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세계영화를 쥐락펴락하는 할리우드도 고민은 있다. 참신한 소재가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재고갈에 직면한 할리우드가 선택한 것이 프리퀄(prequel)과 리부트(reboot)다.
속편의 시간적 배경이 원작영화의 시간적 배경보다 더 앞선 내용을 다룬 영화를 프리퀄이라 하는데, <배트맨 비긴스>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가 본보기다. 리부트는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며, 내년에 개봉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그 예다. 유명 연작영화를 꽃단장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노련한 판매 전략이다.
1968년 <혹성탈출> 제1편을 시작으로 장정에 오른 <혹성탈출> 시리즈는 지난 2001년 팀 버튼의 제7편에까지 이르렀다. 이번에 선보인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전편에 제시된 충격적인 결말의 원인을 제시하는 프리퀄 수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미래 세계에서 인간이 침팬지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지극히 놀라운 설정.
시저의 탄생과 성장
제약회사의 잘 나가는 연구원 윌에게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찰스가 있다. 뛰어난 지식인이자 우아한 교양인이었던 아버지의 끝 모를 추락은 윌에게 말 못할 고통을 준다. 그는 몇 년째 기적의 치매 치료제 ‘큐어’를 준비한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목전에 두고 침팬지에게 투여한 치료제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고, 윌은 성공의 문턱까지 다가선다.
언제나 그렇듯 성공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험 과정에서 얻게 된 꼬마 침팬지 시저는 윌과 찰스에게 행복의 원천이 되어간다. 빛나는 눈의 시저는 놀라운 지적 능력과 민첩성을 가진 침팬지로 자라난다. 윌은 시저의 친구이자 아버지를 자처하면서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호기심 때문에 집밖에 나간 시저가 부딪친 살풍경한 인간의 거리.
시저의 공간은 윌의 집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방이고, 그 꼭대기에 창문이 있다. 창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에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는 시저. 평온하고 안락하며 변화 없는 이쪽과 크고 작은 시끌벅적한 사건으로 넘쳐나는 저쪽을 차단한 창문. 소통과 교류의 매개가 아니라 차단제로 기능했던 창문의 역할변화가 몰고 온 파국.
저항과 폭동: 시저와 스파르타쿠스
거리와 광장 같은 외부세계로 열려진 창을 통해 우리는 눈과 귀로 정보를 얻고 세상과 소통한다. 창문 없는 공간은 무덤이거나 악명 높은 교도소의 징벌방뿐이다. 시저가 그 창문을 넘어 세상과 소통했을 때 그것은 새로운 탄생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펼쳐질 시간과 공간은 시저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공간과 관계이기 때문이다.
유인원 수용소에서 시저는 난생 처음으로 동종의 침팬지와 오랑우탄, 고릴라 등을 본다. 정체성의 혼란이 야기된다. 시저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으며, 그것이 시저와 다른 유인원을 구별하는 현저한 요소이기도 하다. 개체가 지나치게 눈에 띄면 다른 존재들에게 왕따 당하게 된다. 이지메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세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시저는 윌과 작별하며 침팬지의 본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과 의식은 평균적인 인간의 수준을 넘어버렸고, 자신들을 학대하는 관리자들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장면에서도 창문이 다시 등장한다. 유인원들을 가둔 공간 꼭대기에 있던 돔 형태의 창문을 깨뜨리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시저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
영화를 보면서 스파르타쿠스(?~기원전 71년)가 떠올랐다. 로마의 노예반란을 이끌었던 인물로 크라수스에게 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스파르타쿠스. 노예에게도 인간으로 누려야 할 기본권이 있음을 내세우며 특권적인 로마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전설적인 혁명가. 그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어쩌면 오늘날의 유럽과 미국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연 혹은 본성에 대하여
만일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야수처럼 된다면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인면수심이나, 개돼지 같은, 짐승만도 못한 따위의 표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에게 키워지고 길들여져 침팬지의 본성을 잃고 인간성을 획득한 시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저는 인간인가, 침팬지인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안 돼!”
수의사 캐롤라인이 윌에게 몇 번이나 경고하는 말이다. 그녀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은 언젠가 시저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며, 침팬지의 본성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명해 보이는 말이 뜻밖의 상황과 충돌했을 때 발생하는 결과로 인해 관객은 충격과 흥미의 늪으로 깊이 빨려든다.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문구는 따라서 적잖게 섬뜩하다.
“진화는 인류를 위협하는 혁명이다!”
공상과학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시저가 윌의 냉장고에서 훔쳐 가지고 나온 강력한 치매 치료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유기체에게 주어진 자연 혹은 본성을 거스르는 단 한 번의 치료제가 불러오는 기적 같은 효과. 그렇다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 지겨운 공부를 하고 있는가!
금문교 다리 위에서
대규모 경찰병력과 유인원이 충돌하는 금문교 다리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시저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유인원 무리는 잘 조직된 군대나 전사들처럼 보인다. 그들을 막아선 가공할 경찰력을 뛰어난 두뇌회전과 전투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시저와 그 무리는 신세계로 질주하는 스파르타쿠스와 그를 추종하는 반란자들의 형상을 빼닮았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시저가 고릴라에게 보여주는 연대의식이다. 자신을 괴롭힌 침팬지 우두머리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활용했던 고릴라와 끝까지 함께 하려는 시저의 자세는 인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치밀하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영리한 시저가, 다른 한편으로는 연민과 동정을 온몸으로 실현하는 시저가 있다.
영화에서 다리는 ‘창문’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처럼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금문교는 후자에 속한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유인원이 건설하는 신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자 입구로서의 다리.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의 다리.
그런 까닭에 윌이 시저를 끝까지 뒤쫓는 행위는 어리석어 보인다. 금문교를 건너 가버린 시저에게 윌은 더 이상 시저의 친구도 아버지도 될 수 없다. 이제 윌과 시저는 동종의 영장류이기는 하되, 영원한 적대의식으로 마주해야 하는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간 시저가 윌에게 남긴 대사는 침팬지인 시저가 윌보다 더욱 진화했음을 뜻한다.
“윌의 집은 여기야.”
침팬지는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대략 500만 년 전부터 다른 길을 걸어온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5%가 동일하다고 한다. 오늘날 65억 명에 이르는 인류는 지구를 지배하는 최상위종이 되었다. 반면에 야생상태의 침팬지는 고작 1만 5천 마리에 불과한 실정이다. 멸종위기를 맞은 침팬지가 진화의 사다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영화는 여러 면에서 경고음을 낸다. 과도한 욕망에 대한 경고가 있다.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윌이나, 그것으로 거액을 벌려는 제약회사 대표가 보여주는 욕망은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그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실험동물로 쓰이는 침팬지들의 가혹한 운명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모르모토처럼 인간을 위해 사용되기 전에 무수한 임상실험에 활용되는 무수한 동물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드킬로 죽어나간 동물의 사체를 먹을거리로 둔갑시키는 대한민국이고 보면 사정은 더 참혹해 보인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지만,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에게 21세기 인간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과연 우리는 인간다움으로 표현되는 인간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가. 창밖에 매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 덧붙이는 글: 영화가 끝났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간 예의바르지 못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참을성 있게 자리를 지키면 ‘아하!’ 하는 소리가 들릴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도 속편을 준비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