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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방문했습니다. 그 동네에는 유명한 수태고지 교회가 있습니다. 천사가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마리아를 찾아가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는데,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마리아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훗날 교회가 세워졌는데, 바로 이 교회가 수태고지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는데, 지금의 교회는 1969년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참 아름답습니다. 그 지붕은 백합꽃의 형상으로 육각형으로 지어졌는데, 그 규모로도 성지에서 가장 큰 성당일 뿐 아니라, 외관이나 내부 인테리어도 건축가들도 인정하는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이 수태고지교회 바로 근처에 또 하나의 교회가 있습니다. ‘성(聖) 요셉교회’라고도 불리고, ‘성(聖) 가정교회’라고도 불리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의 가족이 살았던 집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 집터는 교회 지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일했다는 작업실도 있습니다. 수태고지교회는 화려하고 웅장함에 비하여, 이 ‘요셉 교회’는 소박하고, 찾는 사람도 비교적 적습니다. 마치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역할만 묵묵히 감당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내려온 요셉을 닮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성당에 가면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어린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 있는 조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들어가면 한쪽 벽에는 요셉이 어린 예수에게 목수 일을 가르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그림에는 인자한 표정의 아버지 요셉, 그리고 진지하면서도 편안한 소년 예수가 그려져 있고, 어머니 마리아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따뜻한 표정으로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셉의 가정 분위기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또, 요셉이 아내 마리아의 품에 안겨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며 임종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있습니다. 요셉이 언제 죽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복음서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기 직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요셉의 임종 성화에서도 예수님은 장성한 성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정과, 한 가정의 가장이요 예수님의 아버지였던 요셉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로서 자신의 역할과 자신의 가정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아버지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고단한 업무에 스트레스를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되던 날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지만, 아버지 노릇이 영 어색합니다. 가족을 위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오히려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가족들에게 밑거름과 같은 존재가 되리라 다짐하지만, 때로는 가족들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보통의 아버지들은 가족들로부터 소외되기도 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1970년대 우리 다락방의 대학생 회원이었던 정신과 의사 한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아버지를 위한 변명’입니다. 벌써 여러 해 전에 발간된 책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때로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거나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해서 해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굳이 해명이나 변명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밝혀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밝혀지기까지 오해가 깊어져 미워하거나 관계가 깨어지고 그래서 서로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 경우 필요한 것은 첫째는 사과이고, 둘째는 변명입니다. 잘못한 경우,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과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진심이나 의도에 대해서 변명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 강한 남성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실수에 대해서 사과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로서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 혹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사과를 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기가 좀처럼 어렵습니다. 그런 아버지들을 위해서 우리 시대 명성이 높은 전문가가 대신해서 변명을 해주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물론 어떤 아버지들 중에는 ‘나를 위한 변명은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아버지들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가진 자녀들은 숨이 막힐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삽니다. ‘내가 부족했다. 힘들어할 때 도와주지도 못했고,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마음껏 날아오르도록 뒷받침도 잘 못했고, 오히려 자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래서 미안한 것입니다. 그렇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가슴에 담은 채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은 어땠을까? 그도 우리처럼 미안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요 가장이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요셉은 직업이 목수였습니다. 목수라고 번역한 희랍어 ‘테크톤’은 단순히 목재뿐 아니라, 돌이나 철과 같은 건축자재를 다루는 기술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평범한 직업입니다. 이 평범한 직업을 가진 청년 요셉이 마리아라고 하는 여성과 정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하고 동거하기도 전인데,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 그 여성은 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민도 컸겠지만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데려왔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로마 황제는 모든 백성들이 호적등록을 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 아내를 데리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떠났습니다. 베들레헴 여관은 사람들로 만원이어서 방을 구하지 못했고, 요셉은 여관 주인의 호의로 마굿간에서 쉬게 되었고, 그 날 마리아는 출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는 말구유에 뉘어야 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몸을 푸는 아내와 태어난 아기를 위해 깨끗하고 안락한 방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요셉이 가졌을 그 민망한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 모든 사내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했을 때, 요셉은 천사의 지시를 따라서 마리아와 어린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급히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몇 해를 지냈습니다. 