 앳된 처녀이면서도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였지요. 그리고 성모님이 임신한 엘리사벳을 찾아와 인사했을 때,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성모님을 알아보고 펄쩍펄쩍 뛰놀게 됩니다. 그 생생한 움직임들, 그리고 성령으로 가득찬 엘리사벳의 느낌. 그 태 안의 아기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만났다는 것을 넘어서,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성모님의 태 안에 있는 예수님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말처럼 하느님의 사람 세례자 요한은, 전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 예수님을 태 안에서 단박에 알아보게 됩니다. 이 만남의 신비! 마르틴 부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순간은 ‘나’와 ‘그것’의 접촉이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이고, 동시에 그 만남을 움직이시는 ‘영원한 너’ 하느님과의 대면 순간일 것입니다. 저는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제 마음 안에 있는 걸림돌들을 발견합니다. 저는 가끔 제 앞에 앉아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온 이야기하고 저하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정작 그 사람은 쏙 빠지고 말입니다. 사실 내 눈앞에서 지금 숨 쉬고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것인데, 정작 그 사람은 없어지고 그 사람의 이야기하고만 만나고 싸우고 있을 때, 저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너’가 아닌 나를 즐겁게 해 줄 ‘그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상담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어려운 점이나 고통, 갈등이나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어떻게 하면 그 고통과 갈등을 제거시킬 것인가’에 대한 머리는 막 굴러가는데,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내가 지금 이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되는 순간. 저는 그 사람의 껍데기는 보고 있지만, 정작 그 영혼과는 만나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이러면 안되지~’ 하면서도 또 그 사람을 만나지 않고, 문제만 해결해서 그 상황들을 내 맘대로 지배하겠다는 욕망이 문득문득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너를 ‘너’로 받아들이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진정한 만남이란, 내가 그 이야기와 사람을 지배하고자 애쓰는 것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너’를,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움직이는 ‘너’를 ‘나’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때 ‘나’의 영혼은 깊은 떨림으로 움직이고, 만남이라는 사건은 신비가 될 것입니다. ‘나’와 ‘너’ 사이를 ‘영원한 너’이신 하느님이 스쳐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진 순간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은 외쳤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바로 당신이 이 진정한 만남의 주인공이 되셨으면 합니다.
세밀한 독서
루카복음서의 유년사화는 두 개의 큰 단위, 곧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예고(1,5-38) 그리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1,57-2,52)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1,39-56)는 이 두 단위를 연결하는 이음새 역할을 하며,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유사점과 대조점을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동정잉태 예고를 수락한 후(1,26-38)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39-40절) 성경은 즈카르야의 집이 ‘유다 산악지방의 한 고을’에 있다고 할 뿐 명확한 소재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6세기부터 그리스도교의 성전聖傳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인 카렘’에 즈카르야의 집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나자렛에서 ‘아인 카렘’까지는 도보로 3-4일이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장거리 여행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친척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1,36) 그리고 마리아가 늙은 나이에 잉태한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면 정작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점에 나자렛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1,56 참조) 아기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것과 동정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공통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체험에 이끌려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것입니다.(1,36-37 참조) 그래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만나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도구로 사용해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양했던 것입니다.(1,42.46-56)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곧, 태중에 있는 두 아기의 첫 만남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한테 인사를 할 때 그의 태 안에 아기가 뛰놀았다는 것은 마리아의 방문이 태중의 아기한테도 기쁨이 되었다는 뜻입니다.(40-42.44절)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두 여인의 믿음을 통해 섭리된 아기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을 펼쳐 갈 두 아기의 소명은 달랐습니다. 늙은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한 시대를 끝낼 것이라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는 새 시대의 새로운 약속을 열어갈 것입니다.(1,12-17; 1,31-33 참조) 또한 이 아기들은 두 여인한테 믿음의 확신과 기쁨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문안에 태 안의 아기가 즐거워하며 뛰놀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그녀를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이런 엘리사벳의 칭송에서 하느님의 전능을 힘입어 칭송받던 구약의 여인들이 떠오릅니다. 판관 드보라가 야엘한테 “카인족 헤베르의 아내 야엘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판관 5,24) 하고 칭송하며, 우찌야는 유딧한테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 13,1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기, 예수님께 대한 칭송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한테 했던 말을 연상하게 합니다. “너희 몸의 소생과…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 28,4)
‘복되다’, ‘행복하다’는 것은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루카 1,28; 8,21; 11,28 참조) 따라서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칭송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된 것입니다.(1,43ㄱ) 루카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주님’이란 단어는 메시아로서의 주님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었을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으니 복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45절) 마리아는 동정잉태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전능으로 이루어지리라 믿고 받아들인 신앙인의 전형典型이십니다.
우리 삶에도 수많은 만남이 있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같이 참된 신앙인의 만남은 얼마나 될까요? 또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웃한테 평화와 구원의 도구가 되는 이들은 얼마나 될지 생각합니다.(1,38; 참조: 창세 12,1-3)
묵상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문안 인사를 듣는 순간, 제 가난한 믿음을 보았습니다. 어떻게요? 왜요? 어째서요? 무엇을요? 하고 얼마나 많은 의문사를 붙였는지요. 하느님의 전능을 믿기보다 인간적인 사고로 수용하지 못했던 말씀이 제 앞에 우수수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받아들인 말씀만이 생활이 되고, 기쁨이 되며, 평화와 사랑으로 다가섭니다. 제게 부족한 기쁨, 사랑, 평화는 저의 불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어머니 당신한테서 보았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기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