어린 아기와 젊은 아내를 거느리고 낯선 외국 땅에서 살아갈 때, 요셉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집을 구하고 일자리를 얻고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서 요셉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몇 해 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에야 요셉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갈릴리로 돌아와 나사렛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한 가정을 지키고, 자식을 지키기 위하여, 한 가정의 가장인 요셉은 이렇게 이리 저리 떠돌며 험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젊은 아빠였던 요셉의 젊은 날이 참으로 안쓰럽기만 합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이후 요셉의 삶은 어떠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아이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기를 거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믿음 안에서 아기를 잘 양육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좋은 아버지가 되리라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해에도 유월절을 맞아 요셉은 가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마친 후 요셉은 일행들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귀향 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하루 길을 걸어서 내려온 후에야 요셉과 마리아는 일행 중에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를 찾았습니다. 사흘 후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랍비들 틈에 함께 앉아서 그 랍비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데, 듣는 자들 모두가 예수라고 하는 이 어린 소년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그 어린 아들이 당대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직 어린아이였던 예수를 책망하며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지금 어린 열두 살 예수님이 대답한 이 말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 이후 요셉과 그의 가족들 이야기는 성경에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춘기를 어떻게 지났는지, 친구들이나 이웃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성경은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부모님과 함께 갈리리로 내려가 나사렛에 도착해서 ‘순종하여 받드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청소년기를 요약한다면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순종하여 받드셨고, 키가 자라고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녀를 가진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요셉과 마리아가 부러워집니다. 자녀 된 분들은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자녀를 부모님께 순종하며 이웃들과 하나님께 사랑받기에 부족함 없는 자녀로 양육해낸 아버지 요셉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은 것입니다. 어린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또한 그런 자녀들로 하여금 이웃과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양육하는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장성하신 예수님은 마침내 서른 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을 따라서, 집을 떠나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상처 많은 세상,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가정이라고 하는 곳은 가족들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해 주는 따뜻한 보금자리여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언젠가 가정을 떠나, 각자의 꿈과 소명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야만 합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곳은 자녀들이 그렇게 세상으로 나가서 각자의 꿈을 펼치고 소명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 만큼 자랄 때까지, 보호하고 양육하며 힘을 길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생명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열두 살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된다’. 예수님은 어린 열 두 살의 나이에 당신의 아버지가 따로 계신 것을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예수님이 마침내 아버지인 줄 알았던 요셉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부모님 마음에 못을 박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분은 안계실 것입니다. ‘내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버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근원이시며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에서 ‘집에’이라고 번역된 말은 ‘엔 토이스’입니다. 이 ‘토이스’는 ‘일’ 또는 ‘사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번역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을 ‘My Father’s business‘, ‘내 아버지의 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셨느냐’고 소년 예수는 지금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신의 목숨을 걸고 헌신해야 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이 세상은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 소명을 따라서 가정을 떠나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아버지는 자녀가 말을 배우게 시작하면 먼저 토라를 외우게 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이 신앙교육은 생활 교육, 직업 교육으로 이어집니다. 토라뿐 아니라 직업이 될 자신의 기술도 전수해 주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 과정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고, 요셉도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히브리어의 ‘교육’이라는 단어 ‘히누크’는 ‘봉헌한다’ ‘바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로 하여금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율법과 학문을 가르치고 기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문과 기술이 단순히 돈을 벌고 자아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나 교사의 책임은, 이 아이가 자라서 무슨 일을 택하든 궁극적으로 이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인 이 세상에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요셉은 바로 그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한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다하며 노심초사하였을 요셉입니다.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기 위하여 절기를 따라 아이에게 할례와 정결예식을 행하고 해마다 유월절에는 아이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고 또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구원하는 그 일을 위해 가정을 떠날 때까지 요셉은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수많은 남성들 가운데 왜 요셉을 택하셨을까요? 의로운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그 뜻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책임감있고 성실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믿고 당신의 아들을 그에게 맡기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자녀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왜 나에게 맡기셨을까요? 참으로 감사하게도, 나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만 합니다. 우리 아이에게 좀 더 나은 부모가 되고, 좀 더 나은 환경을 공급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부족함이나 연약함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귀한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지혜와 사랑의 은사를 덧입는 부모가 되기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더욱 착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연약한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은, 우리가 부모로서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한 지혜와 사랑의 은사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섰을 때, 부모로서 그 사명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였는지,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